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94화 (194/280)

러스트 [RUST]-194

마루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찾아본다고 하더니 갑자기 주민등록 말소라니. 말소랑 기순이를 찾는 거랑 상관있나?

“말소라니요?”

말소 사유는 크게 3가지가 있었다.

가출·행방불명됐을 때 가족이 신고하는 '주민신고(무단전출) 말소', 사망했을 때 처리되는 '호적신고(사망) 말소' 그리고 채권기관 등 3자의 민원에 의해 '거주지 부재' 사실이 확인될 경우 행정기관이 실시하는 '무단전출 직권말소'.

무단전출 직권말소야, 마루네 집이 망하면서 경험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기순이는 그럴 일 없지 않은가?

기순은 행정 기록상으로는 한국 사람이었다. 일본인 신분을 팠고, 그걸 이용해서 미국인 신분을 만들었지만, 한국인 신분도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일본에 갔다가 미국에 들른 기간이 길다고 해도, 기순의 배다른 형제들이 가출‧행방불명 신고할 리 없었다. 사망하는 순간, 기순이 몫은 전부 사회 환원되기로 했으니까.

기순이 가지고 있던 제법 많은 양의 주식이 전부 사회환원 되면? 지금 경영권이 누구한테 가느냐 하는 판국에 대량의 주식이 풀리면 골치 아파졌다.

가출‧행방불명 말소도 아니라면 남은 건 사망신고 말소였다.

죽었다고 말하기 힘들어서 돌려 말한 건가?

죽었다고?

기순이가?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살기.

너무 붉다 못해 탁해 흑색으로 보일 정도로 진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비물질적인 살기가 실체화된 것 같은 환상.

심은영과 경호원, 김 양이 순간적으로 그대로 굳었다.

딸꾹- 딸꾹-

김 양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심 회장의 쌍둥이 경호원들도 나서지 못했다. 석화의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음으로 막아선다는 생각. 머리에서 끊임없이 막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몸이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심은영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막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조이는 것 같은 느낌. 분노했을 뿐인데 이렇다고?

심은영이 아랫배에 힘을 줘 목소리를 높였다.

“오해하지 마세요. 말 그대로 말소일 뿐입니다.”

“······.”

“짐작하시겠지만, 사망으로 호적 말소가 들어갔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망 사유로 말소하려면 유족들이 신고하거나, 따로 절차가 필요해요. 그런데 유족들에게 연락하지 않고 말소가 된 상황이라 행정 오류가 아닌지, 기순 씨 가족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외침과도 같은 심은영의 목소리에 마루가 반응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을 옥죄는 무엇이 환상이었던 것마냥 사라졌다.

딸꾹- 딸꾹-

김양의 딸꾹질 소리만이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쌍둥이들은 재빨리 심은영 양옆으로 이동했다. 부르르 떨리는 오금에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기순이네 집안에서 문제를 제기했다고요?”

“예. 어떻게 보더라도 기순 씨의 말소는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코로나와 변이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탓에, 시체를 최대한 빨리 화장하는 것이 권장되고 있었다.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사망신고를 할 수 있었는데, 빠른 화장까지 권해지는 상황이라 처리가 빨랐다고.

그걸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유가족들과 연락하기 불가능한 상황도 아닌데, 대리인이 주민등록을 말소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기순 씨의 재산이 외국으로 빼돌려졌다는 정황이 나오면서, 기순 씨 유족들의 반발이 상당합니다.”

“누군가 기순이를 죽이고 재산을 빼돌렸다고 생각할 수 상황이군요.”

마루의 대답. 그와 함께 다시 스멀스멀 살기가 피어오르려 하자, 재빨리 말을 받는 심은영이었다.

“기순 씨가 재산을 정리한 뒤, 대리인을 내세워 죽은 것으로 위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요.”

하-

마루의 탄식- 낮은 탄식과 함께 무겁게 내려앉던 공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놈.’ 심은영의 말도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것으로 위장했으면 혹시라도 꼬투리 잡히지 않게 연락을 씹었을 테니까.

“기순 씨가 자의적으로 자신의 사망을 드러내고 몸을 숨긴 것이라면, 찾아다니는 것은 하책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죽은 것으로 위장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니까요.”

“누군가 기순이를 죽이고 지웠을 확률은 없습니까?”

“기순 씨의 자작으로 생각하는 게 더 가능성 크다고 봅니다. 누군가 기순 씨를 죽였다면, 지금처럼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말소를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심 회장은 무조건 기순이 살아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말소됐다. 그러니까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하자.’ 정도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죽었을지라도 일단은 살아있다고 해야 했다. 마루의 앞에서 이미 늦었다거나 죽었다거나 그런 말을 했다가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체···.’

KTX 테러 당시, 반투명 보호막 안에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KTX 열차에 난 상흔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 증거를 없애는 게 차라리 깔끔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초능력?’

초능력이라기보다는 그런 거와 비슷했다. 호랑이를 마주한 강아지나 원숭이가 심장마비로 죽기도 한다더니, 방금 겪은 일을 생각하면 정말 그랬다.

가늘게 숨을 몰아쉰 심은영의 볼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전에도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났지만, 지금은···.’

쌍둥이 경호원들이 바싹 긴장한 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적막.

웅- 웅-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 마루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진 그룹 본사에서 흔적이 끊긴 게 맞습니다. 그날 이후, 행동반경 내 CCTV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둘 가운데 하나였다.

오진 그룹에서 기순이를 어떻게 하고 사망신고를 때렸든지, 기순이가 탈출한 뒤 추적을 피하려고 사망신고를 했든지.

뭐가 됐는지 제일 빨리 알 방법은 오진 그룹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여기 괜찮은 칼 하나 구할 수 있을까요?”

허리춤에 있는 칼을 풀어 내밀며, 마루가 말했다.

“요즘 좀 단단한 애들을 잡았더니 말이죠.”

날도 많이 상했고, 손잡이도 흔들거려서···.

심은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죠?”

“가서 확인해 봐야겠죠.”

산책이라도 하러 간다는 것처럼 여상스럽게 대답하는 마루의 대답에, 심은영은 눈을 감았다.

녹슨 쇠 냄새가 짙게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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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좀 말려봐.’

심은영은 필사적으로 자기에게 눈짓하는 김 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심 회장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다 눈을 깜빡거렸다, 김 양이 분노했다.

‘모르는 척? 지금 이 시국에 모르는 척?’

금괴도 안 주고 백정도 안 말리고, 외면?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임? 엉뚱한 소리나 해서 백정 빡이나 돌게 하고.

그렇지 않은가? ‘찾지 못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정도로만 말했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열심히 찾겠다든지, 확실해지면 말하겠다든지,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고 많은 말 가운데 하필 해도 말소니 어쩌니 그래서 백정이 눈 돌아간 거 아닌가? 그래 놓고 수습한답시고 기순이의 자작극설이나 풀고.

‘사람을 잘못 봤어. 부산에서 봤을 때는 그래도 개념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때는 알아서 금괴도 챙겨주고, 합리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김 양의 맹렬한 눈빛에도 심은영은 ‘그게 무슨 눈빛인가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

‘저거 봐. 저거. 다 알면서.’

김 양이 눈을 부라렸지만, 심 회장은 깜박깜박으로 응수했다.

눈을 부라리는 김 양을 보며 심은영은 갑갑했다.

수신호를 했다가는 마루에게 걸릴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눈의 깜박임을 이용한 단문 신호. 모스부호를 이용한 숫자코드와 그에 대응하는 짧은 암호를 만든 것이었다.

깜빡깜빡- 빤히-

(지연작전)

깜빡깜빡- 빤히-

(시간 끌라고)

열심히 눈을 깜박거렸는데도 김 양의 표정이 점점 나빠졌다. 아니, 왜 못 알아먹지? 김 양이면 월드 그룹 킬러로 활동했었으니까 단문 신호 정도는 알 텐데.

일단 마루를 진정시켜야 했다. 칼 들고 들어가서 다 썰어버리면 그 뒤엔? 오진 그룹 빌딩을 날려 버릴 건가?

KTX 사건 이후, 대테러 부대 항시 대기 중이었다. 거기에 수도 방위 사령부도 경계 태세로 들어간 판국인데 일단 진정하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맞았다.

깜빡깜빡- 빤히-

(시간 끌라고 시간!)

마루랑 같이 오래 다녔으니까 친하잖아. 네가 시간을 끌어야지. 쟤 말릴 수 있는 사람이 너뿐이잖아. 말리라고!

두 사람이 눈빛으로 뭘 하든, 마루는 할 일을 했다.

[내가 신호하면 오진 그룹 빌딩을 외부랑 차단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제어실을 해킹해서 차단 셔터를 내릴 수 있지만,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비상구 같은 부분은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어서, 차단을 오래 유지하기란 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통신은? 인터넷이랑 전화 모두 차단해야 하는데.]

[짧은 시간이라면 가능합니다.]

[얼마나?]

[10분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넷과 전화를 10분간 끊을 수 있다?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마루는 오진 그룹 빌딩 설계도를 살폈다.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제일 이상한 부분은 지하 공간이었다. 설계도면 상으로는 지하 8층까지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주차장으로 이뤄진 지하 공간.

하지만 설계도를 확인한 후드가 지적했듯, 엘리베이터가 문제였다.

지상 42층 지하 8층으로 총 50층짜리 건물인데 들어간 엘리베이터 가운데 2개가 60층짜리 엘리베이터였다. 그러니까 건물 설계도에는 나오지 않은 숨겨진 곳이 있다는 소리였다. 지하에.

만약 기순이가 지하에 갇힌 상황이라면?

들어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탈출이었다. 일본 제약회사들처럼 지하에 비밀 실험실이나 연구소가 있다면 차단장치, 소각장치를 비롯해 다양한 장치들이 있을 것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독 안에 든 쥐가 된다는 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지하로 내려가서 찾는 건 위험했다.

‘내려갈 수 없다면?’

올라오게 하면 될 일이었다.

마루의 시선이 설계도면 한쪽을 바라봤다. 회장실이라고 적힌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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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일렁이는 무언가가 헬기 착륙장 구석을 향했다.

오진 그룹 빌딩 옆에 있는 높은 빌딩. 49층짜리 건물 옥상에서 오진 빌딩을 내려다본 마루가 무전기를 점검했다.

샬롯 심 회장은 신영 그룹과 회담을 한다며 헬기를 이용해, 신영 빌딩 옥상에 마루를 내려줬다.

‘신영 그룹 빌딩이 바로 근처에 있어요. 거기서 소형 부스터를 이용하면 오진 빌딩 옥상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은신 로브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1층에서 회장실까지 가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옥상 헬기 착륙장을 통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가능했다.

혹시 들킨다고 하더라도 1층에서 뚫고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가는 것이 훨씬 빨랐고.

[3. 2. 1.]

은신 로브로 몸을 감춘 마루가 내달렸다.

푸화하하학-

소형 부스터가 파란 불꽃을 내며 마루의 몸을 멀리 날려 보냈다.

탁-

오진 빌딩 옥상.

헬기 착륙장에 떨어진 마루가 아래로 내려가는 잠긴 문을 향해 다가서자, 붉은빛을 내며 잠긴 문이 초록빛으로 풀렸다.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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