소설리스트

러스트-98화 (98/280)

러스트 [RUST]-98

최 전무는 어둠 속에 숨어 마루의 칼질을 봤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찢어진 살갗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작 본능으로만 칼질하던 망둥이도 괴물을 보곤 두려움 없이 맞서 싸우는데, 망둥이를 잡겠다던 자신은 허겁지겁 도망쳤다는 사실이 가슴을 쥐어짰다.

촉수처럼 늘어나는 괴물의 팔뚝이 잘리는 모습. 그 깔끔한 일격. 망둥이가 날치라도 된 것처럼 깔끔한 칼질을 날리자 괴물이 쥐고 있던 회백색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씨발. 씨발.’

칼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자괴감. 그렇게 헬기를 타고 도망쳤음에도 괴물이 헬기에 달라붙어 따라왔다는 것을 몰랐다는 한심함. 괴물이 자기가 버린 칼을 들고 와서 날린 칼침에 찔렸다는 쪽팔림.

스스로가 병신 같았다. 칼을 잡고 평생을 살았지만 이게 뭔가? 이건 뭔가? 이 꼬라지는 뭐냔 말인가? 저 새끼도 싸우는데 난 여기 숨어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칼도 버리고 기폭 장치도 떨구고 도망친 병신 아닌가?

“씨발. 좆같은!”

망둥이가 바닥에 떨어진 괴물의 팔뚝을 토막 냈다. 빠르고 아름다운 연격. 낭비되는 힘 없이 자연스러운 칼질. 최 전무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그 뒤에 이어진 행동. 칼끝을 까딱거리며 나오라는 몸짓에 최 전무는 자기도 모르게 달려 나가려는 다리를 멈춰 세웠다. 미지의 괴물에 대한 공포가 전의보다 컸다. 꼭 죽이겠다고 했던 놈은 저렇게 잘 싸우고 있는데······.

최 전무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모조리 날려주마.’

망둥이고 오징어고 한꺼번에 날려주마.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밖에 내려앉은 헬기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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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무언가 비명 지르는 느낌.

[■■□■□■■□■□!!!]

소리가 아니라 뇌에 직접 쏘아내는 것 같았다. 다카이치 제약 실험실 금속 상자에 갇혀있던 그놈 같은데? 그게 왜 여기 있지? 소각했을 텐데?

저게 월드 헬기를 타고 왔다는 소리라면 어이없었다. 월드 새끼들이 제정신이라면 저걸 데려올 리 없을 테니까. 이유야 어쨌든 여기 있다는 건 저게 헬기로 왔다는 건데, 헬기 조종사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까딱까딱

마루가 칼끝으로 보낸 신호에 반응이라고 하듯, 질질 끌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 것의 모습.

[■■■■■■■■!!!]

4~5명이 검은색 타르 같은 것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뒤틀린 모습. 한 사람의 등에 다른 사람의 옆구리가 붙었고 그 위에 목이 돌아간 사람의 머리가 얹어진 기괴한 모습. 사람과 사람을 검은색 접착제로 대충 붙여 놓은 것 같은 덩어리가 바닥을 쓸었다.

꿈틀꿈틀 검은색 타르가 수축 팽창하더니 뒤로 꺾여 덜렁거리던 머리 하나가 흔들흔들 흔들렸다. 흔들리는 머리통에 시선이 가는 순간, 잘린 팔에서 검은색 촉수가 쭉 뻗었다.

파앗-

서걱-

뻗어 나온 것과 잘리는 것이 동시에 이뤄졌다.

툭 잘려서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펄떡대는 촉수.

펄떡펄떡

물 밖으로 나온 뱀장어처럼 꿈틀대는 촉수가 마루의 발을 향했다. 그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흔들리던 머리가 마루의 몸통을 향했다. 턱관절이 없는 뱀처럼 쩍 벌어진 입.

마루는 바닥에서 펄떡이며 덤비는 잘린 촉수를 떡꼬치처럼 칼끝으로 콕 찍어, 쩍 벌어진 입에 쑥 밀어 넣은 채 수평으로 갈랐다.

칼이 지나가자 아래턱이 부르륵 잘렸다. 쭉 자르고 나간 칼 끄트머리에 달려 꿈틀거리던 촉수가 목구멍에 반쯤 쑤셔진 채 토막 났다.

잘린 단면에서 뽀그르르륵 하며 거품이 일더니, 토막 난 촉수와 아래턱 날아간 머리가 뒤섞여 붙었다. 윗머리 아래 촉수가 달라붙은 모습.

“아- 씨-”

몇 번 잘리더니 함부로 덤비지 않고 휘적휘적 좌우로 움직이며 간을 보는 괴물이었다.

“뭐냐 정말.”

바닥에 떨어진 아래턱이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루가 잘게 토막 냈던 팔뚝 조각들 방향이었다.

스륵 스륵- 아메바가 먹이를 먹듯 조각들을 흡수하는 아래턱. 민달팽이 같이 움직이던 모습이 조금씩 달라졌다. 조금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아래턱에 짚신벌레같이 작은 돌기들이 돋기 시작했다.

“봤지? 빨리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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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학 은신 장비 속에 숨어있던 김 양은 팔다리에서 돋아나는 소름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이래서는 안 돼.’

기괴한 파장이 뇌를 휘젓는 것 같았다. 순간 멍해지고 몸이 굳는 느낌. 소리도 아니고 뇌로 직접 전달되는 이상한 감각. 막 굳어가는 다리를 팍팍 때린 김 양이 백업하기 쉬운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백정도 몸이 굳는 거 아닌가 했는데, 멀쩡했다.

호쾌하게 썰어버리는 칼질. 역시 백정이었다. 근데 자르고 잘라도 계속 재생하는 괴물의 모습. 심지어 잘린 조각이 다른 조각을 먹고 ‘진화?’ ‘변화?’하는 것 같았다.

‘저거 뭐야.’

잘린 자리에서 다시 돋아나는 촉수. 팔이 촉수처럼 변하더니 머리통도 이상하게 변했다. 검은색 타르 같은 것이 점점 사람들을 잠식하는 것 같았다.

빨리 준비하라는 백정의 말에 김 양은 뭔가 싶었다. 뚜렷하게 뭘 어떻게 하라고 하지 않고 준비하라고 말한 이유가 뭘까?

끙- 생각해 봤지만, 백정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대로는 힘들었다. 한 번에 날려 버린 뒤, 태워야 할까?

준비하라는 걸 보니 확실히 날려 버리자는 건데, 날리는 건 크레모아로 하고, 태우는 건 항공유로 하는 수밖에. 헬기에서 기름 뽑아 태워야겠네.

김 양은 조심스럽게 헬기가 있는 공터로 향했다.

‘어? 저거 최 전무?’

헬기가 있는 방향으로 살금살금 가는 최 전무가 있었다.

헬기에 간 최 전무는 뭔가를 찾고 있는 모습.

‘뭘 찾는 거지?’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헬기 좌석과 좌석 사이를 헤집고 바닥을 뒤지는 최 전무. 김 양은 조용히 최 전무의 등 뒤로 향했다. 팔이 닿지 않는지 끙끙대던 최 전무가 뭔가를 쥐고는 미친 듯 웃었다.

“크크크하하하. 다 죽여버리겠어!”

최 전무의 손에 들린 건, 무선 기폭 장치였다.

누굴 다 죽인다는 건지 모르겠다만, 일단 기폭 장치는 처리해야 했다. 김 양이 조심스럽게 최 전무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순간, 헬기 밖으로 던진 몸을 최 전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던졌다.

파칵!

백정의 속도에 단련된 김 양이 반사적으로 단검을 피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광학 은신 로브 한쪽이 깨지며 단검이 튀었다. 단검이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당긴 방아쇠.

투칵! 뻐칵!

단검을 던지자마자 엎드려 총탄을 피한 최 전무가 언제 챙겼는지 수류탄을 까 던졌다.

툭- 데구르르

은신 기능이 살짝 깨져 얼룩진 공간 방향으로 굴러온 수류탄.

‘넷- 셋-’

최 전무가 수류탄을 까는 것을 본 순간부터 숫자를 센 김 양이 굴러오는 수류탄을 발로 차 다시 넘겼다.

“미친 씨발!”

다시 돌아온 수류탄에 화들짝 놀란 최 전무가 개구리처럼 펄쩍 몸을 날렸다.

‘하나-’

쾅!!

크윽!

수류탄 파편에 헬기 문짝이 걸레가 됐다. 펄쩍 뛰었어도 폭발 범위에서 완전히 피하지 못한 최 전무가 비척거렸다.

투칵! 투캉!

기폭 장치를 쥔 손목에 한 방, 무릎에 한 방 박아 넣자. 억 소리를 내며 대굴대굴 구르는 최 전무. 김 양은 최 전무가 흘린 기폭 장치를 주워 들고 뒤로 살짝 빠지며 말했다.

“이거 무슨 기폭 장치임?”

“누구야!”

투칵!

악!

발목에 총알이 박힌 최 전무가 살짝 깨져 일렁이는 공간을 노려봤다.

“대답 없으면 계속 쏨.”

“씨발! 너. 김 양이냐?”

투악!

“악! 으아아악! 이 씨발년아 그만 쏴!”

“···이거 무슨 기폭 장치임?”

최 전무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너 뒷일 감당하겠어? 휴전 맺은 거 몰라? 씨발 알면서도 이러냐? 엉?”

스윽- 일렁이는 깨진 곳에서 소음기 달린 총구가 삐죽 나왔다. 발목을 향했던 총구가 반대쪽 발목을 향하는 것을 본 최 전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자폭 조끼. 자폭 조끼. 기폭 장치다!”

“자폭 조끼? 어디? 누구?”

‘시발년이.’ 작게 중얼거린 최 전무가 마루와 괴물이 싸우는 곳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김 양의 눈이 괴물을 향했다.

4~5명이 뒤엉킨 모습. 그들이 입고 있는 방탄복 같은 조끼. 방탄복이 아니라 자폭 조끼였어? 직원들에게 자폭 조끼를 입혔어? 왜? 순간 최 전무의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투각. 투칵.

거의 동시에, 최 전무의 미간과 목에 총알이 박혔다. 총을 쥔 팔이 위로 올라가며 뒤로 넘어간 최 전무의 동공이 서서히 풀렸다.

치직- 광학 은신 로브 깨진 곳이 일렁이다가 일그러졌다가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단검에 맞은 부분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늘어진 최 전무의 다리를 퍽 소리 나게 걷어찬 김 양이 혀를 찼다.

‘내 템. 내 템이···.’

뚜퍽! 투캉!

최 전무의 시체에 화풀이 두 방을 박아 넣었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안쪽을 보니 백정과 괴물은 벌써 한바탕했는지,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밖으로!!!”

김 양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백정과 괴물이 서로를 향해 칼과 촉수를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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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기네. 이게.’

칼날에 내성이라도 생기는 건지, 아니면 진화라도 하는 건지, 촉수가 점점 질겨지고 있었다. 뭔 이딴 괴물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합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으로는 똥도 싸기 싫어진 마루였다.

“아오- 썅-”

심지어 점차 정교해지는 움직임.

빠른 칼질에 살짝살짝 반응하기 시작한 촉수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나 둘 정도를 간신히 움직였다면 지금은 서넛이나 되는 촉수가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김 양이 밖으로 나오라고 했으니, 준비가 됐다는 건데.

휘리릭

투창처럼 쏘아진 두 개의 촉수, 다리를 휘감을 것처럼 아래로 오는 촉수와 오른쪽으로 피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촉수.

타닥- 촤악!-

끝이 단단하게 변한 촉수 찌르기를 흘려내고, 오른쪽 촉수를 찢듯이 벤 마루가 휙- 뒤로 빠졌다. 단번에 10m 가까이 멀어지자 본체가 울부짖었다.

[■■■■■■■■!!!]

“아니. 씨발 그걸 왜 나한테 지랄인데? 내가 했냐? 내가 했냐고!”

[■■!!!]

“너나 죽어!”

[■■■!!!]

“뒤로 멀리! 엎드림!”

외치며 김 양이 기폭 장치를 눌렀다.

마루가 괴물과 거리를 벌리는 것과 동시에 굉음이 터졌다. 살벌한 폭발에 휩싸인 괴물의 본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질퍽질퍽한 검은 핏덩이와 살점들이 벽과 천장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아- 씨발- 진짜.”

괴물의 재생능력을 생각해 보면 급속치료제가 괴물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바이러스에 괴물 조합이라니, 급속치료제고 나발이고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게 맞았다.

‘이거 치료제 괜찮은 거 맞나? 아오. 찝찝하게 정말.’

천장에 붙었던 얼룩이 철푸덕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바닥에 있는 조각들을 흡수하며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와- 이게 뭐냐 정말. 진짜- 질기다- 질겨. 이걸 진짜.”

김 양이 헬기에서 뽑아온 기름을 얼룩과 덩어리 위에 뿌렸다. 기름에 닿고 적셔지자 부르르 떨며 몸부림치는 덩어리들.

“이 새끼 이거 기름 맛을 아는 거 같은데? 아주 지랄하는 걸 보니.”

마루가 바닥에 떨어진 회백색 칼을 주워 들었다. 5자루 챙겨온 칼 가운데 4자루나 괴물이랑 싸우다 날려 먹었다. 그 짧은 시간에 칼이 깨지고 날이 나가고 순식간에 엉망이 된 것이다. 그래도 좀 좋아 보이는 칼을 득했으니 완전 손해는 아닌가?

팅- 칼날을 손가락으로 튕겨본 마루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지려는데, 김 양이 기름을 여기저기 끼얹으며 ‘뭐 하심? 기름 더 뽑아오세요.’ 신호를 보냈다.

“기름 좀.”

“그래. 그래.”

좋은 기분이다. 마루가 새로 챙긴 칼을 쥐고 수류탄 파편으로 문짝이 너덜너덜해진 헬기로 갔다.

‘어라? 이 아재는 왜 여깄어?’

최 전무의 시체를 본 마루가 열심히 기름을 뿌리고 다니는 김 양을 봤다.

미간도 그렇고 여기저기 총구멍 난 것을 보니, 김 양이랑 부딪친 거 같은데. 많이 컸네, 김 양. 쉽지 않은 아재인데. 은신 아이템이 있으니 선빵치고 시작했겠지?

‘아? 이 칼. 아재 건가?’

소리도 그렇고 딱 봐도 특수 가공한 칼날로 보였다. 이런 칼을 일반 직원이 쓸 리는 없고, 아재칼이 맞는 거 같았다. 칼잡이가 자기 칼도 없었으니 불리하긴 했겠다. 근데 왜 이 칼을 괴물이 들고 있었지? 설마? 뭐 어쨌든 아재칼이라면 믿을 만하지, 전에 쓰던 아재칼도 좋았으니까.

‘연료통이 어디쯤 있더라?’

헬기 연료 주유구 근처를 살피던 마루가 회백색 칼날을 헬기에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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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지직- 콰지지직-

금속 갈라지는 소리에 열심히 기름을 뿌리던 김 양이 뒤를 돌아봤다.

‘아니. 기름 좀 빼 오랬더니···.’

왜 헬기를 회 치고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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