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32
안동구 실장과 샬롯 직원들은 당황했다. 갑자기 미 해병대가 등장해?
“야. 영어 되는 놈 있어? 저거 미 해병대라고 그러는 거 같은데?”
“석준이가 군대 카투사였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걔 보고 통역 좀 하라고 해.”
“석준아! 마석준이!”
키가 190은 될 법한 덩치가 저쪽에서 허리를 푹 숙이고 다가왔다.
“예. 형님. 큰형님. 부르셨는지라.”
“사투리 쓰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형님은 무슨. 너 진짜 제대로 안 할래.”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인 석준에게 우 팀장이 한 소리 했다.
“됐고. 저기 미 해병대라고 하는데, 통역 좀 해라.”
“어떻게··· 뭐라고 할까요?”
“우리 총기로 무장했다고 해.”
“예?”
안 실장은 이기영 과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프간에서 무장을 해제한 수송팀에게 벌어졌던 이야기였다. 안전한 보급로라고 제대로 된 무장 없이 다녔다가 목이 잘리면 누구 탓을 하겠는가?
병신 같은 상황에서는 미군이고 미군 할아비고 믿을 게 못 된다는 이야기였다. 미군이 지켜주겠다고 무장해제 시켜서 무장을 해제한 뒤 미군이 이것저것 시키면 어쩔 건가? 개판일 때 제일 중요한 건 총이었다.
“우리 총기로 무장했다고 해, 오발 사고 있으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고.”
“아- 예.”
“그리고 우린 샬롯 그룹 보안이랑 PMC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해.”
“실장님 그래도 미군인데 우리가 너무 까칠하게 하는 것 같은데요?”
안 실장의 말에 우 팀장이 걱정했다.
“지금은 까칠해야 해. 애들 살려서 데려가야지. 정전 협정이고 뭐고 유 이사, 월드 새끼들 눈 돌아가서 쏴대는 거 봤잖아. 뭣보다 쟤들 영어 쓴다고 미군이라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
“베트남 갱단에, 중국 삼합회 애들에, 남미 카르텔까지 병원으로 들이닥쳤던 거 잊었어? 진짜 미군이라고 해도 어디서 온 미군인지도 모르고. 주한 미군에서 보낸 애들이면 쟤들 월드랑 연결됐을지도 모르는 애들인데, 엮이지 않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좋아.”
석준이 조금 앞으로 나가서 자칭 미군이라는 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화산재와 연기 때문에 가시거리가 20~30m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서로 조심하고 있었다.
잠시 뒤, 뿌연 연기 속에서 석준이 돌아왔다.
“미군 맞습니다.”
“그래? 미군 맞아? 어디서 왔데?”
“괌에서 왔다고 합니다.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여기 지리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협조를 바란다고 하는데요?”
“우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말했는데도?”
“예. 당장 GPS가 먹통이라서 지도 보고 다니는데, 화산재가 이렇게 쌓여서 지도만으로 수색하기 힘들다고 하네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
“가서 실장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했죠. 뭐.”
“아- 이 새끼. 오늘따라 진짜 답답하네. 무조건 모른다고 했어야지···.”
우 팀장이 답답한 놈을 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안 실장이 석준에게 재차 확인했다.
“우리 무장했다고는 했고? 오발 사고 나니까 접근하지 말라고 했지?”
“예.”
“그쪽 분위기는 어때?”
“이런 상황에서 밑도 끝도 없이 뺑이치고 있는데, 미군 애들이라고 분위기 좋겠습니까?”
“좋아. 우 팀장은 애들 챙겨. 짐 분배해서 먼저 출발해.”
“실장님은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일단 쟤들한테 우리 상황을 설명해줘야지. 괌에서 온 미군이라잖아. 괌에서 왔으면 월드 입김은 닿지 않았겠지.”
“괜찮겠습니까? 아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상황이 개판이면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고 하셔놓고.”
“그래도 어쩌겠냐? 쟤들이 따라오면?”
“우릴 따라와서 뭘 하겠다고 따라오겠습니까?”
“상황이 이러니까 따라올 수도 있지. 징발하려고 할 수도 있고.”
“설마 그럴까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곧 죽어도 미군인데 무턱대고 척지면 그것도 골치 아파지니까 어떻게든 잘 넘겨야지. 그러니까 일단 먼저 출발해서 요트팀이랑 접선부터 해. 바로 뒤따라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사주경계 확실하게 하고.”
“예. 실장님도 조심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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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 구조대 베타 중대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계획했던 작전들이 전부 무효가 됐기 때문이었다. 작전은 그랬다. 우선 도난 병원을 보급거점으로 삼아, 알파 중대와 베타 중대가 각기 다른 지역을 수색하기로 했었다.
안타깝게도 처음 시작부터 문제가 터졌다. 도난 병원을 보급 거점화한다는 계획은 보급품을 도난 병원까지 싣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보급 계획의 핵심인 화물 운송용 항공 드론이 금방 사용 불가능이 됐다. 배터리 동력으로 움직이는 4족 보행용 시제품은 쓸 수 있었지만, 보급품을 실어 나르기엔 한계가 있었다. 느리더라도 천천히 보급하면 되지 않나? 그것도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인프라가 박살 났으니 충전? 불가능했다. 태양광 발전? 어림도 없었다. 기름 발전기도 내연기관과 마찬가지로 오래 작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처음 싣고 온 배터리 팩이 떨어지는 순간, 인력으로 보급품을 옮겨야 할 상황이었다.
“잘한 결정인지 모르겠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가동할 수 있는 드론이 절반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상황이 최악이라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도난 병원에 보급품을 옮겨 둬야 했다. 그래서 베타 중대는 가용할 수 있는 드론을 모조리 알파 중대에 넘겼다. 알파 중대는 그걸 가지고 도난 병원으로 향했다.
“알파 중대가 도착했으면 좋겠군.”
“지금쯤이면 충분히 도착했을 겁니다.”
작동 가능한 드론을 모조리 밀어줬으니, 도난 병원에 도착했다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리라.
“답답하군. 21세기에 전령을 써야 한다니.”
“화산재와 연기가 이렇게까지 통신에 악영향을 끼칠 줄 몰랐습니다.”
위성 통신도 먹통이었고, 무전기도 통신 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졌다.
“주변 상황은 어떤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엉망입니다.”
통신과 GPS가 먹통인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지만, 지도와 현장을 비교하는 것도 힘들었다. 제대로 된 표지판도 남아있지 않았고 심지어 도로를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최악은 화산재와 잔해가 쌓여 싱크홀과 균열을 덮고 있어 아차 하는 순간 아래로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면 답이 없어. 현지인의 도움이라도 받아야지. 지형이 완전히 변했어.”
“그렇습니다만. 주변에 생존자가 없는 게 이상합니다.”
“위험하니까 다들 피난 갔겠지. 그래도 혹시 남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찾으면 바로 섭외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주택은 거의 전부 파손됐고 주변 빌딩들은 언제 붕괴할지 몰랐다. 거기에 예고 없이 터지는 여진은 병사들의 신경을 긁다 못해 불안하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적이라면 싸우기라도 하겠지만, 지진은 답이 없었다. 난생처음 지진을 겪은 병사들이 대부분이라 휴식을 취해도 쉬는 게 아니었다.
“9시 방향. 1마일 정도 거리에서 20여 명을 발견했습니다.”
“20명이 넘어? 자위대인가?”
“아닙니다. 복장이 정장이었습니다.”
“정장? 야쿠자?”
“확실하지 않습니다.”
“좋아. 우리도 그쪽으로 간다.”
선행 정찰이 끝난 지역을 속보로 이동하자, 금방 인근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찰 분대가 이미 접촉했는지, 곧바로 보고가 올라왔다.
“샬롯 그룹 보안 요원들과 PMC 직원이라고 합니다.”
“샬롯 그룹이라고?”
“일본 대기업입니다. 식품을 시작으로 유통, 제약, 건설, 화학, 전자 등 여러 분야에 진출한 기업입니다.”
“그래? 어쨌든 일본 기업이면 이 근처를 잘 알지 않겠나? 협조를 구하도록 하지.”
“저쪽에서 자신들은 총기로 무장하고 있어 오발 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뭐? 우리가 미 해병대라고 했는데도?”
“예. 자신들은 한국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중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 보급을 나르려면 최대한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일본에 상륙하고 몇 시간을 고생했어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었는데, 처음 만난 잽스들이 총기로 무장했다면서 초장부터 런을 시도하고 있었다.
“긴급상황이니까 당장 무장해제하고 미 해병대의 통제에 따르라고 해.”
쯧-
중대장은 역시 잽스들은 초반에 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공군 조종사로 부시 대통령과 같이 복무했던 중대장의 증조할아버지는 섬에 불시착한 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도시락’ 당했다.
그런 가족력 때문인지, 구조 중대의 중대장으로 뽑힐 수 있었다. 어설프게 대민 지원이니 민간인 보호니 하다가 작전에 차질을 빚지 않을 현장 지휘관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중대장은 임무에 충실했다. 잽스를 징발해 보급품을 운반시킨다. 잽스를 잡아 길잡이로 쓴다. 지금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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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석준이 뒤로 물러섰다.
“큰형님. 아니, 안 실장님.”
“왜?”
“저놈들···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습니다.”
“그래? 뭐가 이상한데?”
곰이 나무 뒤에 웅크리는 것처럼, 기울어진 전봇대 뒤로 돌아간 석준이 자세를 낮췄다.
“그게 이게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그냥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간혹 그런 놈이 있었다. 촉이 발달한 놈. 그리고 안 실장은 그런 지나가는 말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냐? 그럼 그냥 째자.”
“괜찮겠습니까?”
“느낌이 안 좋다며? 그럼 굳이 더 이야기할 거 없지. 째자.”
“예.”
두 사람이 연기 속으로 돌아서자 뒤에서 미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STOP!!!]
[Put your hands up!!]
[Freeze!!!]
안 실장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뛰어!”
“예.”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가라앉았던 화산재가 푸스스 흩날렸다.
끼이이익-
삐이이익-
기울어진 전신주가 휘청이며, 반쯤 끊어진 전선에 쌓였던 화산재가 밀가루처럼 쏟아졌다. 도로가 흔들리더니 금이 쭉 가기 시작했다. 배가 갈린 고등어처럼 뱃속을 드러낸 길바닥에서 바람인지 가스인지 훅 치솟았다.
“젠장 좆같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넌?”
“저도 괜찮습니다.”
지진 때문인지 쫓아오던 미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군 애들이 쫄았을 때 튀어야 했다. 진동 때문에 가라앉았던 화산재와 먼지가 피어올라 20~30m는 됐던 가시거리가 2~3m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컥-크-”
순식간에 막힌 정화통.
“정화통 여분 있지?”
“예.”
“후딱 갈고 가자.”
안 실장과 석준이 허겁지겁 정화통을 가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투다다다닥
타다다다당
먼지에 막혀 둔탁하게 느껴지는 총소리. 두 사람은 바로 몸을 낮췄다.
투다다다닥
타다다다당
마구잡이로 쏴대는 게 분명했다. 그냥 다 죽이겠다는 건가? 잠시 뒤 뿌연 장막 저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와 달라는 소리. 도망치라는 소리. ■■라는 소리가 짙은 먼지를 찢었다.
“씨발 대체 뭔 일이야?”
“······.”
안 실장과 석준 주춤주춤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고 할 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HE···L···]
가시거리 간신히 2~3m. 어렴풋이 보이는 미군의 모습. 한쪽 팔이 뜯기고 군복과 장비가 찢긴 채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떼는 모습. 마치 무언가에 뜯긴 모습이었다.
안 실장과 석준을 봤는지, 방독면 저편 미군의 파란 눈동자에 희망이 비쳤다. 남은 한쪽 팔을 들어 도움을 요청하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미군의 몸통을 뒤덮기 시작했다. 검은색 덩어리들이 미군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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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속도로 밟고 있는 직원은 초조했다.
칼잡이가 싸우는 영상을 보냈는데, 걸렸을까? 총잡이 년이 폰을 확인했으니, 전송기록을 보지 않았을까?
봤다면 칼잡이에게 왜 말하지 않았을까? 아니, 단순히 멍청한 년이라서 전송기록을 확인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트레일러를 떼어놓은 곳을 향해 열심히 달리는 트럭 안은 고요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와 무지성으로 웅웅거리는 엔진음이 직원의 불안감을 조금씩 자극했다.
“얼마나 걸림?”
“예?”
긴장된 분위기를 무시하듯 태연하게 질문하는 김 양.
“시간. 얼마나?”
“금방 도착합니다”
힐끗- 직원은 김 양을 곁눈질했다.
보통 사람들은 조수석에 앉아 폰을 보거나 밖의 경치를 본다거나 그럴 텐데, 김 양은 오직 앞만 보고 있었다.
텅 빈 것 같은 동공은 깊게 파인 우물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직원은 직감했다. 일진이 사나울 것 같았다.
“영상 보냈음?”
“······.”
“대답 안 했잖음?”
“······.”
마루는 직원의 침묵과 조용한 휴대폰을 생각해 아직 보내지 않았으리라 판단했지만, 김 양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확실할수록 좋았다. 그리고 김 양의 경험상 이런 경우, 대답이 없다는 건 질문에 대한 긍정이었다.
직원은 무조건 밟았다. 최대한 밟았다.
부우우웅-
한계까지 혹사당한 엔진이 소리를 높였다.
저 멀리 트레일러가 보였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는 트레일러 주변에는 마구잡이로 주차된 차들이 있었다.
목에 건 금목걸이가 멀리서도 반짝이는 흑형들이 트레일러를 따서 짐을 내리는 모습. 이미 깐 짐을 들고 즐거워하는 흑형들의 모습이 조금씩 뚜렷해졌다.
갱단이었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