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82
산등성이 아래 눈이 쌓인 곳에 죽순처럼 솟은 건물들이 있었다.
도쿄와 인근 건물들은 반파된 것이 많았는데, 북쪽으로 한참 올라온 저곳에 보이는 빌딩들은 마루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멀쩡해 보이는데?’
“도시다!”
“빌딩이야!”
도쿄와 인근 폐허만 봤던 피난민들은 오랜만에 무너지지 않은 문명을 보고 흥분했다. 지휘관은 팝콘 튀듯 톡톡 튀어 오르는 피난민들을 단속 했다.
“진정시켜.”
“괴수가 있을지 모릅니다.”
“다들 자리를 지키세요.”
어눌한 일본어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해병대였다. 하지만 아직 무너지지 않은 ‘일본의 문명’ 본 일본인들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개인주의적이고 유순하며 조용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인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피난민들은 집단적으로 과격했고 충동적이었다.
탕!
지휘관이 허공에 총질하고 나서야 진정되는 분위기. 그나마도 불만이 가득 쌓여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먼저 정찰대부터 파견하도록 합니다.”
지휘관은 마루와 김 양을 바라봤다. 휙- 김 양은 바로 대놓고 고개를 돌려버렸고. 마루는 슬쩍 어깨에 걸친 은신 장비를 토닥였다. 알아서 몰래 가겠다는 신호.
마루의 신호를 알아먹은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곤, 능력자 2명과 해병대 3명을 묶어 만든 정찰조를 도시로 보냈다.
“정찰이 끝날 때까지 우회해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피난민들을 바로 앞에 떨어진 간식을 보고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은 강아지처럼, 도시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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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조에 함께 하실 지원자 받겠습니다. 2명입니다.’
35명의 능력자 가운데 2명의 지원자를 뽑는다고 했을 때, 가다마 키리코는 제일 처음 손을 들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한 분 더 없으십니까?”
“······.”
“······.”
나머지 1명은 나오지 않아 제비를 뽑았다. 그렇게 뽑힌 사람은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었다.
“칼 좀 쓰던 걸요.”
키리코를 보고 히죽 웃는 모습이 중학생이라기보다는 닳고 낡은 폐품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의 위아래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는 모습.
그런 노골적인 시선에도 키리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변태들이야 넘치고도 넘쳤었다.
그녀가 가다마 가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로, 울면서 용서해 달라고, 직장에서 잘리지 않게 해달라고,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어린 것이 이렇게 나오는 건 참신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세상이 변한 뒤로는 남자고 여자고 서로 조심해야 했다. 말 그대로 눈 한 번 잘못 마주쳤다가 뒈지는 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젖비린내나는 애새끼가 이러고도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건, 그만큼 괜찮은 능력이 있다는 소리였다. 키리코는 그 점에 주목했다. 어쩌면 쓸모 있는 말을 하나 건질지 몰랐다.
키리코의 입이 호선을 그리자, 수국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분위기가 풀어졌다. 하얀 꽃망울이 부끄럽고도 화사하게 벌어지는 느낌. 정찰조에 합류한 해병대원 3명도 헤벌쭉 굳게 다물었던 입이 풀어졌다.
“와아- 죽이네요. 진짜.”
중학생이 대놓고 키리코를 품평했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지,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이면서 츄릅츄릅 해대는 모습.
도를 넘어선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진 해병대 한 병이 중학생에게 경고했다.
“어이 꼬마. 주둥이 조심해라.”
“니가 뭔 데? 양키 고 홈.”
“하하하 이 새끼가.”
“히히히- 뒈지고 싶으셔?”
과도를 역수로 쥐고 부들부들 떠는 중학생에게 키리코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세요. 지금 우리는 한 팀이 아닌가요? 다들 기다리니, 어서 가지요.”
요조숙녀와 같은 모습의 키리코를 본, 중학생이 역수로 쥔 과도를 품에 넣으며 해병들을 향해 중지를 빳빳하게 세웠다.
그 도발에 해병들은 어이가 없었다. 대가리가 돌았나? 중지를 분질러 버리면 꽥꽥 돼지처럼 울부짖을 녀석이···.
하지만 해병대원들은 막장에 막장으로 대응할 정도로 썩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생긴다면 저 싹수없는 애새끼는 없는 새끼인 셈하리라, 해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살짝 일그러진 공간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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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수색대의 뒤를 밟았다.
‘묘하네.’
칼든 여자. 그러니까 가다마 키리코라는 여자가 묘했다. 예의 바르고 개념 있는 여자 같은 느낌이었는데, 요조숙녀 같았다가 지금은 자연스럽게 여왕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지 헤헤헤 세세세 하기에 바빴다.
확연히 눈에 띄는 미인에, 저렇게 팔색조처럼 이미지가 변하는 여자를 남자들이 그냥 둘까? 완전히 개판이 된 지금? 그런데도 저렇다는 건 뭔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 옆에 바싹 붙어서 침을 질질 흘리는 저 꼬맹이도 그렇고. 얼굴이 삭았다고 해야 하나, 풍파를 다 맞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좀 안타까운 녀석이 노골적으로 여자에게 추파를 보냈지만,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저런 놈들은 대체로 인내심이 바닥인데. 이상하네.’
짐승 조련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묘한 여자였다.
‘딱히 감각이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특히 뒤가 없어 보이는 중학생이 신경 쓰였다. 능력이 뭘까?
제대로 된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이프나 회칼도 아니고 과도하나 달랑 들고 냅다 들이받다니. 신체능력 향상만 믿고 군인에게 개긴 건가?
괴물 고양이에게 고전해서 그렇지, 총이 약한 무기가 아니었다. 6.8mm 신형 소총은 파괴력과 저지력이 훌륭했다. 그런 총화기로 무장한 군인에게 대놓고 칼을 뽑아?
‘신기한 놈이네. 목숨은 그냥 버린 건가?“
그렇게 삐걱대는 정찰조는 그냥 화기애매했다. 동아리 야외활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도시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이면에는 여자가 있었다.
키리코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해병대들은 앞장섰고, 중학생은 이제 중학교 졸업이고 다 큰 고등학생이라면서 성숙(?)했음을 강조했다. 그게 정찰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쇼. 시야가 확 트여있어서 기습당할 일은 없습니다.”
해병대원 하나가 키리코의 말을 냉큼 받았다.
어쩐지 반쯤은 둥실 떠오른 분위기 속에서 도시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렇게 하얀 눈에 묻힌 건물 숲이 정찰대 앞에 펼쳐졌다.
“이쪽도 깨끗합니다.”
“주변에 흔적이 없군요.”
“칫- 눈깔이 멀쩡하면 다 아는 이야길 뭘.”
갈등이 커질까 싶은 상황에서 키리코가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저기 큰 지붕이 역 건물 같은데, 저기까지 가서도 아무것도 없으면 흩어져서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다른 흔적이 없다면야.”
“그렇게 하죠.”
“퉤- 좋아.”
도심지 안쪽으로 들어갔음에도 여타 생명체의 흔적이 없었다. 쌓인 눈밭은 아무도 거치지 않은 하얀색 그대로였다.
6m 넘는 높이까지 쌓인 눈 탓에, 단독주택들은 지붕 조금을 남기고 전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집들은 확인해 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저기 저 빌딩 하나만 확인해 보죠.”
“각자 찢어지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혼자 움직이는 게 좋으면 먼저 가라.”
“예이- 예이- 쫄보 새끼들. 퉤-”
중학생이 먼저 성큼성큼 한 방향으로 나갔다. 키리코는 중학생이 움직인 곳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 이쪽을 살펴보겠습니다.”
“아-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살짝 들어 보이곤 미소 짓는 키리코였다. 그녀가 괴수와 맞서는 것을 봤던 해병대원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예. 조심하시고.”
“이상하면 바로 신호 보내십쇼.”
“······.”
해병대원들은 3인 1조로 전환해 빌딩으로 들어갔다.
‘어이없네.’
상황을 그늘에서 지켜본 마루는 황당했다. 같이 다니라고 5명 묶었더니 3조각으로 흩어져? 해병대야 그렇다고 치지만, 중학생과 여자는 뭔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다들 저런 식이면 좋지 않겠는데.’
괴수들의 습격을 잘 막아낸 것이, 피난민들에게 과도한 자신감을 심어 준 것 같았다. 군대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잘 막을 수 있다? 이딴 생각.
괴수들 시체를 보니까 총이 아니네? 날붙이네? 그러니까 군인이 아니라 우리 중 누군가가, 괴수를 죽였을 것이다.
옆에서 같이 싸워보니까 총으로는 제대로 죽이지도 못하던데. 능력자들이 더 센 데? 그런 생각. 중학생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런 것 같았다.
‘복잡해지겠네. 여러모로.’
피난민들의 목소리가 커질 게 분명했다.
‘근처에서 제일 큰 건물을 확인해 보는 게 낫겠어.’
도난 병원을 떠올려 보자면, 괴물이든 생존자든 큰 빌딩에 모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마루는 해병대가 수색하러 들어간 작은 빌딩에서 좀 떨어진 주변에서 제일 큰 빌딩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깨고 들어가는 대신, 눈을 파고 1층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기에, 조용히 빌딩 1층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층 유리창이 전부 멀쩡했다. 금이 간 곳도 없었고, 딱히 파손된 곳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상등이 꺼져있는 것을 보면, 비상 발전기나 배터리도 전부 소모된 뒤라고 봐야 했다.
전술라이트가 어두운 로비를 훑었다. 깨끗한 바닥. 사방을 한 번 훑은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도관이 얼어서 나오지 않는 건지, 수도가 끊긴 건지 알 수 없지만, 수도 역시 아웃이라는 의미.
‘생존자는 없는 건가?’
23층 높이의 빌딩을 1시간 넘게 살폈지만,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 책상들. 일하다 급하게 도망친 것이 아닌, 정리 정돈을 한 책상들을 보자면, 위화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결국, 마루는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고야 말았다. 탁 트인 정경 한쪽으로 붉은색과 푸른색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긴급] [생존자 발견]
여자가 간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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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 났군.”
[귀찮음.]
역과 연결된 대형 복합쇼핑센터 안에는 사람들이 복작거렸다. 도시 외곽을 돌았던 피난민들까지 모여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법한 사람들이 중앙 아케이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 남겠다고 하는 거야.”
“이러지 마십쇼. 어르신. 저희는 여러분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휘관과 치매 할아범이 서로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자네 본국에서 자네들에게 한 명령이고. 우리는 이곳에 있겠다는 건데 왜 강제하려고 하는가? 자유의 나라 아니었나? 미합중국은?”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인데,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안전한 곳으로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야죠. 합중국의 군인은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명령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를 책임지고 피난시키겠다는 건가? 이 도시만 해도 몇만 명이 훌쩍 넘어갈 것 같은데?”
“그건 우선 캠프에 도착한 뒤에, 본국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허허.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여기 있는 노약자들부터 먼저 피난을 시키는 게야. 자네 말대로 자네들과 먼저 가서 말이지.”
“······.”
“이제까지 같이 지내면서 알겠지만, 우리는 여기 있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어. 그러니까 힘든 사람들부터 다 보내고. 나중에 우리가 가면 어떻겠나?”
“······.”
“왜? 그건 어렵나? 본국에서는 무조건 도난 병원에 있던 사람들부터 잡아오라고 했나?”
“무슨 말입니까 그게.”
할아범의 눈빛이 형형했다. 지휘관도 피하지 않고 노려봤다.
“뻔하지. 뻔해. 훈련받은 군인들보다도 체력이 좋아진 사람들, 개중에는 괴물들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민간인들이 얼마나 먹음직하게 보일까?”
“······.”
“피난을 핑계로 끌고 가서. 이런저런 생체실험하고 싶은데 갑자기 죽치고 안 가겠다고 하니 속이 타지? 그렇지?”
“닥치십시오! 지금까지 당신들을 호위한 해병대원들의 희생을 모욕하는 겁니까?”
“희생? 클클 희이생? 그 희생 정말 고맙고 감사하네. 내 실언 사과하지. 그러니까 더 희생하지 말고 자네들은 그냥 갈 길 가게. 짐짝들은 여기 있을 테니까.”
지휘관이 이를 갈았다.
이 도시를 발견한 게 문제였다.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피난민들은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아니, 이 도시에 들어오기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가다마 가문이라고 했던가? 일본에서 유명한 가문이라고 하더니, 이렇게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던 건가?
본국에서 피난민들을 어떡하든 살려서 캠프까지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 건 사실이었다. 시체까지 전부 챙겨서 오라고 한 것도 그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부 생체실험실로 끌고 가려고 한다고? 5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전부? 국제사회가 지켜보고 있는데? 미합중국이 중국인 줄 아나?
“진정으로 우리를 위한다면 이곳에서 재건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지 않겠나? 무기든 식량이든 지원해준다면 고맙게 받지. 하지만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한다면, 왜 강제로 끌고 가려는 건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보게. 생체실험 외에 무슨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구먼. 클클.”
“···괴물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할아범이 칼을 살짝 들어 올렸다.
“괴물들 걱정은 우리가 할 게 아니라. 자네들이 해야 할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