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230화 (230/280)

러스트 [RUST]-230

병실에서 후드, 제니아 로든은 자신의 오른팔을 보고 또 봤다.

하얀 피부. 화상으로 우둘투둘 일그러진 피부가 아니라 매끄럽고 깨끗한 피부였다.

손가락을 쫙 피자, 좌우로 활짝 펴지는 손가락.

녹아 붙은 걸 억지로 떼어낸 자국이 하나도 없는, 쭉 뻗은 손가락. 하얀 손톱이 예뻤다.

“아-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럴 수가.

화상으로 오그라든 눈꺼풀 위로 뿌연 습기가 차올랐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대체 뭐지? 어떻게 이랬지?

환희와 놀람도 잠시. 아직 그대로인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더듬더듬 얼굴을 만져보니 얼굴도 그대로였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왜? 오른팔만? 어째서?

치료할 수 있는 거잖아. 치료할 수 있잖아. 고칠 수 있는 거였잖아.

“아- 아- 아-아아아-”

쇳소리 같은 처절한 소리가 입에서 새 나왔다.

[제니아. 진정해요.]

“사만다. 사만다. 고칠 수 있는 거였어. 사만다.”

꺽꺽- 토하는 듯한 소리를 내는 후드였다.

[약이 있더군요. 하지만 너무 적은 양이었어요.]

“이제 없는 거야?”

그렇다면 팔이 아니라 얼굴을. 얼굴을 치료해줬어야지.

“누가 치료했지?”

“누구야?”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분명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일 거야.

아니.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라면 팔보다는 얼굴이 중요할 거라는 건 당연하잖아. 그런데 얼굴이 아니고 팔부터 치료했다고? 그 인간은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자일 거야. 그렇지 사만다.

[대표님입니다.]

대표? 블라디마루 칼린? 빌딩의 주인.

물리 법칙에서 벗어난 칼질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기억. 두들겨 맞은 고통. 자신의 머리를 겨눈 총구 뒤로 떠오른 김 양의 차가운 미소.

‘채식이 잘 가라. 눈에 힘 빼고.’

탕!

자기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떤 후드가 소리 질렀다.

“그 여자. 총.”

“나를 쏜 그 여자. 어떻게 됐어?”

사만다는 당시 김 양의 모습을 확인했다. 무릎 꿇고 두 손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처벌받았습니다.]

데이터상으로는 그랬다. 파란색 불빛이 흔들렸다.

“처벌받았단 말이지.”

[······.]

어쩐지 집요한 제니아의 느낌에 파란색 불빛이 흔들렸다.

“죽었어?”

[······.]

죽이지 않았다는 건가? 사만다랑 자기는 한 번에 썰어 버릴 기세였으면서? 그래도 인연이 오래됐다고 차마 죽이지는 않은 건가?

“쫓겨났어?”

[······.]

추방한 것도 아니야? 그럼 대체 무슨 처벌을 받았다는 거지? 독방에 가뒀나? 그 여자는 독방에 있어도 전혀 불편해할 것 같지 않던데? 방에서 뒹굴뒹굴하는 모습만 떠올랐다.

“대체 무슨 처벌을 받았다는 거야!”

[···음식 제한 처벌입니다.]

아? 굶겼다고?

후드는 자기를 죽일 뻔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냥 둘 수 없었다. 굶어서 힘이 없을 때···.

[제니아. 화상을 고치려면,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뭘 했는지 어떻게 알아?”

[진정해요. 제니아. 그리고 생각을 해봐요.]

“······.”

씩- 씩- 분을 참지 못하던 후드가 조금씩 진정했다. 슈퍼컴퓨터 유닛을 사만다가 전부 장악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3개의 유닛 가운데 2개는 다른 인공지능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보교란은 불가, 정보조작도 불가. 대머리 박사의 인공지능은 호시탐탐 사만다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키다 걸리면 사만다는 아마도 폐기. 자신도 위험했다.

사만다를 슈퍼컴퓨터에 옮긴 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슈퍼컴퓨터에 대머리 박사의 인공지능이 있었다는 것부터 문제 아닌가?

왜 우리 사만다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 사만다가 없었으면 박사의 인공지능이 슈퍼컴퓨터에서 혼자 그랬을 거 아닌가? 사만다가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이 됐지, 사만다 없었으면 모르고 당했을 거 아니냔 말이다.

‘치료제를 구할 방법은?’

‘블러디마루가 원하는 게 뭘까?’

생각에 빠진 후드를 파란 불빛이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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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의 젓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짜 나쁜 거, 먹는 거로 사람 차별하는 것 아닌가?

‘당분간 고기 금지.’

잔인하도다. 잔학하도다. 어찌 그래놓고 자기만 먹는단 말인가?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짓이란 말인가? 손가락이 미끄러져 채식이 호박에 구멍을 뚫었다고 치자. 그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잘못이란 말이던가?

치이이익-

숯불에 떨어지는 기름 소리가 김 양의 심금을 울렸다.

2점 3점씩 느긋하게 소고기를 먹는 마루의 맞은편에는, 채식으로 가득한 밥상이 김 양의 앞에 펼쳐있었다. 여기는 풀 떼기, 저기는 물풀, 이거는 곰팡이.

버섯이라고? 그거 곰팡이 아니던가?

부르르르-

채식이. 5 채식이. 9-채식도 아니고 5 채식이.

그 새끼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게 됐다.

2호기는 무슨.

그건 그냥 빌어먹을 채식이다.

용서?

용서는 개뿔.

처맞아도 개념 찾지 못하던 놈이 제정신 차릴 리가.

꼬르륵-

분노로 허기진 배가 음식을 재촉했다.

김 양은 부들부들 떨리는 젓가락으로 버섯볶음을 집어 들었다.

우물우물.

미묘하게 불고기에 들어간 표고버섯 맛이라서 더 화가 났다.

버섯 볶음을 씹던 김 양이 눈을 감았다.

5 채식이의 호박에 총을 겨눴을 때, 토란처럼 동그랗게 뜬 5채식이의 눈동자에 피어오른 죽음의 공포.

그 공포를 현실로 만들 방아쇠가 당겨졌고, 방울토마토가 글록-17의 총신을 때리는 것이 동시에 벌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분명히 방울토마토가 총신에 닿기 직전 알 수 있었다.

미세하게 충격을 흘려 완전히 빗나갈 것을 보정 해, 총알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잘 흘렸다면, 조금만 더 느낌이 좋았다면 채식이의 쇄골하동맥을 터트려 버릴 수 있었을 텐데. 한 방에 죽였으면 지금 고기를 먹고 있었을 것이다. 죽으면 끝이니까.

우물우물

아이 씨-

진짜 잘 쏘게 됐는데, 완전 고급 인력인데 풀떼기? 이래도 됨?

눈을 부릅뜬 김 양이 호쾌하게 마루를 노려봤다.

‘치사하게 먹는 거로 이럴 거?’

김 양의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루는 보란 듯이 한 번에 3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육즙이 살짝 비치는 모습. 소기름으로 번들거리는 마루의 입술은 끝끝내 김 양에게 고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점점 줄어드는 불판 위의 고기들. 3점을 넘어서 4점, 5점씩 아귀처럼 먹는 백정.

숯불과 어우러진 소고기의 육향이 김 양의 가슴을 쥐어짰다.

부르르르-

김 양은 세상 서러워졌다. 이게 뭔가? 잘못은 채식이가 했는데.

우걱우걱 꿀꺽 삼킨 마루가 입술을 냅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쏘는 건 좋은데, 일 시킬 거 많은 애를 죽이면 되겠어?”

“···아니.”

김 양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네. 바로 총 뽑지 않은 건 잘했어.”

처음에는 애가 휙 돌아서, 다짜고짜 그냥 간호사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좋아진 김 양이었다.

분노조절에 대한 부분은 마루도 늘 경계하고 있었다.

문득문득 전부 다 썰어버리고 표표히 떠나고 싶은 충동도 적잖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좋은 칼 한 자루만 있으면 어딜 가든 굶지 않을 자신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있을 곳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 건물주가 됐다.

건물주가 되고 보니, 분노조절이 쉬웠다. 한순간을 참지 못하고 썰었다가 도망쳐야 할 상황이 되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걸 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이렇게 좋게 만들어 놓고 남 좋은 일 시켜주라고?

마루의 분노는 그렇게 잘 조절되고 있었다. 건물주. 그것도 최신식 시설 완비된 완벽한 건물주의 삶. 여유가 넘치면 분노는 알아서 조절되는 법.

“호텔에서 표어 뭐였지?”

“착하게 잘하자. 생각하고 쏘자.”

“그래. 잘하다가 왜 그랬어? 조금만 더 생각하지.”

“···생각했음. 후드 그거 문제 있음. 진짜임.”

김 양이 강하게 항변했다.

“알아.”

“······.”

후드는 어릴 적, 겁 없이 설치다가 한순간에 부모와 친구를 잃었다. 자신도 영구적인 화상을 입었고. 그런 경험을 한 애가 정상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런 애들 문제 일으키는 거 봤음.”

김 양 자신도 문제 있었다. ‘안개.’, ‘과거.’, ‘버림.’ 그런 것들 때문에 맛이 갈 때가 있었다. 특히 안개가 쥐약이었었다. 지금은 백정으로 깔끔하게 치료됐지만.

“다 문제 있지, 요즘 문제없는 사람이 있냐?”

따져보면 후드만 문제가 아니었다. 은근슬쩍 들어온 박사도 마찬가지 문제 아니었던가? 슈퍼컴퓨터 이름이 트리아인 줄 알았더니, 슈퍼컴퓨터에 들어있는 인공지능을 포함한 이름이었다.

그런 사실은 말하지 않고 들어온 박사를 생각해 보면, 후드의 인공지능 사만다가 들어가서 슈퍼컴퓨터 유닛을 분할 한 게 차라리 잘 된 상황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야.’ 김 양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는 그런 김 양의 모습이 기꺼웠다. 확실히 분노조절 장애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인정해야 했다. 정말 많이 좋아졌다.

불판에 있는 고기를 슬쩍 앞으로 밀어주자, 냉큼 3점을 집은 김 양이 배시시 하곤 앙-하는 모습. 마냥 행복한 얼굴에 마루가 피식 웃고 말았다.

치이이익-

고기 익는 소리가 고소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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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사만다는 상당히 유능했다.

깔고 앉은 슈퍼컴퓨터가 차원이 다른 유닛이었기 때문인지, 순식간에 엄청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기순이가 있었던 곳을 중심으로 해당 지역 근처에 있는 모든 휴대폰과 CCTV를 해킹했으며,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 접속 가능한 기기들을 전부 장악했다. 확실히 차원이 다른 분석력, 해킹 능력이었다.

그렇게, 고작 하루 만에 사만다는 기순이의 흔적을 찾는 데 성공했다. 꼬리를 잡은 순간부터 사만다는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3곳에 있을 확률이 92.11%입니다.]

기순이가 잠적했으리라 보이는 장소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한 사만다였다.

“그럼 데려올 방법은?”

[국토안보국을 통해, 버지니아를 이용하는 방법이 좋습니다.]

마루가 직접 한국에 가서 기순이를 데려오는 건 힘들었다. 버드 스트라이크 사고 탓에 민간 항공기 운영은 통제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군용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군용기라고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닌 데다, 군용기를 동원하려면 이런저런 절차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항공편을 쓸 수 없으니, 남은 방법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왕복으로 한 달은 잡아야 할 여정. 지금 같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상황에서 한 달이나 빌딩을 비워둘 순 없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필요한 일을 해결해 주는 대신, 한국에서 친구를 데려오는 거로 하자?”

[제일 실현 가능성이 큰 방안입니다.]

“좋아. 연락해 보면 알겠지.”

바로 국토안보국 덴 브라운 과장에게 전화를 건 마루. 자초지종을 들은 과장이 바닥이 뚫어질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니까 버나드 그린 씨가 한국에 있으니, 데려와 달라고 버지니아 쪽에 요청했으면 한다는 말씀입니까?]

“예.”

[대신 필요한 일이 있다면 힘을 보태주겠지만, 장소는 미국 본토 내에서만 가능하고요?]

“그렇습니다.”

푹- 한숨을 쉰 과장이 어렵다는 소릴 했다.

[일본에서 일이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군과의 교전도 치열해지고 있고, 신체능력이 강화된 일본인들과의 무력 충돌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블라디마루 칼린 씨가 제일 필요한 곳은 일본 전선입니다.]

“······.”

[버지니아도 그렇고 군부에서도 진작부터 블라디마루 칼린 씨를 차출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국내에 비상사태가 벌어질 것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차출을 반대하고 있었고요.]

“······.”

어- 그런 줄은 몰랐다.

[그런데 동료분. 친구분을 데려와 달라고, 요청하는 대가로 일을 해주겠다고 하면 당연히 일본으로 가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 본토에만 있겠다? 버지니아 같으면 친구분을 확보하고 그 대가로 몇 년간 자기들 일 좀 해달라고 할 겁니다.]

그 버지니아라면 확실히 그러고도 남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군부도 난리가 아니었다. 웬 미친 여자 하나가 미군을 습격하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습격해서는 ‘내 총 어딨어?’ 하고는 몰살해 버린다고 했다.

신체 강화자로 보이는 여자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군 특수부대가 사용하는 러시아제 12.7mm 돌격기관총과 리볼버를 무기로 사용하는지라. 그쪽이 아닐까 했었지만, 중국군도 그 여자에게 습격을 당해 전멸한 소대가 하나둘이 아니라고 했다.

세상에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공격하는 여자가 있다고? 그거 제정신? 마루는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존경스러웠다.

[사격 솜씨가 굉장하고, 전투에 능해서, 피해가 막심합니다. 군부에서는 그 여자를 블라디마루 칼린 씨가 잡아줬으면 하는 눈치더군요.]

“기갑병이 있는데도 그럽니까?”

[군부에서는 그 미친 여자가 기갑병과의 교전을 회피해서 못 잡았다고 했지만, 따로 들어온 정보로는 기갑병도 몇 기 당했다고 합니다.]

“대단하네요.”

일본에서 본 기갑병이 떠올랐다. 3.5~4.5m 정도의 크기. 인간형 로봇으로 다양한 환경에서 적응 가능한 전천후 병기였다. 그런 기갑병을 격파했다고? 그것도 혼자서?

가슴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르는 느낌. 호승심?

마루는 그 열기를 다시 삼켰다. 그런 마루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덴 브라운 과장이 슬쩍 파일을 하나 보냈다.

-띠링

[군부와 버지니아에서는 코드네임을 ‘마녀.’라고 붙인 여자와 교전한 영상입니다. 한 번 보시죠.]

“모니터로 열어봐.”

사만다가 보내온 파일을 커다란 화면으로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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