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65화 (165/280)

러스트 [RUST]-165

김 양 주변을 배회하는 3기의 인공위성이 4기가 됐다. 마지막에 온 위성은 보급 위성.

“동료분께서 탄약과 식량을 요청하셔서 가져왔습니다.”

보급 위성이 주섬주섬 탄약과 전투식량을 꺼내놨다. 1개, 2개··· 14개, 15개. 모두 15개였다. 역시 백정. 전부 고기 요리가 메인으로 된 전투식량이었다.

김 양은 받은 총알을 적재하면서 보급 위성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어디서 봤더라.’

아!? 생각났다. 찝찝하게 생긴 얼굴이라 왜 그렇게 찝찝한가 했더니, 그놈이었다. 부산 마리나에서 갑자기 같은 편 등에 칼빵 놓고 튄 놈.

김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본인의 기억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까 월드에서 배신 때리고 샬롯으로 갔다가, 다시 통수치고 월드로 간 건가?’

이 새끼 뭐임? 먹고 살려고 그랬겠지만, 그래서 더 의심이 갔다. 혹시 엑소슈트 노리고 밥에 뭔 수작을 부리지는 않았겠지?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야.

15개. 음. 미군 식량이니까 한 개씩 덜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너희 밥은 먹었고?]

김 양은 주변을 배회하는 인공위성들을 정렬했다.

======

======

톡- 톡- 톡-

유 이사의 검지가 허벅지에 늘어진 홀스터를 톡톡 치는 소리.

마루의 신경이 유 이사의 손가락 끝에 쏠렸다. 처음 봤던 속사가 떠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총을 뽑았던 순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던 것이 떠올랐다.

틱- 공이 치는 소리 한 번? 아니었다.

마루는 그게 두 번 쏜 것임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더 예민해졌다. 그리고 유 이사는 그런 마루의 예민함이 기꺼웠는지 이야기를 계속 끌었다.

“버지니아든 뭐든 미국 정보기관 제정신 아닌 거 진짜다. 애초에 걔들 정상이 아니다. 영 아니야.”

“······.”

조금씩 팽팽해지는 긴장감.

뻑뻑해지기 시작한 감각이 장난이라는 듯 말하는 유 이사.

“진짜라니까. 보니까 걔들이랑 같이 일 한 게 얼마 안 됐나 본데. 미국 정식명칭이 뭔지 알아? 미합‘중국’이다. 키야 입에 착 붙지 않냐? 미합‘중국’! ‘신대륙의 기상.’하면 미국도 꿇리지 않는다고.”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하는데 눈은 계속 그대로였다. 그런 눈이 마루의 얼굴을 훑었다.

“그런데 말이지. 마스크는 왜 쓰고 있어? 방독 방탄 겸용인 건 알겠는데,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은 답답하지 않나?”

“······.”

마루는 생각에 빠졌다.

총을 뽑았던 속도.

0.1초나 걸렸을까?

세계 신기록은 모르겠지만 저게 신기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틱- 한 발처럼 들린 소리지만 실제로는 두 발.

실린더에 총알이 들어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을까?

첫발은 피할 수 있다. 그럼 두 번째는?

아무리 빨라도 총알보다 빠를 순 없었다.

지금 저 총엔 총알이 들어 있을까?

두 발이나 비었었는데?

벨 수 있나? 한 번에?

뒤는 생각하지 말고 벨까?

슬슬 유 이사의 입만 웃는 상판에 짜증이 난 마루였다.

“응? 이렇게 말하면 다들 알아듣던데?”

좋아. 씨발.

자료도 챙겼으니까 그냥 쓱-해버리고 뜨는 거다.

전부 까라고 해.

피하고.

방탄복을 믿고 들어간다.

“너 좀 둔감한 타입이구나? 그것도 좋지. 그래 아가. 얼굴 좀 까보련?”

계속 떠드는 유 이사.

처음은 피한다.

다음은 파고든다.

마루는 가만히 다리에 힘을 줬다.

“얼굴도 안 보여줄 건가? 진짜?”

“······.”

한다. 한다. 간다.

마루는 처음으로 직감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 이거 진짜. 유다인 성질 많이 죽었네. 아기들이 재롱떠는 것도 다 받아주고.”

“······.”

유 이사의 손이 언제부터인지 홀스터에 꽂힌 콜트 파이슨을 향하고 있었다.

시간에 금이 가고.

공간이 붕 뜬 느낌.

유 이사와 마루 두 사람이 끝없는 복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길게 늘어지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군요. 유 이사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유 이사에게 집중한 나머지 뒤에서 가까이 오는 기척을 놓친 마루였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툭- 풀려버렸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열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젠장. CCTV.’

그제야 천장에 붙은 CCTV가 떠오른 마루였다.

“브라운 사령관님께서 작전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미군의 이야기에, 혀로 입술을 날름 핥은 유 이사가 피식 웃었다.

“그래. 지금 가면 되나?”

“예. 같이 가시면 됩니다.”

마루와 유 이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 이사와 마루가 어깨를 스치듯 지나치는 순간, 마루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 장면.

칼을 뽑는 모습.

칼을 끝까지 뽑기도 전에, 머리에 향한 총구 피했다.

머리는 피했지만 동시에 쏘아진 두 번째 탄환을 피할 수 없었다.

칼을 뽑으면 늦었다.

다시.

첫걸음으로 파고들어 그대로 주먹질을···.

마찬가지로 주먹을 뻗는 것과 동시에 총알 두 방이 날아왔다.

눈 깜박할 시간에 두 발이라.

미치겠네. 처음은 피한다고 치고 두 번째가 문제였다.

방탄복 믿고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나?

그렇게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

유 이사와 마루의 어깨가 주먹 한 개 정도 공간을 두고 스쳤다.

“······.”

“······.”

부글부글 끓어올랐음에도 방탄 마스크 속 마루의 표정은 놀랍도록 담담했다.

======

======

쩝-

유 이사는 멀어지는 마루의 등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온 전신을 썰어 버릴 것만 같은 살기. 그건 진짜배기였다.

언제 휘몰아칠지 모를 칼날의 폭풍. 그 칼날 폭풍의 눈에 빠진 기분.

찰나지만 바로 옆에서 RPG가 터졌던 때가 떠올랐다. 얼굴을 가로지른 흉터가 생겼을 때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새끼도 칼잡이였었지.

쩝-

전신을 바짝 조여오는 죽음의 느낌.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의 긴장감.

죽음에 한 걸음 다가섰을 때 느꼈던 바로 그··· 전신이 갈가리 찢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 같은 압박. 깜짝 놀란 늙은 심장이 살아보겠다고 거칠게 뛰었다.

차갑게 굳어가던 녹슨 손발에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유 이사는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바짝 건조했던 손바닥이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이거였다.

변종이고 나발이고 괴물 쥐새끼니, 고양이니 전부 지랄이고. 감흥이 없었다. 이미 늙어버린 몸뚱이에 잡것들은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했다.

쪽수에 밀려 죽을 위기에 빠졌을 때도 ‘이렇게 뒈지나? 씨발.’ 이딴 느낌밖에 없었다.

근데 저건 달랐다.

저거랑 같이 싸우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았고, 저거랑 싸우는 것도 끝내줄 것 같았다. 어디서 저런 애가 툭 떨어졌나?

좆같은 인생. 여기서 어영부영 심심하게 뒈질 운명은 아니었나?

후후후후후

실실 새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 씨발 새끼 저거 주둥이에 콱 총구를 박아 넣었어야 하는 건데.

흐흐흐흐흐

아니지.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내 인생에 저런 게 마지막이면 어쩌려고

최 전무처럼 쫄아서 찐따 새끼가 되면 참지 못할 거야.

“유 이사님 좋은 일 있으십니까?”

“하아- 아-”

콱!

갑자기 쭉 뻗은 유 이사의 손이 병사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몸무게가 90~100kg 될 법한 건장한 군인이, 여자의 손에 목덜미가 틀어 잡혀 꼼짝 못 하는 이유. 힘이 강하다기보다 쥐는 악력이 셌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가는 숨통을 뜯어 버릴 것 같았기에 숨통을 잡힌 병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컥컥거리기만 했다. 이를 본 미군 두 명이 유 이사를 뜯어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손 풀어요. 손!”

“기분 좋았는데 잡쳐?”

컥- 컥- 대체 무슨 소리를?

병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짜 미친년이었나?

숨통을 움켜쥔 손을 풀기 위해 건장한 남성 둘이 달려들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무리하다가는 정말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쏴야 하나? 이사고 나발이고 전우가 죽게 생겼는데? 일단 팔다리를 쏴보자.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찰나, 유 이사가 손에 힘을 뺐다.

“진짜 오래간만에 좋았는데 잡치···냐? 하- 씨발. 됐다.”

유 이사는 ‘김 샜네···’ 중얼거리며, 목덜미를 틀어쥔 손을 풀었다.

컥- 컥- 커억-

사람 숨통 끊기 직전까지 갔던 유 이사가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 병사의 등판을 토닥토닥 두들겨줬다. 황당하다는 듯 그 모습을 쳐다보는 군인들.

흐억- 흐어억-

“옳지. 숨 쉬고.”

크허어어억-

흐으으으억-

“그래. 잘한다. 천천히.”

덩치 큰 사람을 댕댕이 다루듯 토닥이며 진정시키던 유 이사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그놈을 이렇게 토닥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우쭈쭈하면?

흐흐···

후흐흐흐흐흐.

엎드려 숨을 몰아쉬던 병사는 기괴한 표정으로 행복해하는 유 이사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글렀다. 이건 틀린 년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90살 먹은 노인네를 방어선에 밀어 넣고 터트려 버렸다는 게, 이라크고 아프간이고 동남아고 이년이 갔던 곳에서는 뒈지거나 미치거나 둘 가운데 하나만 남았다는 소문이.

======

======

바리케이드 한쪽 귀퉁이, 막내와 여자애들이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고 있는 모습과 멍하니 앉아서 애들 먹는 걸 구경하고 있는 엑소슈트가 눈에 들어왔다.

[왔음?]

끼융-하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선 엑소슈트, 콘센트에 꽂힌 전선이 길게 늘어졌다. 마루는 쓰게 웃었다.

“그 사람 원래 그러냐?”

[?]

“아니 됐다. 그건 이따 이야기하고. 쟤들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너부터 먹어라. 여기서 먹지 말고 저기 병실 빈 곳에 가서 먹어. 주변 잘 살피고.”

[옛 써-]

기분이 업된 김 양이 비상식량을 5개 챙기더니 살짝 6개째를 들었다가. 마루와 딱 눈이 마주쳤다.

헤헷- 들어 올렸던 비상식량 하나를 살며시 다시 내려놓은 김 양이 끼융끼융- 빈 침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마루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버렸다. 김 양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 정도면 그냥 정상이었다. 거기에 요즘 ‘착하게 잘하고’ 심지어 ‘귀엽게 잘하기’까지 했다.

‘귀엽게? 에이- 내가 미쳤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흔든 마루가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애들을 바라봤다. 땟국물까지는 아니어도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들. 그럼에도 확실히 예쁘장하게 생긴 애들이었다.

시선이 자꾸 한 쪽으로 가는 것을 피하려고 다시 고개를 흔드는 마루. 간호사 보잉 해킹 이후로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그쪽이 떠오르곤 했다.

바운스- 바운스-

‘쯧-’

스르르릉-

칼을 살짝 뽑아들자, 칼날이 울었다.

자기를 쓰지 왜 그냥 왔느냐면서 투덜거리는 모양. 그 울림소리를 듣자 생각이 깨끗하게 맑아지는 마루였다.

휙- 휙-

공기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삐죽삐죽 삐져나온 바리케이드 철근이 뾰족하게 잘렸다.

힉.

히끅.

쿨럭.

대충 휘두른 칼질에 철근이며 쇠파이프들이 잡초 잘리듯 썰리는 것을 본 애들이 콜록거렸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

“······.”

“그냥 휘두른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 괜찮아.”

“······.”

“······.”

“괜찮다니까 편히 먹어. 편히.”

잠깐 좀 휘둘렀다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어떻게 할까?’

엘리베이터로 왕복하는 것도 몇 번이나 괜찮지, 엘리베이터에서 계속 소리가 나면 놈들이 꼬일 게 분명했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계단으로 간다? 그러다가 공격받으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면 모를까? 패닉에 빠지기라도 할 경우, 통째로 아비규환이 될 게 분명했다.

길버트 브라운 사령관은 피난민이든 전우든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탈출하다 절반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 하나 버리고 갈 사람은 아니었다.

‘방법이···.’

그런 마루의 눈에 바닥에 팽팽하게 당겨진 전기선이 눈에 들어왔다. 콘센트에 박혀 김 양의 엑소슈트까지 연결된 전기선.

마루가 창밖을 내다봤다. 100~300m 안쪽에 듬성듬성 큰 나무들이 있었다.

‘가능할까?’

최소한 계단 타고 내려가는 것보다는 빨리 내려갈 수 있었다.

======

======

길버트 브라운 중령이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도난 병원. 탈출 작전을 시작하겠다.”

[치지직- 여기는 전진기지. 무운을 빈다.]

쿨럭- 쿨럭-

폐를 긁히는 고통에도 중령은 기적을 기도했다.

‘부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