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06화 (106/280)

러스트 [RUST]-106

헬기가 이륙 준비를 마쳤다.

김 양은 뭔 짐을 바리바리 쌌는지 자기 몸통보다 큰 가방 4개를 핸드카로 끌고 왔다. 기순도 이런저런 약들이 가득 담긴 캐리어를 2개나 챙겨왔다.

“조종사 아재는 어쩌려고?”

“뭘 어쩌긴.”

마루가 슬쩍 옆으로 칼을 내밀어 보였다.

“그냥 썬다고?”

“그럼?”

마루의 반문에 기순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냥 대뜸 썰어버리겠다고? 이거 좀 사람이 되나 싶더니 이렇게 훅 들어오냐?

“따지고 보면 우리를 배신한 것도 아닌데?”

“우리를 배신 한 거 맞지, 최 전무가 괴물을 데려온 거나 마찬가진데 그거 생각하면 배신 맞지···.”

아니.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니? 어쨌든 이왕 살려서 왔는데 그냥 죽이기는 너무 무식한 처사였다. 그러니까, 아깝다기보다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헬기 아재로 털어내자.”

“뭘 털어내?”

생각하자면 분노를 쏟을 곳이 필요한 법이었다. 헬기 아재가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였다고 치자, 그럼 경호원의 원한이 어디로 갈까? 그냥 사라질까? 아니면 애꿎은 곳으로 튈까?

죽여도 마루나 김 양이 죽이는 건 아니었다. 경호원이든 누구든 호텔 샬롯 쪽 인물이 배신자를 죽이는 게 좋았다.

“사람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은 않아. 상황을 이해는 해도 마음속에서 비틀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기순이 마루를 봤다. 뭐 그렇기는 하지.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헬기 아재를 풀어주고, 분노든 원한이든 그쪽으로 돌리자.”

“저 아재가 잡혀서 우리 엿 먹으라고 헛소리하면?”

“다 방법이 있지.”

기순이 휴대폰을 꺼내 흔들었다.

“휴대폰? 어? 너 아까 다 녹음하고 있었냐?”

마루의 말에 기순이 턱을 치켜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기록의 생활화.”

“그래서 그걸 경호원에게 들려준다고? 바로 저 아재 내놓으라고 할 텐데?”

“당연히 바로 주면 안 되지.”

“휴대폰 안 터지잖아. 인터넷도 안되는 데 어떻게 하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기순이 물찬 제비처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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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샬롯 호텔

대회의실엔 시체가 가득했다. 걷는 발걸음마다 두꺼운 카펫에서 배어 나오는 핏물로 질척했다. 시체를 치우는 사람들의 눈빛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저 쓰레기를 치우는 귀찮음만 있을 뿐.

“빨리빨리 정리하지 뭘 그렇게 꾸물거려!”

“본사 쪽 시체는 저쪽으로. 배신한 새끼들은 이쪽으로.”

“배신한 새끼들 신원 확인하고.”

이기영 과장은 본사 쪽 시체를 하나씩 확인해 대조했다.

“본사 관리팀장은 어딨어? 출입명부에는 있는데 여기에 없잖아? 어떻게 된 거야?”

“화장실에도 몇 구 있는데 끌고 올까요?”

“끌고 오긴 뭘 끌고 와. 사진 찍어.”

“예?”

“예? 예는 무슨 예. 얼굴 사진 찍어서 대조해 보라고, 확인하고 문자 보내.”

“아! 알겠습니다.”

“아요. 새끼들 진짜.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시체를 끌고 올 생각을 하네. 가슴이 답답해진 이기영 과장이 참지 못하고 사탕을 꺼내 물었다. 낮게 진동하는 휴대폰.

“이기영 과장입니다.”

[이 과장, 일본에 출장 좀 가야겠네요.]

“일본 말입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이쪽으로 와서 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목소리가 저렇게 씹창 났냐. 이기영 과장은 사탕을 와그작 깨물었다.

사장 집무실 문을 열면 보이는 커다란 통창.

뻥 뚫린 통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확실히 절경이었다. 그 빼어난 경치 옆에 옷이 홀딱 벗겨진 사내가 꽁꽁 묶인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기영 과장은 묶인 채 꿈틀거리는 중년 사내 위에 걸터앉았다.

끄윽-

재갈 물린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이걸 들어보세요.”

심 사장이 파일을 재생하자. 마루와 기순의 대화가 나왔다.

[···야마츠키 신약에 최 전무가 있더라고. 그러니까 사장이 간 곳을 정확하게 알고 최 전무가 있었다는 소리···.]

[···말했잖아. 야마츠키 신약에 있는 사람들이 배신했다고···.]

끝까지 들은 이기영 과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사실입니까?”

“사실이겠죠. 야마츠키 신약으로 간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없었으니까요.”

심은영 사장의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이건 어떻게 구한 겁니까? 우리 측에서 도청한 겁니까?”

“저쪽에서 녹음한 걸 줬다고 합니다.”

“흠- 하마루나 김기순의 특성상 거짓 정보일 가능성은 적습니다만, 일단 전부 믿을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일본에 있는 우리 쪽 세력이 거의 전부 배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랍니다.”

확실히 그게 문제였다.

녹음된 내용을 믿든 믿지 않든, 일본으로 건너간 대역과 경호원에게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야마츠키 신약에 있는 사람들이 배신했으면 고급인력을 전부 버려야 할 판이었고, 배신한 자들이 일부라면 나머지 사람들을 데려와야 했다.

“호위로 데려간 사람들만으로는 힘든 상황입니까?”

“어렵다고 하네요.”

초반에 배신자들에게 뒤통수 맞고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다행히 마루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믿을 수 있는 인력이 적다는 게 문제였다. 당장 지금도 그랬다. 오래 근무한 헬기 조종사가 배신한 상황.

부산 샬롯에서 일하던 직원도 배신하는 판국에 일본에 있는 자들은 어떻겠는가? 즉석에서 배신 여부를 확인하고 처결할 수 있는 직권을 가진 사람을 파견해야 했다. 대역과 경호원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니, 그쪽을 수색해야 하기도 했고.

“괜찮으시겠습니까? 말대로라면 최 전무가 왔으니 월드 쪽에서도 사람을 더 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4년간 휴전이라고 했으니 한국에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일본에서가 문제죠.”

심 사장은 이 과장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서 든 이 과장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확실히 상황이 복잡해졌군요.”

월드에서는 최 전무를 보내서 뭘 하려고 했을까? 지진과 쓰나미로 초토화된 일본에서 뭘 건지려고 했을까? 샬롯에서 정보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면 급속치료제와 버서커 폴의 레시피를 찾으려고 할 게 분명했다.

누가 정보를 줬을까?

하이힐 뒷굽이 벌거벗은 중년 남자의 손등을 짓밟았다. 콰직- 손등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의자처럼 엎드린 늙은 몸이 펄떡펄떡 뛰었다.

심 사장이 버러지를 밟는 것처럼 다시 하이힐에 힘을 줬다. 끄으으윽- 끄으으으윽- 애처로운 소리가 질질 흘렀다.

“증거가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월드 인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샬롯 본사랑 붙어먹었겠지요.”

‘버러지 같은 것들은 좋다고 배신했겠고요.’ 심 사장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이 과장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의리나 신의 같은 것들이 사라진 시대, 안타깝게도 배신이나 통수는 민속놀이가 된 지 오래였다.

이 과장은 서류를 계속 넘겼다. 일본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큐슈 중남부는 괴멸이나 다름없었다. 화산재가 30cm 넘게 쌓여 고립된 상황에서 겨울이 닥쳤다. 전기, 수도, 가스 전부 끊겼는데 철도, 도로, 항공, 항만까지 막혀 버렸다.

여기에 남방 해저지진이 터져 높이 15~20m에 육박하는 쓰나미가 시코쿠를 중심으로 혼슈 남부지역을 휩쓸었다. 사실상 남부지역 항만도시와 해안가는 회생 불능이라고 봐야 했다.

도쿄는 더 암울했다. 대지진으로 엉망인데 쓰나미에, 원인불명의 전자기파로 항공기는 고사하고 선박들도 표류 중인 상황이었다.

이런 개판을 뚫고 순식간에 도쿄까지 갔다는 것 자체가, 하마루와 김 양이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지 알려주는 반증이었다. 거기다 일본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혼슈 중남부 도난 병원에 안전지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이 생략된 보고서인지라, 세세한 내용이 궁금해졌다.

“여기 보고서에 나온 감염자가 뭔지 혹시 아십니까?”

“변이된 바이러스 감염자를 따로 감염자라고 부르더군요.”

“환자라고 하면 될 걸 굳이 감염자라고 한 것도 이상하고, 감염자들의 증세가 버서커 폴과 닮아있어서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

심 사장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일본에 가서 해야 할 일은, 일본에 있는 배신자들을 찾아 정리하고 배신하지 않은 사람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과 야마츠키 신약, 다카이치 제약에서 자료를 찾아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거기에 수색도 부탁드립니다.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이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세요.”

콰직- 다시 손등을 짓밟는 하이힐. 끄아으아으아으- 재갈 물린 입에서 새는 비명을 뒤로하고 이기영 과장이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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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월드 그룹.

후기 인상파 조만덕 사장의 얼굴은 식은 찐빵 같았다.

“최 전무한테서 연락이 끊겼다.”

유 이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 사장은 유 이사의 ‘나는 몰라요.’ 끄덕임에 짜증이 확 치솟았다. 최 전무 갈궜다는 걸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을 해?

“일본 간 최 전무에게서 연락이 끊겼다고.”

“저도 들어서 압니다.”

“씨발 알면? 뭔가 대책을 세워 왔겠지?”

“지금 들었는데 뭔 대책을 세웁니까? 그리고 대책이 필요합니까? 휴전 맺었으면서?”

짧게 자른 머리를 쓱 쓰다듬으며 모르쇠 하는 유 이사의 대답에 조 사장이 울컥했다.

“아니. 썅- 유 이사.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그럼 내가 서면 대학살이라도 해야 했냐? 서면 깡그리 날려버리고 계엄령 터지든 말든 피바다 만들었어야 해?”

“계열분리 해서 회장 자리에 앉고 싶으셨다면서요?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 회장이 돼서, 효도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니까 부산 샬롯 조져서 회장에 앉았으면 될 일을 휴전해서 이 꼬라지가 된 거다?”

“누가 그렇답니까? 샬롯이랑 휴전한 것도 모자라, 일본에는 최 전무 보내 놓고 왜 저한테 이러냐는 거죠.”

조만덕 사장이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래. 네가 이겼다. 그런데 휴전을 깰 수는 없어. 우리든 샬롯이든. 군부와 정부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건 건드릴 수 없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그 말에 유 이사의 입꼬리가 길게 치솟았다. 대각선으로 그어진 흉터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조 사장이 ‘저년 또 발동 걸렸네.’ 하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샬롯 본사에서 호텔 샬롯 확인한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끝장났다고 한다. 이쪽에서 샬롯 본사에 심어둔 애들까지 다 쓸렸어. 이제 샬롯 그룹은 호텔 샬롯 사장인 심은영이 장악했다고 봐야 해. 그 치료제나, 샬롯이 가지고 있는 전투 보조 마약도 전부 심은영이 챙겼다고 봐야지.”

“그럴 줄 알았죠. 심은규 그 돼지 새끼는 뒈졌고요?”

“아직 죽지는 않았어, 홀딱 벗겨서 의자로 쓰고 있다는군.”

하하하핫!

호탕하게 웃은 유 이사가 ‘그건 마음에 드네.’ 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 유 이사에게 조 사상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위에서 급속치료제를 찾아오라고 한다. 그리고 버서커 폴이라고 샬롯이 가진 전투 마약 레시피도 구해 오라고 한다.”

“위요? 어느 위 말입니까?”

유 이사의 말에, 조 사장이 소리 질렀다.

“위. 존나 위. 하면 몰라? 위에서 가져오라고 했다고.”

“그놈의 위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쟁광 또라이 년이라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그냥 콕 박혀 있으라고 하시더니.”

“그래 씨발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네가 일본에 좀 다녀와라.”

“왜요? 손발 다 묶고 일본 가서 뒈지라고요?”

“손발을 왜 묶어 묶긴. 꼴리는 대로 해도 좋은데, 뒷말만 안 나오게 해라. 그거면 된다.”

“약속한 겁니다. 꼴리는 대로 해도 된다는 거.”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잡음만 없게 해라. 딴소리 나오지 않게만 해.”

“O.K.”

유 이사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조 사장이 얇아진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쓸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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