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249화 (249/280)

러스트 [RUST]-249

[미 서부 대도시 대규모 정전 발생.]

[단순한 정전이 아닐 가능성. 전문가들 EMP 공격일 수도]

레빗 TV와 울프 방송을 중심으로 뉴스 속보(Breaking News)가 채널을 가득 채웠다. 어디를 돌려봐도, 미 서부에서 벌어진 폭발 사고와 연이은 대규모 정전사태가 화제였다.

우물우물 육포를 씹으면서 TV를 보고 있던 김 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은 넓은 나라인지라 서부에 문제가 생겨도, 한참 멀리 떨어진 중부나 동부까지 영향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연구원 아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슨 지구 멸망이 닥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아크 타워에 입주하길 잘했다는 둥, 불만 토로하던 아줌마들 입이 쏙 들어갔다는 둥 그랬다.

다른 걸까? 포항에 지진이 나도 서울에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딱히 사재기도 터지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막 난리 치지도 않았던 터라, 김 양은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갸웃할 따름이었다.

“2호기 따까리. 현재 상황 설명.”

소파에 엎드려 널브러진 자세로 김 양이 말했다.

[···서부 시간으로 오후 7시 10분경, 자선 모금행사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2호기의 따까리인 사만다가 파란색 빛을 점멸했다.

[이후 오후 7시 55분에서 8시 사이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단순한 정전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해당 도시에 있는 모든 통신망과 정보망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휴대폰, 인터넷, 전화 전부?”

[그렇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EMP의 영향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MP 그건 김 양도 알고 있었다. 핵 터지면 EMP가 나와서 전자제품이고 통신망이고 절단 낸다는 거.

그 원리를 이용해 EMP만 쏴서 적의 시설과 장비를 무력화하는 폭탄이었다. 근데 그게 대도시에서 터졌다고?

TV 아나운서들 표정이 압권이었다. 얘들 원래 표정이 이런가 싶을 정도로 눈도 크게 뜨고 억양도 마구 높이고. 막 그래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김 양은 진지하게 팝콘이라도 하나 튀겨 올까 고민했다.

[정전사태가 발생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방화, 약탈,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헬기나 항공기로 긴급 지원이 어려운 상황인가요?]

[그렇습니다. 현재, 비상통신망을 이용해 일부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상황이 매우 심각해 보입니다.]

호들갑 떨던 앵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어서 하단에 굵고 두껍고 딱딱한 활자가 떠올랐다. ‘데프콘 2 발동.’

[방금 들어온 긴급 속보입니다.]

[연방정부에서 데프콘 2를 발령했습니다.]

······

[시민들께서는 외출을 삼가시고 소요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자택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어라? 이거 진짜 공격? 김 양이 몸을 일으켜 TV 볼륨 키웠다.

“무슨 일이야?”

훈련장에서 이클립스로 이것저것 썰면서 실험하던 마루가 올라왔다.

“데프콘 2 떴음.”

“데프콘?”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 마루가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는데, 디아나의 보고가 올라왔다.

[디트로이트의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있습니다.]

[무장한 자들이 빌딩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비상사태가 터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약탈이라고? 마루의 눈매가 좁아졌다.

우연일까?

이제까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우연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한 마루가 어떻게 할지 정했다.

“지금 밖에서 골조 공사하고 있는 사람들 전부 대피시켜.”

[대피하라고 전달했습니다. 지원 나온 공병대는 어떻게 할까요?]

“약탈자들이 온다고 말해주고 어떻게 할 건지 빨리 결정하라고 해.”

[전달했습니다.]

“놈들이 사유지 진입하면 경고 후 쏴버려.”

마루의 강경한 발언에 김 양은 깜짝 놀랐다.

빌딩에 설치된 방어 장비는 대부분 20~30mm 구경의 중화기였다. 심지어 탄은 기본이 철갑탄. 사람이 맞으면 관통은 고사하고 산산조각이 날 텐데, 그냥 쏜다고?

김 양의 눈빛에 마루가 단호하게 말했다.

“데프콘 떴는데 무장하고 약탈이라니, 정상이라고 생각해? 놈들 분명 갱들이다.”

그럴 법도 한데?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여기엔 공병대도 있잖아. 근데도 온다는 건, 미군을 공격하겠다는 소리야. 쏴도 돼.”

공병대가 있는 걸 저쪽이 몰랐을까? 공사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알면서도 온다는 소리였다.

“아마 LA에서 놓친 놈들이랑 엮였을 가능성 있다. 어쩌면 마이클 PD 건드린 갱과 연결된 놈들일 가능성도 있고.”

“LA면··· 약쟁이?”

“그래. 아주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자. 준비해.”

마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파에 늘어져 있던 김 양이 발딱 일어섰다.

갑자기 의욕 충만한 김 양의 모습. 조건을 뭘 제시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의욕적이면 좋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마루에게 김 양이 기대감을 품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리품은?”

갱이었다. 금도 많고 돈도 많은 마약갱.

김 양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

======

엑소슈트를 입은 김 양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들어온 것들 전부 죽임?]

“그래.”

어설프게 살아남은 놈들이 시끄럽게 해서 문제였지, 죽은 자는 잠잠할 뿐이었다.

“디아나는 자동 포탑관리, 사만다는 갱들이 어디서 왔는지 놈들의 아지트를 파악해서 보내. 트리아는 하던 일 계속하고.”

인공지능도 반복해서 수행하고 있던 일들을 잘하기 마련이었다. 사만다는 계속해서 정보수집과 정보조작을 했었으니 그쪽을 맡기는 게 좋았다.

“그리고 사만다. 제니아랑 함께 주변 CCTV 차단하고, 인터넷, 통신 전부 끊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라고.”

[알겠습니다.]

사만다가 후드에게 전달했다. 후드와 사만다면 정보제어는 확실할 거다.

[그럼 갱들 아지트는 누가 감?]

김 양의 들뜬 음색이 들렸다. 그렇게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어보는데 어쩌겠냐.

“한군데면 네가 가고, 그 이상이면 각자 맡아서 가야지.”

[알겠음.]

후딱 처리하고 갈 분위기였다.

“엑소슈트 입었어도 조심해라. 그거 중화기는 막아도 RPG 같은 건 맞으면 위험하니까.”

[6 드론으로 업글해서 괜찮음. 먼저 쏘면 됨.]

그새 개조해서 드론을 추가한 모양이었다. 적이 공격하기 전에 장거리 저격하면 확실히 유리해지기는 할 거다. 특히 지금처럼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드론이 지원해준다면 더 안전해질 테고.

빌딩 근처 공사는 이제 시작이었던 지라, 주변이 어수선했다. 기초 철근을 배근하던 도중에 일이 터져, 여기저기 철근을 비롯한 부자재들이 널브러진 모습. 공병대는 철수 명령이 내려왔다며 허겁지겁 철수해, 그저 휑했다.

“주 방위군과 주 방위대, 경찰들은 어디 갔어?”

치안 유지한다며 빡빡하게 순찰하던 작자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찰들은 상점가와 공장으로 향했고, 주 방위군과 방위대는 수용소로 향했습니다.]

“수용소? 변이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 모아둔 곳?”

[그렇습니다.]

“거긴 왜?”

[강제 수용당한 자들의 가족들이 수용소를 공격할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분노 조절 못 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병 진행이 제법 오래됐을 터.

“치매 좀비처럼 된 사람들도 많을 텐데, 그걸 구하겠다고 공격한다고?”

가족들 마음이야 이해됐지만, 위험하지 않을까? 일본 도난 병원에서는 소리만 나도 미친 듯이 공격했었는데, 가족이라고 알아볼까?

[한국에서 관련 치료제가 나왔다는 뉴스가 보도된 뒤로, 치료제 확보 요구와 강제수용을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 있었습니다.]

오진 그룹에서 분노조절 관련 치료제 3상이 거의 성공했다는 소리가 뉴스에 나온 뒤로, 변이 바이러스 감염자에 대한 강제 수용소행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다른 지역도 전부 이런 상황인가?”

[그렇습니다. 각 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거 좋지 않았다. 이러다가 수용소 몇 군데가 터지면? 초기에 군대 동원해서 변이 바이러스 확산 막아 놨는데, 그게 터져서 감염자들이 활보하게 된다고?

“디아나. 감염자들 수용하는 수용소 말이야. 전기 철조망으로 차단한 구조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미 서부에 있는 대도시. 그쪽에 있는 수용소도 그렇겠지.”

[그렇습니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EMP가 터졌다고 했으니, 철조망 전원이 끊겼을 거다. 관리하던 주 방위군도 대부분 괴수 토벌로 빠진 상황.

지원? EMP 때문에 차고 뭐고 전부 나간 상황이라 시간 맞춰 지원이 도착하긴 불가능. 이건 뚫렸다고 봐야 했다.

“젠장!”

미국 서부 대도시에서 여기까지는 2,500km가 넘는 거리니까.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무장한 인원 1,943명. 차량 151대가 포위 접근 중입니다.]

“영상 올려봐.”

단순한 차량이 아니었다. 픽업트럭에 설치한 드럼통처럼 생긴 게 달린 모습. 국공내전에서 사용했다던 드럼통 박격포가 분명했다.

사제로 만든 박격포에 중기관총을 장착한 차량이라니. 이딴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와?

“EMP 터트린 놈들이랑 연결된 거 맞지?”

[정보가 부족합니다.]

이건 정보의 문제가 아니었다. 직감의 문제. 그리고 마루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것들 노리고 있었다.

[경고합니다.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무단침입자는 강도로 간주, 공격합니다.]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무단침입자는 강도로 간주, 공격합니다.]

디아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들은 공사장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럼통 박격포를 장착한 차량이 자리를 잡으려는 찰나, 디아나가 조종하는 자동 포탑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근접방어체계(CIWS. Close-In Weapons System)를 상정하고 만든 포탑이 방어가 아닌, 공격을 시작했다. 30mm 포탄이 자리를 잡고 있던 픽업트럭을 순식간에 걸레로 만들었다.

콰아아앙!

화르르륵!

수십 대의 픽업이 불붙은 고철로 변했다. 이어, RPG 로켓과 드럼통 박격포에서 쏘아진 폭탄이 빌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총탄과 포탄, 폭탄이 뒤섞이며 작은 전장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드는 자들.

정상인이라면 고개를 처박고 덜덜 떨어야 할 상황에서,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달려드는 자들이 화면에 잡혔다.

약쟁이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마루가 헬멧을 쓰고 이클립스를 잡았다.

“국토안보국 아재들은 내 쪽으로 오지 말라고 해.”

[전달했습니다.]

살기에 휘말릴 걱정은 없앴고. 그럼 남은 건 방향인가?

“어느 쪽이 많아?”

[남쪽과 북쪽입니다.]

디아나의 대답에 마루가 방향을 정했다.

“내가 남, 서.”

[북, 동 알겠음.]

2천 넘는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완전히 털어 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디트로이트 인근의 범죄조직이란 조직은 전부 모였을까? 인구 60만 도시에 2천 명이 넘는 자들이 몰려오다니.

‘하긴, 모든 것이 다 준비됐다는 광고가 나갔으니.’

외벽으로 올라서자, 그새 파괴된 자동 포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동 포탑에 공격이 집중되는 모습. 확실히 인간은 까다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까다로운데 약으로 공포가 거세된 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20~30mm 포탄에 쑥대밭이 되는데도 돌격하는 갱들.

푸쉬이이익-

마루를 향해 쏘아진 로켓.

크르르르--

거칠게 뽑힌 칼날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로켓 탄두가 씹혔다.

스윽- 파먹힌 탄두, 뇌관이 붙은 쪽이 한쪽으로 떨어지며 작게 폭발하는 모습을 뒤로

후으읍-

숨을 깊게 고른 마루가 외벽 아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자유낙하를 거부하는 발걸음.

물리 법칙에 엿을 먹이며 횡으로 내달린 마루가 외벽에 걸리기 시작한 밧줄과 사다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크르- 크륵-

철제 사다리가 나무젓가락처럼 잘리는 모습.

벽에 붙어 자동 포탑 사각으로 들어온 약쟁이들이 마루를 향해 총을 갈겨댔다.

수평으로 달리던 발걸음에 힘을 줘 날아오른 마루가, 이클립스의 칼날을 옆으로 해 몸을 가렸다. 다양한 구경의 총탄이 이클립스를 두들겼다.

크릉- 크르르릉-

작게 파쇄되는 탄환들. 수면에 조약돌을 던진 것처럼 동그란 파동이 생길 뿐. 반동도, 충격도 없이 바스러진 총알 조각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사이로 착지한 마루.

“쏴아아!”

“죽어!”

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달려드는 약쟁이들을 향해. 뭉클- 진득한 살기가 쏘아졌다.

커으으윽!

크어어억!

심장을 옥죄는 살기를 씹어 삼키듯 달려들던 자들이 다리에 힘이 빠진 것처럼 주저앉았다.

허으으- 아으-

입에서 거품을 물며 달려들던 것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져 푸들푸들 떠는 자들을 짓밟고 뛰어오던 놈들도 어느새 꼬꾸라져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긁어댔다.

캬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약 기운과 살기의 충돌을 이기지 못하고 발광하는 자들을 향해, 마루가 칼을 흔들었다.

칼질을 뒤따른 소리.

그건 공기를 찢는 소리였다.

투명한 공기가 갈가리 찢어지며 수십 개로 조각났다.

조각조각 너울거리는 공기를 따라, 산산이 갈린 붉은 고깃덩이가 바닥에 흩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