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77
노인. 가다마 신타는 칼을 겨눴다.
“네놈···. 뭐하는 놈이냐?”
스르르르릉
마루도 서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검은색 칼날이 드러나자, 그렇지 않아도 풀풀 풍기던 살기가 짙어졌다.
‘이놈이?!’
가다마 신타 자신도 검에 피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이놈은 피를 묻히는 그런 놈이 아니었다.
다양한 살기를 겪어 봤기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사람이 풍길 수 있는 살기가 아니었다. 저 검은 칼날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었을까?
“인두겁을 쓴 오니(괴물)구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가면 뒤에서 흘러나왔다.
“오니는 지랄. 멀쩡한 사람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노인장. 중국 새끼들이랑 어떤 관계인데 약속 찾고 그러나?”
“네놈은 뭐냐? 네놈이 그걸 왜 가지고 있어!”
노인의 발작에 마루가 어깨를 으쓱했다. 중국 은신 장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그나저나 말 돌리지 말고. 노인장은 중국 애들이 바글바글 넘치는 이유를 아는 것 같은데? 그 이야기나 해보시지?”
칠흑같이 새까만 칼날이 까닥까닥 흔들렸다.
‘어서와.’ ‘쫄려?’, ‘아님. 들어오든가.’하는 것처럼 칼끝이 움직였다.
노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 경망스러운 칼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놈은 근본 없는 놈이었다. 검술의 목적이 살인에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가 있는 법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일대일로 마주한 적에게는 더욱 그랬다. 각자의 생명을 걸고 검을 나누는 적이기에 오히려 예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을 지켜볼 사람이 상대방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저놈은 그런 게 없었다. 일말의 주저함도, 조금의 존중도, 목숨을 건 진지함도 없었다. 마치 백정과도 같은 분위기. 다음에 도축할 짐승에게 까딱거리는 듯한 몸짓.
노인은 불쾌했다. 놈의 행동 하나하나가.
“근본 없는 놈. 네놈은 그냥 살귀일 뿐. 검객이 아니다.”
“···할아범. 치매야? 좀 전에는 오니라며?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왜 엉뚱한 소리를 하시고 그래. 중국 애들이 넘치는 이유가 뭐지?”
마루의 질문에 중단자세를 취하는 노인이었다.
“할아버지!”
전투태세를 취하는 노인의 모습에 한쪽으로 피해있던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외쳐댔다. 잘해야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애들이 올망졸망 보고 있었다.
“할아범. 미리 말해두겠는데. 난 살살하는 데 서툴러, 그러니까 애들 보는 데서 할아범 토막 내고 싶지 않다고.”
“······.”
마루의 경고에도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는 노인이었다.
“할아범이 다짜고짜 칼을 뽑아 들고 그래서 말이지, 좀 울컥한 김에 중국 애들 이야기를 좀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내가 꼭 알아야 할 건 아닌 것 같거든? 할아범 힘이 넘치면 아꼈다가 바퀴벌레에게 쏟는 게 어때?”
할아범만 있으면 모를까 애들 보는 데서 노인 평화나, 노인 안식은 좀 아닌 것 같았다.
“네놈의 칼에선 피 냄새가 진동한다.”
“······.”
노인의 대꾸에 마루는 어이없었다. 이것저것 썰어댄 칼에서 피 냄새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할아범 칼에서는 꽃향기가 풍기나?
마루가 그러거나 말거나 슬며시 공격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치는 노인.
“아이들을 위해서도. 앞으로 도래할 혼란의 시대에 네놈 같은 살귀가 돌아다니게 둘 수 없다.”
“아니··· 씨발. 이해가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애들을 위해서라면 바퀴나 썰라니까요.”
슬슬 짜증이 돌기 시작하는 마루였다. 그러니까 최 전무 아재도 비슷한 과였다. 근본 찾고 뭘 찾고 그러다가 가셨었지.
검도 좀 오래 했다는 인간을 만나면 이러는 것 같은데, 내 칼질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이 노인은 왜 이러는 거지?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지금. 이곳에서 네놈을 베겠다!”
“미치겠네. 진짜.”
대뜸 자기가 먼저 칼 뽑지 않나, 갑자기 오니니 살귀니 드립하더니, 이제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베겠다? 마루는 진지하게 노인이 치매가 아닐지 생각했다.
“어이. 애들아 너희 할아버지 혹시 치매냐?”
“······.”
“······.”
아이들이 마루를 마왕처럼 보고 있었다. 비장한 눈빛으로 영웅 할아버지를 응원하는 아이들.
중학생 정도면 충분히 사리분별 할 수 있는 나이 아니었던가? 아니, 너희 할아버지가 갑자기 멀쩡한 사람을 살귀니 괴물이니 하면서 죽이겠다는데 구경해? 단체로 미친 건가?
“너희들 뭐 하고 있어? 단체로 미친 거니? 아니면 집안 대대로 지능 쪽에 문제 있거나? 할아버지 안 말려?”
“······.”
“······.”
마루의 어이없음에 노인이 답했다.
“야마츠키류 9단, 가다마 신타다. 네놈! 당당히 얼굴을 보여라!”
하-
‘애새끼들이고 미친 노인네고. 말이 안 통하네.’
됐다. 꺼져라.
짙은 살기가 마루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살기에 접한 노인이 처음 떠올린 것은 죽음이었다.
죽는다.
그것이 노인이 느낀 것이었다.
평가나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해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놈의 살기는 단순한 죽음 그 자체였다.
검도 9단. 검을 든지 어언 65년. 5살 고사리손에 쥐었던 목검의 감촉이 10살 무렵 초등부 검도대회 우승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도내 최강, 전국 최강이었던 그가 중등부 개인전 준우승으로 3년간 분루를 삼켰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고등부 개인전 우승으로 3년의 숙적을 꺾고 대학부에서부터는 명실상부 관동지역 최강의 검객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
음지에서는 가문의 검으로, 가문의 무력을 담당한 기다마 신타였다. 중국 광동과 대만, 동남아로 가문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화교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중국 남방 군부와 손을 잡기 위해 손녀를 시집보낼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기다마 가문의 비상을 위해. 영속을 위해. 그리고 그 끝에는 가문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그런데···. 가문의 복수를 이루기도 전에 죽음이 먼저 와버렸다. 인간의 형상을 한 죽음이 그의 앞에 있었다.
본래는 놈의 공격을 카운터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농밀한 살기를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선공해야 하나?’
후발선제를 노렸지만, 바꿔야 하나?
그 짧은 선택의 순간, 놈의 살기가 사방으로 뻗기 시작했다. 살기에 노출된 아이들이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아이들. 애들이 위험했다.
“네놈! 멈춰라!”
죽음의 공포를 떨치려고 외친 기합!
끼요오오오옷!!!
노인은 자신의 일평생을 끌어 모든 일격을 살귀에게 던졌다.
오싹!
60년이 넘게 축적된 경험이 미친 듯이 경고했다.
죽는다. 아무리 빨라도 죽는다는 경고를 노인은 무시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동귀어진.
칼을 놓치지 않게. 몸이 잘리더라도 팔이 떨어지더라도 네놈과 함께 간다!
그 필사의 일격에 마루는 한 손으로 칼을 흩뿌렸다.
휙- 검은 실선이 그어지고
스꺼껑-
?????
▬▬▬▬▬▬▬▬▬▬▬▬▬▬▬▬▬▬
!!!!!
잘려나간 칼이 하나··· 그리고 둘···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 떨어졌다.
푹- 폭-
깨끗하게 잘린 노인의 검.
노인의 옆에 길게 잘린 검을 들고 있는 여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듯 툭 튀어나온 여자를 보곤 깜짝 놀란 노인이 외쳤다.
“키리코! 애들 데리고 피해!”
======
======
그만 귀찮게 하고 꺼지라는 뜻으로 살기를 풀었더니, 더 발작하는 노인이었다.
끼요오오오오옷!
미친 기합소리와 함께 노인이 달려들었다.
칼밥 오래 먹은 솜씨라는 게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근데 그냥 일격이 아니라 동귀어진이었다.
‘동귀어진?’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아 몰라 씨발. 뒈지든지 말든지.
대충 칼질한 마루였다.
휙-
칼질과 동시에 느껴지는 감각. 아주 빠르게 접근한 여자가 칼질 궤도에 끼어들었다. 살짝 비껴내려는 압력을 무시하고 그대로 썰어버리는 칠흑빛 칼날이, 앞을 가로막은 두 개의 장애물을 잘라냈다.
‘어쭈?’
방금 끼어든 여자. 상당히 빨랐다.
약물인가? 버서커 폴이나, 크리스털을 쓴 건가?
‘눈은···.’
약 빤 특유의 붉은색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럼 이 년은 뭐지? 이상한데? 대충 휘둘렀다고 하지만 칼질의 궤도를 바꿔? 유 이사 같은 건가?
“키리코! 애들 데리고 피해!”
노인의 말을 들은 여자는 못 들은 척, 마루를 경계하며 말했다.
“미야코. 할아버지 모셔.”
“언니는?”
“금방 뒤따라 갈 테니까. 할아버지 챙겨.”
“알았어. 빨리 와.”
‘놔라. 미야코. 네 언니가. 네 언니가 위험하다. 오니야. 오니란 말이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란 말이다!’
‘차라리 내가. 내가 막아야 한다. 놔라!’
‘지금이다. 지금 저걸 베어야 해. 더 늦기 전에 베어야 한다! 지금이란 말이다!’
할아범이 처절하게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기절한 애들과 할아범을 챙긴 여동생이 멀리 떨어지자, 키리코라 불린 여자가 겨누고 있던 잘린 칼을 내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가다마 키리코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폐가 많았습니다.”
하?
마루가 헛웃음 지었다.
======
======
사령관이 존 스미스를 보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게 정말인가?”
“이 상황에서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믿지. 월드 PMC 유 이사가 젊어졌다니. 오리엔트 판타지 소설에 빠져서 제정신이 아닌 건가?
“제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여기 이걸 보시죠.”
존 스미스가 내려놓은 전송기. 검붉은 피딱지가 여기저기 튄 화면을 아랑곳하지 않고 만지작거리자, 사진이 떠올랐다. 30대 후반으로 볼 법한 여자의 얼굴. 사령관도 면식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저 얼굴이 노화의 비밀이니, 영생이니 이딴 소리를 할 얼굴인가? 동양인들 어려보이는 건 알고 있잖나? 30대 후반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40대 50대일 수도 있다는 거 말이야.”
“다음을 보시죠.”
화면 속 얼굴이 변했다. 이건 누가 봐도. 젊어졌다. 얼굴에 생기가 조금 전 사진과 전혀 달랐다. 마치 계절이 가을에서 여름이 된 것만 같은 변화.
“이··· 무슨.”
“계속 보시죠.”
계절이 변했다. 가을에서 늦여름으로, 늦여름이 한여름으로, 그리고 마치 초봄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느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떻게? 컴퓨터 그래픽인가? 보정작업?
혼란스러운 사령관을 감상하듯 지켜본 존 스미스가. 휴대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작동시켰다.
[···쿨럭···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피난민들 가운데 몇 명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쳤지···.]
길버트 브라운 중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뭔가?”
“길버트 브라운 중령과 대화한 걸 녹음한 겁니다. 계속 들어보시죠.”
[유 이사처럼 젊어진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었네.]
[그렇군요. 대단한 활약을 했다는 건. 힘이 세지고 초인 같은 힘을 발휘한 자들이 나왔다는 건가요?]
[···쿨럭 ···쿨럭. 그래. 그들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자네도 보지 않았나? 변종과 그 괴물 고양이들을···.]
남은 분량이 제법 많았음에도 존 스미스가 냉큼 휴대폰을 정지시켰다.
“그래서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됐습니다.”
“······.”
“서류에서 보셨다시피, 일본이 중국과 협력한 정황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에도 배신자들이 있다는 게 밝혀졌고요.”
“······.”
“대재난 이후, 지옥 같은 일본에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변이든, 진화든 무엇인가 변화한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지금까지 제가 찾은 정보입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일본과 연결고리가 있던 중국이 이런 정보를 먼저 알고 특수부대를 밀어 넣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사람들을 포획하기 위해서겠군.”
존 스미스의 안경 너머, 광기 어린 파란 눈이 빛났다.
“진화한 자들만 노릴까요? 중요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포섭하려고 할 겁니다. 이미 제법 많은 사람을 중국으로 데려갔더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전진기지 그린필드 대령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
“다른 자들은 놓쳐도 됩니다. 하지만 절대 말입니다. 절대. 유 이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머리카락 한 톨. 피 한 방울. 전부. 우리 합중국이 가져야만 합니다.”
놈들이 어떤 계획을 세웠든 무슨 짓을 하든. 승리하는 것은 우리 합중국이어야만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