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64화 (164/280)

러스트 [RUST]-164

엑소슈트가 위협적으로 일어섰다.

[돕긴 뭘 도움?]

단호한 김 양의 목소리.

[착해지고 싶음? 저기 저쪽으로 가서 착해지셈.]

그 착함이 그 착함은 아닌 것 같지만, 속에 숨겨진 살벌한 의미는 잘 전달됐다.

도와? 뭘?

동남아 마약쟁이들이랑 엮였을 때 꼭 그랬다. 돕니 어쩌니 그러면서 엉기는 것들. 그런 애들이랑 엮이면 결과가 좋지 못했다.

지금은 자료 챙기고 여력 있으면 대충 돕는 일인지라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더 괘씸했다.

‘어디서 가슴을 디밀어?’

김 양은 불만스러웠다. 엑소슈트를 입고 있었으니 자신을 남자 군인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건 이해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빴다.

백정에게 달라붙는 년들도, 그걸 바라보고 있는 찝찝하게 생긴 새끼도, 뭣도 모르고 가슴부터 디민 옆에 있는 년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엎을까?’

힐끗 마루를 쳐다본 김 양이 조용히 앉았다.

김 양의 시위가 효과 있었는지 조금은 거리를 벌린 여자들. 마루는 팔뚝에서 느껴졌던 묵직한 감촉을 애써 무시하곤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 사령관을 만나고 싶은데.”

“··· 브라운 사령관님 말씀이십니까?”

이름을 들어보니 맞았다. 국토안보국 과장이 덴 브라운이었고, 그 사람 사촌이라고 했으니.

‘아직 살아있나 보네.’

과장 이름을 대면 불필요한 오해나 마찰은 없지 싶었다. 이를테면 ‘용병 따위에게 자료를 넘겨 줄 수 없다.’ 거나 ‘이 자료는 국방부의 것이다.’ 같은 멍청한 상황.

“그래. 길버트 브라운 중령.”

“이쪽으로.”

막내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마루였다. 여자애 3명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우물쭈물 김 양의 주변을 인공위성처럼 배회했다.

마루가 보기엔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자기 나이가 많아 봐야 2~3살 더 먹었으면서 애들 잡기는.

[야. 적당히 해.]

[···알겠음.]

복도에 불이 들어온 걸 보면, 전력 공급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충전될까? 콘센트 있던데.]

[확인해 보겠음.]

[충전되면 조금이라도 해둬. 안되면 대기모드로 돌려서 전력 아끼고.]

[알겠음.]

대답은 넙죽넙죽 잘하는 김 양이었다. 뭘 빼먹은 거 같은데. 아! 유 이사! 유 이사라면 김 양의 얼굴을 알고 있겠지?

마루가 주변을 살폈다. 역시 천장 이쪽저쪽에 CCTV가 붙어 있었다. 저것으로 이쪽을 보고 있으리라.

[헬멧 벗지 말고 계속 쓰고 있어. 여기저기 CCTV 있다.]

[···밥은?]

밥은··· 먹어야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을 시간도 됐고.

[금방 다녀올 테니까, 갔다 와서 번갈아 가면서 먹자.]

[···알겠음.]

막내는 마루를 이끌고 바리케이드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막내의 경고대로 뒤따라가기 힘들었다. 침상과 잡동사니들이 천장 꼭대기까지 쌓여 미로를 만들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틈이 없는 것 같았지만, 사이사이 빠져나갈 곳이 있었다.

‘무너지지 않을까?’

손으로 슬쩍 건드려보니, 그냥 쌓아 놓은 것이 아니라 용접을 해놨다. 사람보다 덩치가 큰 변종이라면 이 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엉킬 게 분명했다.

‘엑소슈트도 지나가긴 어렵겠네’

그렇게 철근 잡동사니 미로를 지나가자 한쪽 벽이 둥그렇게 뚫려 있는 곳이 있었다. 막내가 성큼 뚫린 벽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입니다.”

여기저기 총을 들고 있는 일반인들이 보였다. 몇 명은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티가 났다.

콜록- 콜록-

작은 기침 소리마저 억누르려는 모습. 피곤과 절망에 찌든 얼굴. 생존 의지보다 쉬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 바리케이드 뒤편에 우두커니 모여있었다.

막내는 그런 사람들 사이로 마루를 인도했다. 눈에 띄는 미군은 매우 적었다.

“생존자는 얼마나 있지?”

“다 합하면 500명 정도 될 겁니다.”

일반인 300명 남짓. 미군 숫자는 확실히 모르지만 많아도 200명은 넘지 않는다고 했다.

“500명? 보급은 괜찮고?”

“보급은 넉넉합니다.”

맨 처음 구조작전을 시작했을 때 도난 병원을 보급기지로 쓸 요량이었기에 보급 물자를 빵빵하게 채워 넣었다.

1천 명 육박하는 구조대와 이후 2차례에 걸칠 추가 파병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점점 늘어나는 피난민들 생존자들 때문에 보급품이 부족할까 싶었는데, 외부 방어선이 한 번 뚫리고 나자 사망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싸우다 죽든, 미쳐 발광했든 순식간에 생존자들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식료품이나 무기, 탄약이 오히려 넉넉해졌다고.

말하면서도 쓴웃음 짓는 막내였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럼. 내가 꼭 돌려 보내줄 테니까 내 뒤만 따라와.’, ‘나만 믿으라고.’, ‘우리 모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어.’ 이딴 말이 나올 때마다 ‘굳이?’ 그랬었다.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희망 때문일까? 책임 때문일까? 이유야 어쨌든 비슷한 상황이 되고 보니 기분이 찝찝해졌다. 마루는 침묵을 선택했다.

“······.”

“······.”

그러고 보니 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마루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확실히 낯이 익었나. 어디선가 봤었나?

“영어 잘하네.”

“아닙니다. 요즘 어지간한 애들 대부분 이 정도는 해요.”

“그래? 어디 살고?”

“집이요? 한국. 서울에 삽니다.”

아닌가? 부산에서 본 것 같은데. 그러니까 김 실장이랑 이기영 과장이랑 싸웠을 때, 그때 본 것 같은데.

“한국 사람이 어쩌다가 일본에 왔어? 친척 집에 놀러?”

“직장에서 온 거라서요.”

“직장?”

“예. 월드 PMC라고 거기 취직해서. 일본 출장 왔는데. 이렇게 됐네요.”

이놈이 그놈 맞네. 부산에 있던 놈. 이기영 과장 뒤에서 찌른 새끼. 유 이사 라인으로 들어간 건가?

“바리케이드 쪽에 있는 목소리 허스키한 여자 말이야.”

“유 이사님이요?”

마루는 시치미를 뗐다.

“그 여자가 이사님?”

“예. 월드 PMC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군. 그럼 월드 PMC랑 미군 사이에 뭔가 그런 건 없고?”

“예. 저희 쪽에서 민간인 통제와 경비 쪽을 해서요. 서로 잘 맞아서 딱히 문제 있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 이사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상황이 이런데 대단하네.”

“대단하신 분입니다.”

초기 피난민들 두들겨 패서 훈련 시켜, 방어선에 밀어 넣지 않았다면 그대로 쓸려버렸을 것이다. 여자고 애새끼고 노인이고 공평하게 밀어 넣은 게 유 이사였다.

“여깁니다.”

막내가 안내해준 곳은 제일 안쪽에 있는 병실이었다.

“그럼 이야기 나누시고 나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기다리지 마. 보급품 넉넉하다고 했지?”

“예.”

“7.62mm 철갑탄 넉넉하게 챙겨주고 먹을 만한 거로 한 10인분. 아니, 15인분 동료한테 가져다줘.”

“15인분요?”

“어.”

“전투식량으로 괜찮을까요?”

“상관없어. 고기 많은 거로.”

“알겠습니다.”

“잘 부탁해.”

막내를 먼저 보낸 마루가 병실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병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병상에 반쯤 누운 사령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어서 오게. 길버트 브라운 중령이네.”

“국토안보국 소속 용병. 블라디마루 칼린입니다.”

“국토안보국 용병이라. 덴 그 녀석이 보냈나?”

“그렇습니다.”

피곤함이 쌓인 중령의 눈가에 옅게 주름이 잡혔다. 무언가 회상하듯 미미한 미소. ‘바보 녀석 쓸데없는 짓을···’ 작게 혼잣말한 중령이 마루를 바라봤다. 조금 전과는 다른 형형한 눈빛.

“뭐라고 하던가?”

“여기 있습니다.”

마루는 대답 대신 서류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 읽는 중령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아무도 도착하지 못했다는 소린가?”

특수부대가 3번이나 왔다 갔다. 근데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마루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

“그렇군.”

원본 파일을 보냈었다면 자료가 유실됐으리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탈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생각 중입니다. 일단 받으시죠.”

마루가 꺼내 놓은 것은 무전기였다.

“무전기? 작동되나?”

“언제까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4~5km 거리까지 가능합니다.”

중령의 눈빛에 희망이 감돌았다. 단독으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밖의 전진기지와 앞뒤로 호응해서 나간다면 가능성 있었다.

“자료 원본은 줄 수 없어. 이유는 알겠지?”

“상관없습니다.”

“나도 동행할 수 없네. 보시다시피 이래서 말이야.”

“······.”

확실히 저 상태의 중령을 달고 탈출하는 건 무리였다. 과장이 서운해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여의치 않으면 자료만 챙기라고 했었다. 애초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료였다.

“입이 무겁군.”

“······.”

“···입이 무거운 것도 덕목이지.”

“감사합니다.”

“엑소슈트가 있다고 들었네, 탈출 작전을 시작하면 도와줄 수 있겠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마루의 대답에 중령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작전이니 따라라.’, ‘비상시다. 까라면 까라.’,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선선히 수긍해서 묘해진 마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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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잘 끝났다.

중령은 정석적인 사람이었다. 마루를 강제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다. 500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자리였기에 그걸 핑계로라도 어떻게 할까 싶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에 정석대로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브라운’이라는 성씨를 쓰는 사람들과 궁합이 맞나? 국토안보국 과장도 그러더니.

마루는 품에 넣은 USB와 서류철을 확인했다. 제법 두툼한 서류 복사본과 연구자료가 담긴 USB였다.

“샌님과 이야기가 잘 풀렸나 보지?”

허스키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벽에 등을 대고 선 유 이사가 있었다.

“어때? 생각해 봤어?”

“···동료와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마루는 위화감을 느꼈다. 허스키했지만 나긋나긋한 말투임에도 불편한 느낌. 월드 그룹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어차피 신분 세탁했으니 다시 엮이지만 않으면 문제없을 사이었다. 선입견 때문이 아니라면, 그럼 뭣 때문에 이렇게 불편한 거지?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마루가 고개를 살짝 트는 것과 동시에 공이 치는 소리가 났다.

틱-

휘리릭- 콜트 파이슨을 한 바퀴 돌려 홀스터에 꽂은 유 이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데. 너, 감각이 죽이는데?”

‘미친년이? 돌았나?’ 지금 뭘 한 거지? 빈 총이라지만 나한테 겨눈 건가? 방아쇠를 당겼어? 마루는 순간 울컥했다. 아주 잠깐 치솟은 살기.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가 유 이사를 향했다.

그 살기를 마주한 유 이사의 눈이 커졌다. 하얀 흰자가 도드라지며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히이이이죽- 찢어진 미소. 대각선으로 그어진 얼굴의 흉터가 환희로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마루는 확 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옳지 못한 년이었다. 순식간에 갈무리되는 살기.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해진 마루였다.

그걸 느꼈는지 유 이사가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왜?”

“?”

‘왜?’ 뭔 왜?

“조금 더 해보지?”

“이런 씨발.”

참지 못한 마루가 욕을 내뱉었다. ‘썅- 이런 년이라고는 안 했잖아.’

영문 모를 김 양에게 분통을 터뜨린 마루를 향해 유 이사가 말했다. 자기에게 대놓고 욕을 박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너. 얼마나 벌어?”

“······.”

갑자기 얼마나 버느냐니? 그냥 썰어버릴까? 썰어버리면? 그 뒤엔? 여기 사람들 전부 썰어 버릴 건가? 마루는 평정심을 득했다.

“우리 회사에 괜찮은 칼잡이가 하나 있었는데, 없거든.”

“······.”

그거 나도 아는 이야기 같은데? 마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걔보다 네가 훨씬 낫다. 어때? 바로 이사, 전무 자리 꽂아주긴 힘들지만, 부장까지는 될 거 같아.”

“······.”

“생각 없어? 월드 그룹 계열사 부장인데? 월드 PMC면 이쪽 업계에서는 알아주는데 몰라? 아! 맞다. 너 미국 정보기관 그쪽이랑 엮여있다고 했었지?”

“······.”

“국토안보국 소속 용병이라고 했지? 내가 솔직히 국토안보국은 잘 모르지만, 버지니아는 좀 알거든. 근데, 버지니아나 국토안보국이나 다 거기서 거기 애들이지. 걔들 존나 씨발련들이다.”

유 이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제발 그렇게 웃지 말라고요. 눈이 안 웃고 있잖아.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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