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57화 (157/280)

러스트 [RUST]-157

모니터 속에서 펼쳐진 압도적이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영상.

김 양은 숨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조용히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후드는 숨이 가빠져 어쩔 줄 몰랐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끝.

힘이 빠진 손가락으로 간신히 키보드를 치던 후드가 고개를 팍 숙였다. 키보드를 베개 삼아버린 후드가 버둥거리며 혼잣말하는 소리.

“후아- 사만다?”

‘진짜 어떡하니? 나 미쳐버렸나 봐. 사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쳤다.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지고 척수에 박힌 신경 다발이 탭댄스를 춰대는 느낌. 이게 미친 게 아니면 뭘까?

그런 후드의 뒤통수를 가만히 노려본 김 양이, 가늘어진 눈초리로 말했다.

“뭐함? 일 안 함?”

“······.”

‘무슨 지랄이니? 그만 지랄하고 빨리 일이나 하지?’ 김 양의 재촉에 후드가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뭔가 어물어물하게 반응하는 후드의 뒷모습. 김 양은 쏴 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전신이 근질근질했다. 마루가 총 쏘지 말라고 하는 걸 듣고 난 뒤부터 미묘하게 개기는 느낌?

죽이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무릎에 총알을 박아 버리면 꿰엑꿰엑 고라니 멱따는 소리를 낼 것 같은데.

진짜 무릎이면 딱 좋잖아. 다리 병신이 되면 도망도 못 치니까. 손가락만 멀쩡하면 되지 않겠어?

김 양의 생각이 ‘다리 병신 만들어서 시작하는 착한 해커 노예 육성기’로 기울어질 무렵, 후드는 자기를 닦달하는 김 양을 멀리 보내버릴 수 없을지 고민했다.

괜찮은척했고 멀쩡한척했지만, 자기 머리에 총을 쏜 김 양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에서 병신 코로나에 걸린 후유증일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딴 게 있으면 진작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겠지.

무슨 핑계를 대도 그딴 핑계를 대는지, 세상에 코로나가 분노조절장애? 웃기지도 않았다.

어떤 분노조절장애가 툭하면 사람 죽이겠다고 그러겠는가? 여차하면 총 뽑고 심심하면 총 뽑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같이 있다가는 불안해서 말라 죽을 것 같았다.

타다다다다닥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이런저런 결과가 떠올랐다.

‘갱들이 방송하려고 켜놨던 액션캠 영상은 전부 처리했고.’

동료들 썰리는데 그걸 찍고 있던 갱이 있었다.

그런 놈이 있다는 게 이상한지, 아니면 한 명 밖에 없다는 게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올라간 영상도 중간에 가로채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촬영에 사용한 휴대폰까지 해킹하고 있으니 곧 관련 영상 정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흥. 어설픔.”

모니터를 바라보던 김 양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뭐가 어설프다는 거지?

후드는 김 양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를 봤다. 그곳에는 은신 로브를 벗고 돌아오는 마루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멀쩡하게 잘 오고 있는데? 그런 후드의 의아함에 대답해주는 것처럼 김 양이 말했다.

“뒤처리.”

은신 로브를 입고 싸웠으니 증인도 없고, 칼로 썰어서 딱히 증거 따위 나올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여 생존자라도 생기면 어쩔 건가?

아까 보니까 위/아래로 나뉜 놈 하나가 살아있었던 것 같던데. 반으로 잘렸으니까 조금 있으면 과다출혈로 죽겠지만, 혹시라도 죽지 않고 살아서 주둥이를 털어대면?

맞다. PD도 있었다. 초벌구이 끝나고 재벌구이 되기 직전이었던 방송국 PD. 걔가 살아서 이상한 소리 하면 어쩔 건가?

‘어둠 속에서 뭔가가 갱들을 죽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딴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면 앞으로 활동하는데 피곤하지 않겠는가? 시체를 전부 처리하고 온 것도 아니고. 예전 같았으면 시체를 모아서 구덩이 파고 밀어 넣든 휘발유 뿌려서 불 질러 버리든 했을···

‘하네?’

돌아오나 싶었는데 중간에 기름통을 사서 현장으로 돌아가는 마루의 모습이 CCTV에 찍혀 있었다. 후드는 마루가 찍힌 부분을 실시간으로 삭제 편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후, 현장을 정리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시체를 한쪽으로 몰아넣고 주차된 차량의 블랙박스를 뜯어 던지는 영상, 자동차에서 휘발유를 뽑아 시체 더미에 뿌려 불을 붙이는 모습을 끝으로 정리가 끝났다.

김 양은 뚱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불만이었다. 김 양의 불만이 무럭무럭 자랄 무렵 마루가 돌아왔다.

“현장에 액션캠 있던데 찍힌 거 정리했지? 인근 CCTV도 전부 처리했고?”

“예.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기계음이 묘하게 튀는 소리. 마루를 보곤 뭔가 안절부절 좌불안석하는 후드를 보자니, 괜히 심사가 꼬이는 김 양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참았던 불만을 터뜨렸다.

“PD는?”

더러운 방송국 PD는 왜 살려준 건가? 갱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PD? 아? 그 화상 입은 사람. 그 사람이 왜?”

“죽이지 않음?”

마루는 김 양의 불만 가득한 눈동자를 바라봤다.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불만이라고 눈을 그렇게 떠? 어디서.

“야. 저기 뭐라고 적혀있어?”

마루가 턱짓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벽에 붙어 있는 표어.

[생각하고 쏘자.]

[착하게 잘하자.]

“······”

“근데 왜 안 죽였냐고?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구나. 너.”

“······”

스르르르릉-

한 번 불만을 품어봤던 김 양은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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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생존자인 PD에 관한 이야기는 기사 몇 줄로 끝났다.

디트로이트시 외곽, 버려진 공터에서 일어난 사건. 37명이나 되는 갱들이 죽은 사건은 분명히 큰 사건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대재앙이 터진 일본에 갇힌 미국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출발한 구조부대가 큰 피해를 당하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후 2차례에 걸쳐 추가 파병이 이뤄졌지만, 구조작전이 실패로 끝났다는 단독기사가 터지고, 모든 언론 방송은 일본 사태에 대한 특집 방송과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2차로 파병된 병사들까지 합하면 3,0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일본에 갇힌 건가요?]

[그렇습니다. 현재 일본은 완전히 고립된 상황입니다. 화산재와 먼지의 여파로 항공기를 사용할 수 없는 데다가, 해저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엄청난 양의 부유석이 쏟아져, 선박 운항도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통신도 끊겼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인공위성을 직접 이용한 위성통신도 불가능한 상황인가요?]

[안타깝게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국방부에서는 현재 일본에 갇힌 구조대를 구출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을 거점으로 삼아··· 작전을 실행할 예정이며, 한국 정부와 긴밀한 협조를 통해···]

대규모 작전이 시작됐다. 군종 기자들이 따라가 실시간 방송이 진행됐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시작했지만, 작전은 시작부터 난항에 빠졌다.

화산폭발 여파로 햇빛이 가려졌다. 그에 따라 주요 작전 지역인 도쿄 인접 지역을 비롯한 관동지방 기온은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갔다. 평년 기온보다 15~20까지 낮아진 날씨.

일본 동북부 해수온은 순식간에 베링해와 비슷하게 변했고 심한 곳은 바다가 얼어붙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눈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3일 동안 계속된 폭설로 누적 적설량이 무려 220~250cm가 넘어갔다. 행정력이 유지된 상황에서도 3일간 220~250cm 폭설은 감당하기 힘든데, 지금 일본의 상황은 무정부 상태였다. 한파+폭설로 인해, 사실상 관동지역 민간인들이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한파와 폭설이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부산에서 헬기와 수송선을 이용해 일본 서북부에 상륙. 거기서 육로를 이용해 구해오겠다는 계획은 졸지에 혹한기 죽음의 계획이 됐다.

영하 15~20도, 220~250cm 쌓인 눈을 뚫고 가는 것도 위험했지만, 기온이 어디까지 낮아질지 눈이 앞으로 얼마만큼 더 올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봄까지 기다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력이 끊긴 상황이었다. 비상 발전기를 돌린다고 하더라도 이런 강추위 속에서는 금방 연료가 바닥날 것이 뻔했다.

난방이 끊긴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겨울은 이제 시작인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국방부를 비롯한 미 정부는 당황했다. 졸지에 3천 명이 넘는 장병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것이었다.

구조대 3천 명, 일본 수도권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을 생각하면 3만 5천이 넘는 사람들이 얼어 죽게 된 것이었다.

[현재 한국 부산에서 출발한 구조대가 필사적으로 길을 뚫고 있지만···]

[···12월 말에 다시 대규모 폭설이 예상되는 가운데··· 12월 누적 적설량이 400cm를 웃돌 것으로 보입니다.]

[···화산재와 연기가, 햇빛을 차단해 평균 기온을 1~2도 가량 낮추는 것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후지산 대폭발은 후지산 단독으로 폭발한 것이 아니라···]

[큐슈의 화산지대가 가을에 폭발해 기온을 낮춘 상황에서 일본 본토의 화산들이 늦가을과 겨울에 폭발해 기온이 더욱 낮아졌습니다. 여기에 해저화산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막대한 부유석이 해수면에 떠올라, 햇빛을 차단해 수온을 떨어뜨려 버렸지요.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예상할 수 없는 기온 변화를 일으켰다고···]

대규모 구출 작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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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측정 장비를 살핀 연구원이 말했다.

“이 정도라면 헬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폭설의 여파로 화산재와 먼지의 농도가 낮아져 헬기 운용이 가능해졌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은 운용하고 있는 치누크를 총동원해 일본으로 보냈다.

“지금도 후지산을 비롯한 여러 화산이 분화하고 있습니다. 헬기를 띄울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일 겁니다. 헬기를 쓸 수 있을 때, 일부라도 우선 구출하는 게 맞습니다.”

“구조대가 마지막으로 보낸 정보는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그 정보라도 회수해야 합니다.”

모두를 구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일부라도 10분의 1이라도 구하려면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기름과 혹한기 장비를 가득 실은 10대의 치누크 헬기가 구조대의 거점인 도난 병원으로 향했다.

“무섭군요.”

“동감이야.”

아래 보이는 것은 온통 흰 눈뿐이었다. 도로도 건물도 전부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 무덤이 되어버린 이곳이 그 강대했던 경제 대국 일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5분 뒤, 도난 병원 도착합니다.]

“전부 준비해.”

병사들이 제설 장비를 투하할 준비를 끝낸 병사들이 헬기 밖으로 강하했다. 그들을 반겨준 건 거의 4m 가까이 쌓인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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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 병원.

구조대와 피난민을 포함하면 거의 5천 명에 육박한 사람들이 북적거렸던 병원은 을씨년스러웠다.

복도와 벽 여기저기 뿌려진 핏방울과 바닥에 널브러진 살점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붉은 자국을 필사적으로 막은 바리케이드 건너편 추위에 떨던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멀리서 들리는 헬기 소리. 길버트 브라운 사령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병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외쳤다.

“사령관님. 치누크입니다! 치누크가 오고 있습니다!”

“쿨럭. 쿨럭. 늦었어. 너무 늦었어. 무전기. 작동되는 무전기가 있나?”

여기서 죽어야 했다. 모두. 길버트 브라운은 속내를 숨기고 무전기를 물었다.

“······.”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구조대를 덮치면 전부 끝장이야. 작동되는 무전기가 있으면 가져오게.”

“저희 쪽 무전기는 모두 부서졌습니다. 비상용 무전기도 방전되어 쓸 수 없습니다.”

“비상 연막탄을 피워서 경고하게. 적 있음. 매복 위험. 접근 금지.”

“사령관님!”

“경고하지 않을 텐가?”

4m 가까이 쌓인 눈을 제거하고 치누크가 착륙할 공간을 확보한 뒤, 병사들은 쌓인 눈에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임시 착륙장에서 도난 병원까지 직선거리는 1.5km 남짓이었지만, 중간중간 장애물이 있어 그것을 치워야 했다. 단시간 내에 통로를 뚫기는 사실상 힘들었다.

“도난 병원에서는? 아직도 연결되지 않았나?”

“군 주파수로는 먹통입니다.

“공용 주파수로 돌려봐.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비상 신호입니다. 도난 병원에서 연막 신호를 보냈습니다. 코드 블랙. 인근에 적이 있다는 신호입니다.”

“신호. 매복. 위험. 접근 금지! 반복합니다. 신호. 매복. 위험. 접근 금지!”

“작업 중지! 전원 무장. 임시 착륙장으로 후퇴한다. 당장.”

쌓인 눈 속. 저 너머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크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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