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53화 (153/280)

러스트 [RUST]-153

왓츠업 방송국은 개국했을 때 4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이었지만, 추후 확장하면서 5층을 목구조로 증축해 총 5층 건물이 됐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사무실과 스튜디오. 5층은 사장실을 비롯한 회의실과 임직원실이 있었다.

5층 벽에 붙어 있던 마루는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참느라 힘들었다. 밖에서 사장과 PD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혈압이 치솟았다.

PD가 사장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곤 사장과 둘이 조용히 얘기 좀 해야겠다 싶었는데, 곧이어 여자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뭔가 킁킁거리며 코로 흡입하는 소리.

‘이 새끼들 약 처먹고 뭘 하는 거야.’

마루는 참지 못하고 벽에 칼을 꽂았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썰리는 벽. 나무 골조와 단열재, 내부 합판과 석고보드 따위는 마루의 칼질을 견디지 못했다.

순식간에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여자는 깜짝 놀라 약을 잘못 먹었는지, 기절해 버렸다. 사장은 바지를 내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멍하니 옆이 툭 터진 벽을 쳐다봤다.

사장실은 5층이었다. 한 층에 3~3.5m만 잡아도 15m 높이. 구조가 뭐든 벽이다. 벽을 뚫고 사람이 들어왔다. 그것도 칼로? 약을 잘못 먹었나?

사장은 눈을 비볐다. 뚫린 구멍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식은 하체. 바지를 올릴 생각을 하기도 전, 공기가 무거워졌다.

끄으흑-

허으윽-

사장은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저 숨이 막혔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칼을 든 침입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침입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게 사람의 눈인가?

사장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고개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이 담긴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죽는다. 목이 잘려 죽는다. 반이 갈라져 죽는다. 상·하체가 분리돼 죽는다. 사지와 몸통이 절단돼 죽는다.

크흣

푸쉭- 푸쉬식

푸르르르르륵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노란 국물과 누런 덩어리가 바닥을 더럽혔다.

덜덜덜 전신을 떨던 사장이 뒤로 비척비척 움직이다 발목까지 내린 바지에 다리가 엉켰다. 앞으로 꼬꾸라지는 사장.

철퍽!

자기가 싼 누런 덩어리에 안면을 박고 쓰러진 사장이었다.

“씨발······.”

이건 또 뭔 개판이야.

마루는 어이없었다. 확 썰어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더니, 사장 새끼가 혼자 똥오줌 싸다 정신줄을 놔버렸다.

“미치겠네.”

눈알이 돌아간 것을 보면 약을 잘못 처먹은 것 같았다. 조곤조곤 말로 풀어보려고 했지만, 온 우주가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중화제를 쓸까?’

바닥에 대충 널브러진 하얀 가루약. 필로폰이나 코카인 둘 가운데 하나로 보였다. 펜타닐을 저렇게 처먹지는 않았을 거고 크리스털이나 그런 걸 먹었으면 눈이 뻘겋게 물들었겠지.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중화제를 이 새끼에게 쓰긴 아까웠다. 그렇다고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우스웠고.

후- 깊게 심호흡한 마루가 손을 휙휙 털고 어깨를 돌렸다. 시원하게 썰어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더니, 수전증 걸린 것처럼 손이 덜덜 떨렸다.

일단 중요한 건 방송국에서 더 지랄하지 못하게 하는 것. 지금 나온 방송 정지시키고 더 퍼지지 못하게 하는 것. 김 양 괜히 들쑤시지 못하게 하는 것. 이거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마루의 눈에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가 보였다. 계약서 원본.

그래 미국이라면 계약이지. 총 든 강도보다 무섭다는 자본주의 변호사 맛을 보여주마.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럼 이 난장판은 어떻게 한다?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포영화 소품들로 장식된 벽이었다.

하키 마스크, 거대한 초퍼 나이프, 손가락에 칼날 달린 장갑, 찢어진 카우보이모자, 외계 괴물 머리통, 노루발··· 그리고 구석에 있는 커다란 전기톱과 작은 전기톱.

전기톱? 큰 건 그렇다고 치고 작은 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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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단속국, 경찰, 911구조대까지 방송국이 시끌벅적 요란해졌다.

안에서 잠긴 사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보이는 난장판. 벽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바닥엔 밀가루 쏟아 놓은 것처럼 하얀 가루가 범벅이었다. 여자는 기절한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사장은?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져, 엉덩이를 깐 사장이 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오른손엔 전기톱을 꼭 쥐고. 그 난장판을 본 PD가 탄식했다. 가슴에 품은 사표를 진작 던졌어야 했었다.

“PD님? 특집 방송했던 ‘버커퀸의 히어로.’ 관련해서 전화가 왔는데요. 사장님이 전화를 받으실 수 없어서.”

“하아- 그래 내가 받지.”

PD가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도널드&맥 법률사무소의 맥 골든이라고 합니다. 제 고객께서 귀사의 파렴치한 방송 때문에 살해위협을 받아, 소송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PD는 순간 당황했다. 살해위협? 뭔 방송? 최근 방송했던 건? 그럴 게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건 계약서 원본까지 확인한 내용이었다.

“어떤 방송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혹시 고객님 성함이?”

[‘버거퀸의 히어로.’ 방송분 말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방송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갱들에게 도발하는 방송 아닙니까? 대놓고 죽이라고 편집한 내용 아닙니까? 심지어 제 고객님께서는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 방송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방송 내용이 좀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계약서를 쓰고 동의하에 촬영된 방송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좋습니다. 그 잘난 계약서. 한 번 봅시다. 법정에서 뵙지요.]

PD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필 지역에서 제일 악명 높은 법률사무소였다. 건수만 잡으면 기둥뿌리 뽑는다는 법률사무소에서 연락했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사장이 괜찮다고 했던 게 몇 시간 전이었다.

괜찮다고? 괜찮기는 개뿔이. 이걸 어떻게 한다.

불공정 계약이라고 하더라도 계약서가 있는 이상 큰 문제는 없었다. 도덕적인 책임은 있을지언정. 당장 갱이 쏜 총 맞아 죽은 게 아니라면 피할 수 있었다.

사장이 응급실로 실려 갔으니, 일단 시간을 벌어야 했다. PD는 급하게 사장실로 들어갔다. 계약서 원본을 먼저 챙겨야 했다. 경찰과 마약단속국이 증거를 수집한다고 사장실을 헤집고 있었다.

PD의 눈이 먼저 책상을 살폈다. 다행히 책상 위는 아직 멀쩡했다.

‘없다?’

사장이 책상 위에 올려놓는 걸 분명히 봤었는데, 없었다.

“현장에서 나가십시오.”

경찰이 노란색 접근 금지 테이프를 붙이며, PD를 사장실 밖으로 쫓았다.

“아니. 이거 고작해야 마약 아닙니까?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 말 뒤를 보고 다시 해보십시오. 쯧-”

언제 들어왔는지 다른 방송국과 신문사, 뉴투버들까지 조용히 마이크를 내밀고 있었다.

Fuck!

PD가 자리를 피했다.

일단 어떡하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힘들다면?

계약서를 쓴 그 여자와 직접 만나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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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은 두 손 가득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들고 총총 발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어둑한 도로를 홀로 걸어왔지만,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갱? 복수?

흥. 흥.

버거퀸 털러 왔던 찐따들이 진짜 갱이라면 악명 높은 디트로이트는 천국일 것이다. 미국 경찰 아재에게 물어봤더니, 갱들이 공격하려고 하면 죽여도 정당방위라고 했다. 복수하겠다고 온다? 그건 정말, 진짜로, 생큐였다.

흥 ? 흥 ♪

즐겁게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절로 나오는 콧노래.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고, 두 손 무겁게 먹거리도 챙겼고. 제일 맛있는 거로 듬뿍 샀으니까 마루도 좋아하겠지.

응.

그동안 함께 먹은 밥이 얼마던가? 마루 식성을 나름 안다고 자부하는 김 양이었다.

고기에 고기를 위한 고기! 트리플 패티!

치즈 더하고 치즈 올린 뒤, 치즈로 마무리! 트리플 치즈!

합쳐서 트리플 패티&치즈 크레이트 퀸 와퍼!!!

심지어 매콤한 맛 소스!

이거 10개. 분배는 이따가 간식으로 먹을 거 3개는 내 거.

마루 5개, 간호사랑 후드는 1개씩 먹으면 됐고.

김 양은 뿌듯했다. 뭔가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는 가장의 기분? 애들이 맛있게 먹들 걸 생각하는 가장이 이런 기분일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묘하게 서늘한 느낌. 갸웃? 김 양은 고개를 돌려 방금 내린 엘리베이터를 봤다.

자기도 모르게 뒤돌아본 김 양. 겨울이라 춥기는 했는데··· 호텔 복도가 이렇게 서늘했나?

후-

입김을 불어봤다. 하얗게 입김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추운 게 아닌데? 난방은 잘되고 있는데 왜 이렇지?

다시 갸웃했지만,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호텔엔 마루가 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마루가 있는 곳이니까 이런 기분은 기우일 것이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순간.

오도도도도도도독.

솜털이 곤두섰다. 동공이 확대되고, 주뼛주뼛 손끝이 정전기에 쏘인 마냥 따끔따끔했다. 문을 닫고 싶었는데, 관성으로 문을 열어버렸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상황.

문이 열리고 바로 앞에 1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뾰족한 목소리.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백정의 눈이었다.

아니. 아냐. 아님. 갑자기. 왜. 뭐지. 뭔 일이야. 이건 뭐임.

딸꾹.

왜··· 그러시는데요···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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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벌벌 떠는 김 양을 가만히 바라봤다.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는 얼굴. 억울함과 서러움, 의아함과 놀람이 가득한 눈망울이 흔들리고 있었다.

씨발. 이거 자기가 뭔 짓을 하고 다닌 건지, 전혀 자각이 없었다.

화났다가도 감염돼 이러는 건가 생각하면 짠하기도 하고. 지만 감염됐나? 감염됐으면 자신도 감염됐을 건데 멀쩡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혈압이 오르기도 하고.

후- 숨을 고른 마루가 입을 열었다.

“너. 정신이 있는 애냐? 생각이 있는 거야?”

“······.”

“일본에는 뭣 때문에 갔었고, 일본에서는 왜 신분 바꾸고 그랬어?”

“······.”

“미국에는 왜 왔냐고?”

“······.”

“월드 그룹 피하겠다고 그 고생한 거 아니야? 그 새끼들이랑 더 엮이지 않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고?”

“······.”

“아니야? 그렇잖아? 근데 대체 뭐가 문제야? 그냥 막 쏴야 해? 갱들이 덤비면 다 쏴 죽이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렇게 다 쏴 죽일 거면 한국에서 왜 도망친 거냐? 월드 그룹 새끼들 전부 다 쏴 죽이면 됐잖아.”

그 말에 김 양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어? 그러네?’ 하는 표정. ‘싹 죽이면 됐는데, 왜 도망쳤었지?’ 하는 맹한 얼굴.

마루는 어이없었다. 진짜 맛이 살짝 간 게 분명했다. 회사 무섭다고 덜덜 떨던 애가 이렇게 변하는구나 싶었다.

“아- 씨발-”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낸 마루가 깊게 심호흡했다.

쏙 움츠러든 김 양. 두 손으로 꼭 들고 있는 커다란 버거퀸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쯧-

좋다고 먹을 걸 사 온 걸 보면, 아- 진짜 이걸 어쩌나.

“그거 내려놓고. 이쪽으로 와.”

버거퀸 봉지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쭈뼛쭈뼛 다가오는 김 양.

“후- 잘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음.”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안 그러겠음.”

김 양이 도리도리 안 그러겠다고 어필했다.

“진짜 믿어도 돼? 다시는 안 그런다는 거 믿어도 돼?”

“진짜 안 그럼. 믿어도 됨.”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 양. 믿어주세요.

뭔가 훈훈해지는 분위기 끝에. 마루가 말했다.

“그럼 머리 박아.”

“······.”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어딜 그냥.

“······.”

“······.”

스르르릉-

김 양은 조용히 머리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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