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87화 (187/280)

러스트 [RUST]-187

사내의 살기가 심은영을 향하자, 그녀의 옆이 살짝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광학 은신 장비로 기습할 수 있었음에도 누군가 숨어있다는 것을 일부러 들키는 행위, 당신이 회장님을 공격한다면 당신도 공격받는다는 경고였다.

“광학 은신? 그걸 입고 기습을 안 해? 병신이냐?”

[······.]

일렁이는 공간은 대답 대신 날카로운 예기를 뿜었다.

“이빨을 보여? 어디서 이를 드러내? 겁먹은 개 따위가?”

남자의 살기가 조금씩 더 짙어졌다. 너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냐는 것처럼 노골적인 행동.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심은영은 담담했다.

“아야코.”

심은영의 말과 동시에, 바로 튀어 나갈 듯이 일렁이던 공간이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사내는 입맛을 다시며 허공을 노려봤다.

“제법인데, 뭐가 아쉬워서 반푼이를 따르나?”

“······.”

반푼이라는 말에 심은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그랬지. 하긴 항상 그랬었다. 이쪽에서는 왜년이라고 씹히고 저쪽에서는 재일이라고 밟히고. 그녀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

심은영은 다시 한 번 참았다. 투 스트라이크.

“임시재난 정부도 무너졌으니, 일본 정부가 그랬을 리는 없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린 거죠?”

“네년이 그걸 알아서 뭐하게? 엉? 주인님이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고, 배를 까라고 하면 배를 까고 엎어지는 게···”

심은영이 책상 안쪽에 붙은 빨간색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은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뭐?’ 하고 되묻던 놈의 눈매가 변하면서 심은영의 목덜미를 움켜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휘릭!

천정에서 떨어지는 투명한 무엇. 동시에 책상에서도 치솟아 올랐다. 이대로 심은영의 목을 잡으면 팔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팍!

투명한 재질로 된 것이 심은영과 나카소네 헤세이를 가로막았다.

“뭐야 이건? 이따위 걸로 뭘 하겠다는 거지? 반항이냐? 아? 제대로 교육받고 싶다고?”

헤세이의 주먹이 파공음을 내며 투명한 방벽을 때렸다. 쩌어어엉- 깨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하얗게 금이 가면서도 방벽은 깨지지 않았다.

“어쭈. 이딴 걸 준비하고 있었어?”

이년 보소. 회장실이라고 하더니 깜찍하게 이딴 걸 준비했단 말이지.

과연 겁 없이 꼬나본 이유가 있었다는 건가? 방탄유리? 신소재? 그게 뭐가 됐든 뭔 생각이든, 오산이었다는 걸 알려주지.

헤세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흐흡-하는 소리와 함께 이두박근과 전완근 삼두박근이 팽팽하게 팽창했다.

츠팡! 쾅!

슈팡! 콰직!

주먹질 한 번이 투명벽에 부딪칠 때마다, 하얗게 거미줄 모양을 만들었다. 금이 가고 패일지언정 뚫리지는 않는 벽이었다.

“아- 이- 개년이 진짜 튼튼하네.”

방탄유리도 박살 내는 철권이 부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게 방탄유리보다도 더 개 같다는 소리였다.

회장실에서, 그것도 이렇게 근거리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을 대비했다는 건 여러모로 불길했다. 총알도 아니고 로켓포 이상의 화력을 막을 수 있는 대비를 한다는 게 정상인가?

이거 미친년이군. 아니면···.

주먹질을 멈춘 헤세이가 쫙쫙 금 간 벽 건너 심은영을 보며 말했다.

“야- 죽고 싶냐? 적당히 하고 결정을 해. 어떻게 할 거냐?”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린 거죠? 당신이 자료를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을 텐데.”

“사람 떠보지 말고. 결정하라고 썅년이!”

쾅-콰지지지직-

차단벽에 주먹이 때려 박혔다. 겉면에 금이 갔던 것과는 달리, 한 마디 깊이로 박힌 주먹. 때리다 보면 부서지고 찍다 보면 넘어가는 법이라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헤세이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부쉬시시시식!

사방에서 뿜어지는 연기. 아찔하게 흐려지는 정신에 헤세이가 심은영을 노려봤다.

“입이 말을 하지 않으니, 뇌에 직접 물어보죠. 번견의 주인이 누굴지 궁금하네요.”

부채로 살짝 입을 가린 심은영의 목소리.

이. 개. 년. 이.

헤세이가 품에서 약을 꺼내 자기 목에 꽂았다. 투명한 주사액이 들어가자 헤세이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 그걸 본 심은영의 눈썹이 살짝 찌그러졌다.

“크리스털?”

날렵했던 헤세이의 몸이 삽시간에 30%가량 부풀어 올랐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한 눈이 심은영을 포착했다. 책장 사이로 생긴 통로로 들어가는 모습.

크아아아아아아아! (어디가! 어딜 가냐고!!)

발광하는 헤세이를 뒤로 한 채, 심은영은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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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뭐야? 어디서?”

[월드와 크리스털 중립지역입니다.]

“용역 써서라도 추격해. 최소한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하라고.”

이기영 과장은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난감했다.

삼면이 철근콘크리트와 특수소재로 강화된 소재였다. 차단벽과 유리창까지도 신소재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뚫고 놈이 달아났다.

서울 샬롯과의 내전을 대비하고, 월드와의 항쟁까지 생각해서 만든 부산 호텔은 사실상 거대한 덫이자, 벙커나 마찬가지였다. 덫에 걸린 짐승이 도망쳤다?

이기영은 탱크가 난동을 부린 것처럼 사방이 박살 난 회장실 한쪽을 바라봤다. 투명한 차단벽에 구멍이 뚫렸고, 그 뒤에 창문까지 떨어져 나갔다.

‘어이가 없군.’

숫제 괴물이잖아. 괴물 하니까 떠오른 기억. 알고 있는 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칼잡이 놈. 놈과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만든 덫이 이렇게 뚫리다니.

그런 괴물들이 날뛰는 세상이 됐다는 건가? 경호원이 일본에서 귀환해서 건넨 정보를 대충 봤지만, 믿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실물을 보니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했다.

“전부 말끔하게 정리하고. 애들 모아.”

월드냐? 크리스털? 그러니까 지금 괴물을 보냈다는 거지? 월드면 정전협약을 무시한 거고, 크리스털? 이 새끼들은 한 번 손을 보려고 했었다.

일이 커질 것 같으니 보고부터 해야 했다. 이기영 과장이 심은영에게 연락했다.

“회장님. 놈이 빠져나갔습니다.”

[···의외군요.]

“예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흔적도 놓쳤나요?]

“중립지역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월드나 크리스털 쪽에 접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럼 양쪽 모두에게 여기서 찍힌 CCTV 영상 보내세요.]

이기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역시 뒤끝이 진한 회장님다운 발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대비를 해두세요.]

“예 애들 준비시키겠습니다.”

[전 이만 올라가겠어요. 부산을 맡길 테니 잘 부탁해요.]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올라가십시오.”

여기서 일이 터졌다는 건 위에서도 일이 터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텃밭인 부산과 달리,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울에는 중심이 필요했다.

“회장실 CCTV 녹화 영상 2개 구워서 월드 지부와 크리스털 아지트로 보내. 우리 애들 보내지 말고 퀵으로.”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CCTV 영상을 본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도망친 짐승 새끼는 일본놈이었다. 월드건 크리스털이건 뒷거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CCTV 영상을 본 뒤 무슨 생각을 할까? 거래한 대로 잘 치료하고 숨겨줘야지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면 샬롯에게 가더니 실종됐다며 이쪽 핑계를 대고 먹을 생각할까.

생체병기처럼 날뛰는 모습을 봤는데, 상처 입은 짐승이 제 발로 들어온다? 그걸 그냥 둘까? 어느 쪽이든 이쪽에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놈이 어디로 갔는지만 확인할 수 있다면.

“괴물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 그럼 셋도 된다는 소리겠네.”

젠장. 이기영이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주먹을 내질렀다.

팍!

반파된 차단벽에 작은 금이 갔다. 씨발 존나 아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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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깨끗하고 하얀 눈이 떠오르는 단어. 그 순백한 단어가 회색빛으로 물든 산자락 끝에 펼쳐진 도시엔 적막이 가득했다.

작은 석유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뜨거운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미국놈들이군.”

통신 장애를 물량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다니, 미국 놈들 아니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다목적 중계기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띄워 놓았다니, 중국에서는 추가 파병이 불가능해졌다.

“중국 놈들이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 추가 지원이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던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신체능력자들이 생기고 있는데, 포기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유 이사. 그년과 함께 사라진 회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금단의 열매를 다시 뽑을 수 있다면. 세계 3차대전이든 핵전쟁이든 할 놈들이 차고 넘쳤다.

“젊음이라···. 선물이긴 하지. 자기가 받은 줄도 모르는 선물.”

40대는 30대를 그리워한다. 10년만 젊었으면, 10년만 어렸으면. 하지만 그 40대가 곧 50대가 되고 60대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산다. 자기도 그랬으니까.

노인. 가다마 신타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검버섯이 군데군데. 쭈글쭈글 주름 잡힌 손. 언제부터였던가?

손가락에 주름이 잡히고, 손가락 관절에서 뻑뻑한 통증이 생겼던 게.

생선에서 가시를 바르려고 했을 때,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됐다. 일평생 검을 들고 살았기에 검을 쥐고 죽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 소망마저 앗아가기 충분했다.

검을 들지 못할지 몰랐다. 검을 잊을지 몰랐다. 그렇게 낡고 헤진 보자기처럼 구석에서 쪼그라든 최후를 맞기는 싫었다.

죽음 만큼은 벚꽃처럼, 마지막은 불꽃처럼 그렇게 스러지고 싶었다. 더 힘이 없어지기 전에 복수하면 좋으련만.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소이탄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을 때의 그 기억. 모든 것이 불타버린 도쿄의 기억은 너무도 강렬했다. 거리마다 늘어진 시체들. 죽음들.

목숨은 버러지와 같았다. 살충제를 뿌리면 뒈지는 것처럼 덧없는 죽음 앞에서 어린 그는 그저 두려웠을 뿐이었다.

치열한 공작이 열매를 맺었는지,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그렇게 일본은 다시 살아났다. 폐허에서 부활했다. 다시 살아나고야 만 것이다.

도쿄는 재건됐고, 매일 밤은 점점 더 화려해졌고 밝아졌다.

전쟁에서는 졌지만, 경제로는 미제를 곧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열도 전체를 달궜다. 도쿄의 땅을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활했다. 부활했었다.

더러운 미제 놈들이 다시 짓밟기 전까지는.

가다마 신타는 분노했다. 젊음을 가문의 재건과 중흥을 위해 내던졌다. 중년을 가문의 어둠으로 살면서 피를 먹었다.

그렇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자들이 모이고 모였다. 타도 귀축영미.

오래된 맹방인 중국과 손을 잡고 계획을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핵보유국이 되고 나면, 계획을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앞으로 5년. 계획대로라면 5년 뒤에 실행되어야 할 계획을 중국이 먼저 시작해 버렸다.

중국 군부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서 나중에야 양해를 구했지만, 그건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연구가 완성되지 않았다. 최소한 2~3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일본에서 대지진이 터져버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됐다.

복수는 한낱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정신이 오락가락 벽에 똥칠하면서 죽기를 기다릴 바에야 할복하려고 다짐했을 그때. 신은 또 한 번 기적을 내렸다.

노인 가다마 신타는 쭈글쭈글한 손을 꽉 쥐었다.

늙었지만, 신체능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힘이 좋아지고 있었다.

가끔 기억이 흐릿한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젊음을 찾아야 했다.

젊음을 찾을 수 없다면, 복수를 완성해야 했다.

그게 힘들다면 복수의 초석을 만들어야 했다. 그보다 값진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재 속 화롯불 사그라드네 눈물 끓는 소리.”

“한밤에 남몰래 벌레는 달빛 아래 밤을 갉는다.”

가다마 신타는 머릿속에 떠오른 싯구를 나지막하게 읊었다.

복수를.

죽음을.

노인은 조금 전까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지금도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고만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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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대마도 인근 해역부터 하나씩 안테나가 뜨더니, 부산에 도착하자 완전히 꽉 찬 안테나였다. 휴대폰에 뜬 안테나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된다.”

“?”

“휴대폰 된다고.”

‘당연한 거 아님?’

김 양은 마루의 말에 ‘뭔 소리래?’ 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을 피한 마루가 바로 기순에게 전화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이 새끼. 진짜 뭔 일 생긴 거야?”

“안 받음?”

“그래. 시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젠 아주 전화기가 꺼져있다.”

“??”

‘에이 새끼 진짜.’ 구시렁거리면서 마구 문자를 찍던 마루가 멈칫했다.

월드하고는 이제 볼 일 없었다. 그러자고 일본 신분 파고 미국 신분으로 갈아타고 그 지랄을 했으니까. 기순이도 마찬가지였다. 새 신분이었고 망한 일본인 국적도 아닌, 미국 국적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신호는 갔었다. 받지를 않아서 그렇지.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하는 첫 통화가 전화기가 꺼져있어?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건 위치추적이 어렵다는 소리였다.

위치추적을 할 걸 알고 꺼놨다?

아니. 애초에 지금 한국에 왔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기순이?

아니면 누가?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 깔린 CCTV 가운데 하나가 마루와 김 양이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마루가 번호를 눌렀다.

잠시 이어진 벨소리. 그리고 음성변조음이 전화를 받았다.

[···사만다. 그거 좀 정리··· 전화받았습니다-]

“여기 한국 부산인데. 거기서 여기 좀 확인할 수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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