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231화 (231/280)

러스트 [RUST]-231

흐릿한 영상.

화질이 나쁘다기보다는 시야가 흐리다는 느낌. 일본은 3월 중순임에도 아직 화산재와 연기가 걷히지 않고 있었다.

뿌연 시야 속으로 무언가가 지나갔고. 총구를 돌린 병사의 뒤에서 뻗은 손에 병사의 목이 수수깡처럼 꺾였다.

뿌득-

타다다다당

순식간에 5발의 총탄으로 5명의 시체를 만드는 모습. 12.7mm 특수탄이라 방탄복도 소용이 없어 피해가 컸다.

분대 하나는 3~4분 만에 시체 분대로 변했고. 소대 하나가 시체 소대로 재편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15분 남짓이었다.

총잡이가 근접전을 즐겨 하다니. 이건 또 희귀한 스타일이었다.

[-콰직.]

병사의 입에 거대한 리볼버 총구를 욱여넣은 여자가 전술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 총 어딨어?]

아니, 입에다 총구 박아 넣고 물어보면 대답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진성 또라이 같은 짓을 하는 여자의 얼굴선이 묘하게 낯익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형과 광기에 찬 눈빛이.

어?

?!

마루와 김 양이 서로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어려진 모습.

‘저거 유 이사 아니야?’

‘유 이사 같음.’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하는 순간, 화면 속에서 둔탁한 총성이 울렸다.

투앙!

12.7mm 탄에 병사의 머리통이 폭발하듯 터졌다.

주둥이에 총 물리고 쏘는 버릇. 유 이사가 맞았다.

사방으로 흩어진 핏방울과 뇌수. 입가에 튄 찌꺼기를 핥은 유 이사가, 전술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내 총 가져와.]

[아니면 내가 간다.]

어-

음-

온다고?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는 건. 얼굴을 깠으니 앞으로 막 나가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수틀리면 미국으로 온다는 거 같은데?’

마루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는 김 양. 마루는 피식 웃었다. 놀라기는, 그래도 그렇지 진짜 올까? 유 이사는 미국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원하는 워너비 아이템 그 자체인데?

‘회춘’이라는 비밀을 간직한 아이템이 자기 발로 온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사람들이 넘치고 넘쳤다.

그런 아이템이 대놓고 얼굴 깠는데, 유 이사인지 모를까 싶기도 했지만 덴 브라운 과장의 표정을 보니,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저렇게 변한 얼굴이면 모를 법하기도 했다. 어려도 너무 어려 보여서 유 이사 본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얼굴만 따져보면, 이제 23살인 김 양보다도 어려 보이는 모습.

덴 브라운 과장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영상 속 여자는 일본에서 죽은 월드 PMC 유 이사의 딸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모친의 유품인 총을 원하는 것 같은데, 버지니아에서 유품을 회수하면서 한 자루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한 자루는 행방불명입니다.]

행방불명인 총이라는 말에 김 양이 다시 움찔했다. 이거 표정은 잘 관리하면서 몸은 너무나도 정직한 김 양이 슬쩍 마루를 봤다.

‘이거 어캄?’

‘일단 가만히 있어. 티 내지 말고.’

[유 이사는 가족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품을 요구하는 딸이 나타나서 학살을 저지르고 있어, 버지니아에서 상당히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유 이사’의 딸이니까요.]

덴 브라운이 상당히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악센트를 준 것을 보면, 회춘에 대한 것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에서는 ‘그 유 이사’의 딸이 확실하다면, 일본에서 더 날뛰도록 잠시 두자고 하고 있고, 심각한 인명피해를 입고 있는 군부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잡아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두는 게 목적이라면 잡은 뒤에 일본에 두면 될 일이라는 거죠.]

유 이사의 딸이라면 일본에서 변이를 일으켜 또 ‘회춘’ 능력에 당첨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

그렇게 심각한 피해를 받았으면서도 퇴각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뭐겠는가?

신일본이니, 일본 부흥이니 하면서 미군 보급창 습격하고 있는 일본 강화자들과 치고받고, 일본인들 빼돌리는 중국군과 교전하고, 분노조절 감염자, 뇌와 심장 파먹는 변종, 변이 괴수들과 싸우면서도 붙어 있는 이유가 뭐였던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회춘’ 뽑기의 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회춘’ 뽑기 확률이 상당히 높은 유 이사의 혈육으로 보이는 여자가 일본에서 등장했으니, 풀로 흥분해 버린 상황.

[버지니아와 군부에서는 그 여자를 ‘생포’할 수만 있다면, 무얼 원하든 들어 줄 생각이라고 합니다.]

뭐든? 마루의 자본주의적 본능이 꿈틀거렸다. 천조국에서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참 좋은 단어였다. 일단 지금 있는 빌딩을 보라. 이게 천조국 스케일이었다.

자본주의적 기세를 풍기는 마루를 보곤 도리도리하는 김 양.

‘왜?’

‘싫음. 완전. 싫음.’

일본에는 털 달린 새우들도 많았고. 냥아치들도 많았다. 쥐야 거기든 여기든 넘치는 게 쥐였지만, 여러모로 더러운 꼴 본 거길 또 가자고?

‘그래. 그렇기는 하지.’

선선히 인정하는 마루였다. 안분지족. 건물주의 삶에 만족하는 중인데 무슨 영화를 더 보겠다고 거길 다시 가서 개고생하겠나.

화산재, 연기 가득한 현장에서 방독 마스크 쓰고 구르라고? 언제 지진에 쓰나미 덮칠지 모르는 일본에서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면서? 통신도 먹통. 항공지원 불가. 차량도 쓸 수 없음. 도보 이동하는 것도 모자라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 넘치는 동네를 왜?

“핵잠수함이라도 달라고 하면 주겠답니까?”

피식 웃은 마루가 한마디 하자, 덴 브라운 과장의 입이 합죽이가 됐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핵잠수함을 달라고?’하는 어이없는 표정에 마루가 으쓱했다.

“아니, 뭐든 이라고 해서 그냥 해본 소립니다. 어쨌든 저랑 김 양은 일본 갈 생각 없습니다.”

[하아- 한국에 있다는 동료분 찾아오는 걸 조건으로 한다고 해도 말입니까?]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순이가 죽지만 않았으면 언제든 어떻게든 데려올 것이다. 방법은 후드랑 사만다가 찾을 거고.

“네. 당분간 어지간하면 빌딩 밖으로 안 나갈 생각이라서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든 김 양이든 필요한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괴물 늑대만 하더라도 공원과 숲을 오가며 사람들 사냥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다. 기갑부대와 수천 명을 동원해도 잡을까 말까.

헬기가 자유롭게 뜰 수 있다면 쉬웠겠지만, 헬기는 버드 스트라이크 때문에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운 상황.

사람들이 몰리면 도망칠 테고, 소수로 가자면 역으로 사냥당하고 그렇게 갈리다 보면, 김 양이든 자신이든 다시 찾기 마련이었다.

출동 조건은 기순이 데려오는 것일 뿐. 언제까지? 데려올 때까지 계속.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덴 브라운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영상통화가 끝났다.

“들었지? 내 친구 데려올 다른 루트도 찾아두는 게 좋을 거야.”

[확인하겠습니다.]

사만다를 압박한 뒤, 마루는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서 유 이사와 그 부하들은 중국과 미국 양측에서 공격받았다. 마루가 본 흔적은 말 그대로 사투라고 보일 정도로 처절한 흔적이었다.

집요하기로 유명한 두 나라의 추격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유 이사는 잃어버린 자신의 총을 찾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 아마도 복수 때문이겠지.

유 이사와 스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길게 늘어졌던 시간 속에서, 유 이사도 분명히 반응했었다.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까?

스르르르릉-

마루가 칼날을 응시했다. 빛나는 칼날에 비치는 눈동자 속 타오르는 불꽃. 삼켰던 뜨거운 감정이 심장을 달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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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은 덴 브라운 과장에게 추가 영상을 요청했다. 그렇게 받은 영상을 보고 또 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할망구가 회춘하더니 날아다니네.’

유 이사. 곱게 유품만 남기고 가시지, 지옥에서 돌아오시기는.

‘넌 샤프 슈터나 트리거 해피 따위지 건슬링거는 아니야.’라고 했던, 유 이사의 날카롭게 늙은 얼굴이 떠올랐다.

영상 속 회춘한 유 이사는 산삼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아주 잘해야 산삼 정도의 나이. 마지막에 봤을 때가 20대 중후반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18년산 산삼 느낌.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년.’이라는 표현에 딱 걸맞게 생겨 먹어서는 썩은 동태눈깔을 하고 있었다. 죽고 죽이기 딱 좋은 눈깔.

총이라면 자신 있었다. 작은 김 양이 중국 깜깜한 뒷골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총 때문이었다.

돈에 미친 공안과 장기 털이 조직 폭력배, 인육 즐기는 정신병자들 바글거리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총 솜씨. 그거 하나 때문이었다.

그래. 총질은 김 양의 자부심이자 본질이었다. 그리고 유 이사는 그걸 애들 재롱잔치로 취급한 년이었고.

‘구르면서 경험 좀 쌓이면, 병신들 잡기엔 적당히 쓸만하겠네.’

그 말에 김 양의 자존심엔 깊은 상처가 났다. 딴에는 더욱 분발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는 소리도 있었고, 유 이사의 후계자로 자신이 될 거란 소문도 있었지만, 그딴 거 의미 없었다.

제일 자신 있는 총질이 무시당한 기분. 분했지만. 화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 이사는 말 그대로 속사로는 당해낼 수 없었으니까. 속사 권총 세계 챔피언과 맞먹는 여자를 근거리에서 총질로 어떻게 이기겠나?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회춘했든, 18년산 산삼이 됐든, 김 양에게는 협찬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 얻은 미묘한 감각도 있었고.

영상 속 유 이사는 빨랐다. 화산 연기, 안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외곽부터 깎아 먹는 모습. 과감하고 단호한 공격을 바라보던 김 양은 어느덧 영상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정면을 향한 총구, 동작감지기에서 유 이사의 행적이 추적되고 있었다. 정면에서 왼쪽으로, 깊게 움직인 붉은 점이 순식간에 엑소슈트의 등 뒤를 점했다.

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도 숨죽이고 다가왔던 늑대처럼, 근거리까지 와서 방아쇠를 당기는 유 이사를 피해 데굴데굴 굴러 눕는 엑소슈트. 정면을 향했던 김 양의 총구가 순식간에 뒤를 향했다.

타다당

투다다다닥

엑소슈트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12.7mm 총탄이 유 이사를 향해 쏟아지는 것을 끝으로 영상 밖으로 나온 김 양.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을 슥- 닦은 김 양이 해맑게 점심 메뉴를 골랐다. 회춘한 할망구 때문에 신경 썼더니, 함박스테이크나 돈가스가 고팠다.

응.

고기는 근본이 소고기. 그러니까 함박스테이크로.

점심이니까 5인분.

5 채식이를 곱게 지켜보겠다는 의미에서 5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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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느 재개발 예정구역.

3월 봄비가 부슬거려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LED 가로등이 골목을 밝히고, 거미줄처럼 엮인 전선이 촘촘한 가운데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헉- 헉-

레게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남자. 깜깜한 밤인데도 노란색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허겁지겁 계단을 달려 올랐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좁은 골목으로 몸을 밀어 넣는 모습.

얼마나 갔을까.

‘생존권을 보장하라.’, ‘재개발을 원안대로 진행하라.’ 등의 붉은색 현수막으로 가려진 낡은 집으로 뛰어들어간 사내가 좁은 마당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뛰어서 그런지 가려움증이 다시 도졌다. 북북- 얼굴과 팔뚝을 긁어도 가려움증이 가시지 않았다. 손톱 끝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가려운 피부 속에 느껴지는 미묘한 단단함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후- 빌어먹을.”

질끈 묶었던 레게머리가 언제 풀렸는지 살아있는 말미잘처럼 흔들렸다. 사내는 흐트러진 머리를 모아 꽁지 머리로 묶었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뒤, 다시 대문 밖을 살피는 남자. 뒤따르는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사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 거실에 불을 켰다.

틱- 낡은 스위치 소리와 함께 환히 밝혀진 거실. 그리고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기순 씨. 이제 오십니까? 이거 참- 여러 사람 힘들게 하시네요.”

“······.”

놈들이 이곳을 어떻게 알았지?

“살펴봤더니, 마루님께서는 이곳에 안 계신 것 같은데, 그분은 어디 계신 거죠?”

“······.”

집요하고도 집요했다. 놈들과는 벌써 몇 차례나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역시 나루를 찾아간 게 실수였을까? 마루네 부모님을 찾아뵈려고 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가씨 아니, 회장님께서 많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기순은 재빨리 탈출로를 살폈다. 현관은 아웃. 덩치 여럿이 바깥에 대기하고 있었다. 거실 창문 밖에도 짙은 색 양복을 입은 자들이 기순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야 하나?’

기순이 거실 건너편 방을 보는 찰나, 중저음 목소리가 포기하라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회장님께서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하게 찌르라고 하셨습니다. 즉사만 아니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뭐?

당황한 기순의 눈에 들어온 반짝이는 칼날.

언제 다가왔는지, 기척 없이 뒤로 다가선 사람이 기순의 옆구리에 사시미를 찔러 넣었다.

쿠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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