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54화 (154/280)

러스트 [RUST]-154

PD는 사장이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갔다. 사장은 침상에 사지가 꽁꽁 묶여 있었다.

“마약 부작용 때문인지 환각 상태에 자주 빠지고 있습니다.”

“대화가 전혀 불가능한가요?”

PD의 질문에 담당 간호사가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자, PD가 사장이 묶인 침상 머리맡으로 가 조용히 말했다.

“사장님 접니다. ‘버거퀸의 히어로.’ 그 계약서 원본. 어딨습니까?”

흐릿했던 사장의 눈에 살짝 빛이 돌았다.

“자네가 왔군. 드디어 왔어. 여기 의사에게 말해주게. 나 미치지 않았어. 나 멀쩡하다고.”

“알겠습니다. 그보다 지금 방송국 상황이 심각합니다. 계약서 원본. 사장님 책상 위에 있던 계약서 말입니다. 그거 어디로 치우셨습니까?

“계약서? 방송국 사장실 책상에 있던 계약서?”

“예. 사장님. 제가 나갈 때, 벨라 불러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사장님 책상 위에 계약서가 있는 걸 봤는데, 없더라고요.”

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벨라? 맞아. 내가 벨라를 불러달라고 했지. 그래 그랬어.”

“······.”

PD는 점점 이상해지는 사장의 목소리에도 자리를 지켰다.

“계약서? 책상 위에 계약서! 사장실이 뚫렸어. 5층인데··· 벽을 뚫었다고! 벨라? 벨라! 그 눈. 눈이. 죽어. 죽는다고. 죽어어어어어어어!!!”

침상에 묶인 사장이 펄떡펄떡 몸을 비틀며 발광했다.

삑삑삑- 경보음이 울리고 간호사가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

“나가세요. 면회는 끝났습니다.”

“사장님! 계약서는 어디 있습니까? 사장님! 계약서요!”

“죽어!!! 다 죽는다고! 그게 온다. 죽음이 온다!!! 살려줘! 살려줘!!”

“사장님! 소송이 걸렸어요! 계약서 원본이 필요합니다!”

“나가시라니까요.”

간호사가 진정제와 수면제를 섞어 주사했다. 똥오줌을 지리며 발광하던 사장의 몸이 점점 흐느적거렸다.

“흐히히히히. 다 죽는다고. 전부 썰려서··· 잘린다고··· 주그···”

계약서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사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왓츠업 TV는 불난 곱창집이 됐다.

사장이 여직원과 마약 응앙을 하려다 여직원은 중태에 빠졌고, 사장은 환각 속에서 전기톱으로 벽을 뚫었다는 보도가 흘러넘쳤다.

버거퀸 광고를 비롯한 광고들은 날아가 버렸고, ‘버거퀸 히어로’ 특집 방송은 방송금지처분을 두들겨 맞았다.

검색어도 싹 갈렸다.

[버커퀸 건슬링거 걸]

[무장강도 참교육]

[총 좀 쏘는 여자]

[버거퀸 히어로]

이랬던 검색어가 완전히 변했다.

[왓츠업 코카인]

[왓츠업 필로폰]

[왓츠업 사장 마약]

[디트로이트 전기톱 약사장]

[전기톱으로 간단히 벽 뚫는 법]

딱 하루 만에, 김 양의 무장 강도 사건이 쏙 들어가 버렸다. 나름 오래된 지역방송국인지라 경쟁사들도 많았다.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뜯고 맛보고 씹고 즐기기 시작했기에 더 큰 이슈가 터지지 않는 이상, 일주일은 넘게 들끓을 것 같았다.

[···마약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생긴 것으로 보고···]

[악마가 자기를 죽이러 왔다는 식의 환각이 생각보다 많아··· ]

[환각 상태에서 전기톱을 휘두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끔찍한 사고가 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일단 김 양이 터트린 버거퀸 무장 강도 사건은 얼추 정리된 것 같았다. 마루는 여기에 더해 금융 치료 폭탄을 사방에 뿌렸다.

김 양과 계약한 계약서 원본이 없는 데다, 사본까지도 없었던지라 왓츠업 방송국은 금융 치료 융단폭격에 초토화가 됐다.

뉴투브에서도 해당 동영상은 삭제됐고, 블로그 같은 곳에 동영상을 올려놓고 삭제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은 바로 금융 치료제를 먹어야 했다.

그러고도 여기저기 퍼진 것들은 해커를 시켜 싹 잡아내게 했다. 인공지능+해커의 조합은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버티는 놈들 컴퓨터든 핸드폰이든 깡그리 날려버려.”

“···예.”

단호한 마루의 목소리.

후드는 보았다. 그날의 기적을···

칠흑빛으로 물든 칼날이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검광을 내뿜은 순간,

미친년이 찍소리도 못하고 머리를 박는 모습··· 그것이야말로 전율.

진정한 지배자의 칼날에 서광이 비치자, 미친년은 반항하지 못했다.

“야. 뭔 생각이야?”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이 새끼 느낌이 좀 이상한데? 마루가 후드를 봤다.

깊게 눌러쓴 후드에 마스크. 거기에 뭔 고글 비슷한 것까지 차고 있고 심지어 손에는 라텍스 장갑을 껴서 온 전신을 꽁꽁 감추고 있는 모습.

“너.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거냐?”

“네? 아니요. 없습니다.”

음성변조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기계음이 살짝 튀었다.

흠- 이걸 까봐?

깠다가 눈 버리면?

깐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알면 귀찮아지는 법이었다.

간호사도 그렇지 않았던가? 무시하지 말라고, 이름 불러달라고 징징거렸던 거. 김 양 키우는 것도 한 번씩 속이 터지는데 뭘 더 키우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야 보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편히 보낼 수 있었다. 초짜가 떠났을 때처럼.

“그래. 일단 영상 전부 정리하고, CCTV도 싹 한 번 훑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슈퍼컴퓨터 필요해? 하나 해줄까?”

“네엣↗ 슈. 슈퍼·컴퓨·터·요?”

후드의 눈에 보인 마루의 모습.

그의 뒤엔 오로라처럼 너울거리는 후광이 서렸다.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그분께서는 물으셨다.

너에게 필요한 것이 있느냐?

치마 대답하지 못하자, 이를 가련하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내 너에게 슈·퍼·컴·퓨·터를 내려 축복하리니, 그것으로···

멍하니 넋이 나간 후드를 보자니, 아차 싶었다.

너무 나갔나?

혹시라도 국방성에서 쓸 법한 컴퓨터를 달라고 하면?

마루는 자세히 말을 덧붙였다.

“기업에서 쓰는 거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싶다. 대충 필요한 사양이랑 옵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견적서 뽑아서 올려봐. 가능하면 빌딩 공사할 때 넣게. 예비부품이랑 그런 것도 빼먹지 말고.”

“······.”

고개를 끄덕인 후드가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며 중얼거렸다.

‘사만다. 드디어. 우리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어. 사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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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거실. 벽에 붙은 표어.

=생각하고 쏘자.=

“생각하고 쏘자!”

=착하게 잘하자.=

“착하게 잘하자!”

김 양은 벽에 걸린 표어를 복창하고 머리를 박았다. 아침, 점심, 저녁에 한 번씩 표어 복창과 머리 박는 시간이 정해졌다.

처음에는 마냥 억울했다. 백정도 신나게 썰었으면서 왜 나만 괴롭히는 건데? 총 좀 쏠 수도 있고 그렇지, 무장 강도한테서 사람들도 구했는데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짜증도 났고 화도 났고 그랬지만 검은색 칼날이 스르르릉 삐져나오자, 아무 생각 없어졌다. 그냥 ‘착하게 잘하자.’, ‘생각하고 쏘자.’ 이거 두 개만 떠올랐다.

‘표어 벽에 붙여 둘 테니까.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에 3번씩 보고 외쳐. 3분씩 머리 박고.’

3분 동안 머리를 박았던 김 양이 고개를 들었다. 3분 너무 길었다. 진짜 힘들었다. 그러니까 머리뼈에 금이 가고 목뼈가 비틀어져 디스크 걸릴 것 같았다.

머리 박는 거 말고 플랭크 자세로 하면 안 될까? 플랭크도 힘든 건데? 바꿔 달라고 하면 칼 뽑을까? 너무 힘들었다.

목이랑 머리가 너무 아파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띠- 프론트입니다. 왓츠업 방송국에서 온 PD가 미스 킴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네. 내려가요.”

인터폰을 내려놓은 김 양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방송국에서? 죽고 싶어서 왔구나?

계약이고 나발이고 그딴 거 하지 않았으면 백정이 눈깔 돌아가지 않았을 거 아닌가? 백정 이야기를 들어보니 방송국이 자길 엿 먹인 게 맞았다. 그래 놓고 뻔뻔하게 찾아와? 자기들 때문에 하루에 3번 지랄 당하고 있는데?

철컥-

“야.”

마루의 한 마디에, 김 양의 눈동자가 순둥순둥하게 변했다.

“응?”

“그거 총은 두고 가라.”

할로우 포인트 넣고 어딜 가니? 쏘고 난 뒤에, 생각해 보고 쐈음. 그러려고?

“······.”

“······.”

‘너도 불안하다고 항상 칼 가지고 다녔으면서, 나도 총 없으면 불안하다고.’ 김 양이 눈빛으로 항변했다.

“하- 좋아. 표어 3번 외치고. 총 가지고 가고 싶으면 그거 말고. 발터 p-22로 가져가. 총알은 일반탄 넣고.”

“알겠음.”

김 양은 냉큼 표어를 외쳤다. 휘릭 글록-17를 넣은 홀스터를 풀고, 발터 p-22가 꽂힌 홀스터로 바꿔 차는 김 양을 바라보던 마루가 한숨을 쉬었다.

“거기서 뭔 소리를 하든 무시해. 계약이 어쩌고 그러면 계약서 보여 달라고 하고, 다음부터는 무조건 변호사한테 말하라고 해. 알았지?”

“···알겠음.”

어떤 PD가 왔는지 모르겠지만, 밥줄 끊기게 된 사람은 때로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었다.

확률이 매우 낮더라도 왓츠업 TV 측에서 돌발행동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려웠다. 거기에 영상을 지우긴 했지만, ‘버거퀸의 히어로.’ 방송을 본 갱단이 복수하겠다고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방탄복 입었냐?”

“······.”

“방탄복 입고 내려가라. 그리고 기우였으면 좋겠는데, 혹여 이상한 애들이 시비 걸어도 싸우지 마.”

“저쪽에서 먼저 총 뽑으면?”

‘정당방위로 처리?’ 김 양의 눈빛에 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됨.’

“일단 튀어. 나중에 조지면 되니까 지금은 참고 도망치는 데 집중해. 견제사격 위주로 하고. 알겠어?”

“알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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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PD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PD가 김 양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은 김 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 제 법률대리인에게 연락하시면 되는데 무슨 일이시죠?”

“···부디 소송을 취하해 주십시오.”

‘소송을? 왜?’ 김 양은 이해할 수 없었다. PD가 간절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대로 가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됩니다. 계약하지 않으셨습니까? 방송국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 때문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지금 누군지 모르는 100명의 생계를 위해 고소를 취하하라는 거? 무슨 ‘위 아 더 월드.’ 같은 소리지?

“방송국이 좋지 않은 선택을 했다고 하지만, 그건 동의한 부분이지 않았습니까. 계약서엔 촬영분에 대해 방송국에 일임한다고 하셔놓고, 소송이라니요. 그것도 분명히 계약서에 사인하셨으면서 방송국에 무조건 책임 있다고 하시···”

“계약서. 봐요.”

김 양이 PD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계약해놓고 왜 소송했냐고, 소송해서 100명 밥줄 끊긴다고? 그 좆같은 계약 때문에 매일 무슨 지랄을 당하고 있는데. 물 먹여 놓고 피해자 코스프레?

“······.”

“내가 사인했다는 계약서. 보여주셈.”

까봐. 있으면 까보라고. 없으면서 계약?

“사장님께서 의식이 불분명하셔서, 계약서를 어디에 뒀는지···.”

“계약서 없음? 날 죽이려 함?”

김 양이 휙 맛이 가려고 했다.

“무슨 소립니까? 죽이려고 했다니요.”

무조건 머리를 박아도 될까 말까 한데, 발뺌? 이 새끼가. 죽여버려?

“그럼 그 방송 뭐임? 악의적 편집은 뭐임?”

“······.”

쏘고 싶다. 쏴 버리고 싶다.

“그게 날 죽이려고 한 거 아님? 그래 놓고 뭐?”

“······.”

개새끼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싶다.

뚫린 주둥이라고 나불거려? 죽이려고 한 게 아니면?

이 새끼 대가리에 총알을 박으면 피눈물 흘리면서 감사하겠지?

22구경이니까 2발 넣어주면 좋아서 코피까지 흘리려나? 종간나 새끼가.

철컥-

슬슬 발동걸리는 김 양의 눈에 언뜻 그림자가 스친 창문이 들어왔다. 머리를 살짝 내밀어 이쪽을 보고 있는 백정의 모습.

‘생각하고 쏘자.’

‘착하게 잘하자.’

급발진을 조절한 김 양이 살포시 총에서 손을 떼고 PD를 노려봤다.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PD가 정색했다.

“아닙니다. 정말 오햅니다.”

“됐음.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고 변호사에게 말하셈. 또 찾아오면 고소함.”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김 양이 창문을 슬쩍 봤다. 백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휴-

작게 숨을 내쉰 김 양이 애원하는 PD를 뿌리치고 나섰다.

잘 참았음. 나 대견함. 응.

김 양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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