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07
프로펠러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야- 그건 그렇고 의사 데려가기로 하지 않았었냐?”
“그렇지 않아도 출발하기 전에 다시 확인했었는데, 같이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실력 있는 사람들은 바퀴벌레에 꽂혔는지 연구하겠다고 그러고 애매한 사람들은 무조건 싫다고 했다.
“그럼 강제로라도 한 명 챙겼어야지.”
‘너 잘하는 거 있잖아.’ 기순이 마루가 들고 있는 칼을 보며 눈짓했다.
“같이 간다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는데, 자기 애인 죽인 남자랑 그 친구라서 찝찝하더라고.”
찝찝하면 거르는 게 맞았다. 그렇게 거르고 보니, 오겠다는 사람은 받지 않고 가기 싫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야 하는 모양새가 나왔다. 그렇게 억지로 끌고 갔다가, 뭔 일이 터졌을 때 대충대충 치료한다거나 태업해버리면?
“치료제 연구로 낚으려고 했는데, 안 통하더라. 연구원 말고 실력 있는 의사들은 애초에 같이 갈 생각이 없었던 것 같고.”
“그 열혈 중년 의사는 어떻고? 그 아재 잘 구슬리면 됐을 거 같은데.”
“나도 그 생각을 했었는데, 그 의사가 하필 참의원 그쪽이랑 관계있는 아재더라고.”
“네가 밖으로 던졌던 그 국회의원?”
“어.”
“하필···.”
“그러게···.”
열혈 의사라면 믿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엮이나? 기순의 불량한 눈빛에 마루가 작은 상자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이게 있으니까. 이거면 어지간한 의사보다 낫지.”
“하긴···.”
급속치료제가 넉넉하게 있으니, 싫다는 의사를 억지로 끌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밖을 보던 마루가 칼집으로 헬기 운전석 부분을 툭 때렸다.
“아저씨. 고도 더 높여요.”
[······.]
미친 새들이나, 혹시나 모를 일들에 대비해 고도를 한껏 높인 헬기.
하늘 위에서 본 풍경은 고요했지만, 저 멀리 화산재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비현실적이었다.
회색 커튼이 세상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 기순이 멀리 보이는 회색빛 공간을 보고 감탄했다.
“진짜 신기하네.”
“그러게.”
“······.”
“겨울이라 북서풍이 불 텐데. 화산재랑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저렇게 있는 건 뭐냐 진짜.”
생각해 보니 그랬다. 겨울바람이 불 텐데 흩어지지 않고 커튼처럼 펼쳐져 있는 건 신기했다.
“저쪽으로는 이제 못 가겠는데?”
“그러게.”
“······.”
배를 타고 저길 뚫고 나왔다는 게 신기했다. 화산재와 연기 속을 뚫고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굉장히 오래된 기억처럼 색이 바래있었다.
“아- 씨 뭔 대답이 그렇게 성의가 없어. 귀찮냐?”
“어.”
“······.”
매정한 새끼. 기순은 지지자를 찾아 김 양을 쳐다봤다. 김 양도 별 감흥 없다는 듯 우물우물 땅콩을 까먹고 있었다. 이런 절경 앞에서 땅콩이라니. 땅콩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쌍으로 매정했다.
“이야. 바다 봐라. 바다.”
바다색도 마찬가지였다. 파랗게 맑은 바다와 쓰나미로 뒤섞여 진창이 된 바다가 나뉜 모습. 서로 별개의 바다인 것처럼 나뉜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저쪽 바다 위에 두 척의 요트가 보였다. 카타마란과 메가 요트가 나란히 정박하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그림이 됐다.
“······.”
“······.”
마루와 김 양이 어쩌라고 얼굴로 기순을 바라봤다.
“아오. 됐다. 됐어, 감수성이 없어요. 감수성이.”
기순이 투덜거리는데 헬기 조종사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줄 타고 내려갈 수 있지?”
“너만 군필이냐? 나도 군필이다. 군필이고 나발이고 호이스트로 내려가는데 뭔.”
기순과 김 양이 먼저 내려갔다. 호이스트로 짐을 전부 내린 마루가 조종사에게 다가갔다. 마루가 가까이 가자 빳빳하게 굳는 조종사.
마루가 조종사에게 덕담을 건넸다.
“조심해서 잘 가시고, 헛소리하시면 아마 좀 힘들 겁니다.”
[그게··· 무슨 말···]
조종사의 이야기를 끊은 마루가 담백하게 웃었다.
“잡히지 않게 잘하시고 오래오래 잘 사세요. 이렇게 보내드리는데 허무하게 잡히면 억울하잖아요.”
[······.]
“위성 전화기 있죠? 이리 내요.”
잠시 멈칫한 헬기 조종사가 구석에서 구형 벽돌폰처럼 생긴 위성 전화기를 넘겼다. 태연하게 위성 전화기를 건네받은 마루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고도 더 낮춰요. 저기 메가 요트 그 위로.”
고도를 최대한 낮추는 헬기. 메가 요트 위에서 고도를 낮추자, 마루가 밖으로 뛰어내렸다. 헬기 조종사가 그걸 보고 작게 욕을 내뱉었다. 괴물 같은 새끼.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젠장.”
위성 전화기를 뺏겼으니 현 상황을 본사에 알릴 수 없었다. 조종사는 연료 잔량을 확인했다. 도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해도, 한국으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근처에 헬기 착륙장이 있을까? 이걸 노린 건가? 이래서 끌고 다닌 건가?
“설마.”
무식한 칼잡이가 그럴 리가.
이유야 어떻든 헬기를 버리고 도보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든 헬기 연료가 있어야 했다. 지금 남은 연료로 갈 수 있는 곳 가운데 연료를 보충할 수 있는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도난 병원.
“하하하- 이거야 원.”
헬기 조종사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 곳이나 착륙한 뒤 도보로 도망치거나, 도난 병원으로 돌아가 마주칠 위험을 감수하거나.
‘새벽에 가는 수밖에···.’
헬기가 육지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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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마란에 내린 김 양과 기순은 내려온 짐을 받았다. 이제 마루가 내려오나 싶었는데 헬기가 위치를 이동하더니 메가 요트 위로 갔다.
‘저건 또 왜 저래?’
기순이 헬기를 보는데 마루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거의 7~8m는 될 법한 높이인데 미친놈. 마루를 뱉어내듯 떨군 헬기가 저편으로 도망치듯 날아갔다.
“진짜 어디로 튈지 모르겠네. 저긴 왜 간 거야.”
대충 무전으로 연락하고 각자 찢어지면 될 일인데, 굳이 일을 벌여요. 일을. 기순이 고개를 저었다.
김 양은 ‘백정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뭘 그렇게 민감함?’ 그런 표정으로 짐을 풀어 먹을 것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김 양의 몸이 통째로 들어 가도고 남을 크기의 가방이 4개인데, 거기서 끝없이 식료품이 나오자 기순이 한마디 했다.
“설마···. 그게 다 먹을 거?”
끄덕
단호하게 끄덕이는 김 양을 보곤 기순이 머리에 손을 짚었다. ‘병원에서 먹을 것만 챙겼다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중얼중얼 기도문을 읊조리는 기순을 사뿐하게 무시한 김 양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도도독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갔다.
예?
에엣?
간호사의 목소리. 그리고 질질 끌려온 간호사가. 수북하게 쌓인 먹거리 앞에서 울먹거렸다.
“아니. 이 사람은 왜?”
“일하지 않은 자. 일 시킴.”
일을 시키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말투가 참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랑은 잘만 이야기하는 것 같더니, 나랑 마루한테는 왜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건데?”
“내 맘임.”
“그래. 맘대로 하세요.”
뭔가 서러운 듯 울먹거리는 간호사에게 ‘이렇게 해라, 저건 저기에 챙겨라.’ 주문한 김 양이 기순에게 말했다.
“아래 조종실에 무전 온 것 같음.”
“내려가서 받으라고?”
하- 참-
기순이 투덜거리면서 내려갔다. 울먹거리던 간호사도 짐을 들고 내려가자, 김 양은 조용히 저격총을 꺼내 들곤 한쪽 구석에 엎드렸다. 메가 요트 쪽으로 향하는 총구. 힐끗 이쪽을 쳐다본 백정이 직원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 스코프에 들어왔다.
‘백업이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김 양은 스코프로 메가 요트를 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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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가 메가 요트에 착지하자 경계를 서고 있던 직원이 화들짝 놀랐다. 레펠을 타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뛰어내리다니, 이게 뭔 짓이란 말인가?
“괜찮습니까!?”
‘당신 미쳤소?’ 하는 얼굴로 마루를 보는 직원이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 높이야 뭘.’ 마루의 태연한 표정에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사장도 경호원도 내리지 않고 그대로 헬기가 떠나버리자, 직원은 황당했다.
“아니. 사장님은? 경호원이랑 사장님은 안 오신 겁니까?”
“어?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도난 병원에 있는 경호원이 연락했을 줄 알았는데, 배신자도 그렇고 이것저것 문제가 많아서 그런가? 그래도 그렇기는 한데, 이러면 좋지.
“예. 별다른 소식 못 들었습니다.”
“그럼 좋네요. 일단 아래 내려가서 말하죠.”
간질간질한 느낌에 슬쩍 카타마란 쪽을 보니, 김 양이 저격총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백업인가?’
마루는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낸 뒤, 조종실로 향했다.
조종실에는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자세한 것은 나중에 도난 병원에 있는 경호원에게서 들으십시오.”
마루가 직원들의 질문을 패스해 버렸다.
“그럼 뭣 때문에 여기로 온 겁니까?”
“식수랑 식량, 연료 좀 주시죠.”
저번부터 딴지를 걸었던 아재가 툭 내뱉었다.
“뭐요? 우리가 왜 그걸 줘야 하는데?”
“여러 번 도와준 목숨값 받는 거니까, 딴지 걸지 말고 줄건 줍시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언제 휘둘렀는지 딴지 거는 아재 앞에 놓인 테이블이 토막났다.
툭- 투두둑-
느긋한 살기가 슬슬 조종실 바닥을 채우기 시작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 다들 알고 있었다. 이건 그런 놈이었다는 걸.
“알··· 알겠소.”
딴지 아재가 손을 들자, 팽팽했던 공기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후딱 넘깁시다. 빨리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각자 갈 길 가면 좋지 않아요? 어차피 줄 거면서 왜 이렇게 사람 불편하게 만들어요? 원수졌습니까?”
“······.”
“······.”
그렇게 메가 요트가 카타마란에 바싹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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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L 생수가 로프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계속 쌓이는 생수, 연료, 식료품. 탄약과 폭탄들.
기순은 두통이 생겼다. 저걸 순순히 그냥 줬을 리는 없고, 이번에는 뭘 썰었을까? 의자? 테이블? 사람은 썰지 않았겠지. 사람만 썰지 않았으면 최악은 아니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저쪽에서 보낼 짐은 다 보냈는지 마루가 로프를 타고 넘어왔다.
“야. 씨발··· 너 저기서 뭘···.”
“잠깐. 그 이야긴 여기 도와줬던 아저씨 돌려보내고 하자.”
“하- 그래.”
기순을 제압한 마루가 김 양을 보며 말했다.
“뭐 더 필요한 건 없고?”
“없음.”
김 양은 넉넉하게 쌓인 탄약과 폭탄을 보며 흐뭇하게 대답했다.
[치지직- 하마루씨, 무전이 왔습니다. 이기영 과장님입니다.]
“예. 내려갑니다. 아저씬 준비됐으면 저쪽으로 넘어가세요.”
[칙- 알겠습니다.]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마루가 카타마란 조종실로 내려가 무전을 받았다. 수류탄이 터진 흔적과 총알구멍이 자국이 제법 말끔하게 수리돼 있었다.
[이기영 과장입니다. 치직-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연락이 갔군요.”
[치직- 예. 대행님과 경호원이 사망한 게 확실합니까?]
“대행을 했던 분은 확실히 돌아가셨고요. 경호원은 모르겠습니다.”
[···칙- 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아뇨. 저도 잘 모릅니다만, 붉은 약이 뭔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건 확실합니다.”
[붉은 약이요?]
“네. 다카이치 제약 실험실에 있던 붉은 약인데, 짙은 핏빛 약이었습니다. 그거 위험한 약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카이치 제약에 변종 바퀴벌레가 있어서 소각 처리를 진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랬습니다. 근데 월드 쪽 사람들이 거기서 괴물을 데려온 것을 보고 탈출할 때 탄 헬기에도 바퀴벌레가 붙어 온 걸 봐서는. 소각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 그 바퀴벌레나 괴물이 더 있을까요?]
“모르죠.”
마루의 대답이 짧아졌다.
[의뢰를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단호한 즉답에 잠시 앓는 소리를 낸 이기영 과장이었다.
[하- 지금 타카이치 제약으로 가는 중입니다. 조언이 있다면 해주실 수 있을까요?]
“가지 마세요. 뭣 때문에 가는지 대충 알겠지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
“야마츠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쪽도 소각 절차를 진행했지만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네요. 도착하면 일단 태우세요. 자료 타는 거 아까워하지 말고요.”
[하-하- 참 어려운 이야기네요.]
“뭐. 이미 결정된 상황이면 어쩔 수 없지요.”
어차피 떠날 거니까 상관없었다.
[······.]
“바퀴벌레는 섬광 폭음탄이면 쫓아낼 수는 있을 겁니다. 그것도 자주 반복하기는 힘들고요. 괴물 쥐는 최루탄이 효과적입니다.”
“검은 괴물은 총이 듣지 않을 테니, 총보다는 폭탄으로 날리는 게 좋고. 날린 뒤 바로 불을 붙여야 합니다. 네이팜이나 화염방사기 같은 게 있어야 합니다. 터졌어도 바로 재생과 변이를 시작하니까 조각을 낸 뒤 불로 지지는 게 효과적입니다.”
무전기 저쪽 이 과장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을 침식하거나 정신파 같은 거로 공격하는 놈이니, 원거리에서 교전하는 게 좋을 겁니다.”
[··· 조언 고맙습니다.]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