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63
변종은 온몸에 불을 붙이고도 한참을 버둥거리다 쓰러졌다.
매캐한 연기가 복도를 채웠지만, 화재경보가 울리지 않았고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건축 내장재가 불연재가 아니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거기. 미군인가? 그린베레? 델타포스?”
허스키한 목소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자의 목소리가 바리케이드 너머로 들렸다.
마루는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미국 국토안보국 용병이다.”
“국토안보국 용병이라고? 요즘엔 용병도 광학 은신 장치를 쓰나 보군.”
“······.”
마루의 침묵을 뻘쭘하게 해석했는지 여자가 말을 이었다.
“딱히 비꼬려는 뜻은 아니었다. 그쪽이 바리케이드에 달라붙은 것들 정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미국 용병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하게 될 줄이야. 나도 늙었군.’ 작게 푸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쪽은 우릴 구조하러 온 건가? 아래가 며칠 전부터 요란하던데, 탈출로는 뚫었고?”
“······.”
계속되는 마루의 침묵에 답답했는지 여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구조하러 온 것도 아니면? 뭔가? 그쪽도 그놈의 연구자료인지 비밀자료인지 그것 때문에 왔나?”
은신을 해제하지 않은 채, 마루는 복도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쪽도?’
그 말은 국토안보국 말고 다른 쪽에서도 정보를 확보하려고 사람을 보냈다는 의미였다.
‘군부?’ ‘버지니아?’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이 2곳. 다른 쪽에서 보낸 애들과 경쟁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내 임무는 구조가 아니다.”
“크흐흐흐흣. 그래 차라리 그렇게 속 시원하게 말하는 새끼가 낫지. 그래서. 그놈의 정보인지는 여기 사령관이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사령관을 만나려면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어쩌나. 출입구가 당장은 없네. 드나들려면 오래- 아주- 오래 걸리겠어.”
확실히 바리케이드를 만들 때 용접을 한지라, 드나들기 힘들었다. 밖에서 달려드는 변종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오래오래 밖에서 변종이나 처리해라?’
아니면, 탈출로를 만들든지? 재밌는 여자였다. 변종을 썰어버리는 것을 봤을 텐데,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건가?
하긴, 이런 공간이라면 화염방사기가 무서운 무기였다. 복도에서 어디로 피하겠는가? 수틀리면 같이 구워버리면 된다 이건가?
기이이잉- 기이이잉-
기계음과 함께 김 양이 다가왔다. 엑소슈트 밖으로 뿜어지는 어두운 오라. 지치고, 힘들고, 서럽다는 분위기. 일렁- 마루가 은신을 해제했다.
[배터리 25% 남음. 20%부터 절전모드임.]
[잔탄 320발.]
[바리케이드 왜 안 엶?]
후딱 열어주지 않고 뭐 하고 있음? 김 양이 물음표를 띄울 때,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엑스기어? 이야. 이거 광학 은신 장비에, 엑스기어까지? 장갑이 있는 걸 보면 엑소슈트인가? 아프간에서는 뼈대만 있었는데 말이야.”
그 특유한 목소리에, 김 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유··· 유 이사?]
통신기에서 흘러나온 김 양의 목소리.
유 이사? 마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니까 월드 그룹에서 홍 과장과 김 양의 윗줄이었다는 사람? 그 사람이 여긴 왜?
“어이. 거기. 이쪽도 돈 받고 구르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왕 자료 찾는 임무라면 겸사겸사 구조도 같이하면 어떨까? 대가는 충분하게 드리지. 이왕 일하는 거 벌이가 2배면 좋잖아?”
“······.”
“엑소슈트에 광학 은신 장비까지. 그쪽에서 놈들의 이목을 끌어주면 최소한 절반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 생각 좀 해보지.”
“화끈하게 결정하라고, 분위기를 보니까 금방 지랄 나게 생겼으니.”
바리케이드 뒤에서 난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저쪽에서도 상의할 것이 있는 모양. 마루는 김 양에게 확인했다.
“유 이사면 월드 그룹. 예전에 말했던 유 이사 그 사람?”
[목소리가 특이해서 확실함.]
이사급 직함을 가진 사람이 왔다는 건, 그 칼잡이 아재가 실종돼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월드 그룹도 일본 제약회사들의 연구자료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성격이 좀 변한 거 같음.]
“그래?”
[말이 많아짐.]
“······.”
[예전에는 진짜 단답만 하고 뭐라고 말만 하면 눈을 번뜩이고 그랬음.]
“······.”
[홍 과장도 진짜 고생했음. 유 이사가 키워주기는 잘 키워준다고 했는데···.]
“······.”
간만에 말문이 터진 김 양이었다. ‘너도 유 이사 보더니, 말이 많아진 것 같은데?’ 물론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나름 피곤한 걸 회피할 줄 아는 마루였다.
[···그래서 유 이사가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콜트 파이슨. 2자루나 있으면서 그것도 45구경짜리는 진짜 희귀한 건데···.]
역시 방심할 수 없었다. 기순이에게도 밀리지 않았던 김 양이었다. 여기서 맞장구치면 곤란했다. 마루는 묵묵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게 최선의 방어. 침묵이 효과가 있었는지, 김 양이 결론을 말했다.
[···그러니까. 착하게 잘하면 안 됨?]
착하게 잘하자고? 왜?
엑소슈트 헬멧을 뚫고 뭔가 초롱초롱한 느낌을 발산하는 김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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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케이드는 얼기설기 여러 겹을 쌓고 엮은 어설픈 모양이었지만, 중요 부위를 단단히 용접해 보기보다 견고했다.
칙- 치직
불똥이 튀며 철과 철이 빨갛게 달라붙었다.
“거기 한 번 더 붙여.”
“이쪽요?”
“그래 거기.”
“예.”
철판을 우그러뜨리고 철문을 찢어버릴 정도의 악력을 가진 괴물들을 막기엔 오히려 이런 구조가 적합했다. 한쪽 면을 뜯어낸다고 해도 그 안에 또 엉겨 붙은 구조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 이사가 용접현장을 감독하는 사내를 불렀다.
“막내는 어딨어?”
“민욱이요? 걔는 3번 구역 경계 중입니다. 지금 불러올까요?”
유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장 감독이 바로 사람을 보냈다.
“야- 거기 너. 막내 좀 데려와. 도민욱이.”
“민욱이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현장 감독은 궁금하다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걸 본 유 이사가 쓰게 웃었다.
“미국에서 애들 또 보냈다.”
“이번에도 자료만 챙겨가겠다는 새끼들입니까?”
유 이사가 연초를 입에 물고 끄덕이자, 남자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 개새끼들인지 알고 있기는 했는데, 웃기는 새끼들이지···.”
유 이사의 눈빛이 하얗다 못해 푸른 기운이 돋을 정도로 싸늘해졌다. 벌써 네 번째. 들어오는 거야 들어왔다지만, 자료만 챙겨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한 놈이라도 자료 갖고 탈출에 성공했다면 이곳으로 계속 밀어 넣지 않았겠지. 또 보냈다는 건 여기서 나간 새끼들이 모조리 뒈졌다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자료 챙겨서 뜬 새끼들 전부.
“구조대는 소식 없습니까?”
현장 감독이 우울하게 내뱉었다.
“병신 새끼. 좆달린 새끼가 지랄을 해요. 지랄을···. 네가 공주냐? 기다리게?”
유 이사의 폭언에도 현장 감독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저쪽이 계속 시끄러운 거 보니까, 이번엔 작정한 거 같은데. 그래도 글렀다.”
일주일 넘게 지지고 볶았음에도 구조대가 올라오지 못했다는 건,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소리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구조대는 못 올라오는데 자료 챙기겠다는 새끼들은 어떻게 잘만 올라왔다.
하나같이 임무가 어쩌고 하던 놈들이었다. 들어오는 게 쉬웠다고 나가는 것까지 그러리라 착각한 머저리들, 꾸역꾸역 올라와 놓고 내려가면서 뒈진 병신들.
“차라리 한 번 폭격이라도 하고 그 틈을 탔으면 좋지 않을까요?”
“눈이 이렇게 쌓여서 정밀 폭격은 불가능해. 화산 폭발로 폭격기가 뜨기도 힘들고.”
뭔 지랄인지 GPS도 개판이었다. 화산 터진 여파로 인공위성도 맛이 갔고, 당장 무전기도 고장이지 않은가?
카악- 가래를 뱉은 유 이사가 가슴을 쳤다. 연초를 피면 시원했는데 가슴이 더 막히는 느낌. 미세한 화산재와 먼지가 폐에 들러붙는 더러운 기분.
“이번에 온 자들도 말이 안 통합니까?”
“지들 입으로 용병이라고 하는 걸 보니까. 전에 온 새끼들이랑은 좀 다르긴 한데···.”
확실히 이번에 온 놈들은 좀 달랐다. 장비부터가 광학 은신 로브에, 엑소슈트까지. 전에 들어온 놈들이 근육질 약쟁이들이었다면, 이번 애들은 들고 있는 장비부터 때깔이 다르다고 할까?
무엇보다 광학 은신 장비 가진 놈. 그놈은 진짜였다.
후- 담배 연기를 내뿜는 유 이사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변종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까다로워졌다. 이제 3~4주 만에 덩치가 10%나 커졌다. 키 180cm 정도 되는 사람이, 변종으로 변하면 거의 2m에 육박해졌으니까.
키만 커진 것이 아니었다. 가죽이 질겨지다 못해 방탄복이라도 된 것처럼 총알을 막아냈으니까. 5.56mm 일반탄은 답이 없었고, 철갑탄 정도를 써야 그나마 비벼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변종을 썰어?
특수한 무기일까? 단분자 커터 같은 거라도 쓰는 건가?
‘단순한 무기빨이 아니야.’
확실히 아니었다. 무기빨이든 아니든 변종 근처에 접근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감각이 날카로운 변종들 근처로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싸울 줄 아는 괴물인 변종에게 접근해 근접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엑소슈트까지 있으면 해볼 만해.’
일단 은신 놈이 위력정찰로 길을 잡고, 엑소슈트로 정면을 뚫는다.
엑소슈트에게 변종들이 달려드는 틈을 타, 도망친다면. 최소한 절반은 밖에서 삽질하고 있는 구조대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저번 새끼들처럼 그냥 입 닦고 튀지 않게 하려면, 뭔가 그럴 계기가 있어야 할 텐데. 돈 만 가지고는 부족할 거 같고.
유 이사가 연초 연기처럼 흩어지는 생각을 정리할 무렵,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어- 막내 왔어. 니가 해야 할 일이 좀 생겼다.”
귀여운 막내야. 피난민 가운데 예쁘장한 애 하나 데려가서 용병 형들에게 엉겨보련?
자고로 낚시는 허니 트랩부터 시작이란다. 이라크에서도 그랬고 아프간에서도 그랬단다. 코 꿰이는 애들은 다 그렇게 엮였지. 유 이사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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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았을 때는 3천이 훌쩍 넘었던 피난민들의 숫자는 고작 4주 만에 800명 남짓 남았다.
제일 처음 죽은 건 어린아이와 노인이었다. 호흡기나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이 급격한 환경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고, 이어서 성인 남자와 여자들이 갈려 나갔다.
처음에는 20~30대, 다음에는 40대와 50대까지. 나중에는 10대나 60대도 총을 들 수 있으면 방어선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방어선을 사수했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갑자기 미쳐버리는 사람들. 피난민이 모인 곳에 갑자기 터지는 폭력사태 이어지는 총기 난사. 수류탄 자폭 등. 안쪽에서도 끝없이 사고가 터졌다.
상황은 시시각각 악화했다.
병원 외측 방어선이 뚫리자, 방어선을 병원 안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병원 로비 방어선이 뚫렸다.
방어선이 뚫릴 때마다 사람들은 줄어들었다. 1층을 버리고 2층으로, 2층을 버리고 3층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사람들.
계속되는 압박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미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밀린 15층.
최악의 상황에서는 종족보존 본능이 커진다고 했던가? 피난민들 가운데 서로 눈이 맞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민욱도 그런 케이스였다. 막내는 이곳에서 만난 여자친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민욱아 그래서 유 이사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
“우리 살 수 있다고 하셨어?”
“···그래.”
유 이사님 말대로라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거라 했다.
탈출하느냐. 아니면 갇혀서 말라 죽느냐.
“너 친한 친구 유키 있잖아.”
“걔는 왜?”
애인의 눈빛에 의혹이 비쳤다. 막내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 특수부대가 뚫고 왔다고 하더라고.”
“진짜? 미군 특수부대? 정말이야?”
“어. 우리보고, 그 사람들 좀 도와주라고 하셨어. 유 이사님이.”
“우리가?”
“그래. 너랑, 나랑에 한두 사람 더 해서.”
“알겠어. 유키한테 말하고 올게.”
그렇게 막내를 비롯한 4명이 마루와 김 양과 만났다.
“우릴 돕겠다고?”
“예.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기이이잉-
엑소슈트가 몸을 일으켰다.
오- 오-
감탄하는 아이들에게 김 양이 말했다.
[꺼지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