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56
현대에서 잠수함은 크게 2종류로 분류했다.
킬러(Killer)와 부머(Boomer). 킬러는 적의 함선이나 잠수함을 사냥하는 기체를 의미했다. 비교적 작고 날렵하며 고속으로 기동 가능한 잠수함이었다.
이와는 달리 부머는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을(SLBM 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 16~24발을 싣고 다니는, 종말형 병기다.
적재하고 있는 SLBM의 탄두가 전술 핵탄두인지라 부머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것은 상호확증 파괴상황이 도래했다는 의미였다. 즉, 핵 종말이라는 소리.
지금처럼 중국과의 관계가 날카로운 상황에서 부머를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제 발 저린 중국이 지레 겁먹고 버튼을 누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전에 투입된 것은 킬러 잠수함. 공격형 원자력 잠수함(SSU)이었다.
일본 서북부.
항구도시 니이카타 인근 해역에서 버지니아급 잠수함 하나가 잠망경을 올렸다.
“항만이 인파로 바글바글합니다.”
주한 미군이 동해에 띄운 조기경보기에 초대형 수송선을 비롯한 엄청난 숫자의 배들이 일본 북서부 항구로 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조기경보기가 화산재와 먼지 때문에 일본 방향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없어, 확인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예상대로다.”
일본 관동지역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는 이야기에 허겁지겁 탈출하겠다고 모인 중국군을 싣고 갈 수송선이겠지. 그렇게 죽을 자리에 옹기종이 모인 것들이었다.
회춘의 흔적, 초인의 비밀이 감춰진 관동지역을 왜 날려? 중국놈들이 모인 항구만 날려 버리면, 오롯이 미합중국의 차지가 되는 데.
“요원으로부터는 보고가 없었나?”
“적들이 중계기를 전부 박살 내 통신이 끊겼습니다.”
적들을 감시하고 원활한 통신을 위해 설치한 부표가 전부 사라지고 있었다. 미군이 깔아 눈과 귀를 처리했다는 건, 대규모 수송작전의 전조라고 생각해야 했다.
“중국 북부에 있는 방송국들의 보도를 시작으로 피난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일본의 항구로 수송선을 보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출발했다는 어선 선장들의 이야기가 링톡과 뉴튜브에 올라왔습니다.”
“하- 이것들이 우리를 바보로 생각하나?”
이건 심리전이었다.
“요원들이 자세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도록 중계기를 박살 내놓고 피난민 수송이라고? 그걸 믿으라는 말인가?”
“······.”
“기만전술이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이 국민군에게 했던 기만전술. 베트남전쟁 당시에 베트콩들이 아군에게 한 기만작전도 비슷했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빨갱이들이 후방으로 침투해 퇴로나 보급선, 통신망을 끊었던 방식.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형 레이더와 소나, 통신중계기가 달린 부표를 공격했다는 건, 감추고 싶은 게 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게다가 일본인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중국 어선 선장들이 자기들 목숨을 내걸고 일본 항구로 모인다고?
일본에 재난이 터진 지 반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단 한 명도 가지 않았던 놈들이? 동네방네 방송까지 해가면서 제발 믿어 달라고?
어림없지. 더러운 놈들.
미합중국을 공격한 놈들이 중국인이라는 것은 밝혀진 사실. 단지 보안이 걸렸을 뿐이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한 승무원들은 모두 말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미사일 발사 준비.”
중형 킬러 잠수함이지만,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소형전술 핵탄두를 탑재한 순항미사일을 적재하고 있었다.
나지막한 함장의 명령에 복창하는 대원들.
“미사일 발사 준비!”
“발사 준비 완료.”
“코드 확인-”
“코드 확인!”
.
.
.
4월 중순. 일본의 봄은 부패했다.
화사하게 피던 벚꽃은 구경할 수 없었다. 죽어버린 벚나무엔 새순도 꽃봉오리도 없었으니까.
눈과 얼음이 녹아내린 회색 진창. 썩어가는 시신들에서 올라오는 사기(邪氣).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죽음의 늪지대가 펼쳐졌을 뿐.
하수도는 막혀 역류했고, 화산재와 연기의 독성 때문인지 파리 따위의 벌레들도 없어 생명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도쿄.
우르르르릉-
진도 5~6 사이의 지진이 거의 매일 있었고, 눈과 얼음으로 지탱되던 건물들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넘치고 썩어버린 물을 피해,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바퀴벌레와 쥐들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살아남은 생존자들. 혹독한 겨울에도 버틴 사람들이 바퀴벌레와 미친 쥐의 먹잇감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쿨럭- 쿨럭-
마스크의 필터를 갈아 낀 대원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큭- 카악- 소리의 끝에 뱉어진 것은 검붉은 핏덩이. 신체 강화 능력자임에도 조잡한 필터로 인해 망가진 폐는 어쩔 수 없었다.
쓰러진 대원을 부축하며 돌아가는 길은 끔찍하게도 힘들었다.
화산재와 먼지, 연기는 생존자들을 죽이는 것과 동시에 변이 괴수의 수명도 줄였다. 미국에서는 변종 괴수들이 창궐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귀축영미에게 천벌을, 배신한 중국에 복수를.’ 신일본 연합의 수장인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미국과 중국의 원조를 최대한 받아 내려고 줄다리기했다.
‘적의 원조로 힘을 기르고, 적의 보급으로 적을 친다.’ 좋은 이야기였지만, 그건 원조나 보급이 정상적일 때 논리였다.
‘중국에서 보급품 원조를 줄였습니다.’
‘미군에서는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면서 피난민들 보내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놈들!’
그렇게 미군의 보급고를 털었다. 중국군을 털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고,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중국군과 미군의 교전이 치열한 틈을 타, 보급고를 터는 데 성공한 뒤, 증거를 없앴다.
‘흔적이 남아서는 안 돼.’
‘탄흔은 어떻게 합니까?’
‘중국 놈들이 쓰는 12.7mm 탄으로 흔적을 덮어.’
지울 수 없는 흔적은 그런 식으로 덮었다.
미군 보급창을 털었지만, 소모품은 항상 모자랐다. 협조하지 않으면 보급을 아주 끊겠다는 중국놈들의 협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존 물품이 필요했으니까.
무엇보다 화산재와 먼지를 거를 필터류는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정수 알약, 정수 필터, 공기정화 필터와 마스크. 이런 것들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혹독한 환경으로 변한 일본 관동지역이었다.
‘무슨 방법을 쓰든 컨테이너만 들어가게 해주면 된다.’
중국군은 일본이 가진 끈을 이용해 미국으로 컨테이너를 16개나 싣고 갔다. 일본인 난민으로 위장해 들어간 자들만 100여 명에 이르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설마 미국을 공격하지는 않겠지. 한다고 해도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좋든 싫든 중국군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했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미국에 다시 손을 벌려봤지만. 소용없었다. 미국은 일관적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피난민들과 초인들 전부 미군의 관리하에 들어오면 될 일 아니냐고 했다.
독립적인 일본 부흥세력을 추구했던 신일본 연합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 결국 중국과 계속 손을 잡게 됐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누군가에게 모든 걸 넘겼어야 했을까?
피난민들도. 기술도. 미래에 절대적인 위치가 될지 모르는 초인들과 그 요람까지 전부 포기해야 했을까?
‘포기할 필요 없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자신감 넘치는 눈빛과 목소리.
2차대전의 패전, 그 폐허의 끝에서도 미국을 쥐락펴락할 만큼 성장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미래엔 초인이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게야.’
‘아무리 대국이고 아무리 버러지들의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초인을 이기지 못하는 시대가 온다.’
‘일본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초인을 붙잡고 있어야 해. 초인이 탄생하는 이 땅을. 일본을 우리가 지켜야 해.’
총화기가 통하지 않은 변종들이 넘치고, 항공편과 뱃길이 끊기면 결국 초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가다마 키리코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며칠 만에 돌아온 도시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피난민들이 매일 모여들어 항상 북적이던 도시가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사람들이 전부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남아있던 사내가 상황을 설명했다.
미국에서 관동지역 변이 괴수들 말살을 결정, 무차별로 폭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홋카이도와 관서 지역으로 피난 가려고 항구로 향했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소리죠? 갑자기 미국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미국 본토가 공격받아 대외 정책이 급변했다고 합니다.”
통신과 인터넷이 끊긴 상황인지라, 소식이 많이 늦었다.
열흘 넘게 수색 작업을 하고 돌아온 키리코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끔찍하게 돌아가는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병력을 철수하면서, 수도권을 포함해 변종이 출몰한 지역을 전부 폭격해 버리기로 했답니다.”
이제껏 많은 희생을 해서라도 도쿄와 주변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던 미군인데. 갑자기 철수하고 폭격?
불행중 다행인지 신일본 연합에 합류한 초인들이 피난민들과 이곳에 있다는 건 미국도 중국도 알고 있는 사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폭격에서 안전한 장소였다.
“이성적으로는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내심은 불안하니까요.”
통신과 인터넷이 끊긴 지금, 오폭 사고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묻혀 버릴 게 분명했으니까.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관서 지역으로 가거나, 홋카이도로 넘어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변이 괴수들을 잡기 위해 폭격하겠다고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미군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나요?”
“아니요. 공식적인 브리핑은 없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키리코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커지는 위화감.
폭격기를 이용한 폭격은 말이 안 됐다.
화산재와 먼지, 연기로 항공기 운항이 불가능한데 어떻게 폭격하겠는가?
일반 미사일로 수도권, 그 넓은 지역에 있는 변이 괴수들을 잡을 수 있을까?
미사일 수천 발이 필요할 텐데?
미국이 공격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거지?
“중국군 쪽에서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돋아오르는 소름.
키리코는 섬뜩하게 다가오는 불길함에 중얼거렸다.
미국이 공격하려는 대상이, 변이 괴수가 아니라 중국군이라면···.
“설마···.”
“예?”
할아버지를 찾아야 했다. 할아버지라면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피난민들을 설득하시겠다고 가셨습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아셨구나.
키리코는 할아버지 가다마 신타가 간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얼마나 걸었을까
폭발하듯 번쩍이는 강렬한 불빛.
산 아래. 먼 항구 위로 조그만 태양이 떠올랐다.
이어 버섯구름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
키리코는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 망연자실한 눈동자 속으로 작은 태양이 하나. 둘. 셋··· 멀리 해안선을 따라 빛났다.
쿠르르릉- 쿠르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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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지나 5월 초.
큼지막한 국방색 하드 케이스가 배송됐다. 미군에서 보낸 상자였다.
“······.”
“······.”
마루와 김 양은 말없이 박스를 열었다. 정복을 비롯해 군복과 기본적인 옷가지, 전투화, 단화를 비롯해 커다란 상자 속이 가득했다.
“근데 치수 같은 거 말한 적 있냐?”
김 양이 도리도리했다.
“일단 입어보자.”
먼저 정복부터.
주섬주섬 옷을 입어보니 딱 맞았다.
이런 스토커 같은 새끼들.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데?
김 양도 옷 입은 각이 나오는 걸 보니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장교 정복이 생각보다 멋있기는 하다만, 뭔 짐을 벌써 보내?’
그날 밤 마루는 잠을 설쳤다.
“아오- 씨-”
“디아나 이거 왜 이러는 것 같아? 그냥 가만히 두지를 않네.”
[태평양 전쟁 시. 부족해진 장교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장교로 전역한 사람들을 재소집, 재교육한 전례가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랑은 다르잖아.”
[향후 논란이 없도록 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보입니다.]
엉클 샘의 악의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마루는 영 찝찝했다.
김 양도 잠을 설쳤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식당에 내려왔다.
“얼굴이 왜 그래?”
군대 악몽을 꾼 것도 아니면서.
“회사 다닐 때, 악몽. 동남아랑 중국에서 뺑이친 꿈을 꿔서···.”
똥통에서 잠복했던 일을 시작으로, 김 양의 파란만장한 회사 썰이 열렸다.
“잠깐.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궁금하긴 하니까.
마루와 김 양이 전투적인 식사를 영웅적으로 끝낼 즈음.
디아나가 긴급호출 신호를 받았다.
[국토안보국과 전략사령부에서 호출이 들어왔습니다.]
옷 던져주자마자 긴급?
하- 헛웃음 친 마루가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마저 먹어. 내가 가서 확인해 볼 게.”
마루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김 양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간 마루가 화상통화를 시작했다. 커다란 모니터에 국토안보국 덴 브라운 과장과 육군 소속 중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56시간 전 중국에서 내전이 터졌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비밀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해, 일본 관동지역에 있는 중국군을 전멸시켰다고 했다.
[북부전구의 전력이 약해진 틈을 타, 베이징에서는 북부전구를 지배하고 있는 룽 가문을 숙청하려 했지만, 이를 사전에 알아챈 룽 가문에서 내전을 일으키고, 다수의 초인을 이용해 베이징을 습격한 상황입니다.]
중국 애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런 마루의 생각을 부정하듯, 덴 브라운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베이징에 침투한 초인들이 핵 보한 코드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