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15
기순은 해안 경비대원에게 전화기를 넘긴 뒤, 속으로 씨발을 연발했다.
계획대로 잘 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박사 하나가 노빠구 트롤 짓을 했다. 미합중국이 손을 댔으면 알아서 처신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꼴랑 교수가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게 난리였다.
해안 경비대원이 기순이 건네준 전화를 받고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버지니아에서 뭔가 기분 나쁜 소리를 했을까? 그냥 좀 좋게 쉽게 넘어가면 좋을 걸 다 와서 이러니까. 폭폭 한숨만 나왔다.
그런 기순에 눈에 들어온 광경. 트롤 교수가 보관함에 손을 대는 모습이었다.
“씨발. 아저씨 거기서 손 떼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금속 보관함의 잠금장치를 틱-하고 여는 교수.
“야. 거기 손 떼!”
기순이 소리치며 달려들자, 해안 경비대원 한 명이 보관함을 여는 교수를 붙잡았다. 틱-하고 열리던 보관함을 다시 꽉 눌러 닿은 기순이 식식댔다.
“이 미친 새끼가!”
“아니. 난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뭘 확인하는데? 잠가 둔 거 보면 모르나?”
기순의 살기등등한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느꼈기 때문인지, 밖에 있던 마루가 허리춤에 손을 넣고 안으로 쓱 들어왔다. 마루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무거워진 공기.
마루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기에 무게가 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무거워진 공기를 모두가 느꼈다. 뭔가 내리누르는 듯한 감각에 해안 경비대원들과 교수 그리고 기순도 마루를 봤다.
“무슨 일인데?”
담담하게 일본어로 묻는 마루의 말에 기순이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기순도 재치 있게 일본어로 답했다.
“별일 아니야. 여긴 아무 일 없다니까.”
“······.”
슥 주변을 살피다 살짝 삐뚤어진 보관함을 가만히 바라보는 마루. 기순이 화들짝 말했다.
“아니,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저 교수가 미쳤는지 보관함을 열라고 해서.”
“그래서 열었어?”
“열기 전에 닫았지.”
“그래? 확실해?”
“일단.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야. 무게 좀 잡지 말고. 분위기 싸하다 정말.”
“···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이야기하고.”
기순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루는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해안 경비대원들과 교수는 어쩐지 고개를 돌려 마루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뒤, 김 양과 간호사가 작성한 서류가 기순의 이메일로 들어왔다는 알림이 들렸다. 기순은 이런저런 서류들을 모아 버지니아로 자료를 보냈다.
띠링-
메일을 보내자마자, 접수됐다는 답 메일이 왔다. 일 처리 속도가 번갯불에 콩 볶은 듯 빨랐다.
“야- 지금 바로 온단다.”
“지금 바로?”
“그래 거의 다 왔다고 하네.”
“정말 빠르네. 아니, 아까 김 양이 근처에 무장한 애들 있다고 했던데. 이미 와 있던 거 아니야?”
여차하면 털 생각이었나? 버지니아면 그럴지도. 기순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쨌든 해안 경비대랑 교수가 트롤하는 건 막았으니까. 빨리 넘겨주고 받을 거 받고 끝내자.”
“진짜 저거 그냥 줘도 되는 거냐?”
마루가 보기에 변종 따개비는 위험했다. 일본 도쿄에서 마주친 바퀴벌레와 쥐 떼를 생각하면 변종 따개비가 풀렸을 때 뭔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지금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다른 방법은 이미 늦었고. 버지니아에게 넘겼다는 걸 국토안보부에도 말해야 하고. 샘플 보낸 대학에도 연락해서 미리미리 복잡한 일 터지지 않게 하고 있을 테니까. 밖에서 일 생기면 대충 제압만 해. 제압만. 힘 너무 주지 말고.”
미리미리 연락해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했다. 괜히 괘씸죄 걸리면 또 피곤해지니까.
“···어렵네. 알았다. 김 양한테 너 챙기라고 할 테니까. 위험하면 신호 보내.”
“그래.”
해안 경비대원이 박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박사는 엄청나게 아쉬운 표정으로 보관함을 바라봤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빛이었다.
“쯧- 저런 사람이 꼭 사고를 치던데.”
기순이 툴툴댔다. 버지니아와 통화를 마쳤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해안 경비대원이 기순에게 전화기를 돌려줬다.
“위험한 생물체라고 하니, 저쪽에서 인수할 때까지는 경호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해안 경비대가 경비를 서 준다면 좋았다. 기순은 재빨리 미국 국토안보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버지니아에서 샘플을 회수해 가기로 했단 말입니까?]
당연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만. 당장 밖에 무장한 자들이 포위하고 있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기순은 억울한 상황이었음을 강조했다. 김 양이 봤다고 하니 무조건 버지니아였을 거다. 아니어도 버지니아였다.
[···바로 우리에게 연락했으면 될 일 아닙니까?]
“저쪽에서 모른 척하고 무력을 행사했으면요? 사상자 생긴 뒤에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쪽에서 제시한 조건을 전부 들어준다고 하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
“이제라도 연락드린 이유는 오해하시지 않았으면 해서 전화한 겁니다. 그리고 샘플은 넉넉하게 있으니까 몇 개 챙기시면 될 겁니다. 메일로 추가적인 내용을 보내드리죠.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후-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혹시라도 다른 정보가 있다면 우리 쪽에 우선 보내줬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순이 잠깐 말을 멈췄다. 아까 트롤한 교수 새끼 그냥 둘 순 없지.
“브리티시 컬럼비아 해양생물학 교수가 와서 샘플이 담긴 보관함에 손을 댔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활짝 열지 못하게 막기는 했습니다만. 샘플과 접촉했을 위험성이 제로는 아닙니다.”
[격리해야겠군요.]
“제일 처음 알려드린 겁니다.”
[··· 좋습니다. 미국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좋아. 좋게좋게 국토안보부랑은 끝냈고, 샘플을 보낸 대학교에 연락해서 정리하면 끝이었다. 기순이 쭉 기지개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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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에서는 정말 빨리 왔다.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다가 시민권이랑 서류 정리한 거 뽑아서 왔다고 할 정도였다. 전화 끊고 10분이 지나기 전에 왔으니까. 버지니아가 도착하고 잠시 뒤, 국토안보부에서는 헬리콥터를 타고 부랴부랴 날아왔다.
국토안보부 직원들과 생화학 방호복을 입은 특수부대원들이 해안 경비대와 교수를 포위했다.
“난 캐나다 시민이오. 미국 국토안보부에서 날 구속할 권리가 없어!”
“구속이 아닙니다. 생물학적 위험이 있는 관계로 격리 조치와 정밀검사를 하려는 것이니···.”
“변호사. 변호사를 불러.”
“붙잡아! 진정제. 진정제를 투여해.”
트롤 교수와 함께 있던 해안 경비대까지 모조리 포장되어 헬기에 실려 갔다. 버지니아 직원과 국토안보부 직원이 서로 논의하더니 금속 보관함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역시 국토안보부에 찔러 넣고 여러 대학교에 샘플 찔러넣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기순이었다. 상황 정리를 끝낸 버지니아 직원이 서류 가방을 들고 기순에게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스즈키 스바루씨. 아니, 지금부터는 자랑스러운 미국 시민이 되셨습니다. 버나드 그린씨.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는 일본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당분간은 버지니아의 눈이 달라붙을 테니 순순히 말하는 게 좋았다.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았으니 서로 피곤한 신경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다른 친구분들은 미국으로 가신답니까?”
“캐나다 여행하면서 좀 쉬고 싶다고 했습니다.”
캐나다에 동부와 서부에 한 채씩 그리고 미국의 동부와 서부에도 각기 한 채씩, 합해서 모두 네 채의 집을 받았다. 기순, 마루, 김 양, 간호사 이렇게 네 사람이 각기 한 채씩 받은 꼴이었다. 거기에 보험에 세금 문제까지 깔끔하게 처리해줬다. 확실히 버지니아가 이런 쪽으로는 빠삭했다.
“그렇군요. 일본에 가실 때는 어떻게 가실 생각이십니까?”
“배를 타고 가려고요.”
럭셔리 카타마란을 두고 뭘 타고 간단 말인가?
“그렇습니까? 배가 따개비에 오염됐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밴쿠버 항에서 확인했을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따개비에 오염됐다면 며칠 지나는 동안 자랐을 테니까요.”
버지니아 직원이 기순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버나드 그린씨.”
“버나드로 괜찮습니다.”
“좋습니다. 버나드 씨 이건 공식적인 도움 요청입니다. 일본으로 가실 때 우리 직원들과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예?”
“일본의 상황을 인공위성으로 확인하려고 해도 화산재와 연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항공기를 이용한 항공 정찰도 어렵고, 드론을 이용한 정찰도 실패했습니다. 게다가 기존에 있던 상주 직원들과의 연락도 끊겼습니다.”
기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지진으로 연락이 끊긴 주일 미군 사령부로 구조대를 보냈지만, 소식이 끊겼고. 프랑스에서는 외인부대를 파견했음에도 퇴각하겠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긴 상황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사실상 일본 대재난 이후, 도쿄를 자력으로 탈출해 북미에 도착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배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버나드 씨와 친구분들뿐입니다.”
“······.”
“현재, 구조대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들은 버나드 씨뿐인 상황입니다. 현지 상황을 아는 현지인. 길잡이를 해줄 수 있는 현지인도 그렇고요.”
“······.”
말이 일본을 경유, 한국 간다고 한 거지, 일본은 그냥 스쳐 지나갈 생각이었다. 그것도 홋카이도 북부 지역을 지나 동해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면 따개비 있고 방사능 후쿠시마 지나가야 할 텐데,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근데 이렇게 나오면 좀 곤란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공식 요청입니다.”
“······.”
“카타마란에 실려 있는 화물. 비공식적이지만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버지니아 직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카타마란에는 다양한 무기에 폭탄에 심지어 금괴와 각국 현찰까지 있는 판국이었다.
‘젠장. 그새 확인했나? 어떻게 알았지? 제일 밑바닥에 숨겼는데···.’
역시 버지니아. 숨겨진 것 뒤지는 데는 국세청, 국토안보부와 함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조직다웠다.
반쯤 썩은 표정을 지은 기순이 직원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기순은 이왕 버린 몸이 된 김에 뽕을 뽑기 시작했다.
캐나다 시민권과 미국 시민권까지 얻은지라 시애틀항으로 가는 건 간단했다. 시애틀항에서 트레일러트럭까지 삥 뜯은 기순은 태연하게 카타마란에 실었던 물품들을 하역했다.
총화기에, 폭탄, 각국 화폐와 금괴까지 트레일러에 실리는 것을 본 버지니아 직원의 얼굴을 보니 소화가 되는 기순이었다.
“큼. 좀 많군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도쿄에 남아있을 것들과 비교해 보면, 여기 있는 건 티끌 정도도 안 될 겁니다.”
기순이 버지니아 직원이 희망 회로를 돌리도록 입을 털었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고 단지 꿈과 희망을 좀 뿌려줬을 따름이었다.
“흠. 그럼 이동 경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다.”
“일단, 동북부 해역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변종 따개비가 있을 확률이 높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지진까지 겹쳐서 방사능 유출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그렇겠죠.”
“그래서 일단 하와이에서 괌으로 간 뒤, 괌에서 일본 남부를 거쳐 이동하는 루트와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의 스가루 해협을 통과해, 혼슈 서부를 타고 내려가는 루트 둘 가운데 하나를 정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루트가 좋겠군요. 괌에 있는 구조대와 합류하기 좋은 루트라. 그쪽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렇게 가는 쪽으로 하고. 저는 여기 이곳까지만 함께 가는 것으로 하지요.”
기순이 도쿄 인근 지역을 꾹 찍었다.
“도난 병원까지입니까?”
“예. 이곳으로 오기 전, 안전지대를 만들어 뒀으니 그곳을 거점으로 움직이면 구조활동을 펼치기 쉬울 겁니다. 의료진도 있고. 헬리콥터 착륙장과 넉넉한 연료까지 있으니까요.”
“오- 그거 다행이군요. 도난 병원에서 도쿄까지는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니까 아주 좋습니다.”
윙-윙-
버지니아 직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붉은빛을 점멸하며 진동하는 핸드폰. 직원이 급하게 자리를 피하며 전화를 받았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순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직원이 전화기를 내밀었다.
“긴급상황입니다. 받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