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93
마루는 카페 CCTV 영상을 조용히 저장했다.
‘이건 무조건 영구박제지.’
친구의 흑역사는 간직하는 게 도리였다. 개소리하면 영상으로 증징해주지. 설마··· 아니겠지? 혹시라도 차였다고 잠수탄 거면 진짜 그냥 안 둔다. 기순이놈
?
가만히 기다렸지만, 후드에게서 추가 문자라든지 추가 행적이 들어오지 않았다.
[카페에서 헤어지고 난 이후 행적은?]
[중간중간 CCTV 기록이 지워진 곳이 많아서, 추적에 시간이 걸립니다. 확인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수고해.]
[네.]
눈을 감고 있던 김 양은, 마루의 ‘영구박제.’라는 혼잣말에 호기심이 들었는지 살짝 실눈을 떴다. 이런 영상은 돌려봐야 재밌는 법. 마루가 폰을 슬쩍 김 양 앞으로 밀어줬다.
“까임?”
“봐봐.”
영상을 끝까지 본 김 양은 뭐라고 할까? 위화감이 들었다. 고백과 까임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남자가 고백한다. 그런데 여자가 ‘싫음.’ 하는 장면이라고 하기엔 여러모로 좀···.
‘이상한걸.’
김 양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요트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김 양이 기순에게 관심 있나 싶었던지라, 마루가 슬쩍 물어봤다.
“표정이 왜 그래?”
“아님. 좀 이상해서.”
“뭐가?”
“일반적인 고백과 차임 같지 않아서.”
여자들이 보는 관점은 또 다른가? 마루가 계속하라고 눈빛을 보내자, 김 양이 이걸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고백하기 전에 어떻게 함?”
“분위기를 잡겠지?”
“그럼 고백하기 전에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이거 되겠다 싶을 때, 고백하지 않겠음?”
“그런데?”
김 양은 CCTV 화면을 뒤로 돌렸다. 카페에 들어와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돌아가 재생한 김 양이 손가락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가리켰다.
“시작부터 이상하지 않음?”
김 양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고백하러 간 게 아니었던가?
“그럼?”
“고백은 아닌 것 같음. 동생 예쁘게 생겼네.”
홍 과장이 그렇게 산삼 타령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응. 기순이가 홀딱 반하게 생겼어. 백정 동생이라서 머리카락 긴 백정일까 싶었는데, 생긴 건 영 달랐다.
김 양이 지긋한 눈빛으로 영상 속 나루를 봤다.
‘간 좋아하게 생겼네.’
감점 추가한 김 양이었다. 고백이 아닌 것 같다는 말에 어쩐지 안타까워하는 마루를 보곤 김 양은 감점을 더 추가했다.
처음부터 동생 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라비 등골 빼먹을 년으로 살포시 저장한 김 양이 마루를 위로해줬다.
“기순이는 머리도 있고 의외로 고집도 있어서 잘 할 거임.”
그러니까 기순이에게 동생 넘기고 마음에 평화를 찾으셈. 뭔가 짠한 김 양의 눈빛에 마루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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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도 마루와 나루가 화해하는 것을 돕고 싶었다. 친한 친구이기도 했거니와, 나루를 맘에 담고 산 지 10년이 넘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그 오빠가 원수처럼 지낸다면, 힘들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오진 그룹 나주현이 사는 집에 함께 살기로 했다는 말은 마루에게 들었는데, 같이 붙어 다닐 줄은 몰랐다.
보통 그렇지 않나?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는 거.
부잣집이라면 더했다. 잘사는 친척 집에 얹혀사는 것도 눈치 보이는 판국에 남 아닌가? 심지어 경제력이라도 비슷하면 모를까 아니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근데, 연주회까지 태워주고 태워오고 같이 살고. 친자매라도 이러는 경우 요즘엔 흔하지 않았다.
‘오진 그룹.’
월드 그룹 산하 기업이었다가 독립. 제약, 바이오, 식품, 화학, 화공학으로 순식간에 영역을 넓혀 그룹으로 성장한 기업.
문득, 홍 과장의 USB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많은 파일 가운데 딱 하나 열 수 있었던 파일에 있던 내용.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었다. HMR이라는 약자. 그리고 mg 단위가 적혀 있는 것들. 마루에게 집착했던 이야기들을 제약과 묶어 생각하면 심증은 하나였다.
‘마루에게 뭔가 했다.’
처음에는 오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오버가 아니었다. 야마츠키 제약, 타카이치 신약. 일본의 제약회사들이 이상한 약들을 만들어 대고 있었다.
버서커 폴이라는 약, 급속치료제 같은 약들. 그럼 한국에서는 그냥 수입하고 있었을까? 마루가 말했던 약들은? 월드 축산에 있던 약들은 어디서 만든 약들일까?
친구가 월드 축산에서 일한 건 거의 2년. 2년 동안 회사급식에 뭔가를 넣어서 먹이고 관찰했다. 이게 기순이 생각한 결과였다.
그러고 보면 마루가 월드 축산에 들어가 했던 이야기도 의미심장했다. 잘 다니던 사람들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돈은 많이 주는데 이상하다고 했던 이야기들.
애초에 그런 쪽 일은 전혀 몰랐던 마루였는데, 갑자기 축산 쪽으로 가게 된 계기를 타고 가다 보면 이상하게 걸리는 부분들이 많았다.
학교 휴학하고 군대 전역한 뒤, 갑자기 축산 쪽으로 그것도 도축 업체로 간다? 보통 다른 쪽으로 가지 않나? 시급 높은 쪽으로 간다면 다른 일도 많았다. 하다못해 배달일을 하더라도 더 많이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 간다는 일이 그쪽 일? 그리고 그 업체가 하필 월드 그룹 자금 세탁 회사일 확률은? 또 오진제약과 관계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거기에 동생까지 챙길 확률은? 앞집 뒷집 사이였을 확률은?
우연도 이렇게까지 겹치면 필연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필연이라면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오진 회장.’
마루네집 망하기 전 뒷집에 살던 사람.
‘나주현.’
나오진 회장의 외동딸. 여러모로 유명한 아이였다. 천재라는 소리도 있었고, 정신장애가 있다는 소문도 있던 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마루에게 집착했던 아이였다.
‘씨발.’
기순은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생각을 접고, 꽃다발을 옆에 내려놓은 앉은 나루를 봤다.
“기순 오빠.”
“어-”
오랜만에 본 나루는 이뻤다. 할 말을 잊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연주회는 어떻게 알고 왔어? 오빠가 올 줄 몰랐는데. 진짜 깜짝 놀랐어.”
“어- 그래. 연주 잘하더라.”
기순은 머리가 하얘졌다. 어버버- 하는 기순을 보곤 나루가 살풋 미소 지었다.
“고마워.”
“아- 하하하- 뭘. 나야말로 연주 잘 들었지. 정말 잘하던데.”
“주현 언니 덕분이지.”
“그··· 그래? 주현이라면 예전에 너희 뒷집에 살던 그 주현이?”
나루가 친언니 자랑하듯이 대답했다.
“어. 오진 그룹 나주현 언니 맞아.”
“고마운 사람이네.”
“고맙지. 정말 그 언니 덕에 이번 연주회도 잘할 수 있었어.”
이야기가 끊기고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기순은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마루 이야기를 하고, 오해를 풀고, 미국에 같이 가자고 하고 싶었는데, 이 분위기에서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적이 갑갑했다.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됐다.
주현이? 그래 주현이가 마루를 참 많이 좋아했었지. 나루가 주현이를 따르는 것 같으니까. 기순은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입을 뱉었다.
“주현이가 마루를 참 많이 좋아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순식간에 서늘해진 분위기. 나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게 아닌가?
“아니, 그냥. 마루가 옛날에 인기가 많았던 게 생각나서.”
“그 인간 이야기를 왜 꺼내는 데?”
씨발. 기순은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더 조심했어야지.
기순의 패닉을 침묵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루가 분통을 터뜨렸다.
“설마. 모르는 거야? 오빠한테는 같이 외국 가자고 안 했어?”
“······.”
“아? 오빠는 모르는구나. 그 인간 크게 사고 치고 한국 떴어. 소식 못 들었어?”
“······.”
“하긴, 나한테도 이메일로 연락하니, 어쩌니 해놓고 3달이 넘도록 한 번도 연락 없었으니까.”
“······.”
기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답답해졌다.
“일이 있어서 그랬겠지.”
“무슨 일? 얼마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병원에 입원한 아빠한테 전화 한 통화 안 하고, 시설에 집어넣은 엄마는 좋다고 신경 끊고. 동생년과는 인연 끊고 살자고 하더니 3개월 넘도록 문자 한 번 없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뭐야 오빠. 그 인간이랑 연락했었어? 그래서 편드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그럼 뭔데? 가족 버리고 전화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면,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인데?”
‘이건 아니지.’ 기순이 한마디 했다.
“연락했다가 혹시라도 가족들한테 해가 갈까 봐 그러지 않았을까?”
“해가 간다고? 전화했다고 가족에게 해? 누가 도청이라고 한데?”
“월드 그룹 사람들이 노릴까 싶어서 그랬겠지.”
“···알고 있었네? 그 인간이 무슨 짓 했는지 알면서 모른척했던 거야?”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연락 없다가 연주회에 왔나 했더니, 그 인간이 가보라고 해서 온 거야?”
“말이 좀 심한 거 같네. 그 인간이 뭐냐? 그 인간이···. 아무리 싸웠어도 그건 아니지.”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가르치는 거야? 이래라저래라? 이게 옳다. 저게 옳다. 네가 잘못이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진짜 옛말이 틀린 게 없네.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더니. 됐고요. 앞으로 서로 아는 체하지 말고 지내요. 김기순 씨.”
“···너 진짜 많이 변했구나?”
나루는 기순의 말에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겨웠다.
변했다고? 그럼 변하지, 변하지 않을까. 집안 망했는데도 성격 그대로인 건 정상일까?
“하나루. 앉아봐. 네가 언니라고 따르는 나주현이. 그 사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닐 수 있어.”
나루는 기순이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다 그렇지 않나? 세상은 항상 그랬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 그게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마냥 생각과 같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였다.
그리고 지금. 나주현은 중요한 사람이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뿐이었다.
나루가 주차된 롤스로이스에 가까이 가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내려 공손히 문을 열었다. 차 안에는 나주현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별로 영양가 있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영양가?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우리 나루 기분이 좋지 않을까?”
“별 이야기 아니었어요. 그냥 짜증 나는 이야기?”
그랬어요? 하는 얼굴로 나주현이 물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오빠랑 연락한대?”
“처음에는 아닌 척하더라니까요.”
나루의 이야기에 간간이 맞장구 쳐주던 주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봤다. 백미러로 뒤를 보던 사내가 나주현의 신호를 받고 전화기를 들었다.
“그 남자 정중히 모셔오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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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도착할 때쯤. 후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분 말입니다. 오진 그룹 비서실에서 데려간 것 같습니다.]
[이상한 점은 오진 그룹 본사로 들어간 영상은 있는데, 밖으로 나온 영상이 없습니다.]
[일단 오진 그룹 쪽을 중심으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흠- 마루가 목을 스트레칭했다.
오진 그룹이라. 기순이가 연락 끊긴 이유가 오진제약 때문일까?
왜?
나오진 사장 때문에 모친과 싸웠던 생각이 났다. 그 딸도 기억났고, 여러모로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모친과 동생이 워낙 그쪽 집안을 좋아했다.
모친과 동생을 생각했더니, 약이 떠올랐다. 월드 홍 과장이 작업한 약. 훅-하고 혈압이 올랐다. 마루는 가만히 칼을 쥐었다. 치솟았던 살기가 조금씩 진정됐다.
마루의 살기에 깜짝 놀란 김 양이 토끼 눈을 떴다.
“아니야. 별일 아니야.”
“?”
‘너님 별일 아닌데 살기를 뿜어요? 진심 백정이세요?’
‘아니라고 했다.’
심오한 눈빛을 이어가기에는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고 말았다.
웅- 웅-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샬롯에서 전화가 왔다. 마루와 김 양은 샬롯이 준비한 차를 타고 샬롯 그룹 본사로 향했다.
“올라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차 타고 왔는데요. 뭘.”
마루는 여행용 케리어를 심 회장에게 건넸다. 시달린 기색이 역력한 심은영은 케리어를 넘겨받자 그나마 안심이 됐다는 듯 얼굴이 조금 피었다.
“잘 받았습니다. 그- 친구분 알아보겠다고 했었죠.”
“예.”
심은영이 잠깐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확인해 보니, 3일 전에 주민등록이 말소됐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