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25
부웅- 탁-
공중으로 떠오른 술병. 스탠드 불빛에 비친 그림자가 허공에서 회전했다.
뷰웅- 탁-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잭 다니엘 병을 살짝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마루는 생각에 잠겼다.
김 양도 그렇고 간호사도 함께 가겠다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국에서부터 같이 지지고 볶은 김 양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간호사는 정말 의문이었다.
기순이와 김 양이 다쳤을 때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고맙고, 그에 대한 보상은 미국 시민권과 돈으로 갚았으니 도리는 하지 않았는가?
‘오노 나나에라고 했지.’
이름 불러달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간호사로 퉁 쳐버리고,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싶은 피바다를 직관하면서까지 함께할 이유가 있을까?
‘HOXY?’
아니, 그럴 리 없다. 중학교 이후로 여자 사람과 연관될 일 없었던 마루였지만 그건 알았다.
‘나는 아니고···. 그럼 김 양?’
설마? 김 양에게 반한 건가? 엉금엉금 김 양의 다리에 매달리던 간호사가 떠올랐다. 김 양이 다정하게 낚시를 알려주던 모습도 생각났다. 그리고 김 양이 벌을 주며 매도하자, 움찔하면서 무릎 꿇는 간호사의 모습.
마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괜히 김 양에게 잘못 찐득댔다가 머리통에 구멍이 날 게 뻔했다. 어쨌든 만약에 정말 그런 쪽이라면, 오늘 햄버거 솜씨를 봤을 때 바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부우우우웅- 팅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하느라, 힘 조절에 실패해 술병이 천장을 때리고 떨어졌다. 병목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 역회전시킨 술병이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기순이 이 새끼는 잘하고 있는 건가?’
술잔을 비틀어 열 자, 버번위스키 특유의 향이 올라왔다. 마루는 황금빛 향기를 조금 머금고 기순이 주고 간 편지를 뜯었다.
편지 봉투에 담긴 USB, 홍 과장의 노트북에 있던 자료를 담은 것이었다. 확실히 기순이가 가지고 다니기는 위험한 물건이 맞았다. 그리고 약간은 두툼한 편지가 봉투에 들어있었다.
편지를 펼치자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필체.
[씨발··· ]
첫 단어부터 욕이냐? 피식- 웃으며 읽기 시작한 마루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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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이 탄 카타마란이 밤바다를 가르며 속도를 올렸다. 출발했을 때는 3척이었지만, 이후 한 척이 더 붙어 4척의 선단을 이룬 요트들이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마루 새끼. 벌써 사고 치진 않았겠지?’
마루와 김 양을 회사에 스카우트하면 어떻겠냐는 문의가 와서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다. 스카우트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마루의 무력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보는 게 좋았다. 떠나기 전 최대한 숨기고 감추기로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었고 그건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장한 조직원들과의 싸움도 그랬지만, 미친 감염자들, 날뛰는 바닷속 고기떼,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새들, 살 파먹는 바퀴벌레와 시멘트까지 갉아대는 쥐, 흡수하고 증식하는 검은 괴물, 돌 던지는 일본원숭이 그리고 변종 따개비까지.
마루가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상황들이 넘쳤다. 그 말은 마루는 항상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친구는 짧은 기간 너무 많은 피를 봤다. 기순은 그게 걱정이었다.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간 전쟁에 투입됐던 미군들 가운데 후유증을 겪는 병사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멀쩡해 보였던 병사들도 영혼에 새겨진 상처가 벌어지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자기도 모르게 알코올에 의존하거나 약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고, 충동적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거나 반대로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마루에게 되도록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권했지만, 상황이 그렇게 편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기존에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기순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세상이 눈에 선했다.
똑-똑-
“네.”
“버나드 씨, 잠시 시간 되십니까?”
버지니아 직원의 목소리. 기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지를 입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겉옷을 챙겨입은 기순이 카타마란 2층 라운지로 올라왔다.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직원이 보였다. 기순이 자리에 앉자 술잔을 내미는 직원이었다.
“한 잔 어떻습니까?”
“좋죠.”
잔에 위스키가 채워졌다.
“제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기순의 질문에 직원이 쓴웃음 지었다.
“작은 트러블이 생기긴 했지만, 잘 해결됐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도쿄로 가지 않습니다.”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까?”
“네. 전혀.”
차가운 겨울 바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위스키 향이 짙어졌다.
“버나드 씨, 회사는 아니, 미합중국은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삽니다.”
“······.”
“그렇기에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그리고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
직원이 차갑게 바라봤다. 서늘했다. 그래도 기순은 기죽지 않았다. 마루가 뿜었던 살기에 비하면, 죽음에 한 발짝 걸쳤던 순간들에 비하면 이 정도 차가움은 오히려 뜨뜻미지근했다. 기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박하다 잃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돈이 더 있었다면 딸 수 있었는데?”
즉답하는 직원의 말에 기순이 하하 웃었다.
“그 말도 맞네요. 근데 이런 말도 많이 하더랬죠. 본전만 찾으면 그만둔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정말 본전만 찾고 그만두려고 그런 말을 할까요? 아니면 본전을 찾겠다는 핑계로 계속 도박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요?”
“······.”
“도박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 어떤 판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들어가 놓고, 본전만 찾으면 나가겠다는 소리를 하면서 계속 꼬라박는 건 좀 웃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확실히 이길 판이 아닌, 도박판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나중에 본전 생각하고 싶지 않거든요.”
이번엔 직원이 픽- 웃었다.
“도박판이라. 도쿄에 가는 걸 도박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까?”
“······.”
기순은 침묵으로 답했다.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칩만 넉넉하다면 충분히 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박판에서 빠져나온 경험으로 말하지만, 어떤 도박판에서는 칩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더군요.”
질이 중요했다. 마루처럼 압도적인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필요했다. 근데 마루 말고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해병대로 구성된 구조대와 함께, 델타포스도 같이 간다면 어떻겠습니까?”
“해병대와 델타포스라···. 말만 들어도 든든합니다만, 저는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네요.”
직원의 한쪽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하기까지 하군요. 그 말은 우리 해병대와 델타포스보다 버나드 씨, 당신의 동료들이 더 대단하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똑바로 들었다. 씹새꺄. 안 가겠다는데 왜 이렇게 질척이고 지랄이냐?’라고 속으로 말한 기순이었다.
기순과 직원이 눈싸움 아닌 눈싸움에 웅- 웅- 웅- 테이블에 놓인 직원의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슬쩍 폰 화면에 떠오른 내용을 본 직원이 혀를 찼다.
“쯧- 방금 후지산이 대폭발했다고 하네요.”
“······.”
“상황이 변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죠, 괌에 도착해서 다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
“그럼 이만.”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홀로 남은 기순이 위스키를 천천히 비워갔다.
‘후지산이 터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도쿄가 화산재와 연기로 뒤덮인다면 동물들로부터는 오히려 안전해질 가능성이 컸다. 일본원숭이라든지, 쥐라든지, 새 같은 경우 화산폭발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칠 테니까.
‘어쩌면 미친 물고기 떼들도 인근 바다에서 사라지겠군.’
그렇게 파도치는 겨울밤이 점점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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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땀에 젖은 마루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끼익- 낡은 매트리스 녹슨 스프링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스프링처럼 머리가 녹슨 것 같은 느낌에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튀는 땀방울이 찝찝했다.
‘무슨 꿈이었지?’
생각나지 않아도 이렇게 까맣게 생각나지 않을 수가. 분명히 기순이 새끼가 쓴 편지 때문에 이러는 게 분명했다.
편지 생각만 하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씹.’
욕을 삼킨 채 마루는 생수병을 거칠게 땄다. 콰직-하고 뜯어진 병뚜껑을 던져 버리고 500mL를 한 번에 마셨지만,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씨발.’
한 병을 더 마시고 나서야 TV 소리가 띄엄띄엄 들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일본의 후지산이 폭발했습니다···. 위성으로 관찰한 바에 의하면 대규모 폭발로 연기가 상공···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겨울바람을 타고 도쿄와 인근 도시를 덮친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대지진 여파로 도쿄 인근 지역에서는 교통과 통신이 끊긴 상황··· 전기와 가스, 수도 같은 기본 인프라도 무너진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외교관, 특파원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것으로···]
[정부에서는 구조대를 파견했으며··· 특수부대로 구성된 구조대가 괌에서 도쿄로 출발··· 큐슈에서 연이어 터진 화산활동으로 인해 일본 서남부 지역 전역이 항공 제한 구역이 된 가운데 이번에 관동지역에서도 후지산이 대규모 분화를 일으켜 항공 제한 구역이 확대···]
[구조에 난항을 겪을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중국 공군의 전투기 편대가 대만과 일본의 항공 식별구역을 넘나들고 있어··· 오키나와 미군 기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지랄이네. 아주.”
일단 샤워부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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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마친 마루가 식당으로 터덜터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순이 쓴 편지엔 절망적인 미래 예측이 가득했다.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보겠다고 미국까지 왔는데, 곱창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갑했다.
[씨발··· 내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혹시나 해서 쓴다.]
[코로나 같은 감염병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지랄 났는데, 일본에서 날뛴 감염자, 뇌랑 심장 파먹는 그 미친 것들이 전 세계로 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
[감염자도 좆같은데, 바퀴벌레나 쥐 같은 게 중국이나 러시아를 휩쓴다고 생각해 봐라. 아니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한국에라도 그것들이 상륙해서 옆구리 터뜨리면 어떻게 될까?]
[그걸 가지고 무기화하려는 나라는 없을까? 코로나만 하더라도 경제가 휘청거렸는데 코로나 변이로 감염자가 된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만 해도 답이 없는데, 진짜 세계로 퍼지면 어디에 있든 나락 확정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날뛰지 말고 생각 잘해라. 너랑 나랑 같이 돌아가면 무슨 병신 짓거리냐? 어차피 둘 가운데 하나는 남고 하나는 돌아가야 했어.]
[미국이든 캐나다든 쉘터를 만들어서, 무조건 많이 쟁여놔라. 무기든 식량이든 생존에 필요한 건 닥치는 대로 모아 둬라. 헬기나 비행기 같은 것도. 한국이랑 다르게 돈만 있으면 구하기 쉽잖아.]
마루는 고개를 흔들었다.
‘씨발 새끼.’
그런 생각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편지는 이렇게 끝났다.
[···진짜 뭔 일이 터지면 초반에는 한국이 더 안전할 거다. 나중에는 미국이나 캐나다, 시베리아처럼 인구 밀도가 낮은 곳으로 도망쳐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일이 터지면 내가 나루랑 장모님 장인어른 모시고 갈 테니까 거기서 자리 잘 잡아 놓고 있어라.]
장인 장모 드립까지 하는 걸 보니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었다.
후지산이 터졌으니 어쩌면 다행이었다. 변이를 일으킨 동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거나 싹 죽어 나갈 것이다. 화산재와 연기로 항공편이 완전히 먹통 됐으니, 감염자가 퍼지는 것도 일단 막혔다고 봐야 했다. 배편은 해경과 해군이 진작 차단하고 있었고.
“느긋하게 캐나다 여행이나 하려고 했었는데···.”
좆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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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남부 도난 병원
겨울 햇빛이 짙은 회색 커튼에 가려져 있었다. 화산재와 화산 연기로 만들어진 두툼한 장막 저편, 마스크를 써도 순식간에 구멍이 막혀 버리는지 가쁜 호흡을 힘겹게 쉬는 사람들이 분주했다.
헉-헉-
“빨리빨리 안 움직여.”
“다 죽고 싶냐?”
짐을 나르던 여자가 힘이 빠졌는지 푹 쓰러졌다. 득달같이 달려간 유 이사가 쓰러진 여자를 그대로 걷어찼다.
“썅년이 어디서 엄살이야. 뒈지고 싶냐? 안 일어나?”
퍽- 다시 배를 걷어차자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여자였다.
“왜? 좆같냐? 좆같으면 네년이 대신 총 들고 싸우든지.”
유 이사의 말에 여자는 다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쌓이는 짐들이 여기저기 무너진 바리케이드를 채워나갔다.
땡-땡-
땡! 땡! 땡!
“온다!”
“3시 방향! 3시 방향에서 옵니다!”
씨발-
유 이사가 콜트 파이슨의 실린더를 휘릭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