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99
저거 뭐야 무서워. 대체 헬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김 양은 실시간으로 옆구리가 찢기는 헬기를 보면서 잠시 멍했다. 왜 그러는 건데? 응? 설마 기름 가져오라고 했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쿠직- 우두둑- 소리와 함께 헬기 옆구리에서 기름통을 뜯어낸 마루가 만족스러운 미소로 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회백색 칼날과 얼굴에 기름이 묻어서 그런지 뭔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아-
김 양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미쳤어. 응- 미쳤어. 정말.’
파닥파닥 손바닥 부채질하는 김 양이었다.
월드 그룹 헬기 옆구리를 뜯어, 기름통을 통째로 빼낸 마루가 뿌듯한 표정으로 기름을 뿌렸다. 그새 여기저기 뭉쳐진 검은 덩어리들이 뿌려진 기름을 맞고 꿈틀거렸다.
묵묵히 기름을 뿌리는 김 양. 또 뭐가 불만인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불만인 표정은 아니었다.
“저쪽까지 뿌려. 난 이쪽을 뿌릴 테니까. 아- 저기 최 전무 시체도 싹 태워버리고.”
“···알겠음.”
건물 안쪽 사방으로 터진 흔적에 기름을 붓던 마루가 인상을 썼다.
“아- 닥쳐-”
[▪▪···]
[◾◾◾◾?]
[■■■!!!]
“······?”
“아니. 너 말고.”
“······.”
김 양에게는 들리지 않는 건가? 고개를 흔드는 거 보니까 뭔가 느끼는 거 같기는 한데.
“뭔 소리 같은 거 들리지 않냐?”
“소리는 안 들리는데 머리가 좀 어지러움.”
“어떻게 어지러운데?”
“막 뭐가 윙윙거리는 것 같이.”
“그래? 저쪽으로 가봐. 거기. 거기서도 어지러워?”
“어? 여긴 괜찮음?”
김 양이 머리 위로 물음표 느낌표가 동동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일정 거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다는 건데. 터뜨렸더니 여럿으로 늘어났다? 조각조각 분리된 것들이 각자 의사 표현한다는 건 좋지 않았다. 조각이 난 숫자만큼 증식한다는 말이니까.
‘플라나리아냐? 잘린 게 증식하게.’
“아무래도 저기부터 저쪽 주변까지 전부 태워야겠어. 금방 꺼지지 않게 기름을 넉넉하게 뿌려야겠다.”
“······.”
“저거 터지면서 조각이 어디까지 튀었을지 몰라서. 영 찝찝하거든.”
마루의 말을 들은 김 양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폭 조끼랑 기폭 장치가 없었다면 크레모아 만으로는 힘들었지 싶었다. 뭣보다 그 미친 듯한 재생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찝찝했다.
“다 뿌렸으면 주변 좀 확인해봐. 난 여기서 싹 타는지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알지? 뭐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쏘고 보는 거.”
끄덕- 고개를 끄덕인 김 양이 광학 은신 로브를 뒤집어썼다. 고장 난 부분이 좀 일그러져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쓸 만해 보였다.
김 양이 사라진 곳을 보던 마루가 조명탄에 불을 붙였다. 툭- 기름이 적셔진 건물 안쪽에 조명탄을 던지자, 불꽃이 사방으로 확 치솟기 시작했다. 야마츠키 신약 건물 1층을 시작으로 주변 공터가 불길에 휩싸였다.
[■■■■■■!!!]
[◾◾◾!!!!]
[···▪▪···]
사방에서 쥐어짜듯 정신파가 쏟아졌다. 마루는 그러거나 말거나 불길이 약한 곳에 기름을 끼얹었다. 두 시간 넘게 타오르고서야 잠잠해진 공간.
‘불을 싸질렀는데도 조용하네.’
야마츠키 신약 본사 1층 로비는 거의 전소됐고, 앞의 공터도 깡그리 태웠는데도 사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니. 화재 경보가 떴을 텐데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주변에 사람 없음. 이동 흔적도 없음.]
“일단 돌아와. 여기 뭔가 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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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싹 태운 불길이 잦아든 뒤, 두 사람은 건물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괴물이든 바퀴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랬는데도 일이 커진다면 그건 뭐. 어차피 망한 동네에서 터지는 일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사람도 없는데 별일이야 있겠는가? 있다고 해도 어차피 북미나 남미로 가는 마당이니 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사장이든 경호원이든 왜 연락이 안 되지?’
콰직-
석탄 덩어리처럼 부서지는 잔해를 짓밟은 마루가 사방을 살폈다. 다카이치 제약처럼 인근에 비밀통로가 있는 건가? 본사 건물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한다면, 기순이 있는 도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갈 생각을 하니 깜깜했다.
반대쪽을 살피던 김 양이 수신호를 했다. 엘리베이터를 찾았다는 신호. 엘리베이터 문에 화재의 흔적이 있었지만, 작동은 되고 있었다. 비상용 전기가 아직 들어오고 있다는 소리.
“근데 이거 지하층 내려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하네.”
다카이치 제약 실험실에서처럼 지하로 내려가려면 열쇠가 필요했다.
“저쪽 옆에 통제실.”
통제실이라, 가볼 만했다. 하다못해 통제실에는 메인 콘트롤 센터가 있으니 CCTV 화면이든 녹화된 영상이든 볼 수 있었다.
똑- 똑-
“이봐요. 안에 아무도 없습니까?”
쾅-쾅-
철컥- 철컥-
“잠겼는데.”
“비키셈.”
김 양이 통제실 철문을 C4로 날려버렸다. 뽀얗게 피어오른 먼지 속엔 사람의 흔적도 감염자의 흔적도 없었다.
“이쪽엔 없어!”
“여기도 없음.”
다카이치 제약 통제실을 뒤졌던 경험이 도움 됐는지, 금방 뭐가 뭔지 파악한 김 양이었다. 여지 저기 퓨즈 같은 것을 뚝딱 갈고, 이런저런 레버를 당긴 뒤 버튼을 누르자. 커다란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여기부터 저쪽까지 화면이 1층 CCTV. 그 위가 2층부터 위로. 아래는 지하 2층까지.”
1층 CCTV는 2개를 빼곤 전부 까만 먹통이었다. 화재로 녹아내렸거나 그 전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지하 1~2층은 쓰나미 때 물이 들어왔는지 엉망이었다. 그나마 다카이치 제약보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지하 1~2층을 제외하면 침수 피해는 거의 없어 보였다.
“O.K. 난 녹화된 영상 좀 살펴볼 테니까. 마스터키 찾아보고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는지 좀 봐. 아- 그리고 아까 봤던 엘리베이터 내려가게 조종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알겠음.”
1층 CCTV에 녹화된 영상을 뒤로 돌렸다. 깜깜한 화면이 계속됐다. 거의 하루 동안 깜깜한 것을 보니, 전자기파 터졌을 때 날아간 거 아닌가 싶었다.
한참 되감기를 한 뒤에야 팟- 밝아진 화면, 쓰나미가 밀어닥치는 장면이었다. 물이 밀려오는데 대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쓰나미가 오기 전에 사람들이 떠났다는 소리였다.
쾅!!!
금고를 찾았는지 호쾌하게 폭탄을 터뜨리는 소리가 통제실을 흔들었다. 잠시 뒤 의기양양한 김 양의 목소리.
“마스터키 찾았음!”
“어야- 잘했어!”
4일 전 촬영분까지 확인했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대지진 터졌을 때 사람들 전부 대피한 거 아님?”
“그랬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다. 느낌이 이상해서 확인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확인할 건 아니었나? 마루가 입맛을 쩝 다셨다.
“엘리베이터는 이거 하나지?”
“아래로 내려가는 건 이거 하나. 다른 건 못 찾았음.”
마스터키를 넣고 돌리자, 엘리베이터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버튼이 활성화됐다.
[문이 닫힙니다.]
[내려갑니다.]
위이이잉- 낮은 모터 소리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다카이치 제약과는 달리 지하 5~6층 정도 깊이 정도 내려왔지 싶었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 양이 은신 로브를 쓰고 구석 마루의 그림자 아래로 숨었다.
띵-
[문이 열립니다.]
바짝 긴장한 마루가 벽에 붙어 칼을 살짝 내밀었다. 회백색 반짝이는 칼날에 비친 밖. 비상등이 아닌 일반 조명이 켜져 있어, 여기저기 폭발한 흔적과 총탄 자국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다는 건,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마루의 신호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마루도 살며시 발걸음을 뗐다. 바닥에 깔린 탄피와 여기저기 굳어있는 혈흔이 격렬한 교전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대부분 굳은 피다.’
사장이랑 경호원, 헬기 조종사가 흘렸다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쪽으로 내려갔을까? 다카이치 제약처럼 비밀 출입구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장님- 사장님- 응답 바람.”
[치이이익- 칙-]
지하로 내려와서도 연결이 안 된다? 굳은 혈흔이 여기저기 있는데 시체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치운 걸까?
‘응?’
혈흔 근처에 놓인 작은 버클. 벨트 버클이었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선명한 버클이 눈에 들어오자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손목시계, 총과 탄창. 금속 재질로 된 것들과 우레탄 깔창의 일부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섬광 폭음탄 준비.’
마루가 수신호를 보냈다.
‘그건 두 발 가져와서 다 썼는데?’ 김 양은 꿩 대신 닭이라고 최류탄과 수류탄을 앞섬에 꽂고 벽을 따라 이동했다.
‘응?’
벽이 좀 이상했다. 매끈한 윗부분과 달리, 종아리쯤 되는 높이부터 그 아랫부분에 집중적으로 패인 흔적이 있었다.
김 양이 쪼그려 앉아 흔적을 살폈다. 날카로운 뭔가가 벽을 갉아댄 것 같았다. 정이나 끌 같은 거로 벽을 긁어대면 이런 흔적이 남을까?
휙-
퍽!
구석에서 옆으로 튀어 나간 뭔가가 백정이 던진 회칼에 꼬치가 됐다.
“뭔 놈의 쥐새끼가 이렇게 커?”
‘팔뚝보다 커? 존나게 크네.’ 마루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칼을 회수하는 소리, 김 양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벽을 봤다. 벽면을 갉아댄 흔적이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빼곡하게 나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이게.’
콘크리트 벽을 쥐가 갉았다고? 여기서 저기까지? 쥐가 콘크리트도 갉나? 나무는 그렇다고 쳐도 콘크리트 미장인데? 여길 다 갉아댔다면······
쭉- 뽑힌 칼날 끝에 핏방울이 맺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톡 떨어진 한 방울의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칼날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제법 나왔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혈향.
멀리서 들리는 작은 소리. 김 양이 화들짝 외쳤다.
“가스! 가스!”
“가스? 왜?”
김 양의 외침에 마루가 가스마스크를 허리춤에서 빼 썼다.
찌-찍찍찍
찌직찍찍찍
“씨발---!”
마루가 던지라고 하기도 전에, 김 양이 최류탄을 와글거리며 몰려드는 쥐 떼를 향해 던졌다.
펑! 푸쉬쉬쉭!
최루가스가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미친 듯 발작한 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컥-서걱-
퍽-
쥐를 자르고 쪼개고 발로 걷어차던 마루가 주변을 살폈다. 뽀얗게 사방을 가득 채운 최루탄 연기. ‘이거 김 양 PTSD 터지면 망하는 데.’ 죽일 수도 없고, 마루가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유독 가스 노출이 감지되어, 강제 배출과 공기 순환을 시작합니다.]
[메뉴얼에 따라 비치되어있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시고 공기정화가 끝날 때까지······]
[반복합니다.]
[유독 가스 노출이 감지되어, 강제 배출과 공기 순환을 시작합니다
[메뉴얼에 따라······ 끝날 때까지······]
환기장치에서 벽 옆에 뚫린 구멍과 천장의 환풍구로 최루가스가 순식간에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벽 한쪽 구석에 일그러진 공간이 있었다.
“야. 괜찮냐?”
“‧‧‧어? 괜찮음.”
김 양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뭔가 크게 이상 없는 느낌. 정신도 멀쩡했고 기분도··· 괜찮았다.
“너 안개랑 연기 그런 거에 좀 그랬잖아.”
“······.”
김 양도 신기했다. 예전 같았으면 발작했을 텐데. 백정 때문인가? 은신 로브 안쪽에서 김 양이 마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역시 백정. 불가능이란 없지?
“와- 진짜 다행이다.”
마루가 칼에 붙은 핏방울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김 양은 순간 오도독 돋는 소름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툭-
묵직하게 밀려나는 소리, 마루가 죽은 쥐를 발로 밀어 찬 소리였다.
“거긴 바퀴들이 지랄이더니, 여긴 괴물 쥐가 떼로 몰려다녀? 어이가 없어서. 이거랑 마주쳤으면 사장이고 경호원이고 끝났겠다.”
뼈도 못 추리고 죽었을 거 같았다. 이쪽이 아니라 다른 출입구라면 다를까?
“섬광탄을 준비하라고 했잖아. 갑자기 최루탄은 왜 깐 거야?”
“다 썼음.”
“뭐? 그럼 남은 게 뭔데.”
“수류탄 3발, 최루탄 1발, 크레모아 1개, C4는 좀 넉넉.”
수천 마리? 아니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아 보였다. 그걸 수류탄 몇 발로 막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최루탄이나 섬광 폭음탄이 적격인데. 바퀴, 쥐, 다음엔 뭘까? 고양이나 개? 비둘기? 까마귀? 뱀?
“열도가 미쳤나?”
“?”
순식간에 최루가스를 빨아버린 환기구에서 정화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일단 계속 가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중화제는 챙겨야지.”
사장이 살아있다면 연락하겠지. 뒈졌으면 어쩔 수 없고.
최루탄 냄새가 옷에 배였는지 쥐들이 마루와 김 양 근처로 오지 않았다. 몇 마리 온다고 하더라도 접근했다가 그대로 썰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