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09
촤아아악-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무거웠다. 팽팽하게 당겨진 돛에 비해서 느린 느낌.
“뭔가 뚱뚱한 기분인데?”
“뚱뚱한 기분?”
“그래. 이게 좀 이상하네. 돛이 지금처럼 팽팽하면 이렇게 느릴 리가 없는데···.”
“뭔데 그러는데?”
기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지자, 마루는 주변을 살폈다. 망망대해. 끝없이 펼쳐진 바다엔 아무것도 없었다.
형광 녹색으로 빛나는 바다를 벗어나면서 찝찝했던 기분이 많이 가시긴 했지만, 아직 잔향처럼 불쾌함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
“뜸 들이지 말고. 뭔데?”
“속도가 너무 안 나와. 이 정도 바람에 지금처럼 힘을 받았으면 15노트 정도까지는 속도가 나왔어야 하는데 지금 잘 나와야 12노트다.”
“연료도 추가로 싣고, 이것저것 많이 실었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니냐?”
“그거 고려해서 하는 소리야. 무게가 늘어난 느낌이 없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무게가 늘어서 속도가 느려지는 거랑은 느낌이 달라.”
“어떻게 다른데?”
“저항이 커졌다고 할까?”
“저항?”
부피가 커진 느낌. 미끄럽게 나갔던 배가 힘겹게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 아무래도 배에 뭔가 붙은 거 같다.”
“뭐?!”
촤아아악-
물살을 가르는 소리 끝에 하얀 거품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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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름처럼 몰려오는 것들이 하늘 가득 들어찼다.
“씨발. 고도 높여! 고도 높이라고!!!”
이기영 과장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속도 높이라고! 고도 높이라고! 빨리!!!”
헬리콥터 소리와 맞먹는 날갯짓 소리, 얼마나 숫자가 많았는지 주변이 어둑해질 지경이었다.
“최루탄 까. 끈 있냐? 최루탄 묶어서 빨리 매달아! 일단 까서 매달라고!”
최루탄을 낚싯줄에 찌 달 듯 묶어 내리자, 잠시 뒤 푸시식-하고 최루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헬리콥터 프로펠러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최루가스. 하얗게 뿜어지는 가스들이 공기를 휘젓고 사라졌다.
얼마나 최루탄을 까댔는지 하늘에 또 다른 구름이 생겼나 싶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검게 몰려들었던 새 떼가 서서히 멀어졌다.
“씨발···”
“존나··· 씨발··· 저건 뭐냐?”
이기영 과장이 노랗게 뜬 얼굴로 안전 손잡이를 잡았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골로 갈 뻔했다. 까마귀가 저렇게 뭉쳐서 다녔었나? 천 단위? 아니, 만 단위는 될 법했다.
저렇게 몰려다니는 게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놈이 말했던 게 사실이라는 말.
“쥐들도 저렇게 몰려다닌다는 건데···.”
최루가스가 헬기 안으로도 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었다.
쿨럭쿨럭-
캬악-
“눈 비비지 마! 눈 비비면 더 쓰리다.”
“아윽- 눈이 너무 아픕니다.”
“물. 물!‘
“병신아. 군대 있을 때 훈련 안 받았어? 손 떼! 눈 비비지 말라고!”
“문 열어. 바람으로 씻기게.”
헬기 문을 열 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쳤다.
“최루탄 얼마나 깠냐?”
“12개··· 13개 깠습니다.”
“20개쯤 가져오지 않았어?”
“그렇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게 무슨 꼴이람. 차가운 바람에 최루가스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따끔하고 쓰라린 기운이 점차 옅어졌다.
“최루탄 가져오지 않았다면 죽었겠지?”
“···예.”
“쥐들도 저렇게 몰려다닌다는 소린데···. 최루탄은 애들 나눠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느낌이 영- 안 좋습니다.”
안동구 실장의 말에 이기영 과장은 헛웃음만 나왔다.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렇지 않아도 좆같으니까. 그 이야긴 더 하지 말자.”
“형님!”
“빈손으로 돌아가면 좆된다고. 모르냐?”
“······.”
“우리는 굴러들어온 돌이야. 지금이야 상황이 복잡하니까 박힌 돌들이 그냥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러겠냐?”
“······.”
“월드에서 못 느꼈어? 이 바닥 좆같은 거 충분히 겪었잖아. 거기서 최 전무 밑에서 개처럼 굴렀는데 기회가 있었냐?”
“······.”
“근데 지금은 시기가 딱 맞아떨어져서 기회를 잡았잖냐? 이렇게 기회를 잡았는데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야지, 그냥 어리바리하다가 다시 바닥부터 길래?”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월드 그룹도 그렇지만, 크리스털 쪽으로도 정보가 샜을 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고. 그렇다고 기관총에 화염방사기까지 들고 가는데 꼬리 말고 튈 생각부터 하면 되겠냐?”
“그 새끼들은 그냥 오겠습니까?”
“기관총이랑 화염방사기는 없겠지, 최루탄과 섬광 폭음탄도 그렇고.”
“··· 후- 좋습니다. 그럼 약속 하나 해 주십쇼. 이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똥폼 잡지 말고 튀시기로.”
“이 새끼가. 자존심 상하게.”
“······.”
이기영 과장이 안동구 실장의 잔소리를 슬쩍 피했다.
“그래. 씨발 먼저 튈게. 됐냐? 그만 지랄하고 애들이나 챙겨. 정신 나간 놈 벌써 보인다.”
“약속한 겁니다. 여차하면 튀는 거로.”
“미친 새끼가. 진짜. 아- 알았다고. 조종사. 얼마나 남았어?”
[치칙- 도난 병원까지는 30~40분 정도 남았습니다.]
“일단 그쪽에 연락해 둬.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모르니까 상황 변한 거라든지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 치직]
어둑해지는 하늘 저편, 붉게 물든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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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하게 이륙하던 치누크 한 대가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싣고 있던 네이팜 탄과 백린탄이 연쇄 폭발하면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유 이사의 얼굴에 가로로 새겨진 흉터가 뱀처럼 꿈틀댔다.
흐흐흐핫
기괴한 소리는 웃음소리인지 분노를 참고 억누르는 소리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내가 요구했던 건 분명히 블랙호크였는데 말이야.”
“······.”
“민 장군이 자기 마음대로 치누크로 바꿨으니까 이건 이쪽 책임이 아니지.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럼 뭐 하고 있어? 한 대 더 보내라고 해. 네이팜이랑 백린이랑 가득 채워서.”
“···그건 어렵습니다. 지금도 사실 여유분을 다 보낸 터라.”
유 이사의 눈이 뱀 눈처럼 번들거렸다. 동그란 눈동자 속에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동공이 숨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럼 7:3이 되겠군. 민 장군이 3. 앞으로 한 번 더 까면 9:1이 되겠고.”
유 이사의 손이 허벅지에 달린 홀스터 근처로 내려가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가 박 중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기질적인 살기가 서서히 짙어졌다.
박 중사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중사는 씨발 전역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PMC니 지랄이니 이쪽으로 발을 담그는 게 아니었다.
“대답?”
“연락해 보겠습니다.”
“좋아. 일단. 기다리지.”
말하는 꼬라지가 속을 박박 긁었다. 박 중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민 장군 십새끼도 개새끼지만 이 미친년은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터를 갈아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실존 인물이고 나발이고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후- 진정하자. 진정해.’ 박 중사는 여러 차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상황을 정리했다.
유 이사가 요구했던 건 블랙호크 5대. 민 장군이 보낸 건 블랙호크 2대 치누크 3대. 중고로 들여온 치누크들이 말썽이 부리자, 슬쩍 써먹고 치워버릴 속셈이었다.
블랙 호크에서 치누크로 바뀌면서 한 개 중대가 아닌, 두 개 중대 규모의 병력이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지분을 높이려는 민 장군이었지만, 이빨도 들어가지 않게 됐다. 심지어 지분이 낮아진 걸 생각하면 뭔 진상을 떨지.
‘자료를 먼저 확보하면 처리해.’
처리? 씨발 처리하기 전에 정리당하게 생겼는데? 박 중위가 고개를 들자,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찢어진 미소로 박 중위를 구경하고 있는 유 이사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네놈들이 뭔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그런 미소. 섬뜩했다.
‘민 사장 씹새끼. 옷 벗은 지 언젠데 아직도 장군이라고.’
박 중사가 위성 전화기로 민 장군에게 연락했다.
“박 중사입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치누크 한 대가 추락했습니다.”
[그래? 안타깝군. 조종사들은?]
“네이팜을 싣고 있던지라···.”
[안타까운 일이야. 그런데 무슨 일이지?]
“유 이사가 치누크가 떨어졌으니 지분율을 변경해야겠다고 해서 말입니다.”
[뭐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갔으면 그쪽에서 생긴 손실이지! 우리 조종사가 사고로 죽었는데 지분을 깎겠다고?]
앞에 앉아있던 유 이사가 발끝으로 박 중사의 정강이를 톡톡 찼다.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참으며 유 이사를 보자,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 바꾸겠습니다.”
[뭐? 야- 박 중사!]
“유 이삽니다. 민 장군님.”
[···큼. 흠. 유 이사. 지분율을 바꾸겠다고 했다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5;5 항상 깔끔하게 했었잖나?]
“그렇게 가려면 처음 이야기했던 대로 해 주셨어야지요.”
[이야기대로 하지 않았나? 아니 오히려 병력을 2배로 보냈잖아. 1개 중대가 아니라 2개 중대 규모로 보냈으니 지분이 오르면 올라야지, 왜 내려가! 일단 거기 갔으면 그쪽 책임이지, 헬기가 추락했는데 지분이 깎인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민 장군님. 제가 병신입니까?”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제가 호구로 보입니까?”
[···말이 심하군. 자네···.]
“네이팜을 가득 실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백린탄까지 꽉꽉 채워서 실었다면서. 왜 불길은 모닥불인지 모르겠군요. 아프간에서 터졌던 걸 생각하면 주변이 불바다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장군님은 아십니까?”
[······.]
“그래서 7:3입니다. 5:5로 가려면 다시 하나 보내시면 됩니다. 제대로 된 네이팜, 백린탄 싣고 오는 거로 해서요.”
[···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무슨 말씀을. 모욕이라니요. 제대로······.”
갑자기 휙 옆으로 꺾는 헬기. 높은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삐삐삐삐삐
[치익- 이글라입니다. 회피 기동 들어갑니다. 모두 안전 손잡이를 잡···]
블랙호크가 시소처럼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파파팍- 플레어가 꼬리 날개처럼 활짝 펼쳐졌다. 4대의 헬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몸부림쳤다.
쾅!
치누크 한 대가 아랫부분을 맞고 연기를 내뿜었다. 한 방으로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치누크. 연기를 내뿜는 치누크를 노리고 다시 2발의 이글라 지대공 미사일이 날아왔다.
한 발은 피했지만, 나머지 한 발이 몸통에 틀어박힌 치누크가 비상 착륙 신호를 보내곤 내려앉았다.
2색 적외선 마크가 아니군. 유 이사가 고개를 들어 땅을 바라봤다.
“조종사. 3시 방향으로.”
[치직- 그쪽에서 미사일이 날아왔습니다.]
“3시 방향으로 가서 네이팜 떨궈.”
[치지직- 네? 시가지에···]
탕-
조종실을 향한 콜트 파이슨 총구.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조종사. 3시 방향으로 가서, 네이팜 떨궈. 인근 지역에 네이팜 하나씩 떨구라고 해.”
뒤를 돌아봤던 조종사가 유 이사와 눈이 마주쳤다.
[···예.]
유 이사가 탄 블랙호크가 네이팜을 하나 떨궜다.
콰아아아아
화아아아아악
뜨거운 불꽃과 폭음이 치솟았다.
이어서 4대의 헬기가 지나가며 네이팜을 하나씩 떨구자 축구장 3~4개의 면적이 불바다로 변했다.
“2시 방향에 있는 야구장에 착륙해. 어떤 놈들인지 확인은 하고 가야지.”
블랙호크가 연기와 불길을 뚫고 선회했다.
“1호기는 야구장에 착륙. 3호기는 6시 타워 맨션에 강하. 5호기는 9시 학교에 착륙 후 수색 시작. 2호기는 저공비행으로 엄호.”
유 이사의 명령에 헬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윙윙 유 이사가 탄 블랙호크가 야구장에 착륙하자마자, 직원들이 뛰어내렸다.
“2인 1조로 산개. 저격수 위치로. 상황은?”
[3호기. 강하 완료. 작전지역 수색 시작.]
[5호기. 2중대 1소대 2소대 교전 중.]
[2호기, 2중대 엄호.]
유 이사의 머릿속에서 교전 상황이 정리됐다. 학교에서 첫 교전이 벌어졌다는 건, 착륙할 가능성을 생각하고 매복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헬기의 엄호가 있으니 그쪽은 됐고. 맨션에 강하한 1중대가 옆을 쓸면 저쪽으로 퇴각하거나 이쪽으로 튀어나오겠지.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