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19
마루는 멀리 사라지는 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몰래 다리를 분질러서 못 가게 할 걸 그랬나?”
옆에 있던 김 양과 간호사가 화들짝했다.
‘다리를 어떻게 몰래 부러뜨린다는 건데?’ 김 양은 움찔하면서도 호기심이 들었고, 간호사는 ‘아- 이건 아니었나?’ 하는 표정으로 굳었다.
두 여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기순이 떠나기 직전에 준 편지를 한 손에 들고 머리를 긁적이는 마루였다.
‘아- 새끼 뭔 할 말이 많다고 이렇게 주면 참.’
중학생 시절 이후 여자한테서도 편지 같은 건 받은 적 없었는데, 할 말 있으면 문자나 메일로 하지 뭘 이렇게 뻘쭘하게. 투머치가 될 것 같아서 중간에 계속 잘랐더니 편지로 준 건가?
“별일 없겠지.”
괌에서 미 해병대로 구성된 구조대와 합류해 도난 병원 인근까지 간 뒤, 화산재와 연기를 피해 남쪽 오가사와라 제도 인근까지 내려갔다가 서쪽 대만 방향으로 이동, 이후 북상해서 서해 쪽으로 진입해 인천항으로 가는 코스였다.
도난 병원까지는 미 해병대와 군함이 함께하니 문제가 없을 것이고, 거기서 구조대와 직원들을 내려 준 뒤, 괌으로 돌아가는 군함과 같이 가다가 서쪽 대만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 안전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지랖 부려서 도쿄까지 같이 간다거나, 길잡이 한다고 병신 짓만 하지 않으면.’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 안 그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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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가 점점 멀어졌다.
기순은 작게 심호흡했다. 확실하지 않은 일인데 괜히 이야기했을까? 홍 과장의 자료가 담긴 USB와 이것저것 해석한 자료를 편지 봉투에 넣어 건네줬다. 그걸 보고 또 휙 돌지 않도록 차근차근 이야길 적어 놓기는 했는데.
‘눈이 있을 거란 말이지.’
전화 통화, 이메일, 문자는 당분간 검열된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젠장. 뻔히 스토리가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
때로는 그냥 들이받는 방법이 최고였다.
“긴장됩니까?”
구조대 대장인 해병대 중위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군인이 활짝 웃는 포스터를 현실에 가져다 놓은 듯한 모습. 푸른 눈에 가지런한 치아가 부담스러웠다.
“아- 예.”
“해병대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예에.”
기순은 해병대 20~30명보다 칼 든 마루 하나가 더 믿음직스러웠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었다.
‘마루 녀석이 곁에 있었을 때는 불안하지 않았는데···.’
지금 앞에서 실실 쪼개고 있는 중위를 보니, 일진이 사나울 조짐이 보였다. 불똥이든 뭔 똥이든 튀기 전 기순은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좀 이르지만, 선실에 들어가 짱박힐 준비하려는데 중위가 먼저 선수 쳤다.
“그래서. 도쿄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적은 무엇입니까?”
“전부.”
“······.”
“······.”
웃음과 미소를 지었던 중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기순이 눈꼬리를 휘며 입을 열었다.
“큐슈 지역 화산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해서 화산재와 연기로 인해 항공지원은 불가능하죠. 그런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있다면 그건 무조건 적입니다. 그게 새든, 벌레든, 비든···.”
“대지진의 여파로 도로가 끊겨 사실상 도보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것도 쓰나미가 2번 들이닥쳐 진창이 된 지역을 말이죠. 도쿄는 이제 도시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적이죠.”
“온갖 오물과 시체가 뒤섞여 썩은 진창 속에 크기가 10~15cm는 될 법한 괴물 바퀴벌레가 호시탐탐 인육을 노릴 겁니다.”
“팔뚝만 한 덩치의 쥐 떼들과 미친 까마귀들도 마찬가지고요. 식수를 구할 곳은 없고 식량도 없습니다. 후쿠시마를 관리하던 사람들이 전부 도망쳤으니 방사능 농도도 높아졌겠군요.”
“거기에, 일본이라는 대국이 쓰러졌으니 그 살점을 찢고 내장을 파먹겠다고 달려들 하이에나들까지. 중국, 러시아, 북한, 베트남, 남미 카르텔, 마피아 그리고 밖에서 온 자들을 무조건 죽이겠다고 설칠 야쿠자까지. 적들이 부족한가요?”
중위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기순이 살짝 인사하고 선실로 내려갔다.
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기순이 내려간 선실을 노려보던 중위가 살벌하게 웃었다.
선실 복도에 삐딱하게 기댄 버지니아 직원이, 막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기순에게 한 소리 했다.
“꼭 그런 식으로 말했어야 합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기순은 모르쇠 했다. 도난 병원 근처까지만 같이 가기로 한 상황. 내려서 지지든 볶든 그건 해병대인지 구조대인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앞으로 볼 일도 없는데 말꼬리 길게 늘어지는 사람과 비벼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버나드 씨를 지켜줄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좀,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보여서 말입니다.”
“지켜줘야 할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좀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무엇보다 다 알면서 말꼬리 잡는 스타일을 제가 좀 힘들어해서 말입니다.”
기순이 직원의 말꼬리를 흉내 냈다.
“다 알다니요?”
“제가 말한 정보, 돌고 돌았지 않습니까? 바퀴벌레며 쥐 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과 각국 특수부대에 마피아, 카르텔, 갱까지 들끓고 있는 도쿄의 상황. 알면서 그러길래 복습시켜줬을 뿐입니다.”
직원이 소리 없이 웃었다. 복습이라는 말이 참 그랬다.
“군인들이 좀 그렇기는 하죠. 그래도 복습이라기보다 어느 쪽이냐 하면 ‘반복 학습.’을 좋아하는 성향이라고 할까요?”
“그 ‘반복 학습’을 왜 저한테 하려고 했을까요? 어차피 도난 병원까지만 가기로 한 사람인데 말이죠?”
기순도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혼잣말처럼 한마디 내뱉은 직원이 삐딱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버나드 씨. 말씀하셨듯 현재 도쿄는 아수라장입니다.”
직원의 말을 기순이 그대로 끊었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반복 학습 좋아하는 중위에게 제가 왜 그랬는지 대답이 됐을 텐데요. 처음에 했던 이야기대로 도난 병원 인근 항구까지만, 그 뒤는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
“아닙니까? 그럼 다시 확실히 이야기하죠. 전 도쿄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켜주니 어쩌니 하면서 간 보는 건, 짜증 나고 화납니다. 이제 됐습니까?”
기순의 말에 직원이 쓰게 웃었다. 살기 풀풀 풍기는 허리춤에 칼 찬 놈이나, 댕청하게 생긴 간호사나, 멍한 총잡이 여자와는 다른 타입이었다.
인상 좋은 중위와 안면을 먼저 트게 한 뒤, 조금씩 끌어들이려 했건만 바로 읽히다니. 일본에서 뭘 하던 놈일까?
나이도 20대 초중반. 말 그대로 대학생, 잘해야 사회 초년생이 읽어낼 판은 아니었을 텐데. 친절함과 친근함이 통하지 않는다면? 눌러봐야겠지? 직원이 목소리를 깔았다.
“버나드 씨.”
“국익에는 충분히 도움이 됐을 텐데요? 서로 얼굴 붉히고 어긋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목소리를 낮게 깔든 말든 바로 튕겨대는 기순이었다. 하하- 웃음을 감춘 직원이 정말 이렇게 끊어도 후회하지 않겠냐는 듯. 재차 확인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서로 얼굴 붉힐 일만 없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글렀다고 판단한 직원이 고개를 까딱하곤 뒤돌아섰다. 직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기순이 선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복도가 파도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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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SUV가 트레일러트럭의 뒤를 따랐다.
“진짜 징하긴 아주 징글징글하네. 다음 휴게소에서 교대다?”
“알겠음.”
마루와 김 양의 대화에 간호사는 데굴 창밖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간호사는 도착하면 운전면허부터 따고.”
“하···잇요.”
뭔가 풀죽은 모기만 한 목소리였다. 뒤에 요는 왜 붙인 거? 한본어인가? 마루가 슬쩍 김 양을 봤다. 마루와 눈이 마주친 김 양이 입 모양으로 뻐끔뻐끔 신호를 보냈다.
[이.]
[룸.]
E-ROOM?
아? 이름?
이름은 불러서 뭐 하게? 후딱 독립시키려면 갈궈야지. 붙어 있을 거면 좀 태워도 붙어 있을 것이고 달궜다고 토시면 어차피 안 볼 사람 이름은 불러대서 뭐 하게?
쯧-
마루가 혀를 찼다.
간호사가 일본에 있었으면 좋은 꼴 보긴 힘들었다. 하는 짓을 보면 그랬다. 뭔가 좀 18% 애매한 모습.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가상한데 허둥거리고 화들짝 놀라고 그러는 걸 보면 옆에 있는 사람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래도 간호사는 한몫 잡은 거 아닌가? 같이 있다가 미국 시민권까지 얻었는데, 미국 시민권을 돈으로 사려면 제법 비쌌다. 그럼 할 도리 다 한 거 아닌가?
“왜 우리랑 같이 다니려고 하는데? 3개월 치 월급 한 번에 달라고 하고 갈 길 가는 것도 괜찮잖아.”
그렇지 않아도 시무룩하게 내려앉은 얼굴이 처량하게 변했다. 김 양이 마루를 째릿 노려봤다가 뭔 생각을 했는지, 다시 급격히 태세를 전환해 방긋방긋했다.
저건 또 왜 저러나?
“그러고 보니까 김 양도 그렇잖아? 미국 왔으니 이제 각자 갈 길로 가는 건가?”
순간 김 양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미국에 와서 신분 바꾸고 월드 그룹의 추격에서 벗어나면 방 하나 잡아서 덕질이나 조금씩하고 맛집이나 찾아다니면서 가끔 부업이나 하는 안락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기로 했었는데. 내가 왜 백정이랑 이러고 있지?
김 양의 머리 위로 느낌표와 물음표가 번갈아 떠오르는 것 같은 표정.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같이 가겠다는 사람 굳이 쫓아내지 않을 거고, 나가서 따로 가겠다는 사람 잡지 않을 테니까.”
[-칙--38마일 뒤에 있는 휴게소에서 휴식 후 출발하겠습니다.--]
“예. 확인했습니다.”
선행하는 트레일러트럭의 무전에 대답한 마루가 백미러로 김 양과 간호사를 봤다. 둘 다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뭐. 알아서들 하겠지.
조용한 가운데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것처럼 똑같은 풍경이 휙휙 뒤로 지나갔다.
한 5~10분쯤 뒤에 휴게소에 도착하는 줄 알았는데, 거의 30분을 더 가서야 휴게소에 도착했다. 큼직큼직한 그려진 주차선에 호쾌하게 차를 밀어 넣은 마루가 시동을 껐다.
“휴게소 왔다.”
20~30분 전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던 간호사는 언제 잠들었는지 부스스 고개를 들었고, 김 양도 깜박 잠들었는지 슬쩍 입술 주변을 닦고는 안 그런척했다.
트레일러트럭 운전사와 직원이 SUV로 다가왔다. 흑인과 히스패닉 혼혈로 보이는 트럭 운전사가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손바닥에 땀이 많은 체질인 듯 손바닥을 문지른 청바지에 습기 자국이 났다.
어둑한 갈색 피부에 약간은 투박한 입술, 레게머리 비슷한 스타일, 190cm쯤 되는 키에 120~130kg은 족히 될 법한 덩치. 날씬한 직원과 호리호리한 마루 사이에 커다란 덩치가 있으니 더욱 커 보였다.
슥슥-
다시 손을 닦은 트럭 운전사가 김 양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말했다.
“같이 식사라···.”
트럭 운전사의 입이 열리기 무섭게 재킷을 살짝 열어 보이는 김 양. 홀스터에 꽂혀있는 권총과 수류탄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모습이었다.
김 양이 총과 수류탄을 대놓고 보여주자 ‘뭐 이런 미친년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트럭 운전사의 눈에 몽실몽실하게 생긴 간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순수하고 괴롭히고 싶고 그런 욕망을 자극하는 모습.
“아가씨. 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마루의 뒤로 쏙 숨는 간호사였다. 트럭 운전사가 ‘이런 씹.’하고 눈을 부라렸다.
이것들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좌우로 꺾자 우둑뚜둑하는 소리가 났다.
“야- 잽- 비켜.”
“······.”
김 양이 총을 보여줬다고 겁먹은 것처럼 보였던 게 쪽팔렸는지 트럭 운전사가 오버하기 시작했다.
“귓구멍에 좆을 박았나. 안 들려?”
마루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직원을 봤다. 직원은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 뭐지? 몰래 카메란가? 아니면 테스트?
“그 아가씨랑 얘기 좀 하게 비키라고.”
혼자 말하더니 자기 혼자 열을 내기 시작한 트럭 운전사가 마루의 멱살을 잡았다. 그래도 가만히 구경하는 직원.
그렇다면야.
마루가 멱살을 잡은 트럭 운전사의 팔목을 살포시 비틀었다. 그러자 두툼한 팔목에서 새우깡 소리가 났다.
우두두둑
끄아아아악!
“이 아저씨 골다공증이 심하네. 이거 정당방위죠?”
미국에서는 정당방위 맞겠지. 마루가 직원을 보고 흐릿하게 웃었다. 언제 꺼냈는지 폰으로 열심히 동영상을 찍던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