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98화 (198/280)

러스트 [RUST]-198

사랑에 대해

인간의 본질이며 진리라고 한 사람이 있었고, 어떤 학자는 단순한 호르몬 작용일 뿐이라고 했다. 한 예술가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위선과 자기만족이라고 했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어떻든 나오진은 부인을 사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손을 잡았을 때부터, 첫 키스의 날카로운 기억까지 생생했기에. 아내의 외도와 이혼 소송 그리고 마지막은 그를 무너뜨리는 데 충분했다.

펠릭스와 수면제를 섞어 먹고 영원히 잠든 아내는 웃고 있었다. 그 괴이한 미소. 어딘가 넋이 빠진 미소가 그를 쥐어짰다.

무엇 때문일까? 아내가 외도하게 된 이유가 뭘까?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이곳으로 이사 와서? 선량한 얼굴로 친절한 척 자랑질이나 하는 빌어먹을 앞집 년 때문에? 약 때문에?

이사를 오게 된 것도, 아내가 우울증에 빠지게 된 것도, 약을 먹게 된 것도. 전부 딸 때문이었다. 딸이 고집부리지 않았다면, 딸이 약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렇게 나오진은 딸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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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속에서 속닥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도자기 인형같이 생긴 여자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자기들끼리만 말하는 건 반칙이었다.

“볼륨 좀 키워보세요.”

“지금이 최대입니다.”

[······지···]

[···래서?]

중간중간 들리는 단어. 그녀의 영민한 머리는 단 몇 단어에서 전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졌다. 옛날이야기?

우욱-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에 그녀는 재빨리 목덜미에 주사기를 박았다. 치익- 순식간에 퍼지는 약제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가씨!”

“괜찮아요.”

비척비척 자리에 앉은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은 달랐을까?

‘약 먹고 쑥쑥 커야지.’

‘이 약 먹으면 아픈 거 금방 호-해요.’

‘상처에 약 발라야지.’

어린 시절 그녀에게 있어 약이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마법과 같았다.

그래서였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와 같이 등교하고 싶어, 이사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반대했다. 계속 반대하는 엄마. 착해지는 약은 없을까? 화내지 않고 찬성해주는 그런 약?

그래 약을 만들자. 엄마가 착해지는 약.

그건 어쩌면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이것과 저것을 섞으면 이런 효과가 생길 것 같다는 느낌. 그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

‘엄마 여기요.’

‘어머 엄마가 좋아하는 주스네.’

엄마는 약을 탄 주스를 드시곤 착해지셨다. 역시 약은 좋았다. 착해진 엄마는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전에는 안 그러셨는데 왜 그러실까?

조금씩 아빠와 엄마가 다투기 시작했다. 점점 더 힘들어하는 엄마. 그래. 행복해지는 약을 만들어 드리자. 이번 약은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만들 수 있었다. 엄마가 행복하고 아프지 않게.

‘이메일 보냈어요. 엄마 행복해지는 약이에요.’

아빠는 놀라워하시면서도 고맙다고 하셨다. 천연성분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안전성 검사는 쉽게 통과됐다.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집은 점점 부자가 됐고, 엄마는 행복해하셨다. 부모님은 그만큼 바빠지셨다. 아빠도 엄마도 없는 큰 집에서 혼자 있기 싫다는 핑계로 그를 만나러 갔다.

‘어- 나루랑 같이 공부하게? 공부를 싫어하는 녀석인데 매번 챙겨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사실 오빠를 만나려고 왔어요.

그렇게. 앞집에 가면 사랑하는 오빠가 있었고, 강아지처럼 따르는 여동생이 생겼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외로웠지만, 엄마도 아빠도 행복해하니까 괜찮았다. 새로 생긴 오빠랑 동생이 있으니까.

그렇게 지내는 것도 잠시, 엄마와 아빠가 크게 싸우며 이혼한다고 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 사람 얼굴 보기 힘들어서, 이혼하려고요.’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가정에는 신경 쓰지 않고서. 부인한테만 책임 있다고 그러면 되겠어요? 잘 생각했어요.’

‘······.’

‘이혼한다고 강하게 나가야지 정신 차린다니까요. 요즘 세상에 한 번쯤 실수 안 하는 사람 있나요? 남자들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가정을 생각하고 애들 생각해서 참고 사는 거지.’

오빠네 엄마와 이야기하는 소리, ‘사랑이 식어서 그렇다.’, ‘사랑하는지 모르겠으면 이혼해야지.’, ‘숙이는 사람만 힘들어진다.’ 알 수 없는 이야기들 가운데 확실한 건 하나였다.

사랑.

그래 다시 부모님이 사랑하게 하는 약을 만들자. 사랑에 빠지는 약. 그 약이면 아빠와 엄마도 다시 사랑하게 될 거고, 오빠도 날 사랑하게 되겠지?

부모님을 위해, 오빠랑 사랑하기 위해 약을 만들었다. 만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엄마.’

차갑게 식은 엄마는 웃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건. 엄마가 행복해 지기를 바래서 만들었던 약과 수면제.

‘미옥아!!! 안 돼!!! 미옥아!!!’

아빠는 엄마가 잠들고 난 뒤 변했다.

짝-!

‘어딜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는 거야!’

‘종아리 걷어.’

아빠는 점점 이상해졌다.

‘앞집 가지 말라고 했지?’

짝-!

‘네 엄마가 물들어서 그렇게 됐다고 그랬는데도 가?’

짝!

‘그 새끼가 그렇게 좋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는 게. 벌써 까져서 남자 새끼 꽁무니나 쫓아다녀?’

그리고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빠가 들이닥쳤다. 아빠의 손에 들린 약. 엄마와 아빠가 다시 사랑했으면 해서 만들었던 약이었다.

‘이건 뭐야? 이건 또 뭐냐고!’

‘네 엄마 그렇게 만들었으면 됐지, 이건 또 뭐야. 말해봐. 이번엔 대체 뭘 만든 거야!’

‘···사랑하는 약이요.’

‘사랑? 씨발- 사랑?’

술에 취한 아빠는 약에 빠져 괴물이 됐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는 약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거리를 두는 모습.

‘오빠 이번에 저 에스코트 좀 해주세요.’

‘어··· 나는 그날 일이 있어서 힘든데. 기순이 어때? 내가 말해 둘게.’

‘···여기 초콜릿이요.’

‘와- 직접 만든 거야? 고마워. 잘 먹을 게.’

‘지금 하나 먹어보면 안 돼요?’

‘그래. 그러자. 맛있는데?’

먹어도. 사랑하지 않았다. 점점 멀어졌다.

왜지? 무엇 때문이지? 약이 잘못됐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멀어져갔다.

‘월드 그룹 홍 과장이라고 합니다. 아가씨.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홍 과장님. 필요한 게 뭐죠?’

‘BH와 KA가 대량으로 필요합니다.’

‘좋아요. 아?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에 제가 말했던 사람. 특이 체질 같으니까 반드시 확보해야 해요.’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확실히 목줄 채워놓겠습니다.’

‘혹시 유전일지 모르니, 가족 전부 관리하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홍 과장이 죽었다. 그 사람은 사라졌다. 가족을 버리고, 그렇게 아끼던 여동생을 버리고 외국으로 갔다.

후---

구역질이 가라앉자, 정신이 맑아졌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아야지.

그녀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으르렁거리는 모습. 과거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비와 도망치는 남자.

드디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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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진 회장의 말에 마루는 어이없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불행의 시작이 우리 집안 탓이고, 우리 엄마 탓이고, 내 탓이다?

“그렇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제는 내 손에 죽고 싶다? 와- 진짜-”

개새끼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기들은 피해자고, 이쪽을 가해자로 만들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더 지랄 같은 속셈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댁을 죽이면 딸이 어떻게 할까? 아비를 죽인 새끼를 사랑할까, 사랑하지 마라, 끝까지 괴로워해라? 이런 미친 새끼가.”

사랑하니 마니 할 것도 없지만, 이 새끼는 진정 미친 새끼였다. 그만큼 지 부인을 사랑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웃기지 마라, 그딴 건 자기 사정이지. 그걸 왜 엉뚱한 사람과 자기 딸에게 지랄인가?

괴물을 만든 건 자기였으면서, 누가 괴물을 만들어? 아주 지랄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새끼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려서 고통받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오진 회장이 낄낄거렸다.

“네 동생. 잘 컸더라.”

“···미친 새끼.”

“······.”

“······.”

고요함 속에서 마루가 나오진 회장을 바라봤다.

“좋아. 아저씨. 내 손에 뒈지고 싶다. 이거지? 기순이 어딨어?”

“죽었다니까? 복수하라고!”

“지랄하지 마시고요. 똑바로 사실대로 말합시다. 오뚝이로 만들어드릴까? 바닥에 똥칠하면서 사랑하는 딸년 수발 받고 살고 싶지 않으면.”

“그냥 죽이라-”

나 회장의 말을 끊고 마루가 말을 이었다.

“뒈지고 싶습니까? 그럼 사실대로 말하자고요. 죽지도 못하게 해주는 수 있습니다. 아주.”

슈컥-

손목까지 잘렸던 팔이, 어깨부터 떨어졌다. 곧바로 지혈하며 마루가 나오진 회장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팔, 두 다리 잘리고 죽지 못해 살고 싶으면 계속 그러라고.”

‘미친 새끼. 낄낄.’ 웃던 나 회장이 이를 드러냈다.

“모른다.”

“모르신다? 기순이가 여기 들어온 거 알고 왔는데?”

슈칵-

한쪽 다리가 분리됐다. 허벅지 부분이 잘려 피가 솟구쳤지만, 지혈제를 바르자 순식간에 상처가 막혔다. 죽음보다 더 싫은 게, 기저귀 갈며 사는 것이었는지 나 회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놈이 탈출했다.”

“자세히.”

“최루탄에 총기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

하긴, 기순은 일반인이었다. 폭발물과 총화기, 최루탄으로 무장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마루가 칼을 다시 치켜들자. 나 회장이 차라리 죽이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모를 통해 엮든, 여동생을 통해 엮든, 기순이를 통해 엮든 마지막 목표는 마루였다고 외쳤다.

“당신들 전부 싸이코야?”

“낄낄. 그러는 너는? 네 집안은 정상이고?”

“···씨발.”

“아는 건 다 말했다. 약속 지켜.”

아- 그래. 기순이가 여기 없다면야. 그렇게 죽고 싶다면야.

살려 뒀다가 또 무슨 병신 짓을 할지 모르니 깔끔하게 쉬게 해주지. 마루가 칼을 치켜들자, 천장에 달린 스피커가 울렸다.

[거기까지 하세요.]

[팔다리를 자르는 건 괜찮아도, 죽이지는 마세요.]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이랍니다.]

나주현의 밝은 목소리. 어딘가 현실에서 어긋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나오진 회장이 발작했다.

“죽여줘! 제발! 약속을 지켜!”

[멈추세요. 가족들을 생각하셔야죠.]

가족. 이리저리 뜯기고 헤진 단어. 가족들을 위해서 참아라? 지금 나한테?

검은색 실선이 길게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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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으로 갈린 실선이 나 회장의 몸통을 지나, 그가 앉은 소파까지 이어졌다. 서서히 미끄러져 무너지는 나 회장의 얼굴에는 어쩐지 해방감이 담겨있었다.

“장례 잘 치르고. 이만 간다.”

[당신···. 당신!]

“이걸로 은원 끝내고 싶은데, 건드리고 싶으면 더 하든지.”

[가스. 가스 넣어욧!]

천정에서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방독 마스크를 쓴 마루는 가스를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으로 향했다. 일반 창문이 아니라 방탄유리로 된 창문.

쩡!

칼질 한 방에 하얗게 변하는 창문

[안 돼! 당장 잡아! 저 사람 잡으라고!]

쩡!

[하지 마! 멈춰!]

하얀 거미줄이 가득한 창문을 까만 칼날이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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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마! 가면 죽일 거야! 동생 죽인다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마루가 빌딩 외벽에 칼을 박아 넣었다.

쿠콰가가가가각-------

수직으로 길게 찢어지며 낙하속도가 줄어들었다.

[치지직- 함정입니다. 회장실과 회의실 내벽과 문에 복합장갑이 들어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후드의 다급한 통신이 들어왔다.

빨리도 말한다.

“빌딩 차단하고, 119에 신고해.”

[알겠습니다.]

구급차와 소방차 소리, 모인 인파 사이로 마루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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