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258화 (258/280)

러스트 [RUST]-258

“베이징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부터 작전이 시작됩니다.”

내려주자마자 신형 전략기는 한국에 있는 주한 미군 기지로 가서 대기한다고 했다. 중국이 내전 중이라고 해서 ‘중국’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

지금처럼 혼잡한 상황이라면 중국 정부 쪽에서는 ‘반군이 공격했다.’고 하면서 훔치려고 할지 몰랐다.

반군은 ‘우리가 미쳤다고 미국을 건드릴까?’라며 중국 정부가 그랬다고 하곤 슬쩍하려고 할지 모르고.

중국 지도부의 탈출로를 공격한 제3의 세력까지 생각한다면 작전이 끝날 때까지 베이징 공항에 있는 것은 위험했다.

“정체가 노출되면 당국은 모든 관련성을 부인할 것입니다. 비공식적이라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비공식적인 지원 요청에 따라 비공식적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지에서 문제가 생길 시 미국과의 관계는 전면 부정될 것이라는 이야기.

‘증인이 없어야 한다는 소리네. 흔적도 남기지 말고.’

예전에는 늘 했던 일 아니던가? 마루는 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GFR(Grim File Reaper)-03 슈트입니다. 광학 은신 기능과 생명유지 장치, 기본적인 방탄능력이 있는 장비입니다.”

통칭 리퍼 슈트. 역시 미국에도 은신 장비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 로브나 갑옷 같은 느낌이 아닌, 몸에 쫙 달라붙는 장비. 오토바이크 슈트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은신은 최대 33분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교체 배터리 팩도 하나당 33분씩 사용 가능하며, 총 2개가 지급됩니다.”

“슈트와 연동해야 할 무기가 있다면 주십시오.”

마루는 칼을 넘겨줬다. 칼집째 들고 나가더니, 순식간에 개조를 끝내버렸다. 마치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칼집에 은신 가능한 장치를 달아 슈트와 연동시킨 것.

이제는 은신 기능을 작동하면 칼집도 같이 은신 모드가 됐다. 칼을 뽑기 전까지는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

“향후 전용 장비는 군 연구소에 연구를 의뢰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투명한 칼날이라던가. 은신 기능 키면 같이 연동되는 칼이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해 준비하겠다는 소리였다. 지금은 칼을 뽑으면 칼이 허공에 둥둥 뜬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말이다.

연구해서 은신 가능한 칼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 녀석 정도의 칼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클립스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루가 태연하게 꾹 눌러 잡자, 웅- 작게 울리던 칼이 잠잠해졌다.

“장비는 전부 점검했습니까?”

“이상 무.”

“탑승 준비 완료.”

“탑승.”

신형 전략기에 올라타자, 급하게 개조한 흔적이 남아있는 좌석이 반기는 모습.

[베이징 공항까지 4시간 남짓 걸릴 예정입니다.]

창문도 없는 좁은 실내에서 마루는 호흡을 골랐다.

후-

개조한 칼집에서 칼을 살짝 뽑았다. 울퉁불퉁 금속과 암석의 중간쯤 되는 칼날이 드러났다. 그래핀과 탄소나노튜브 소재로 감싼 손잡이가 착 달라붙는 느낌.

스트레스로 불규칙하게 흔들리던 호흡, 삐죽삐죽 솟기 시작한 감정이 서서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예고 없이 보낸 군용품 상자. 갑작스러운 긴급호출. 덴 브라운 과장과 옆에 있던 중령. 그리고 중국의 핵 보안 코드를 입수하거나 폐기하라는 지령까지.

뭔가 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그래서 불평이나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생각은 나중에, 당장은 본능이 속삭이는 대로. 생사의 순간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3개 팀이라고 했었지.’

50~60시간 전에 내전이 벌어졌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나머지 2개 팀은 그쯤 침투해서 작전을 펼치고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3개 팀이 아니라 30개 팀이 들어가 있을 지도.

일본도 있고 중국도 있는데 미국에 은신 장비가 없을까 했더니, 한술 더 떠서 은신 슈트가 있었다. 이름도 리퍼 슈트.

슈트가 있다는 건, 이걸 쓰는 애들도 있다는 의미. 자신에게 이런 슈트를 줬다는 건 다른 애들도 지급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받은 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팀 단위로 있다는 이야기.

그런 애들이 있는데 또 자신까지 베이징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왜? 마루는 간질간질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 생각에 칼 손잡이를 꼭 쥐었다.

웅- 칼에서 올라오는 조그맣게 느껴지는 진동이 뒤틀려가는 마루의 심사를 가라앉혔다.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 실종 사건을 해결했을 때는 만나고 싶다고 했던 사람도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디아나를 통해 뒤를 파기 시작했는데 운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시애틀 폭발과 EMP 사태로 사실상 전시사태에 돌입해, 정부 기관 관련 통신망의 보안이 최고 수준까지 올라가 버렸다. 디아나를 활용해도 흔적없이 찾는 건 불가능하게 됐다.

파티 핑계를 대면서 소개해 달라고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덴 브라운 과장에게 넌지시 이야기했지만, 거절당했다.

마루의 의문은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유가 뭘까?

덴 브라운 과장이 중간에서 조율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었다. 1년 뒤로 늦춘다고 했더니, 은근슬쩍 교육과정을 밀어 넣고 지금은 긴급 사태라는 명분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국토안보국도 힘이 없는 기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든든한 가림막이 된 건 사실이었으니까, 주고받는 것도 비교적 깔끔했고. 그런데 군부로 그늘을 옮기라고 한 이유가 뭘까?

과장의 말로는 계속 찔러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논리적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감각적인 결론.

아마도 그것. 그게 확실했다.

결론부터 역으로 거슬러가자 증거들이 보였다.

정말 미국이 전쟁을 결정했다면 어떻게 할까?

덴 브라운 과장이 모르는 척 언급하고 지나갔던 일들이 떠올랐다. 명확하게 답을 해주지 않았지만, 이미 그때부터 한쪽에서는 전쟁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 가능성이, 시애틀 폭파와 EMP 테러로 현실이 됐다.

병력 확충, 훈련 강화, 중간 간부 재교육, 신무기 체계 양산 시작, 군수품 생산 시작. 그리고 지금 작전.

‘핵 보안 코드를 확보하거나 폐기할 것.’

마루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하아- 그런 의미였단 말인가?

[5분 뒤 베이징 공항에 도착합니다.]

그렇게 중국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항공기 운항이 중단된 베이징 공항은 텅 비어 있었다.

간혹 멀리서 들리는 총소리가, 교전이 벌어진 것을 알려줬다. 마루는 전술 헬멧을 벗어 스마트폰과 연결했다. 잠시 뒤, 디아나와 연결됐다.

“디아나. 시스템 장악하고, UI(User Interface)를 내가 쓰던 거로 바꿔줘.”

[프로그램 다운로드 시작합니다.]

[···권한 조정. 완료. 위치 정보 확인. 영상 관리 실시···]

[시스템 업그레이드 완료. 재시작합니다.]

HUD 화면이 잠시 꺼졌다가 재부팅됐다. 마루가 즐겨 쓰는 방식으로 변한 화면이 떠올랐다.

위잉- 슈트의 은신 기능을 켰다. 거의 실시간으로 은신 기능이 작동됐다. 확실히 전에 썼던 다른 장비보다 훨씬 좋았다.

작전 시간이 짧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특히 생명유지 장치에 대한 부분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좋아. 우리 빌딩에 EMP 대책은 어떻지?”

[모듈 원전과 슈퍼컴퓨터 유닛은 EMP 대응이 가능합니다.]

모듈 원전은 전략사령부, 슈퍼컴퓨터 유닛은 국토안보국에서 관여했으니 EMP 대응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게 이상하지 않았다.

[비상 서버를 비롯한 다른 시설물들은 EMP에 취약합니다.]

스마트 팜을 비롯한 다양한 연구장비들은 EMP에 끝장난다는 이야기.

“EMP 대응 바로 실시하고. 김 양의 엑소슈트도 EMP 대응하게 개조 의뢰 넣어줘. 방사능 대응도 필요하고.”

[기술진에게 전달했습니다.]

[미국 서부 대도시에 터진 EMP 탓에, 대응 관련 물품, 관련 부품들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시장에서 구할 수 있으면 웃돈 주고라도 구하고, 구할 수 없는 품목은 국토안보국 덴 브라운 과장에게 달라고 해.

[연락했습니다.]

“실시간 오퍼레이팅 가능해?”

[회선이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현재 베이징과 인근 지역에 강한 통신 검열이 실행 중입니다.]

“어쩔 수 없지. 딜레이가 생겨도 좋으니까 일단 되는 대로 확인해줘.”

처음 찾아야 할 것은 핵 보안 코드를 가지고 있는 중국 지도부였다. 주석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있는 위치.

당연히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위치 정보가 여럿이 나왔다. 지하 비밀 통로로 탈출하지 못하게 되자, 안전을 위해서 더미를 풀었다는 의미였다.

10개가 넘는 더미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찾아다닐 여유가 없었다.

“지도에 띄우고 반군 초인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올려봐. CCTV에 찍힌 교전 화면도 같이.”

정부 내부에 반군과 결탁한 자들이 있을 테고, 주석을 암살하려고 암약한 제3세력도 있었다. 분명히 반군 초인들과 다른 협력자들에게 주석과 정권 실세들이 어디 있는지 알렸겠지.

그러니까 반군 초인과 무장세력이 이동하는 방향이 중요했다. 주요 교전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지도부가 있는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측 지역은 2곳으로 압축됐다.

“인근 CCTV 통제해. 그리고 주변 인터넷과 통신. 모조리 차단할 수 있겠어?”

[30분 소요됩니다.]

“통제하고, 가까운 곳부터 가자.”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도와 화살표가 떠올랐다.

민간인 피해를 신경 쓰지 않고 날뛴 초인들 때문일지, 그런 초인들을 잡겠다고 화력을 때려 박은 방어군 탓일지, 교전의 흔적은 참담했다.

건물 여럿이 반파된 현장. 거의 백에 가까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 사이에 묻힌 파워로더 형 엑소슈트가 회수되지 않고 버려져 있었다.

‘뚫렸나?’

방어에 성공했으면 뒤처리를 하고 있었겠지. 퇴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군 식별 코드 발견.]

“어디야?”

마루는 은신한 채, HUD에 뜬 아군 표시를 향해 조심히 이동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은 처참한 모습의 시신이었다.

머리가 없는 시체는 두 팔이 잡아 뜯긴 것처럼 찢어져 있었다.

고문의 흔적일까?

불로 지진 단면이 선명했다.

리퍼 슈트를 입고 있는 채로 뜯긴 것도 이상한데, 무릎 꿇은 채 목이 잘린 모습. 옆에는 눈이 뽑히고 혀와 코, 귀가 잘린 머리통이 축구공처럼 동그랗게 다듬어져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악의가 느껴지는 훼손 방식.

하나도 아니고 3명의 시신에 이 지랄을 했다는 건, 확실히 의도적이었다.

전의를 꺾기 위해?

그렇다면 시체를 잘 보이는 곳에 뒀겠지.

박살이 난 전사자들의 슈트 헬멧에 케이블을 연결해, 교전 기록을 내려받았다.

“마지막 교전 영상 재생.”

HUD 한쪽에 영상기록이 떠올랐다. 기록을 남긴 사람은 저격병이었는 듯, 위치를 잡고 저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루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이어 반군 초인이 등장했다. 스코프에 담긴 목표는 모피를 두르고 있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안쪽에는 갑옷처럼 보이는 것을 덧입은 모습.

[퉁- 철컥- 퉁-]

7.62mm 총탄을 연달아 꽂아 넣었지만, 총에 맞은 타겟은 잠시 움찔거릴 뿐, 간지럽다는 듯 방어군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퉁- 철컥- 퉁-]

순식간에 탄창을 비웠지만, 적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못했다.

[7.62mm가 통하지 않는다.]

[퇴각한다.]

다른 쪽에 있던 대원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퇴각하려는 찰나. 스코프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륵-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스코프와 총신을 휘감아 도는 불꽃. 총을 버렸지만, 어느새 불꽃이 전신에 달라붙었다.

리퍼 슈트의 생명유지장치가 작동되면서, 외부의 뜨거운 공기를 차단했다는 표시가 화면에 떠올랐다.

순간 억누른 신음과 핏방울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끄아아아아악!]

신음이 비명으로 변했다. 슈트와 함께 통째로 뽑히듯 찢어진 두 팔.

슈트 겉을 넘실거리던 불꽃이 드러난 상처를 물어뜯었다. 강력한 충격에, 리퍼 슈트의 생명 유지장치가 다시 작동했다.

전투자극제를 비롯한 약물이 주사됐지만 두 팔을 잃고 실시간으로 살이 녹아내리는 상황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촤륵-

긴 채찍 같은 무엇인가가 날아와 두 팔을 잃은 대원의 목을 잡아채 끌고 갔다.

[전부 퇴각해.]

전투자극제의 효과로 기절하지도 않고 죽지도 못한 대원이 끌려간 곳에는, 전통 일본식 갑옷을 입은 자가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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