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72화 (172/280)

러스트 [RUST]-172

눈을 뚫고 나온 3.5m의 덩치가 위압적으로 움직였다.

기이이잉-

묵직한 소음과 함께 20mm 발칸을 유 이사 일행에게 겨누는 기갑병.

“?”

“!”

아니 왜?

유 이사와 부하들은 갑작스러운 기갑병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왜 총구를 겨누는데? 같은 편인데?

조용히 간이 썰매를 끌던 병덕이가 한마디 했다.

“유 이사님. 뭔 사고 치신 거 있으십니까?”

“······.”

“······.”

“······.”

부하들의 눈이 전부 유 이사를 향했다. 부하들의 안타까운 눈빛에 썰매에 누워있던 유 이사가 버둥버둥 발작했다.

“이 개···.”

옆에 누워있던 대수가 바로 욕을 박으려는 유 이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읍-.’ 너 죽인다. 손 떼. 유 이사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뭔 나중에 죽인다고 그러십니까? 유 이사님이 안 죽여도 죽게 생겼거든요?’ 대수가 씨익 웃으며 눈빛으로 말했다.

병신 같이 웃는 대수의 입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12.7mm짜리 중돌격소총에 그렇게 두들겨 맞았으니, 가죽과 방탄복이 막아줬다고 해도 충격에 속이 속이 아닐 것이다. 피가 역류할 정도면 치료가 시급했다.

유 이사의 발작이 잠잠해지자, 민식이 발칸포를 겨누고 있는 기갑병을 향해 외쳤다.

“여긴 대한민국 월드 PMC 소속이다. 후방 교란, 지연작전 중 부상자가···.”

민식이의 말을 끊듯. 기갑병에서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미육군 특수기갑병단 소속 로제 룽 소위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통제에 따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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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중국 애들에게서 회수한 장비들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일단 12.7mm 구경의 불펍식 소총도 그렇고, 심지어 같은 12.7mm 탄을 쓰는 리볼버도 있었다.

‘이건 김 양이 좋아하겠는데?’

이렇게 무식하게 생긴 탄을 권총에 쓸 생각을 하다니, 이런 스타일은 중국 스타일이 아니라 러시아적 마인드 아니었나? ‘큰 것은 강하다.’, ‘크게 더 크게.’

어쨌든, 탄종 하나로 소총과 권총 모두 사용한다는 건 좋았다. 종류별로 들고 다닐 필요 없이 하나만 챙기면 된다는 소리였으니까.

뭐니뭐니해도 제일 큰 전리품은 광학 은신 장비였다. 지금 쓰고 있는 것보다는 성능이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은신 장비가 이렇게 넉넉하게 생겼다는 게 어딘가?

이거 망가뜨리지 않게 써느라 고생했는데 보람이 있었다.

배낭 가득 전리품을 싣고, 창밖을 보자 피난민들과 미군은 벌써 떠났는지, 전선이 걸린 나무 인근이 텅 비어있었다.

“어이. 거기는 어때?”

[-치지지직-치직-치지지-]

뭔가 대답을 하는 것 같은데 노이즈가 심해 알아들을 수 없었다. 중국놈들 전송기는 뭐지? 놈들이 어쩌고저쩌고 계속 올리는 걸 보면 이쪽으로 특화된 장비 같았다.

‘이건 후드한테 가져다주면 좋겠네.’

김 양이 좋아할 거, 후드가 관심을 둘만 한 건 있었다.

간호사가 좋아할 거라도 챙겨가야 하나?

요즘엔 무거운 전공서적 들고 다니지 않고, 노트북 하나에 전자책과 참고 자료 넣어 다닌다는 소리가 떠오른 마루였다. 이왕 챙기는 거 간호사 것도 챙겨가는 게 좋지 않겠나?

‘암호 걸려있으면 대충 하드 뜯어가지 뭐.’

가볍게 컴퓨터를 뜯기 시작하는 마루였다.

하드 뜯고 메모리 뜯고 교수 연구실인지 대기실인지 들어가서 반복. 기어 올라온 괴물 고양이도 가끔 썰면서 보람찬 시간을 보낸 마루에게 김 양의 통신이 들어왔다.

[치치칙! 치지지지!!! 치직!]

“뭐라고?”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지는 잡음. 영 소리가 뭉개져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 양은 답답했는지 아니면 위급했는지 목소리를 높여서 계속 말했다.

[!!!! 치직!!!지직!!!]

“안 들려! 안 그래도 지금 가려고 했다!”

변종에게 걸린 게 아니라면 자기 한 몸 빼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엑소슈트에 체인건 조합이니, 변종도 한두 마리 정도면 혼자 처리할 수 있었고. 다급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설마. 중국 애들이랑 붙었나?’

유 이사가 찍힌 자료를 생각해 보면 내부에 스파이가 있는 게 확실했다. 중국 스파이가 탈출 작전 정보를 유출했다면?

인공위성이나 드론도 쓸 수 없고 통신도 어려운 상황. 미군을 몰살시키고 자료 탈취하기엔 지금이 적기였다. 후위 부대에 있는 유 이사를 노리고 도난 병원까지 들어온 중국 애들인데, 원본 자료를 가진 길버트 브라운 중령을 그냥 둘까?

‘서둘러야겠군.’

한가득 짐을 든 마루가 전깃줄을 타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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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mm 발칸이 유 이사와 부하들을 노렸다.

[반복한다. 무기를 버리고 통제에 따르도록.]

병덕과 같이 썰매를 끌고 있던 상현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갑자기 무장 해제하라니. 무슨 소립니까?”

좋지 않아.

이라크에서 아프간에서 겪지 않았던가? 여차하면 증거도 증인도 없는 사건이 터지는 게 전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고. 그런데 무조건 무장 해제해라?

어떻게 봐도 좋지 않았다. 해독제 덕인지 흐리멍텅 했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몸은 아니었다. 그런 유 이사의 감각에 살기가 느껴졌다.

“엎드려!”

작은 목소리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부하들. 납작 엎드려 생긴 공간을 둔탁한 총알이 훑고 지나갔다.

두두두두둑

“씨발. 미친 새끼들이 쐈어!”

“어디야?”

“6시랑 7시.”

눈더미에서 하얀색 위장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ASh-12.7 중돌격소총을 든 자들이 유 이사 일행에게 총구를 겨누며 외쳤다.

[총 버려. 움직이면 쏜다.]

어설픈 영어.

“야. 발음 구리다. 미군 아닌 것 같아.”

미군과 통역을 담당했던 대수가 썰매 위에서 힘겹게 중얼거렸다.

미군 기갑병과 같이 있는데 미군이 아니라고?

심지어 하는 말도 개소리였다. 병덕이 그 개소리를 번역했다.

“총을 버리려면 움직여야 하는데 어쩌라고 씨발아.”

그러니까 총 버려도 움직였으니까 쏜다는 소리였다.

“중국이다. 저 새끼들이 들고 있는 총. 아까 중국 애들이 들고 있던 거랑 같다.”

유 이사의 말에 부하들의 표정이 변했다. 기갑병만 아니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미군 기갑병이라면서 중국 애들이랑 같이 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할까요. 이사님.”

민식의 말에 유 이사가 흐리게 웃었다.

“총 버리면 죽어.”

버리지 않아도 죽을 테고. 전부 생포할 생각이었으면 먼저 쏘지 않았겠지, 아마도 생포 대상자는 자신 하나뿐인 것 같았다. 유 이사는 필사적으로 사지에 힘을 줬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찔- 팔다리가 무거웠다.

“야- 갈 때는 어떻게 가자고?”

유 이사의 덤덤한 목소리에 부하들이 헛웃음 지었다.

“대수 씹새끼가 주둥이로 방정을 떨어서 그래.”

“그렇지. 대수가 개새끼지.”

“어쩌나 우리 대수 마누라 과부 되겠네.”

“좆까 병신 새끼들아. 노총각에 기러기에, 뻐꾸기 이혼 주제에.”

부하들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무기를···]

로제 룽이 최후 경고를 날리려는 순간, 쌓인 눈 더미가 무너지며 검붉은 색 기갑병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로이 스턴 소위가 조종하는 기갑병이었다.

[로제 룽 소위. 통신이 먹통인데 어딜··· 이 자들은 누구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사람들. 동양인들?

로제 룽 소위의 기갑병 옆에 서 있는, 흰색 위장복을 입고 있는 자들.

미군 위장복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 간이 썰매에 누운 여자의 얼굴. 어쩐지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그래 아프간에서 봤던 그 미친년···

[월드 유다인? 아니, 딸인가? 로제 룽 소위. 이게 무슨 상황···.]

질문이 채 끝나기 전, 유 이사 일행을 겨누고 있던 20mm 발칸의 총구가 스턴 소위를 향했다.

팅!

투콰콰콰콰콱!

놀라울 정도의 반사신경과 조종술! 스턴의 기갑병이 들고 있던 방패 끝으로 발칸포의 총구를 쳐올렸다. 바닥을 긁고 허공으로 포탄을 쏟아내는 룽의 기갑병.

두 기갑병이 충돌하는 것과 동시에, 총격전이 시작됐다. 선공은 엎드려 있던 유 이사의 부하들이었다.

“6시!”

3개의 총구가 동시에 불을 뿜자, 처음 총질했던 놈이 붉은 벌집으로 변했다.

“연막탄!”

“3. 2. 1!”

푸쉬시시식-

“하나 더!”

푸하아아악-

[죽여!]

[여자는 살려야 한다.]

[여자 맞지 않도록 해!]

[막아!]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병덕이가, 민식이 엉덩이를 발로 찼다.

“저 새끼들 유 이사님 노린다. 빨리 가.”

“여긴 우리가 맡을 테니까 대수랑 유 이사님 챙겨. 어서!”

상현이 탄창을 갈며 외쳤다.

“씨발. 빨리 가라고 새꺄!”

부하들의 말에 유 이사가 발광했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녀가 소리 질렀다.

“어딜 가? 누가 가? 이 병신들이. 읍.”

옆에 누워있던 대수가 유 이사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미친 듯이 버둥거리는 유 이사.

병덕과 상현의 얼굴을 본 민식이 고개를 끄덕이곤,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연막탄을 터트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는 민식.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수류탄!”

“3! 2! 1!”

병덕과 상현이 한 번에 2개씩 4개의 수류탄을 연막 안으로 던져 넣었다. 3초 들고 있다 던진 수류탄인지라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폭발했다.

그 폭음과 연막 사이로 민식이가 끄는 썰매가 뛰어들었다.

‘야 이 씨발 새끼야. 멈춰! 멈추라고!’

입에 재갈이 물린 유 이사가 필사적으로 콜트 파이슨을 뽑아들었다.

‘애들 버리고 가면 죽여버린다! 진짜 죽인다고 새끼야!’

부르르-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뒤에서 터졌다.

폭발 여파로 썰매가 심하게 요동쳤다.

‘상현아! 병덕아!’

힘이 빠진 유 이사의 손아귀에서 콜트 파이슨이 미끄러졌다.

‘뒈져도 같이 뒈지기로 했잖아! 씨발 놈아!’

‘멈춰! 멈추라고!’

그렇게 하얀 눈밭 위로 떨어진 코발트 색 콜트 파이슨은 주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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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대수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흐릿해지는 시야.

내장이 상했는데, 연이은 충격으로 갈비뼈가 폐를 찌른 것 같았다.

“괜찮냐?”

“크흣- 괜찮아 보이냐?”

보면 모르나? 씨발. 뒈지겠네. 곧.

중국 애들이 가지고 있던 은신 장비 속에 썰매를 숨긴 두 사람이 앞을 살폈다. 미군들이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찾는 모습.

“쟤들 믿을 수 있겠냐?”

“지랄이지.”

미군의 기갑병이 중국놈들과 함께 있었다. 나중에 들어온 붉은색 기갑병과 싸운 것으로 봐서 그쪽도 일이 복잡한 것 같았다.

“······.”

“······.”

씹새끼들 어떡하든 살 생각을 해야지, 자폭하긴···. 거대한 폭발. 전투 불능에 빠진 두 놈이 자폭했을 것이다.

“유 이사님은?”

“아주 쳐다도 안 본다. 저거 마취 언제 풀리냐? 풀리기 전에 나 튀어야겠다. 좀 멀리.”

뒈지면 쫓아오지 않겠지. 아? 지옥까지 쫓아오려나?

“야 C4 좀 줘봐.”

“왜?”

“왜긴 어차피 뒈질 거. 쟤들이랑 말 좀 해보게.”

“···야.”

“저 새끼들이 아군인지 아닌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여기까지 와서 애들 개죽음 만들 거냐? 좆같네.”

대수의 말에 민식이 폭탄을 감아줬다.

“기다려 봐. 보면 알겠지.”

피를 뚝뚝 흘리며 비척비척 미군을 향해 걸어가는 대수.

가까운 거리라서인지 무전기 마이크가 비교적 선명했다.

[정지! 손들어!]

[쿨럭!- 월드 PMC 소속 오대수다. 탈출 작전···]

대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개머리판으로 대수의 머리통을 내리쳐 쓰러뜨리는 미군. 이미 한계에 달한 대수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버둥거렸다.

그걸 본 유 이사가 발광했다.

[···예. 여기 하나 잡았습니다. 여자요? 여자는 없는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잡은 놈이 중상으로 보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주변에 흩어져 수색하던 미군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아- 여자 반드시 잡아야 한단다. 시체라도 찾기 전에는 교대 없단다.]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어떻게 찾으란 말입니까?]

[아 진짜. 똥이네. 야- 어딨어? 어디 있냐고 그 년.]

퍽- 발로 걷어차자 꿈틀거리는 대수. 피가 입에서 콱 쏟아졌다.

[이놈 곧 뒈지겠는데요?]

고개를 돌린 대수가 은신하고 있는 썰매 방향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이 새끼 웃는데요?]

[어? 손에 뭐 쥐고 있습니다.]

[폭탄이다! 쏴!]

콰아아아아아앙!

후두둑 떨어지는 잔해들. 하얀 설원이 붉게 물들었다.

펄떡이던 유 이사가 부르르 떨었다.

‘읍! 으으읍!’

하얀 흰자에서 실핏줄이 툭툭 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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