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49화 (149/280)

러스트 [RUST]-149

붉은 카펫이 깔린 호텔.

후드는 바짝 긴장했다. 방금 보지 않았는가? 칼로 밴의 옆구리를 따는 것을. 예전에 송곳으로 차를 뚫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칼로 깡통 따듯 차를 잘랐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온 힘을 쏟아 한 번에 베는 것도 힘들 텐데, 마치 회를 뜨듯 밴의 옆구리를···.

“들어가.”

“······.”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진짜 팔을 자르면 어떡하지? 미쳤잖아? 정부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어느 기관이라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후드는 정신이 없었다. 뭐든 말해야 하는데. 뭐라고 할지 답하기 힘들었다. 사만다. 인공지능 사만다는? 맞다 밴 옆구리가 터졌는데 장비는? 전자장비 그거 순식간에 털릴 텐데. 여기 디트로이트잖아?

“정부라고 했지? 어디 소속이야?”

퉁- 퉁-

낮은 총소리. 소음기를 단 7.62mm 저격총이 불을 뿜었다. 총소리에 움찔 놀란 후드가 소리가 난 창문을 봤다.

김 양이 스코프에서 눈을 떼며 한마디 했다.

“파리 쫓았음.”

저쪽 창문이면 자기가 세워둔 밴이 있는 곳이었다. 설마 밴을 털려고 하는 것들을 쫓아 준 건가?

“···제 밴에 도둑이?”

“그게 왜 니거?”

백정이 칼질해서 잡았는데, 당연히 백정 거 아님? 김 양이 쿨하게 소유권 이전을 확정했다. 후드는 황당했다. 배 땄으니 배 딴 사람 소유? 밴이 아니라 참치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아니. 그게 왜···.”

“말 돌리지 말고. 정부. 어디 소속이야?”

언제 뽑았는지 칼을 뽑은 마루가 후드를 노려봤다. 점점 무거워지는 공기. 뭔가 이상했다. 숨이 막히는 것 같고 식은땀이 조금씩 맺혔다.

‘뭐지? 뭐지? 뭐지? 숨이 막혀. 왜?’

숨통을 지긋하게 누르는 느낌. 칼잡이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옛날 사람들이 범이나 사자를 마주치면 도망치지 못하고 굳었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였다. 칼잡이는 사자나 범이 아니었기에 더 무서웠다.

“질식. 그거.”

김 양이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쯧-

혀를 찬 마루가 칼을 칼집에 넣자, 무겁고 서늘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가던 후드가 털썩 제자리에 무릎 꿇었다.

흐헉. 흐헉. 헉. 헉···

죽음의 공포로 표백된 뇌리. 후드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영상이 겹치고 얽혔다. LA 지하수로 뒤처리 팀이 촬영했던 영상 바닥을 가득 채운 시체들, 저격 포인트인 옥상에 널려있던 살점들, 계단을 틀어막은 바리케이드, 뒤틀리고 조각난 갱들로 만든 바리케이드···. 그리고 철근콘크리트에 깊게 파인 흔적.

이거라면, 칼잡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게 느껴졌다.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닌,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커흐억.

같은 사람인가? 껍데기만 사람 아니야? 괜히 왔나?

허으헉.

근데 이런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 아포칼립스를 준비한다는 건, 그만큼 뭐가 있다는 소리잖아. Fuck!

후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고개 숙여 심호흡하고 있는데, 갑자기 김 양이 발로 걷어찼다. 절묘하게 끊어 찬 발차기가 후드의 심호흡을 끊었다.

커흑!

“너 누구?”

명치를 붙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후드를 가만히 보던 김 양이 다시 숨을 쉬려는 타이밍에 또 끊어 찼다. 찬 데 또 찬 김 양이 해맑은 표정으로 마루를 돌아봤다.

‘내가 하겠음. 심문.’ 눈빛이었다.

“그래. 난 밴이나 챙길게.”

마루가 밖으로 나가자, 방 안에서 사람 잡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도로 건너편에 주차된 밴 근처에는 누런 물과 핏방울이 여기저기 방울져 있었다. 얄팍한 살점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니 귀를 쏜 것 같았다.

마루는 고개를 들어 호텔을 봤다. 묵고 있는 방 창문이 보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저기서 자신을 백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잡은 먹잇감을 지키고 섰겠지.

피식-

마루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스쳤다. 상어가 한 입 뜯어 먹은 것처럼 옆구리가 뜯어진 밴의 속엔 복잡한 전자장비가 빼곡했다. 슥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모니터가 6개나 있었다.

CCTV와 연계된 모니터들. 그 가운데 하나,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간호사가 있었다. 아마도 방에 있는 웹캠을 해킹한 것 같았다.

간호사는 공부하다 힘이 들었는지, 기지개를 켰다. 웹캠 앞에서 쭉 뻗는지라 가슴이 도드라졌다. 하나둘, 하나둘. 바운스- 바운스- 보잉- 보잉-

“이 새끼가.”

이런 걸 찍고 있었어?

······

잠깐 마루의 시선이 모니터에 쏠렸다.

커다랗게 볼륨을 높인 자동차 두 대가 밴을 향해 다가섰다. 슬랭과 욕설이 뒤섞인 랩이 거리를 채웠다. 자동차 보닛에 붉고 검은 스프레이로 이런저런 문구를 적어 놓은 자동차에서 쇳소리가 났다.

철컥-

모니터를 바라보던 마루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 콰직- 밴의 뒷문이 박살 나며 마루의 몸이 밴 밖으로 튀어나왔다.

투두두두둑!

타다다다당!!

두 대의 차량에서 삐져나온 총구가 밴을 향해 총알을 쏟아냈다. 총에 맞은 모니터가 깨지고, 전자장비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순식간에 하얀 총알구멍으로 만신창이가 된 밴.

탄창을 전부 비운 2대의 차량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지나가려고 할 때, 칠흑 같은 칼날이 앞선 차의 A필러를 훅치고 들어갔다.

깊숙하게 틀어박힌 칼날에 보조석에서 쪼개고 있던 사람의 목이 썰리고, 운전석에 앉은 운전자의 경동맥이 잘려 피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피바다가 된 차 안. 뒷좌석에 있던 2명이 신을 찾고 좆을 찾았지만, 대답한 것은 검은색 칼날이었다.

뿌가가각.

A필러를 자른 칼날이 B필러를 쪼개고 기어코 C필러까지 절단했다. 경동맥이 잘린 운전자가 핸들을 놓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잘린 경동맥을 손으로 부여잡고 버둥거리자, 자동차 경적이 길게 울렸다가 짧게 울렸다가 요란했다.

빠아아아앙-

♬♩♪

빵-

♪♫♬

빠아앙-빵--

갑작스러운 급브레이크로 뒤따르던 차가 앞차를 들이받고 멈췄다. 크게 울려 퍼지는 랩. 리듬이 경적과 뒤섞이는 가운데, 새까만 칼날이 추돌한 자동차를 향했다.

“What the···.”

“Fuck!!”

붕 떠오른 마루의 몸이 보닛에 떨어졌다. 묵직한 충격에 물렁물렁하게 세팅된 서스펜션이 출렁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뒷좌석에 앉은 놈들, 순식간에 터진 일로 공황에 빠진 앞에 앉은 놈들의 눈동자에 점점 가까워지는 칼날.

부각-

운전석에 박힌 칼날이 두 번 꺾어졌다. 옆으로 대각선으로 그리고 다시 옆으로, Z자 모양으로 찢어진 자동차 지붕 아래로 피가 흘러내렸다.

스르르르릉-

칼을 집어넣은 마루의 눈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놈의 시체가 들어왔다. 얼굴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놈이 보조석에 앉아있었다.

쯧-

‘웃기는 새끼들이네.’

그러니까 밴 털러 왔다가 귀에 총 맞고 도망친 새끼들이 왔다는 건데···

빠아아아앙-

♬♩♪

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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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적이 점차 잦아들고 음악 소리만 남아 크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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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오자 마루를 본 김 양이 턱짓했다. 뭔가 거만한 느낌의 턱짓 끝엔 너덜너덜해진 후드가 훌쩍이고 있었다.

“그래서 저건 뭐래?”

“해커.”

밴을 보니 그럴법했다. 그나저나 해커라면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소속은?”

“프리랜서.”

정부 기관이 아니라? 프리랜서? 그럼 우리랑 비슷한 거란 소린가? 일단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았다.

“야. 일단 나와봐.”

“?”

김 양이 왜 갑자기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쫓아냈다는 것들이···.”

마루는 말로 대답하다 말고 창밖을 보라고 눈짓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김 양이 ‘너님 또 그냥 썰어버렸구나? 그래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썰어버리면 어찌할래?’ 하는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하- 지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자기는 대놓고 그냥 저격총으로 갈겼으면서? 애초에 귀를 쏘지 않고 위협 사격만 했어도 쫓아내는 건 충분했을 거 아닌가? 귀가 떨어져서 새끼들이 눈이 돌아간 거잖아. 아니야?

마루의 눈빛에 김 양은 고개를 휙 돌렸다.

“해커라고 했지? 여기 주변 지역 CCTV 전부 지워. 지금부터 5분. 아니, 10분 전 영상은 전부.”

“예? 훌쩍- 크흥- 여기 주변이요.”

“그래. 일단 나와.”

마루는 후드를 끌고 밴으로 향했다.

호텔 건너편 도로 한 쪽, 총알 세례를 받아 너덜너덜해진 밴이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후드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파르르 떨다, 밴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사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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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환상 속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국제사회라는 거짓. 지구촌이라는 거짓.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자유를 위해, 민주주의 진영을 위해 합중국의 청년들이 흘린 피는 대체···.

길버트 브라운 사령관은 번역된 서류를 책상 위로 던졌다.

합중국을 갉아먹은 것들이 합중국을 욕하고 있었다. 합중국을 공격한 것들이 피해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합중국의 희생을 바탕으로 일어선 것들이···

쾅!

분을 참지 못한 주먹이 책상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당번병이 문을 열었다.

“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아니야.”

당번병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길버트 브라운은 노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합중국의 청년들을 살려서 돌려보내야 했다. 비겁? 작전 실패? 전부 다 엿이나 먹어라.

일본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받은 정보는 신빙성이 적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믿기 힘든 정보였다. 거대한 바퀴벌레와 쥐, 변이된 동물들에 정체를 모를 괴물까지.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오컬트적인 제단 이야기. 그걸 어떤 사람이 믿겠는가?

전쟁 경험이 있는 장교라면 더욱 믿기 힘들었다. 약을 빨고 덤비는 적들이 즐비했던 전장. 자폭 테러가 넘치고 길바닥에 급조폭발물이 굴러다니는 현장을 경험한 군인이라면, 벌레니, 설치류니 그걸 강조하는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었다.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딴 소리를 누가 액면 그대로 믿겠는가? 심지어 도난 병원에 거점을 마련했을 때까지 바퀴벌레든 쥐새끼든 보이지 않았다.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화염방사기와 강력한 화력이 있다면 처리는 식은 죽 먹기였다.

오히려 위협이 되는 건 감염자들이었다. 변종 코로나에 걸렸다고 하는 감염자들. 이성을 잃고 분노에 휩싸인 감염자들. 한 번씩 급작스럽게 몰려다니는 감염자들이 직접적인 위협이 됐다.

그렇게 주적을 감염자들로 상정하고 작전에 돌입했다.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위력정찰을 나간 분대들이 실종되는 횟수가 잦아졌다. 생존자를 수색하려고 해도 쌓인 화산재와 연기 때문에 제대로 수색하기 힘든 상황이 반복됐다.

이 빌어먹을 일본에 뭔가 있었다. 그게 바퀴든 쥐새끼든 괴물이든 뭔가가 합중국의 병사들을 죽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변이된 감염자가 아니라. 뭔가가.

“후- 월드 PMC 유 이사를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확보한 증거들을 위성 통신을 이용해 본국에 전달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정보가 전달됐을지 되지 않았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병사들을 최대한 살려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확보한 정보를 본국에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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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가 터지고 너덜너덜해진 밴에서 여러 부품을 챙긴 후드가 밖으로 나왔다. 제법 많은 부품이 살아남았는지 부피와 무게가 상당했다.

“이리 줘. 이거 있으면 CCTV 정리할 수 있는 거 맞지?”

“사만다를 살릴 수 있으면 가능합니다.”

일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후드의 목소리가 너무 비장하고 진지한 관계로 마루는 더 묻지 않았다. 사만다를 외치며 오열하던 후드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구할 수 있는 건 구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후드는 호텔 방 한쪽 구석에서 가져온 부품과 호텔에 있는 컴퓨터, 갱들의 휴대폰 같은 것들을 연결해 뭔가를 만들었다.

그걸 본 김 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느 정도 기계장치나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김 양도 저렇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쪽 전문가 확실해 보여?”

“확실함.”

전원을 켜자 얼기설기 어설프게 연결된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후드가 외쳤다.

“사만다!”

[말씀하십시오. 대기중입니다.]

후드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거 있으면 된다며? 빨리 정리해야지.”

창밖에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경찰들이 현장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CCTV 자료가 경찰에 넘어가기 전에 정리하는 게 제일 깔끔했다.

“사만다. 이 근방에 200m 안쪽에 있는 CCTV 확인해서 20분 전부터 10분 전까지 있었던 일들 덮어쓰기 해줘. 영상편집 어려운 건 내 쪽으로 넘기고.”

[알겠습니다.]

[200m 반경. 접속할 수 있는 CCTV 숫자. 13개. 실행합니다.]

후드가 넘어온 영상을 순식간에 삭제, 기존에 있는 영상으로 편집 대체하기 시작했다. 여러 휴대폰 화면에서 CCTV 영상이 떠오르고 지워지고 대체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

혼자 한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일이 진행됐다. 김 양도 이런 건 처음 보는지 오-하고 감탄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자판을 두들기던 손이 어느 순간 뚝 멎었다.

“다 끝났습니다.”

후드의 말에 김 양이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루를 쳐다보는 김 양.

‘나 얘 줌.’ 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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