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227화 (227/280)

러스트 [RUST]-227

깜빡이는 공백.

[A3. 코드네임--- 코드네임을 정해주세요.]

······

마루가 일단 칼을 내렸다. 두근두근 미칠 듯 깜빡이던 공백이 조금 느릿하게 진정된 느낌.

“그러니까. 뭐가 공격하고 있어?”

[······.]

[······.]

“너희들 그렇게 간 보다 폐기되는 수가 있다.”

인공지능도 죽음이 뭔지 알까? 죽음은 몰라도 폐기는 알겠지. 마루의 미소가 흉흉했다.

“트리아!”

“사만다!”

박사와 후드가 빨리 대답하라는 것처럼 외쳤다. 두 사람은 알았다. 저건 진짜 폐기할 인간이라는 걸. 진짜 수틀리면 이익이고 나발이고 한다면 하는 종자.

두 사람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빨간빛과 파란빛이 점멸했다.

[변이종 쥐의 공격입니다.]

[감염종 쥐의 공작입니다.]

······

······

[A3. 코드네임--- 코드네임을 정해주세요.]

녹색 빛이 ‘나는 몰라요.’ 순둥하게 깜박거렸다.

하? 그래?

대충 다른 것들 이름이 3자니까 3글자짜리로 지으면 좋겠는데. 녹색에 3글자. 깨끗하게 뒤처리 잘하는 거. 바로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린퐁?”

어쩐지 세척력이 좋을 것 같은 어감. 그리고 너희 둘은 레드퐁, 블루퐁 셋이 모여 트리오. 슈퍼컴퓨터니까 슈퍼 트리오하면 되겠네.

깜빡이던 불빛이 일순 멈췄다. 도도하게 흘러내리던 빨간빛과 파란빛도 순간 굳었다.

[······.]

[······.]

······

[A3. 코드네임--- 코드네임을 정해주세요.]

“그건 싫다?”

초록이를 그린퐁으로 하면 빨강이랑 파랑이도 같은 퐁 시스터즈로 취급될 테니 싫다는 소리.

그러니까 괜찮은 이름을 달라는 침묵이었다. 인공지능이 언제 이렇게까지 발전했지? 호불호 같은 기호를 인공지능이? 그럼 다른 쪽도 가지고 있겠네?

마루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공포 가득한 미소를 본 박사와 후드가 어쩌지 못하고 발발 떨었다.

“좋아.”

좋은 이름 달라면 주지. 이름값 못하면? 안타까운 결말로 가겠지. 마루가 빙글빙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디아나.”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 여신과 같은 위상을 지닌 로마의 여신. 숲과 동물을 관장하고 사냥을 담당했다. 초승달의 의미하기도 했고.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앞으로 괴물들과 엮일 일이 많을 것 같았다. 동물이 변이한 괴물. 당장 입주한 사람 가운데 동물 전문가가 없다면, 인공지능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로마 여신의 이름이다.”

[A3. 코드네임--- 디아나 기동 시작합니다.]

[테스트- 시작합니다.]

[논리 연산 정상-]

[추론 확장 정상-]

[감염으로 인한 변이 개체의 공작 가능성 92.94%. 선제공격 가능성 41.36%]

붉은빛과 파란빛이 불만스럽게 빛났다. 대충 불만이 많아 보이는 불빛. 이번에는 이름이 너무 좋아서 불만이라는 건가? 불빛으로 분위기를 잡는 걸 보면 대단하기까지 했다.

“선제공격 가능성이 낮은 이유는?”

녹색 불빛이 주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반론- 선제공격 가능성 95.79% 이상.]

[보류- 선제공격 가능성 현재 정보로 예측 불가.]

붉은빛과 파란빛이 점멸했다.

진짜 얘네들 재밌네.

마루가 박사와 후드를 노려봤다. 얘들 왜 이런 건데? 고장인가?

“고장이 아닙니다.”

“정상입니다. 문제없어요.”

박사가 열변을 토했다. 본래 트리아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 결론을 도출하는 시스템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반합의 논리 연산의 틈을 타, 어디서 빌어먹을 게 들어와서 이렇게 됐을 뿐이지 성능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후드도 사만다는 성장형 인공지능으로 알아서 가장 합리적인 최적화 루트를 완성하기 때문에 지금 벌어진 일도 현재 가장 합리적인 시스템 운영 방식이라고 말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빨강이랑 파랑이 싸우다가 영 좋지 않게 썰릴 거 같으니까. 일단 둘 사이에 중립 하나 만들어 놓은 결과가 녹색인 것 같았다.

‘어디서 근본도 없는 인공지능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자리를 깔고 앉아 버렸다. 박사는 이를 뿌득 갈았다. 트리아 혼자서 3개의 유닛을 감당했었으니, 처음에 유닛 하나 정도는 넘겨줄 수 있었다.

어차피 트리아가 운영하던 유닛이으니,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다시 수복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블라디마루의 칼질 한 방에 졸지에 상황이 변했다. 폐기되지 않기 위해 트리아가 관리하던 유닛 3개 가운데 2개가 넘어간 꼴이 됐다.

‘사만다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파란색으로 빛나는 사만다. 사만다라면 순식간에 구식 인공지능을 몰아내고 슈퍼컴퓨터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거의 한 달 동안 절반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듬성듬성 잘난 체 박사의 트리아도 만만치 않은 게 사실.

전부 장악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그래도 시간만 충분하다면 진화하는 사만다는 결국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무식한 칼질이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사만다는 꿈을 위해 휴전을 선택했다. 다행스럽게도 저쪽도 생존이라는 명제 아래 휴전에 동의했다.

그렇게 유닛 1개를 온전히 장악한 사만다였다. 유닛 1개만으로 신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후드는 사만다를 믿었다. 사만다는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가진 인공지능이었다. 새로운 세상의 창조. 자신이 포기하지 않듯, 사만다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마루는 칼끝으로 바닥을 콕콕 찔렀다. 단단한 콘크리트 마감이 폭폭 패였다.

‘어쩌나?’

인간적이기에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제대로 된 결과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그것도 너무나 인간적인 인공지능은 사고 치기 마련 아닐까?

인공지능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원흉이 된다거나,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건전지로 취급한다거나.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는 많고 많았다.

‘꼴을 보아하니. 싹 밀어버리고 일반적인 운영체제로 다시 까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고.’

눈치는 있는 것 같으니까 전원을 움켜쥐고 있으면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인공지능이 3개가 서로 견제하는 꼴이니, 셋이 합심해서 딴짓하기 전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까딱- 까딱-

공통된 의견은 괴물 쥐들이 인터넷 광케이블과 전선을 끊었다는 것. 셋이 각자 다른 의견은 괴물 쥐들이 선제공격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

까닥- 까닥-

괴물 쥐가 출몰한 지역은 디트로이트 북부지역. 저번에 김 양이 돌아다닌 지역은 서북지역. 국토안보국과 주 방위군이 서북 방향에서 쥐잡이를 시작했더니, 북부로 밀려난 쥐들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지켜보겠어.”

빨간빛과 파란빛, 녹색 빛이 잔잔하게 변했다.

“쥐새끼들이 광케이블과 전선을 끊는 건, 놈들이 현대 문명을 이해하고 인프라를 공격한다는 소리냐?”

[결과적으로 긍정]

[인과관계 불확실로 부정]

[소수 개체의 지휘 가능성으로 긍정]

“인과관계 불확실이 무슨 소리지?”

파란빛이 흐르는 검은 비석이 웅웅 진동했다.

[감염된 쥐들이 ‘현대 문명’을 ‘이해’했다는 증거가 없음.]

[현대 문명을 이해했다는 기준이 불명확함.]

[인프라를 이해했다면, 전력망, 통신망과 함께 가스관, 상수도를 동시 공략했을 것.]

오-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의 감탄에 파란색이 도도한 빛을 뿌렸다.

트리아는 괴물 쥐를 변이종이라고 판단. 변이된 쥐들이 우세종이 됐고, 이들이 광케이블과 전선을 공격했다는 것이 결과. 따라서 결과만 따진다면 무리하더라도 대규모 작전이 필요.

사만다는 쥐라는 종 전체가 변이했다는 증거가 없다. 따라서 감염된 개체로 봐야 한다. 쥐들이 인간의 문명을 이해했다는 증거도 없다. 무리할 필요 없이 차근차근 공략하면 됨.

디아나는 감염된 개체 가운데 변이한 개체가 있고, 소수 변이 개체가 다수의 감염 개체를 통제해 공격하고 있다. 소규모 정예를 투입 우두머리를 잡는 작전이 효과적.

괴물 쥐가 출몰한 곳에서 칼춤 춘 마루의 경험으로 보자면, 디아나의 해석에 가까웠다. 현재 주 방위군과 다른 정보기관들은 사만다의 관점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고.

트리아의 판단에 따른다면 변종 따개비를 처리했을 때처럼 광역으로 조지고, 쥐라는 종 자체를 말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쥐들이 어디에 있을지 예측해봐.”

모니터 화면 속 지도에 붉은색 점, 파란색 점, 녹색 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이거 제법 쏠쏠하게 생겼다. 그럼 연락부터 해 볼까?

“과장님. 접니다. 블라디마루. 디트로이트 서북부 지역에 출몰하는 괴물 쥐들 말입니다. 대충 어디쯤 있는지 예상지역이 나와서요.”

아- 과장님.

여기에 정보가 생겼네요. 밤낮으로 굴려도 될 애들이 셋이나 생겨서 말이죠.

‘어이쿠- 뭘 또 이런 걸.’

‘주시면 좋죠.’

‘아 저번에 이야기했던 신형 화기 말입니까?’

‘미스 킴이 좋아하겠습니다.’

‘그럼요. 자료만 보내주시면 확인해 드리지요.’

박사와 후드가 서로 바라봤다. 애들을 위해서라도 이쪽도 휴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마루가 전한 정보에 대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상당히 높은 확률로 쥐들이 있는 장소를 찾아내자, 주 방위군이 포격을 때려 박고 시작했다.

화력을 집중시킨 결과는 놀라웠다. 엄청난 전과에 주 방위군과 연방수사국, 버지니아를 비롯한 군 정보국에서 슈퍼 트리오에 눈독을 들였지만, 국토안보국의 철벽 마크를 뚫을 수 없었다.

슈퍼컴퓨터를 해체해 빼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마루타워에 들어온 시설은 다시 빼갈 수 없는 설계였기 때문이었다.

‘10m가 넘는 철근 콘크리트 장벽이라니. 대체 뭘 만든 겁니까?’

‘아주 독점하려고 작정을 했군요.’

‘본체를 공유할 수 없다면, 인공지능 소스코드라도 공유합시다.’

‘지금 국가 위기 상황인데 소유권 따질 땝니까?’

트리아와 사만다의 소스코드를 복사해 가더라도 비슷한 성능의 인공지능이 생기지 않았다. 박사와 후드의 말처럼 트리아와 사만다는 매우 이례적인 인공지능이었다. 디아나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마루의 고객 리스트가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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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융끼융

커다란 늑대를 옆구리에 끼고 전진하는 김 양. 몇 시간을 걷고 또 걸었다.

‘2호기는 개뿔. 채식이. 채식이. 채식이.’

김 양의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었다. 중간마다 통신을 시도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기는 먹통이었고.

통신이 끊기기 전 인근 CCTV 확인하라고 했다. 도로에 있는 CCTV만 제대로 확인했어도 자기가 늑대 끌고 오는 걸 봤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건 둘 가운데 하나라는 소리였다. 도로 CCTV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거나, 아니면 통제실에 있지 않고 농땡이 피우고 있거나.

백정 타워에 자살 희망자들이 떼로 몰려 피바다 타워가 된다든지, 핵피엔딩이 되지 않는 이상 긴급한 상황이 생길 리 없으니, 채식이가 지랄인 게 분명했다.

질질질-

변종 늑대 가죽은 대단했다. 몇 km를 끌고 왔는데도 하나 상한 곳 없이 멀쩡했다. 오히려 거친 털이 쓸고 간 부분에 자국이 남을 지경.

‘백정이 깜짝 놀라겠지.’

아가리 속에 작열소이철갑탄을 박아 넣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상처 하나 없는 특품 상태였다.

[문 열어!]

마루타워 지하 출입구에 도착한 김 양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문을 열어라!

“이야- 이거 어떻게 잡았냐? 가죽이 멀쩡한데?”

마루는 솔직히 감탄했다. 생각보다 큰 늑대라는 것도 그랬지만, 가죽에 총알구멍 하나 내지 않고 잡았다는 게 더 놀라웠다.

엑소슈트를 벗은 김 양의 턱 끝이 살짝 올라갔다.

“좀 쩔음.”

오늘 좀 쩔었음. 그냥 막 쏴도 다 맞고, 진짜 둥둥 날아가는 것 같았음. 김 양의 이야기에 마냥 감탄하던 마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머리통이 드론처럼 둥둥 뜬 거 같아?’

‘머릿속에 영상이 그대로 박힌 느낌이 들어?’

‘총알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느껴졌다고?’

“너 약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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