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33
존 스미스는 문득 고요함을 느꼈다.
밖은 언제나처럼 칙칙한 회색. 짙은 안개처럼 자욱한 화산재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화산재와 연기가 수분을 흡수해 마치 안개처럼 축축한 느낌.
막사 안의 공기청정기가 힘겨운 소리를 내면, 당번병이 일상처럼 필터를 가는 풍경. 변한 것은 없었다.
안개처럼 희뿌연 공간 속으로 소리가 먹혔기 때문일까? 낮고 작게 가끔 들리는 진창 소리뿐.
“정말. 기분이 더럽군.”
사람이 있을 땐,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존 스미스가 대놓고 한소리 했다. 공기필터를 갈던 당변병이 움찔. 돌아보는 모습에 존 스미스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주섬주섬 필터를 갈고 밖으로 나가는 당번병. 찰박찰박 진창을 걷는 소리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다시 내려앉는 적막.
보병전술장비 선정이라고 적힌 서류를 펼친 존 스미스가 메모를 시작했다. 제일 처음 쓴 단어는 가격. 이어지는 글자는 가성비. 생산 속도.
국토안보국 녀석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딴 걸 밀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갑옷형 엑소슈트가 좋은 걸 누가 모르나? 지금 필요한 건 충분한 물량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물량.
그래핀 복합소재 장갑을 쓰지 않고 단순복합 장갑을 쓴다면 7.62mm 탄도 막지 못했다. 9mm 권총탄이나 38구경 정도나 간신히 막을 수 있을까? 그 정도 방탄 능력이라면, 차라리 방탄 슈트를 입고, 파워로더형 엑소슈트를 장비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었다.
강력한 방어력을 위해 그래핀 복합소재 장갑을 쓰고 초고성능 모터에, 그 모터를 굴릴 배터리만 해도 장갑차 가격을 넘어서 최신 전차 가격에 육박했다.
보병용 개인 전술장비에 전차값을 태워? 미친 건가? 물론 특수부대용으로 소량 생산하겠다면야 모르겠지만, 보병용으로 뽑아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군부에 납품하려면 버지니아에서 밀고 있는 파워로더형 엑소슈트가 더 현실적이었다. 가볍고 적당한 출력에 다양한 활용성.
320kg 내외의 물건을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고 평균 8km 이상의 행군 속도. 순간적으로는 16km까지 낼 수 있는 순발력을 생각하면 보병전술장비로는 충분했다.
‘700파운드 전후까지 운반 가능한 출력, 평균 시속 5마일로 장시간 기동 가능. 그 정도면 충분해. 그 이상은 오버스팩이지.’
존 스미스를 호위하고 있는 요원들이 장비하고 있는 엑소슈트가 그것이었다. 이는 일본 현장에서도 톡톡히 제 몫을 하고 있었다.
국토안보국 쪽에서 미는 업체가 제법 선전하고 있었지만, 실전 데이터는 이쪽이 훨씬 많았다. 싸니까 많이 만들어서 많이 뿌렸으니, 당연히 데이터의 양과 질에서 차이가 날 밖에.
쿠직-
뭔가 부러지는 소리에 존 스미스가 고개를 들었다.
‘너무 예민했나?’
축축한 적막뿐이었다. 밖은 흐릿한 회색.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연기가 가득했다. 그년이 누구든 이번 일만 처리하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열도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후- 연초가 붉은빛을 내며 재로 변했다. 깜박깜박 넘어가는 불빛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둔탁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다다다닥-
꽉 막힌 것 같은 총소리. 소음기 때문인지 교전이 벌어진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촤악- 엑소슈트를 입은 요원 2명이 막사로 들어왔다.
“습격입니다!”
“바로 피해야 합니다.”
“습격?”
존 스미스가 뭔가를 물으려고 하는 찰나, 투앙- 요원 한 명의 목에 구멍이 뚫렸다. 끼이이- 엑소슈트 때문에 쓰러지지도 않고 선 채로 늘어진 모습.
위이이잉-
투다다다다다닥
옆에 있던 요원이 휙- 돌아서선 미니건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가 좁은 상황. 사선에 아군이 있건 말건 총구를 사방으로 휘적거렸다.
기이이이잉-
빨갛게 달아오른 미니건이 서서히 회전을 멈췄다.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탄피를 헤치고 서서 죽은 요원의 엑소슈트 탄창을 교체하는 모습.
“빨리 준비하세요.”
요원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존 스미스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파기해야 할 자료가 순식간에 난로 속으로 들어갔다.
화르륵-
콰직-
불타고 부서지는 소리를 무시한 채, 존 스미스는 노트북 옆에 붙은 스위치를 눌렀다.
[모든 자료의 파기가 시작됩니다.]
검은색 바탕 화면에 노란색 숫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10. 9. 8··· USB와 외장 하드를 챙긴 그의 손이 바닥에 있는 원목 케이스를 향했다.
“손 떼.”
고운 목소리. 너무나도 맑고 선명해서. 이런 진창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렸다. 존 스미스의 고개가 서서히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엑소슈트의 헬멧이 깨진 틈으로 끄륵끄륵- 피거품이 새어 나오는 모습. 헬멧 속으로 소총을 때려 박은 하얗고 고운 손이 느릿하게 붙잡고 있던 소총을 놨다.
그래 손이었다. 몸통은 보이지 않는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것만 같은 손. 존 스미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린 여자의 목소리면 그 년이었다. 근데 은신 장비?
“중국인가? 중국에 붙었나?”
“손들어.”
“중국 놈들도 마찬가지다. 중국 놈들도 회춘을···.”
투앙-
슬며시 뻗었던 오른팔에 12.7mm 특수탄이 때려 박혔다. 정확하게 관절을 때린 충격에 팔뚝이 폭발하듯 떨어져 나갔다.
투쾅-
왼쪽 손목이 터지며 들고 있던 USB와 외장 하드가 바닥에 떨어졌다. 후두둑 뜯어진 팔뚝과 손목에서 피가 왈칵 흘렀다. 존 스미스는 기절하지 못한 자신의 정신을 저주했다.
“······.”
일렁이듯 공간이 열리며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있는 것은 2kg이 넘는 Rsh-12리볼버.
“그래서. 묻지. 어디까지야?”
아무것도 모를 것만 같은 순수한 얼굴. 순결한 외모를 한 괴물이 존 스미스를 보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 이미 죽은 고깃덩이를 보는 눈빛.
이건 괴물이었다. 이게 유 이사인지 아닌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건 괴물이고,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에서 이딴 괴물이 미국으로 간다면? 사상 최악의 테러가 벌어질 것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그저 여자의 얼굴을 봤을 뿐인데, 존 스미스는 흡혈귀에라도 물린 것처럼 온 전신의 피가 다 빨려 버린 것 같았다.
줄줄 흐르는 식은땀. 땀방울이 눈꺼풀에 매달렸다 떨어지는 것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이 괴물을 막을 수 있지?
그 짧은 순간 떠오른 것은 칼날이었다. 칼을 든 또 다른 괴물. 국토안보국으로 들어간 놈. 일본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새끼. 그 새끼라면?
“크흐흐흐흐-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
웃으면서 혀로 어금니를 건드려 독액을 뺀 뒤, 디트로이트라는 말끝에 독액을 깨문 존 스미스의 동공이 서서히 풀렸다.
풀썩- 뒤로 넘어간 존 스미스의 머리통에 12.7mm 총알을 박아 넣는 무심한 손길.
투캉-
산산 조각난 머리통을 무시한 채, 느긋하게 책상 위에 걸터앉은 여자가 다리를 꼬았다.
“디트로이트?”
그 망한 후진 동네? 가려면 역시 뉴욕이나 LA였다. 서부는 건슬링거의 고향 같은 곳. 위에서부터 아래로 싹 쓸어 버리고 옆으로 차근차근. 뉴욕까지.
시작은 시애틀이 좋겠네. 걸터앉은 책상에서 어느새 스르륵 뱀처럼 내려온 여자가 원목으로 된 케이스를 열자, 딸깍- 붉은색 융단에 놓인 검푸른 총이 주인을 반겼다.
주인은 오랜만에 재회한 애병에게 밥부터 먹였다. 콜트 파이슨이 45구경 탄약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총과 주인의 재회를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삑-삑- 낮은 소리. 뿌려놓은 동작감지기가 울렸다. 정문에 뿌린 것이 울리지 않고 있다는 소리는, 미군이 돌아온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미군이 아니면 어딜까?
중국놈들일 터. 그놈들에게도 제법 많은 빚이 있었다.
그래. 많은 빚이 있었지.
중국이라. 중국.
걔들한테 줄 적당한 게 있었다.
유 이사는 백 팩에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유리병 속에 가득한 바퀴 알집을 보며 웃는 미소가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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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 첸은 극도로 기도비닉을 유지했다.
광학 은신 장비를 했음에도 은엄폐를 놓치지 않았다. 그림자, 사각을 이용해 조금씩 이동하는 모습은 한걸음에 생사가 달린 것처럼 치열했다.
찰박찰박-
‘어떤 새끼야?’
직속 부하 가운데 저런 덜떨어진 새끼가 있었나? 룽 첸은 그 새끼가 누군지 알고 싶었지만, 전부 광학 은신 장비를 하고 있으니 어떤 놈이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철푸덕-
걷다가 엎어졌는지, 진창에 처박히는 소리가 고요함을 깨웠다.
‘씹. 자라 같은 새끼가!’
그나마 생각은 있는지,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쥐죽은 듯 적막 가운데, 룽 첸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오는 동안 본 것은 시체뿐이었다. 대부분 목이 돌아가고, 꺾이고, 부러진 시체들.
미제의 전진기지를 일본해방군이 공격했을까? 당의 비호를 받는 무력단체 일본해방군이 공격했다면 이쪽과 협의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본해방군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일본 연합? 일본부흥회?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현장을 보면 아주 위험한 놈들이었다. 제일 이상한 점은 저항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바닥에 탄피 하나 없었다. 그러니까 바로 옆에 올 때까지 몰랐다는 소리.
‘능력자인가?’
아군의 광학 은신 장비를 노획해서 쓰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강력한 완력의 소유자. 최소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3배 이상의 힘을 내는 자였다. 사람의 목을 수수깡처럼 꺾으려면 그 정도는 돼야 했으니까.
철푸덕-
다시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짙은 화산재가 소리를 먹어 둔탁했지만, 그래도 소리가 난 것은 난 것이었다.
‘이 새끼들이 빠졌네.’
돌아가면 그냥 두지 않겠다. 룽 첸이 화를 내기가 무섭게, 진창에 처박히는 소리가 총소리로 변했다. 소음기를 단 기관단총과 중기관단총 Ash-12 특유의 소리가 회색 공간을 때렸다.
교전이 시작됐다는 소리. 룽 첸은 재빨리 단말기로 신호를 보냈다.
[투약]
전투자극제. 여기저기 뿌려댄 엉망인 것과는 달리, 고순도로 정제한 크리스탈을 기반으로 다양한 약제를 합성한 전투자극제가 혈관을 가득 채웠다.
오감이 민감해지면서 근육이 부풀었다. 룽 첸은 제자리에서 3m를 펄쩍 뛰어 진창을 건너갔다. 목표는 지휘 막사와 인근. 미국놈들이 자료를 파기하기 전에 확보해야 했다.
요란하게 울리는 총소리를 뒤로 한, 그가 막사 앞에 도착했다. 뚜렷해진 오감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끼익- 자세를 낮추고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시체 그리고 시체뿐.
후욱- 후욱-
들숨 날숨을 일정하게 고르면서 집중력을 최대로 고른 룽 첸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활활 타오르는 난로 속에 타오르는 서류들이 가득했다.
늦었나?
사방을 순식간에 살핀 룽 첸의 눈에 특이한 시체가 보였다. 이제까지 시체 대부분이 목이 꺾이거나 돌아간 것에 비해 손목과 팔뚝이 날아간 시체, 군복이 아닌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있는 사내는 머리통이 터져있었다.
‘짙은 양복이라. 미제 정보부 소속인가?’
시체 옆에 있는 외장 하드를 챙긴 그가. 시선을 돌려 책상을 살피려는 순간
퍽- 강한 충격과 함께 의식이 끊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깜깜했던 의식이 돌아왔다. 부하들이 룽 첸을 들것에 옮기고 있었다.
“정지. 멈춰.”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된 거지?”
“은신 장비가 벗겨진 채로 의식을 잃고 계셨습니다.”
전투자극제를 썼음에도 어떻게 공격당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상황은?”
“생존자는 13명입니다.”
“놈들은? 놈들은 어떻게 됐나?”
“죄송합니다. 탈출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부하의 머리통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총에 스쳤나?”
“둔기에 맞았습니다.”
지끈거리는 통증. 답답한 시야와 호흡. 방독면을 벗고 싶었다. 그렇다고 벗었다간 폐가 엉망이 되겠지. 들것에서 내려 탈출 포인트에 도착하자, 반잠수정 5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룽 첸 대위님. 본국으로 귀환 명령입니다.”
“아직. 아직이다.”
제대로 더 큰 전과를 내야 했다. 소교 진급이 내정된 상황이었다. 소교를 달면 바로 대교까지 일직선으로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현장에서 부하들과 부대끼는 것은 이번 기회가 마지막인데 이렇게 미지근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장군님께서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부하들은?”
“전원 귀국 명령입니다.”
“알았다.”
룽 첸과 부하들을 태운 반잠수정이 물살을 갈랐다.
미국은 중국의 개입을 막기 위해 부표에 중계기와 소형 레이더, 수중음파탐지기를 붙여 뿌려댔다. 그 결과 대형 수송선을 이용한 대량 보급이 어려워졌지만, 중국은 일본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소형 잠수함과 반잠수정을 이용한 보급과 충원이 계속되고 있었다.
룽 첸과 부하들을 태운 반잠수정이 두만강을 타고 올라가 부두에 도착했다. 어선들로 위장한 부두 한쪽에 쑥 들어간 공간으로 야음을 틈타 들어간 반잠수정에서 룽 첸과 부하들이 하선했다.
“PCR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발열이나 오한, 인후통, 후각 마비가 있는 사람은 이쪽으로 나와 주십시오.”
코로나 검사와 함께 14일간의 격리 절차가 시작됐다.
그리고 14일이 지나기 전, 어느 날 밤.
찢어지는 비명과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격리시설을 가득 채웠다.
끄아아아악!
"아아악 배가 배가! 살려줘!"
"사람 살려!"
왜에에에에엥! 왜에에에엥!
“차단벽! 차단벽 내려!”
“빨리."
"막아. 막으라고!”
왜에에에에엥! 왜에에에엥!
그 소란을 타고 새끼 바퀴벌레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