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32
기순을 찌른 사내의 동공이 흔들렸다.
복부에 얇은 책이나 잡지를 넣어서 그랬다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분명히 왼쪽 옆구리를 잘 찔렀는데,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피부가 아닌, 가죽 같은 느낌. 그리고 가죽 안쪽에 있는 무언가에 미끄러진 칼날.
‘이게··· 뭔? 사시미가 미끄러져?’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순은 사시미를 뜬 남자의 팔을 꺾었다. 팔이 뒤틀린 사내가 아악- 소리를 내기도 전에 바닥에 손을 뻗은 기순이 전선을 잡아당겼다.
툭- 잡아 뽑힌 전선 끝에서 팅- 클립 튀는 소리와 함께 거실 전장에서 하얀 연기가 쏟아졌다.
푸쉬시식
최루가스가 순식간에 거실을 가득 채웠다.
“가스! 가스!”
“저거 잡아!”
“쏴! 콜록!”
“뭐 하고 있어 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최루가스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멈칫했다. 기순은 그 틈을 타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쾅! 쾅!
“문 열어! 이 씨발.”
“콜록콜록- 그냥 문 부숴!”
“방독면! 산소마스크 어딨어?”
“창문 깨. 창문 깨라고!”
“선풍기든 에어컨이든 돌려!”
“창문 열어!”
“문 부수라고!”
아아아악-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최루탄을 설치해 놓다니 그건 또 어디서 나서. 한두 개도 아니고 집안 전체가 너구리 굴처럼 변했다.
안방 문고리를 때려 부순 직원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리리라. 독기에 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무도 없는 빈방이었다.
“콜록콜록- 이 새끼 어디 갔어?”
“다 엎어! 찾아.”
침대 아래, 지하로 내려가는 문짝이 있었다.
“여깁니다.”
“빨리 내려가!”
끼이이이이익
뻐어어엉!
문짝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분말 최루탄이 터졌다. 지리도록 끔찍한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개 씨발!”
“아아악- 눈- 눈-”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안가를 뒤로 기순은 골목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해둔 탈출로를 타고 야트막한 동산으로 들어간 기순이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직원들이 추격을 위해 개를 데려왔지만, 사방에 터트린 최루가스와 분말 때문에 개들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놓쳤습니다.”
[···어쩔 수 없죠. 월드 PMC 조 사장에게 협조를 구하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즉사만 피하면 됩니다. 팔다리 다 떨어져도 가져만 오면 되고요. 월드 직원들에게도 주지시키세요. 잡기만 하면 된다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보안과장은 나 회장의 평안한 목소리에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아가씨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회장님이 되고 난 뒤엔 특유의 무심함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사방이 난장판이 된 동네를 둘러봤다. 어디로 도망쳤는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CCTV도 제대로 없는 동네.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는 개미 골목이라 자동차 블랙박스를 이용한 추적도 불가능.
본사에서 탈출한 놈을 찾는데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모범생 같은 단정한 머리스타일을 과감하게 레게머리로 바꾸고, 선글라스에 코로나 마스크까지. 그렇게 파격적으로 변했기에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어렵사리 함정을 파놓고 한 달 넘게 기다려 기회를 잡았건만. 놓치고 말았다. 마취총 쏜 놈들은 전부 감봉이었다. 어떻게 한 방을 맞추지 못하나?
“과장님 여기 이것 좀 보시죠.”
“흔적 찾았어?”
“아닙니다. 이게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건 왜 이래?”
직원이 가져온 것은 마취탄이었다.
주삿바늘이 꺾인 마취탄. 재수 없게 단추에 맞았나?
“그쪽 손은?”
직원이 반대쪽 손을 펼쳤다.
“미친.”
바늘이 꺾인 마취탄이 3발이나 더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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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진기지.
서류를 손에 든 존 스미스 요원이 로이 스턴 소위에게 재차 확인했다.
“여기. 이 서류에 적은 내용 확실한 겁니까?”
“확실합니다.”
로이 스턴 소위의 목소리엔 한 점 의혹이 없었다. 존 스미스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근거가 뭡니까?”
“거기 적혀있지 않습니까? 월드 PMC 유다인 이사와는 이라크전에서 같이 작전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 이사의 얼굴에는 상당히 깊은 흉터가 있었습니다. 성형수술로 지우기 힘든 흉터였죠.”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르고 지나간 흉터, 인상을 쓰면 뱀처럼 꿈틀거리는 흉터였다. 그리고 저번에 본 유다인 이사를 닮은 여자의 얼굴에는 그런 흉터가 없었다. 그래서 딸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어려진다고 해도 말입니까?”
“아니. 젠장. 동안이 되든 어려지든, 얼굴에 보톡스를 때려 박는다고 해서 흉터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본 그 여자는 흉터가 없었다니까. 지금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로이 스턴의 보고서 때문에 복잡해졌다. 존 스미스 요원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길게 세 줄로 그어진 주름 아래, 피로 가득한 눈동자가 퀭했다.
엉뚱한 놈들까지 관심을 보일 위험이 있기에 철저하게 통제된 정보, 상층부만 알고 있는 키워드가 ‘회춘’이었다.
중국 놈들이 일본에서 버티고 병사들 갈아 넣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회춘이었다. 중국은 회춘에 대한 단서를 포기할 수 없었고 그건 미합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수천의 병력을 갈아 넣으면서도 지옥 같은 일본에서 버티는 이유는 간단했다. 회춘은 상층부의 염원이자, 인류의 미래와 직결된 사안이었으니까.
‘회춘’한 뒤, 유지하거나 회복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원한 젊음. ‘영생’으로 가는 길이 아니던가?
미합중국도 중국도 일본을 버릴 수 없었다. 계속 새로운 강화자, 변이자들이 생기는 땅. 변종들이 생기는 땅이었다.
어떤 새로운 변이가 일어날지 모르는 땅이라는 소리는 언제든 회춘이나 그것에 준하는 능력이 나올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버리겠는가? 잃을 수 없었다.
존 스미스는 테이블 위에 있던 사진을 로이 스턴 소위 앞으로 밀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로이 스턴 소위는 이 여자가 유다인 이사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는 겁니까?”
미치겠다는 얼굴에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변한 로이 스턴이 기어코 이죽거렸다.
“이 정도로 변하면 ‘환골탈태’ 아닙니까? 아- 버지니아 요원들은 모르려나? 동양판타지에 나오는 용어인데 말입니다. 사람이 싹 바뀌고 어려지고 더 잘생겨지고 뭐 그런 걸 묘사하는 용어인데 들어봤습니까? 이 여자가 유다인 본인이라면 환골탈태했겠네요.”
얼굴에 흉터도 없지, 확대한 사진만 봐도 삶은 달걀 피부에 잡티나 점도 없었다. 지금 일본에서 저런 피부를 유지하는 게 가능한가?
애초에 사진 속에 있는 여자가 진짜 있는 사람인지도 의심스러운 로이 스턴 소위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진은 합성이고 CG. 뭔가 버지니아에서 공작하기 위한 떡밥이 아닐까?
이쪽이랑 좋게 엮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로이 스턴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로제 룽년만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놈들이었다. 이 새끼들은 분명히 로제 룽이 중국과 연관됐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다.
알면서도 로제 룽이 활개치고 다니게 그냥 둔 이유가 뭘까? 로제 룽을 이용해 고구마 줄기 엮듯 더 엮어서 실적 채우려고 그런 것이겠지. 로제 룽이 작업해서 넘어간 애들은 전부 애국심이 없는 새끼들이었을 뿐이고.
‘빌어먹을.’
로이 스턴 소위의 비꼼에 존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로이 스턴 소위는 작게 ‘Fuc-’를 중얼거리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 유이사를 잡으라고 했던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포 또는 사살하라는 명령. 아마도 저런 새끼들이 지랄해서 그런 명령이 내려왔겠지.
기분이 더러웠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던데, 3월 중순이 지났음에도 일본은 개판 그 자체였다.
5m가 넘게 쌓인 눈이 녹으면서 사방이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깨진 도로 사이로 눈 녹은 물이 한꺼번에 흐르면서 협곡처럼 변한 곳도 있었고, 얼어붙어 간신히 버티고 있던 빌딩과 집들이 무너지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수량 증가에 지반이 쓸려나가 여기저기 생기는 싱크홀까지 생각하면 걷는 것도 위험한 곳이 일본이었다.
심지어 화산재와 연기가 아직도 풀풀 날려서 방독면이나 산소마스크 없이는 순식간에 폐가 망가지는 극악한 환경.
“그냥 다 까라.”
대체 왜 철수하지 않는 건가? 여기가 무슨 아프간이라도 되는 건가? 아프간도 철수했잖아? 이라크에서도 발을 뺐고. 근데 일본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뭐하는 짓인가?
“······.”
‘설마 진짜 환골탈태든 회춘이든 그런 게 있어서?’
로이 스턴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소위님. 13구역에 중국놈들이 모이고 있답니다.”
“또?”
“예. 이번에는 숫자가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부지런한 새끼들이네. 진짜 징그러운 새끼들.”
하얗게 칠했던 도색을 디지털 얼룩무늬로 바꿔 칠한 기갑병에 탑승하기 위해 걷던 로이 스턴의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이건 뭐야?”
“그거 말입니까? 며칠 전부터 여기저기 뿌려져 있던데요? 아마 밖에 붙어 있던 걸 누가 가져왔나 봅니다.”
로이 스턴이 바닥에 떨어진 인쇄물을 집어 들었다. ‘총은 여기 있다.’라고 적힌 인쇄물에는 멋지게 생긴 콜트 파이슨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존 스미스의 짓인 거 같았다. 유 이사의 유품이라고 총을 회수한 사람이 그놈이었으니까.
“지랄하네.”
이건 무슨 병신 같은 짓이래? 유품 가지고 장난을 쳐? 역시 재수가 없었다.
존 스미스 요원은 로이 스턴이 적은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기갑병 전술 카메라에 찍힌 여자의 사진. 확실히 흉터가 없으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요원의 날카로운 눈은 다른 점 보다도 같은 점에 주목했다. 무엇보다도 로이 스턴에게 보여주지 않은 영상 파일이 있었다. 며칠 전에 확보한 영상.
[내 총 가져와.]
[아니면 내가 간다.]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더 어려 보였다. 너무나 어려 보였기에 위화감 드는 얼굴이었지만, 존 스미스가 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여자의 눈동자였다.
무심하고. 무감한 눈동자. 10대 소녀의 눈동자가 저럴 수 있을까?
아프간, 이라크, 아프리카 죽음이 넘치는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눈빛도 저렇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은 피식자, 죽음이 잦은 현실에 체념한 눈빛이고 영상 속 어린 여자의 눈동자는 포식자, 살인자의 것이었다. 죽음을 찾는 눈빛.
그 둘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존 스미스는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임무수행중 실종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하더니, 이 여자가 원인인 것 같았다.
치익- 터보 라이터 소리. 연초가 빨갛게 타올랐다. 후- 한 모금 뱉은 존 스미스가 영상 속 여자의 얼굴을 노려봤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합중국의 병사를 죽이고 얼굴을 까다니···. 유 이사 본인이든 그 혈육이든 상관없었다.
본인이라면 단순한 회춘을 넘어서 환골탈태? 그런 것이니 좋았고, 혈육이라면 회춘 확률 높은 실험체가 생긴 것이니 좋았다.
존 스미스가 옆에 놓인 상자를 테이블에 올렸다.
딸깍-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리자, 붉은 융단 위에 놓인 검푸른색 리볼버가 드러났다. 존 스미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걸 원한다고?
좋아. 가져가 보라고.
총은 여기 나한테 있으니까.
어서 물어보라고. Bitch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있잖아. 여기 있다고 광고까지 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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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중국군과 미군이 충돌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정찰대가 위력 정찰 도중 상대방의 정찰대와 만나면서 우발적으로 교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일본인 생존자를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거나, 연구소, 기업 본사에 있는 자료 같은 것을 확보하다가 만날 경우에도 총질이 오갔다.
미군에게는 기갑병이 있었고, 중국군에게는 은신 장비를 갖춘 특수부대가 있었다. 지속적인 화력은 미군이 우세했고 병력과 순간 화력은 중국군이 우세했다.
정보 부분에서는 근거리 통신 단말기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중국군이 유리했지만, 미군이 중계기를 박아 통신과 감지를 동시에 해결하면서 서서히 미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전황을 뒤집기 위해, 중국군이 선택한 것은 강력한 한 방을 꽂아 넣는 것이었다. 미군의 전진기지를 털어버리는 것.
일반적인 전장이라면 불가능한 작전이었지만, 이곳은 일본이었다, 화산폭발과 지진, 쓰나미로 엉망이 된 곳. 인공위성도 쓸 수 없고, 항공지원도 없으며, 통신과 레이더도 먹통이 된 지옥.
“13구역으로 미제 승냥이들의 주력을 유인하고 병력이 빠진 틈을 타, 우리는 놈들의 전진기지를 친다.”
“포로는 없다.”
“전진기지를 파괴하고 미제 놈들이 억류하고 있는 능력자들을 해방하는 것이 우리 목표다.”
13구역으로 떡밥을 던졌으니, 미제 놈들이 낚이기만 기다리면 됐다.
[치지직- 적 기갑병 6기 13구역으로 향-- 삐이익]
[전- 삐이이익-에서- 삐잉이이잉-]
그렇지 않아도 통신상태가 엉망인데 오늘따라 유독 더했다. 이런 날을 노리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더 심했다.
“놈들의 기갑병 6기가 13구역으로 이동했다. 전진기지를 수비하는 남은 기체는 2기.”
대전차 미사일을 3방씩 꽂아 넣으면 충분했다. 13구역에서 교전이 벌어졌으니, 놈들의 지원병력이 추가로 빠지는 것만 기다리면 됐다.
“시야가 너무 나쁩니다.”
“적도 마찬가지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부대장이, 은신 장비를 작동함과 동시에 작전이 시작됐다.
첨벙-
눈이 녹은 진창에 일렁이는 파문이 생겼다.
미군의 전진기지로 접근하던 일렁임이 한곳에 뭉쳤다.
[이상합니다.]
[경계병이 없습니다.]
[반대쪽도 조용합니다.]
‘보초가 없다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부대장이 신호를 보냈다.
[진입.]
미군의 전진기지에는 서늘한 적막만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