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91
묵직한 감각에 마루는 어깨를 돌렸다.
음-
자동차는 대충 썰 수 있었는데, KTX가 튼튼하다고 하더니 제법이었다. 마루가 열차 옆구리를 째고 밖으로 나오자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놈들이 화들짝 놀랐다.
[놈이 밖으로 나갔다.]
[막아.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란 말이야.]
[어디야?]
[이 새끼도 투명망토다.]
으직으직
으작으작
일렁이는 공간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깔린 유리들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허둥대지 말고 조용히 해!]
[소리!]
[유리를 봐.]
[저기다!]
탕! 탕! 타앙!
타닥 타다닥!
유리 밟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노획한 총을 쏴댔지만, 맞지 않았다.
[허공이야. 없다고!]
[투명망토에 쪼냐? 쫄지 말고 계속 쏴!]
한번 박차면 거의 10m 가까이 움직였기에 도저히 거리를 잡을 수 없었다. 단 4번 만에 열차 4~5량을 지나친 마루의 감각에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감각이 더 좋아졌나?’
일본에서 개고생했더니 감각이 트인 것 같았다. 살기는 그전보다 확실히 구별됐고, 가까운 거리라면 사람들이 뿜는 미세한 느낌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집중해야겠지만.
옹기종기 모여있는 3개의 기운. 2개의 기운이 거의 비슷한 걸 보니 쌍둥이 경호원 같았다. 나머지 하나는 심 회장이겠고.
‘주변에 잡스러운 기운이 많네.’
죽이겠다는 심정으로 살기는 아니고 끈적하고 음흉한 느낌이라고 할까? ‘있다.’, ‘없다.’, ‘어떤 느낌이다.’ 정도 위주라. 거리 감각은 좀 애매했다.
‘차라리 살기였으면 더 정확했을 텐데.’
[2분.]
김 양의 무전. 30초 단위로 카운트하는 것 같았다. 알아서 잘하고 있는 중.
마루는 상황을 되짚었다. 안에 있는 놈들이 최소 5명. 저쪽에서 몰려오는 놈들도 그 정도. 합하면 10명. 총기로 무장했고 독특한 능력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
생포하려고 했다가 이상한 침 맞은 걸 생각하면, 적당히 할 생각은 버려야 했다.
쓸까?
쓰자.
이 기회에 더 뜯지 뭐.
칙- 중화제를 꽂자, 서늘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돌았다.
근육과 신경이 치유되고 안정되는 느낌.
효과가 끝나기 전, 마루가 칼을 수직으로 치켜들었다.
======
======
반투명 막이 출렁거렸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출렁거리며 흔들리는 막을 신나게 두들겨대던 나카소네 헤세이가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핫. 이거 봐. 이거. 이것 보라고. 이런 걸 숨겨두고 있었단 말이지? 앙?”
이런 깜찍한 년. 아무것도 없는 척하더니 이런 걸 꿍쳐두고 있었어?
으라차!
꿀렁-
자동차도 한 방에 찌그러뜨릴 주먹이 안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초능력?
이런 초능력이 있었다면 전에 회장실에서 썼겠지. 그럼 뭘까? 꼭 쥐고 있는 여행용 가방이 의심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여행용 가방을 붙잡고 있으면 그 가방이 중요하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본국에서 가져온 연구자료도 저 가방에 들어 있겠네?
“거기에 있냐? 네년은 나랑 좀 같이 가야겠다.”
꿀렁-
그나저나 막 같은 게 제법 생각보다 질기군.
헤세이가 마구잡이로 반투명 막을 두들겨댔다.
총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면서 부하들이 부산스러워졌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또 경찰들이 왔나?”
“투명망토입니다. 경호원이 하나 더 있었나 봅니다.”
은신? 그게 있다고 해도 별것 아니던데? 바닥에 유리를 깔았더니 오도 가도 못하고 두들겨 맞다가 쪼르르 주인년에게 도망친 것들.
“되다 만 년이면 후딱 처리하지, 뭘 저리 요란스럽게.”
헤세이가 으이쌰-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크게 주먹을 때려 박았다.
쑥 들어갔던 주먹이 꾸우울렁이는 출렁임과 함께 다시 밀려 나왔다.
“좀 다릅니다. 나카야마와 기노시타가 당했습니다.”
“슌과 나오야가?”
산성타액을 가진 나카야마 슌과 총알을 막을 정도로 질긴 피부에 강력한 재생력을 지닌 기노시타 나오야가 당해?
“슌은 기폭장치가 있었을 텐데?”
“팔이 잘렸다고 합니다.”
반투명한 막을 두들기던 헤세이가 주먹을 거둬들였다.
“어디야?”
“이쪽으로 오···”
▬▬▬■■■▬▬▬■■■▬▬▬
콰드등!
천둥소리와 동시에 거대한 프레스로 열차를 잘라낸 것처럼 귀퉁이가 잘려나갔다. 한쪽 옆에 서 있던 부하가 검은색 절단선에 휘말려 반으로 분리됐다.
??
!!!
이들은 전부 지옥 같은 일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지만, 이건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비교하자면 지진으로 집이 쪼개지는 것? 화산 폭발 바로 앞에서 화쇄류에 처맞는 것?
고요한 침묵이 열차 안을 가득 채웠다.
“무슨···”
“······.”
“······.”
한쪽 귀퉁이가 북 뜯어진 열차. 휑하니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었다.
근데. 저건 뭔데 둥둥 떠 있지?
하얗게 바랜 자국이 둥실 공중에 떠 있었다. 일렁거리는 투명한 뭔가에 껌 자국처럼 하얀 자국이 뚜렷했다.
“투명망토?”
“적이다----아----”
▬▬▬▬▬▬▬▬▬▬▬▬▬▬▬▬▬▬▬▬▬
적이라고 외친 사내가 상하로 분리됐다. 검은 실선은 사람을 절단하고도 모자라, 열차 벽을 찢었다. 길게 찢어진 열차가 신음을 흘렸다.
끼기이이익-
사선으로 찢고 나갔던 칼날이 방향을 바꿔 한 사람을 노렸다.
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심하게 휘둘러지는 칠흑의 칼날. 남자의 앞에 있는 의자가 잘리고 또 잘렸다. 푸딩처럼 부드럽게 파고든 칼날이 비명을 끊고 지나갔다.
후두두둑-
바닥에 흩어지는 조각들. 파편들.
“쏘-”
서컥-----
입을 뻥끗하기도 전에 생기는 실선. 몸통이 사선으로 분리되며 열차 내벽 또 긴 상처가 생겼다. 이어지는 적막.
방금 그건 뭐였지?
“조장!”
“괜찮습니까?”
급히 달려온 헤세이의 부하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귀퉁이가 잘려나간 열차. 여기저기 찢어진 흔적은 비현실적이었다.
절단된 의자, 토막 난 시신들, 멍하니 한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카소네 헤세이.
“조장! 무슨 일입니까?”
헤세이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허공에 하얗게 변색한 자국이 둥둥 떠 있었다.
“쳐-”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얀 자국이 한쪽으로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헤세이가 갑자기 발작했다.
“도망쳐!”
저게 뭔지 묻기도 전에 뭔가가 부하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실선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을 훑었다. 금속음과 절단음이 흩어졌다.
“안 돼!!!”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칼날이 한 바퀴 산책을 마치자.
끼기기기기-
쿵-
열차 지붕이 무너져내렸다.
======
======
김 양은 스코프로 주변을 살폈다. 위에서 보니까 상황파악이 쉬웠다.
‘경찰은 숫자부터 글렀고.’
어찌어찌 큰길을 통제하긴 했는데, 작은 골목길은 포기한 것 같았다. 시골이라서 그런지 경찰 숫자가 너무 적기도 했고, 실탄으로 무장한다고 하더라도 저 숫자로는 테러범들 잡기 어려워 보였다. 그저 시간 끄는 용도라고 밖에.
인근 지역 경찰을 동원해서 주요 도로 통제와 포위망 구축, 경찰 특공대 투입으로 조기 진압시도, 시간 최대한 끌고 군대 불러서 정리. 이렇게 잡은 것 같았다.
[1분 30초]
아무리 백정이라도 고작 1분 30초 만에 해결 가능할까?
열차가 길어서 애들 쫓아다니는 것도 시간 걸릴 텐데···. 빠질 준비 해야겠다.
그렇게 스코프로 열차를 길게 훑는 김 양의 눈에 들어온 광경.
갑자기 열차 한쪽이 잘려나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귀퉁이가 썰리더니 잠시 뒤, 열차 안쪽에서 뭔 짓을 하는지 열차 옆구리며 천장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아---
김 양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요트 옆구리를 찢고, 헬기 문짝을 썰고, 미사일을 쪼개더니. 이젠 기차?
한우···.
백정도 맛있게 먹었으니까 괜찮겠지?
살짝 식은땀이 흐르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스코프로 보는데도 막 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기어코 열차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창문이 터져나가는 모습.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후- 김 양은 길게 심호흡하고 집중했다.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
지붕이 내려앉은 열차에서 툭- 튀어나오는 그림자가 하나. 둘. 그림자 2개!
저건 백정이 아니었다. 김 양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투웅!
내달리던 두 놈 가운데 하나가 옆머리를 맞고 고꾸라졌다.
철컥.
탄피가 빠지면서 재장전.
김 양은 다음 목표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어? 방금 옆에서 뛰던 놈 어디?
휙- 휙- 총구를 돌려 확인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은신 장치?’
미간을 살짝 찌푸린 김 양이 시간을 확인했다. 30초 남짓 남은 시간.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지금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은신 장치한 놈이 괜히 이쪽으로 오면 피곤해지니까. 응.
장비를 챙긴 김 양이 5층 건물 옥상에서 철수했다.
======
======
칼질을 견디지 못한 열차 지붕이 주저앉았다.
마루와 헤세이 사이를 가로막은 지붕 잔해. 열차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기울어지는 순간, 헤세이와 부하가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로막은 잔해를 잡목 치듯 쳐낸 마루가 놈들을 추격하려는 순간. 앞서 달리던 부하의 머리통에 구멍이 뚫렸다. 역시 김 양의 저격.
이제 남은 건 한 놈.
마루가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놈의 등판을 노리려는 찰라, 놈이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어라?
은신 장비?
어딜 도망치려고.
정신을 집중하자, 감각이 얕고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어디냐?
어디야···
놈의 기운을 찾을 수 없었다. 가까운 거리는 잡을 수 있었는데, 먼 거리는 아직이었다.
쯧-
마루가 혀를 차곤 김 양에게 말했다.
“하나 놓쳤는데, 그쪽에서 잡을 수 없냐?”
[은신해서 확인 불능. 지금 내려가는 중.]
CCTV 동영상에서 봤던 놈이라 마지막까지 남겨 뒀었는데, 녀석이 은신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심은영을 구했으니 됐나?
반투명한 막을 노크하듯 칼끝으로 콕콕콕 찌른 마루가 심은영을 찾았다.
“놈들 다 정리했습니다. 나오시죠. 심은영 회장님.”
“······.”
안 믿어. 못 믿어. 하는 것처럼 견고하게 있던 반투명 막이 한마디에 해제됐다.
“접니다. 마루.”
칼을 살짝 치켜들었던 마루가 입맛을 다시곤 칼을 내렸다.
======
======
심은영은 사장이었을 때도 그랬지만, 회장이 된 지금도 예의 있었다. 회장이랍시고 고개가 뻣뻣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마루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 이거나 좀 넉넉하게 챙겨주시죠.”
마루가 빈 중화제 주사기를 내밀었다. 심 회장은 그걸 보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 수급 때문에 많지는 않지만, 최대한 드리지요.”
“아- 그리고 광학 은신 장비 말입니다. 몇 벌 구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방어력은 중국산이 좋았지만, 작동시간이라든지 은밀성은 샬롯이 만든 게 훨씬 좋았다.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경호원들이 쓰던 것도 상관없습니다.”
바로 기순이 찾아보고 내일이면 미국으로 떠야 했다. 하루고 이틀이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경호원들이 입고 있고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달라고 하자, 반응이 있었다.
예민해진 감각에 경호원들의 노기? 살기가 살살 걸렸다. 살기를 품은 애가 대역이랑 같이 있었던 애겠지? 마루가 살기가 살짝 섞인 시선을 보내는 경호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미묘한 기 싸움에 심 회장이, 작게 한숨을 쉬곤. 경호원들을 불렀다.
“아야코, 미야코 내드려요.”
“하지만 회장님.”
심은영의 단호한 얼굴에 경호원들이 주섬주섬 걸치고 있던 은신 로브를 벗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심 회장이 운을 뗐다.
“미국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딱히 속일 이유도 없는지라 마루가 편하게 대답했다.
“기순이 녀석이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요.”
“저희 쪽에서도 한 번 알아봐 드릴까요?”
샬롯 그룹이 찾으면 조금 더 빨리 찾겠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마루와 심 회장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김 양의 통신이 떴다.
[헬기 접근. 군용 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