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74
흩날리는 잿빛 눈발.
붉게 타오르는 불꽃.
검은 연기가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들판을 본 마루의 평가는 간단했다.
“지랄이 풍년이네.”
촤악-
발 어림에서 삐져나온 바퀴를 세로로 예쁘게 조각낸 마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로도 아니고 세로로 쪼갰는데도 죽지 않고 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
“어이없네.”
크기도 그랬다. 바퀴 새끼들 커져도 너무 커졌다. 손바닥만 했던 것들이 지금은 팔뚝만 했으니까. 거기에 껍데기 자르는데 무슨 느낌이···. 일단 김 양과 합류하는 게 좋았다.
“근처 왔다. 너 어디야?”
[칙칙칙-치익치익치익-칙칙칙]
근거리 통신은 충분히 될 거린데.
“통신 상황이 왜 이래? 들리냐? 어디냐고?”
[칙칙칙-치익치익치이익- 칙칙칙]
일본 가면서 요트에서 겪어 봤지만, 화산 폭발 때문인 통신 장애라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이거 그냥 화산 폭발 때문에 끊기는 느낌이 아닌데?’
그러니까 지금 이건 마치 인위적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전파 교란 같은 느낌? 누가?
마루의 뇌리에 떠오르는 나라. 중국.
중국이 왜?
길버트 브라운 중령이 가진 원본 자료. 도난 병원 15층에 감춰 놓은 정보. 미군 내부의 스파이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저 개판 속에서 중국 애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칙칙칙-치이익치익치이익-칙칙칙]
완전히 뭉개진 통신이 반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반복되는 느낌.
기순이와 해상 구조 이야기를 하면서 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일본으로 가면서 마주쳤던 배들이 이쪽으로 보냈던 무선 신호들과 같은 신호.
짧게 3번, 길게 3번 다시 짧게 3번.
S···O···S···?
아니 씨발 그래서 어디냐고?
새로 파밍한 중국산 은신 장비를 장비한 마루가 나무 위로 점프했다.
계속 썰다 보면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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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슈트가 체인건을 아래로 향했다. 목표는 나무를 기어오르는 바퀴들.
투두두두두두둑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선에 있는 바퀴들의 몸통에 구멍이 뚫렸다. 문제는 구멍이 뚫렸음에도 이 새끼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
김 양은 나무와 나무를 연결한 줄을 타고 자리를 옮겼다. 휘청휘청 갑자기 로프가 요동쳤다. 뒤를 돌아보니 바퀴가 줄을 씹고 있었다.
‘로프를 끊어?’
설마 하는 생각에 줄을 걸어둔 곳을 살펴보니, 나무에 올라간 바퀴들이 걸어 놓은 로프를 갉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걸어 놓은 밧줄의 목적을 알고 있다?’
기갑병이 덩치와 힘으로 쌓인 눈을 뚫고 기동하는 게 가능했다면, 엑소슈트는 그렇지 않았다. 2m 남짓한 크기에 사람보다야 월등히 강하지만, 쌓인 눈더미를 뚫고 움직이기엔 출력이 부족한 게 사실.
김 양과 엑소슈트 그리고 체인건과 탄약을 합한 무게는 170~180kg 가량, 쌓인 눈 위를 사뿐사뿐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푹푹 빠지는 눈밭을 이동할 수 없기에,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밧줄로 연결해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걸 바퀴들이 차단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바퀴들이 로프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저러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바퀴가 생각을? 김 양은 끔찍한 생각을 털어냈다.
바퀴를 죽일 방법은 많았다. 화산 폭발이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계속 갈 것도 아니고 화산재와 연기가 가라앉아, 폭격기만 떠도 죽이는 건 쉬웠다. 살충제를 살포해도 됐고 여차하면 네이팜 뿌려서 모조리 태우면 그만이었다.
땅속으로 피한다고? 핵폭탄도 있었고 중성자탄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생존자들이 있다면 같이 갈아버린다는 게 문제였지.
‘근데 쟤들, 진짜 똑똑해진 걸까?’
그렇다고 보기엔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대체로 이성과 공포는 맞물려있는 법이었다. 바퀴벌레들이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 정도로 똑똑해졌다면, 맨 앞에 있는 몇 마리만 죽여버리면 나머지는 도망칠 텐데,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니 이상했다.
“새우 새끼들이 지랄해봐야 타이거 새우지.”
앞에 킹이 붙은 퀸이 붙든 새우는 새우. 똑똑해 져도 새우고, 몰려다녀도 새우였다.
김 양은 잔탄을 확인했다. 350발 남짓. 거기에 과격한 기동을 많이 한지라, 배터리도 순식간에 닳고 있었다.
백정은 언제 오는 거야. 위치추적기 가지고 다니라고 해서 가지고 다녔는데. 설마 그거 까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디트로이트에서 위치추적기 가지고 다니라고 자기가 실컷 뭐라고 해놓고는.
김 양은 무전기를 틀었다. 헤드업디스플레이에 경고가 떴다. 현재 전파 교란을 받고 있다는 경고.
무전기 전원을 짧게 3번 넣고 끊기를 반복했다. 다음에는 길게 3번 넣고 끊고 다시 짧게 3번. 이렇게 하면 잡음만 받더라도 잡음 그 자체가 모스부호로 들리겠지. 이거 못 알아먹으려나? 알아먹겠지?
삑-삑-삑-
붉은 점이 한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이어서 불꽃이 뿜어지고, 바퀴벌레의 포위망을 뚫은 일련의 병사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지원을 요청하려고?’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부상병, 민간인들 다 떼고 정예만 모아서 최단거리로 뛴다면, 전진기지에서 이곳까지는 10~15분 안짝이었으니까.
‘근데. 쟤들 가는 방향이 이상한데?’
전진기지 방향이 아니었다. 김 양은 헤드업디스플레이에 지형도를 띄워 확인했다. 확인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뭐지 쟤들?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데?’
그것도 이상한데 또 묘한 부분이 있었다. 병사들이 들것으로 사람을 옮기고 있는 모습. 민간인, 부상병을 떼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고 달린다고? 카메라로 확대해 보자, 길버트 브라운 중령이 보였다.
어쩐지 더러운 기분이 든 김 양이었다. 찝찝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기분. 그저 더럽게 찝찝했다.
미친 새우 새끼들도 그렇고, 전파 방해도 그랬다. 이상한 곳으로 가는 애들이나, 길버트 브라
운 중령을 싣고 가는 것 모조리 전부. 그리고 김 양은 찝찝한 걸 그냥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파악- 작살총이 나무를 뀄다. 이어진 로프를 타고 엑소슈트가 이동했다. 길버트 브라운 중령을 끌고 탈출한 병사들이 도망친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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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브라운 중령이 힘없이 말했다.
“쿨럭- 어디로 가는 건가?”
민간인들을 버리고, 전우들을 버리고 가는 것들이 미 해병대라고? 모두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이렇게 도망치는 것들이 자신의 부하들이라는 사실이 참혹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상관을 살리려고 했다는 명분을 들이민다고 하더라도 이건 명령 불복종에 납치가 아닌가? 심지어 도망치면서 내 핑계를 댄다고?
“안전한 곳으로 갑니다.”
안전? 안전한 곳? 지옥이 된 일본에서 안전한 곳이 있던가? 반쯤 요새화한 도난 병원도 결국엔 무너졌다.
“안전? 쿨럭- 거기가 어딘가?”
“금방 도착합니다.”
금방 도착해? 도난 병원 인근에 안전한 곳이 있단 말인가? 그런 곳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적 없었다.
대답도 이상했다. 전진기지에 합류한다는 게 아니라 안전한 곳이라니. 길버트 브라운 중령의 주변을 살폈다. 절반 이상이 아시아계 병사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유독 아시아계 병사들의 생존율이 높았다. 위력정찰을 나갔다가 소대가 몰살되는 사고가 났어도 생존자들은 아시아계인 경우가 많았다. 동아시아 일본에서 펼치는 작전이었기에 아시아계 비중을 높였는데, 그걸 고려하더라도 이상한 일이었다.
“정지!”
선행하던 병사가 팔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브라운 중령이 몸을 반쯤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안전한 곳이라고? 이곳이?
무너진 빌딩 잔해들이 오목한 호리병 형태의 지형을 만들고 있었다. 안전하기는커녕 매복하고 있으면 몰살당할 지형이었다.
이라크에서 겪은 일이 떠올랐다. 좁은 입구, 넓은 공터 양옆을 빙 두른 건물들. 그리고 앞을 가로막은 건물. 지금과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 옆으로 쓰러진 빌딩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빌딩 창문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들. 하얀색 위장복을 입은 자들이 창밖으로 총을 내밀었다. 빨간 레이저 포인트가 후미에 있는 대원들의 전신에 알알이 박혔다.
“무기 버려.”
길버트 브라운 중령의 옆에 있던 부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선두에 대원들이 뒤로 돌며, 후미에 있는 대원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
“!!!”
길버트 브라운 중령을 중심으로 앞에 있는 자들과 뒤에 있는 자들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 상황.
“다들 무기 버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길버트 중령이 소리쳤다.
“쿨럭! 쿨럭!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중령님. 아시지 않습니까?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이라크에서도 그러시더니, 여기서도 그러실 겁니까? 부하들 이렇게 개죽음시킬 겁니까?”
민간인 구조하겠다는 똥고집으로 부하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더니, 지금도 그럴 겁니까? 부관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공간이 일렁이며 부관의 옆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군복을 입은 자가 나타났다.
[다 죽이나?]
“아니. 생포해 가면 좋지. 샘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말이야.”
중국어? 이 새끼들이. 길버트 브라운 중령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 새끼들이 배신을! 미합중국 해병대는 결코! 결단코 항복하지 않는다!”
투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창문으로 총을 내밀었던 흰옷이 붉게 변했다. 부관도 중령도 ‘어?’ 하는 표정이 됐다.
투가가가가가각!
순식간에 창문에 있던 자들이 벌집으로 변했다. 해병대를 겨눴던 레이저 포인트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그 틈을 타. 브라운 중령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공격! 미 해병대는 죽음으로 승리한다!”
“후아!”
“이 미친 새끼들이! 쏴! 중령을 확보해! 어서!”
동시에 총격이 시작됐다. 조금 전까지 전우였던 자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병사들. 도난 병원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서로 목숨을 구해줬던 자들이, 이제는 서로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총탄을 흩뿌렸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양측 전열. 브라운 중령이 누워있는 침상을 중심으로 공터가 생겼다. 서로 중령을 데려가기 위해 점차 교전이 치열해졌다.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길버트 브라운 중령은 가만히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중국 놈들이라면 노리는 건 자료일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원본 자료. 불태우는 것이 제일 확실했지만, 수류탄으로 날려버려도 수습하긴 힘들 것이다.
앙상한 중령의 손이 수류탄 안전핀으로 향하는 순간, 일렁이는 공간이 중령의 팔을 걷어찼다. 콰득! 팔이 부러지며 수류탄이 한쪽으로 굴러떨어졌다.
“크으- 쿨럭! 빌어먹을!”
[쓸데없는 짓을!]
공간에서 쑥 나온 팔이 중령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올렸다.
투카카카카칵!
7.62mm 체인건이 일렁이는 허공을 긁고 지나갔다. 파지직- 허공이 찢어지며 시체가 널브러졌다.
[3시! 엑소슈트!]
[엑소슈트다!]
빌딩에 숨어있던 하얀 위장복들이 3시 방향에 있는 엑소슈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집중되는 공격. 김 양은 제법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 앞으로 남은 가스 잔량은 2회. 추락하던 엑소슈트가 가스를 내뿜으며 착지 충격을 감쇄했다.
푸화하하학
바닥에 쌓인 눈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연막탄과 같은 효과를 냈다. 그사이 김 양의 엑소슈트가 몸을 감췄다.
[쏴!]
[공격!]
적들의 공격이 김 양의 엑소슈트를 향해 집중되는 동안, 후미의 해병대원들은 목숨을 던져 기어코 길버트 브라운 중령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중령님. 괜찮으십니까?”
“쿨럭- 쿨럭-”
피 섞인 기침만 내뱉은 중령이었다.
“위생병! 중령님을!”
“퇴각한다! 퇴로 확보해!”
해병대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김 양에게 습격받은 적들은 둘로 나뉘었다.
[막아!]
[중령을 잡아!]
[모조리 죽여!]
[엑소슈트는 어디야?]
김 양은 내가 왜 이랬을까 후회했다.
착하게 잘하려고 했을 뿐인데, 생각하고 쐈을 뿐인데, 이거 잘못 엮인 느낌이었다.
백정이 길머시기 중령을 살려서 데려가면 국토안보국 과장이 좋아할 거라고, 두둑하게 뜯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끼어들기는 했는데. 이것들이 만만하지 않았다.
놈들이 쓰는 탄환은 7.62mm 철갑탄이 주종이었다. 그것까지는 엑소슈트 방어력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12.7mm짜리로 보이는 탄이 문제였다. 한 방 스쳤는데도 덜덜 떨렸다. 제대로 맞았다면 팔이 부러지든 날아가든 했을 것이다.
두두둑! 파파박!
그래 저 새끼가 쏘는 총. 저거.
두두둑!
넌 뭔데 12.7mm를 기관단총처럼 쏴대니. 엑소슈트 입고 있는 나도 7.62mm 쓰고 있는데.
‘저 새끼 죽인다.’
김 양이 12.7mm ASh 중돌격소총을 쏴대는 놈에게 정신 팔린 사이, 일렁이는 공간 속 대전차 미사일을 든 적이 엑소슈트를 포착했다.
그리고 김 양의 헤드업디스플레이에서 높은 경고음이 터졌다.
삐-삐이이이익!
미사일이 겨눠졌다는 경고음과 함께 대전차 미사일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데굴데굴 굴러 피해 보려고 했지만, 대전차 미사일이 휘어지면서 따라오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아?!’
피할 수 없다.
미사일의 탄두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어째서···
그래도.
그래도.
정말···. 백정 씹새끼···
일렁-
검은 실선이 쭉 그어졌다.
????????????????
날아오던 대전차 미사일 절반으로 잘리며 유폭됐다.
쾅! 퍽!
“야. 뭐해? 안 일어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