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60
손에 걸린 느낌이 이상해 마루는 칼을 살살 휘둘러봤다.
철근 콘크리트도 가볍게 썰어 버리는 이클립스에 미약한 저항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위아래 좌우로 휘둘러지는 칼질에 거친 파공음을 내며 공기가 찢겼다.
크르르르- 크르르르-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괴수 가죽을 베는 느낌이 철근 콘크리트보다 빡빡하다는 것.
따지고 보면 이상하지 않은 것도 같고. 7.62mm 저격총도 약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철근 콘크리트에 구멍을 숭숭 내는 총알을 가볍게 막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잘린 모피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꿈틀꿈틀- 바닥에 깔린 조각들이 잠들었다 깨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씩 벌떡거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죽인다. 죽인다!”
“···이건 뭔···.”
몸통이랑 같이 팔이 잘렸는데도, 계속 주둥이로 ‘오노레.’를 찾는 놈들.
‘오노레?’
상체와 하체가 분리됐어도 죽지 않고 꿈틀거리다 못해, 말까지 하는 게 충격적이어서 정신 놓고 있었는데, 얘들 일본인?
“일본인?”
마루가 일본어로 중얼거리자, 놈들의 발광이 더 거세졌다.
“미제의 개!”
“죽인다. 죽여버린다!”
한 놈이 죽이겠다고 발작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피어난 불꽃이 살아있는 뱀처럼 마루의 헬멧을 휘감았다.
[생명유지장치 작동.]
휘이이이익- 리퍼 슈트의 헬멧이 외부의 뜨거운 공기를 차단했다. 불을 다루는 놈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마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칼을 휘두를 뿐.
츠컥-
울퉁불퉁한 칼날이 발작하는 놈의 목을 거칠게 썰고 지나갔다. 헬멧을 휘감고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힘을 잃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개새끼가!”
남은 놈이 거칠게 몸부림쳤다. 잘린 단면으로 이러저러한 내장이 빠져나오는 데도 개의치 않는 모습.
잘렸으면 곱게 죽지, 왜 이렇게 질겨?
푹-
칼끝이 머리뼈를 파고 들어간 뒤에서야 조용해졌다.
‘찝찝하네.’
시체를 또 죽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더러웠다.
“북부전구에서 베이징으로 보냈다는 초인들이 일본 애들인 것 같은데? 이거 미국에서도 알고 있는 건가?”
[···데프콘 발동 이후 보안등급이 높아져, 흔적없이 자료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미국 쪽이 어려우면 북부전구나 지금 베이징 중국 정부 자료를 털면 되잖아.”
[확인하겠습니다.]
디아나는 ‘융통성’이라는 것을 1 학습했다.
중국 정부와 북부전구 모두 강력하게 보안을 걸어놓기는 했지만, 어차피 적성세력인지라 뒷일이나 흔적 신경 쓰지 않고 뚫어버리려면 뚫을 수 있었다.
디아나가 작심하고 해킹에 들어가자, 북부전구에서는 부랴부랴 자료를 파기하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필요한 자료를 찾는 것보다 일단 통째로 퍼가는 것을 선택했다. ‘융통성’이 1에서 2로 올라간 모습.
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국 서버에 들어간 김에 이를 활용해, 미국 서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쪽도 당연히 양측 모두 난리가 났지만, 그냥 잘리는 순간까지 풀로 자료를 퍼간 디아나.
“자료 찾겠다고 무리하지 말고.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했었지?”
[안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안전. 자나 깨나 안전. 안전이 제일이다. 꼬리 잡히지 않게 잘 정리하고”
[알겠습니다.]
디아나가 빼내온 자료 가운데 정말 1급 기밀은 없었지만, 낮은 등급의 기밀. 명령서라든지 보고서 같은 것들을 규합하면 퍼즐 맞추기처럼 어떤 그림이었는지 대략 윤곽이 잡혔다.
양측에서 추적하면 중국은 미국으로 미국은 중국에서 이렇게 엮이겠지. 디아나의 ‘융통성’은 2에서 3이 됐다.
[···저쪽에서 자료를 파기해, 복원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확인한 것 가운데 특이 사항은 일본 관동지역에서 북부전구의 병력이 몰살한 사건입니다.]
미국이 비밀리에 실시한 작전이라고 했었다. 북부전구에서 파악한 바로는 미국에서 전술핵을 사용해 몰살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었다.
[북부전구에서는 일본 피난민들을 방패로 삼아, 퇴각작전을··· 미군의 눈을 가리기 위해, 동해지역에 깔아 놓은 감시 장비와 통신기를 제거한 것이 오히려 악수가 됐습니다.]
눈을 가리면, 피난민들 생각해서 공격하지 못하겠지 생각했지만, 미국은 반대로 생각했다. 피난민이 없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눈을 가렸겠지.
[전략사령부와 버지니아 자료를 보면, 북부전구의 대규모 퇴각작전을 역 이용해 한 번에 쓸어버리려고 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어진 디아나의 설명을 듣던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퇴각을 유도한 뒤, 그걸 이용해서 한 번에 쓸어버리려고 했다?”
[그렇습니다.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으로 나옵니다.]
“근데 일본인들이랑 무슨 상관이지?”
[북부전구에서 일본인 피난민들을 퇴각작전이 이뤄지는 항구로 유도해, 방패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북부전구 기록에 따르면 대규모 퇴각작전 당시, 일본인 피난민들이 다수 항만에 있었습니다.]
“잠깐. 그럼 미국은 그걸 알고 항구를 공격한 거야?”
[북부전구에서 미국의 감시장치와 중계기를 파괴했기 때문에, 항구에 모인 자들이 전부 민간인으로 위장한 중국군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중국의 국공내전, 베트남전에서도 민간인으로 위장한 작전이 넘쳤었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테러, 민간인으로 위장한 부대는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서도 지겹도록 봤던 미국인지라, 적의 기만전술이라고 생각하면 자비가 없었다.
“섬멸 작전이면 엄청난 화력이 필요했을 텐데 뭐로 공격했지?”
[북부전구의 기록으로 보면, 미국이 전술핵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핵일 것이다. 항구지역을 통째로 날려 버리려면 어지간한 미사일 수십 발로는 어려우니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싸움에서 드러났듯. 일반적인 미사일은 도시를 공격하는 데,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도시는 생각보다 훨씬 튼튼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오듯 미사일 한 방에 빌딩이 무너지고 그러지 않았다.
“핵···.”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지 않아도 인류역사상 유일하게 핵 맞은 피해자를 자처하는데, 또 핵을 맞았다.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그 증오스러운 핵이 또 떨어졌다는 게 중요했다.
중국군이 어떻고 미군이 저렇고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일본에 또 핵이 떨어졌고, 핵으로 죽었다는 것.
“일본 초인들이 북부전구와 손을 잡았다는 소리구나.”
[정황상 그렇습니다.]
“씨발- 하-”
퇴각하는데 미국의 공격을 막겠다고 일본인들을 방패로 삼은 중국 북부전구,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이라고 생각하고 계획대로 공격한 미국,
중국, 미국 양측에서 줄타기하다가 북부전구와 같이 핵 맞은 일본.
그리고 지금.
중국 중앙 정부가 가진 핵 보안 코드를 노리고 있는 북부전구.
북부전구의 용병으로 베이징에 침투한 일본의 초인.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 같은 미국의 움직임.
미국에게 비공식적인 도움을 요청한 중국 중앙 정부.
비공식으로 들와서 핵 보안 코드의 확보, 폐기 작전을 벌이는 미국.
상/하로 쪼갰는데도 바로 죽지 않고 버둥거리는 새끼들까지.
그냥 기분이 더러운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욕 나오는 상황이었다. 좋지 않았다. 마루의 예민한 감각이 불길하다고 아우성쳤다.
살기로 쿡 찌르는 느낌이 아니었다. 숨 쉬고 있는 공간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곳 저편까지 모조리 칙칙한 느낌.
핵을 맞은 원인에는 분명 중국 북부전구의 농간도 있었다. 일본에 그런 걸 간파할 정도의 사람이 없을까? 그렇다면 알면서도 북부전구의 요청을 받고 베이징에 들어왔다는 소리.
핵 보안 코드를 둘러싼 불길함이 솔솔 냄새를 풍기는 것만 같았다.
“디아나. 지금 추적하는 놈들 어디쯤 있어?”
조심스럽게 조용히 할 일이 아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를 땐, 시끄럽든 말든 무조건 빨리 해결하는 게 좋았다.
HUD에 지도와 길 안내가 떠올랐다. 마루의 모습이 일렁거리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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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안보국 덴 브라운 과장은 위장약을 입에 넣고 씹었다.
알약 포장지에 적힌 문구. ‘씹어서 삼키세요.’
그런다고 누가 씹나? 대충 물이랑 같이 삼키기 마련이지만, 그는 설명서에 적힌 대로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당연한 거 아닌가?
복약설명서가 있으면 그대로 하는 게 제일 효과 좋은 게 아닌가?
하다못해 컵라면을 끓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프를 넣고 표시선까지 물을 부으세요.
그게 그렇게 어렵나?
스프 뜯어서 넣고 표시선까지 물을 붓고. 3분 있다가 저어 먹는 게 그렇게 못할 일이야?
왜 물을 반절만 쳐넣고 기다리지도 않고 생으로 씹어 먹고는 맛이 있니 없니, 스프는 왜 안 넣는 건데? 스프를 생략해도 맛이 있어야 한다고?
덴 브라운 과장이 보기에, 전략사령부와 일부 장성들서 하는 짓이 꼭 그런 짓이었다. 다독다독 살살 달래서. 줄 거 주면서 쓰면 된다고 블라디마루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올렸다. 그럼 그대로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약속하고 약속한 대로 지키면 문제없다. 그게 그렇게 힘든가?
컵라면 끓이는 거랑 똑같지 않은가?
컵라면을 사서 먹으면서, 씨발 스프를 생략해도 맛있어야 한다.
끓는 물이 아니라 찬물이어도 괜찮아야 한다.
뜯자마자 핫바 먹듯 처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 그게 병신 아닌가?
물론 발작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블라디마루 칼린과 야니아 킴이 일본인이 아니라, 사실 한국인이었다는 정보를 버지니아를 비롯한 군 정보기관이 확인, 검증하면서 여러 가지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블라디마루 칼린은 깨끗했다. 가문에서 운영하던 중견기업이 망했고, 아버지는 항암치료, 어머니는 마약중독치료, 여동생은 전도가 유망한 피아니스트.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의 동생이 말하길, 오빠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이번에 오진 그룹 회장에 취임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부터 문제가 복잡해지기 시작됐다.
오진 그룹에 문의한 결과, 그 말이 사실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러니까 블라디마루 칼린과 약혼했다는 것.
미래가 유망한 기업 회장이자, 제약 분야에서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여자 회장이 일편단심 기다리고 있는 자가 블라디마루 칼린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난 뒤, 다들 눈빛이 달라졌다.
변이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지능 저하와 분노제어 치료 신약을 만들었고, 임상 3상 통과가 유력한 상황.
이런 오진 그룹과 연결된 블라디마루 칼린을 휘하에 두면?
1+1이 아니라 1+a가 될 상황.
‘블라디마루 칼린은 오진 그룹 여회장을 피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왜? 돈 많은 그룹 회장에 미인인데.
‘블라디마루 칼린의 행적을 보면, 사랑의 도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루가 일으킨 피바람도, 나주현의 광기도 모르는지라 마루가 신분 세탁한 이유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있을 법했다.
그러니까, 집안이 망한 가족들이 블라디마루를 오진그룹에 팔아버렸다는 것.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위해, 신분까지 세탁하고 도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
한국에서부터 일본을 거쳐, 미국에 도착해서도 블라디마루 칼린 옆에 붙어있는 여자. 야니야 킴과의 사랑의 도피.
‘킴이라고 했던가? 그 여자 확실하게 파봐.’
그리고 나온 결과에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북한 출생으로 추정.
다른 나라도 아니고 북한?
중국에서 암살 관련 행적 발견.
북한도 지랄 같은데 중국?
화룡점정으로 월드 그룹 PMC에서 클리너로 활동.
‘청소부’ 그러니까 ‘킬러’였다는 소리.
이 시국에 하나도 아니고 3종 셋트.
북한산 중국조립 한국 활동 킬러가 우리 귀한 블라디마루 칼린 옆에 붙어있다는 말.
북한의 공작원일까? 탈북 코스프레 스파이는 흔했다.
중국의 덫? 허니 트랩은 중국이 즐겨 사용하는 계략이었다.
거기에 킬러?
‘입대에 부정적인 이유가 혹시···.’
‘빌딩을 그렇게 고친 것도 어쩌면···.“
‘확실히 과한 무장이지요.’
‘북한과 중국의 입김이 닿은 것은 아닐까요?’
‘북한과 중국의 때가 묻었으면 꼼꼼하게 확인해 봐야 합니다.’
‘맞습니다. 허니 트랩에 걸린 것이라면 빨리 정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야기는 돌고 돌았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
혹시라도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검증하자.
확인하는 김에 이렇게 저렇게 굴려보며 중국이나 북한과 연결됐는지 지켜보자.
덴 브라운 과장은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그가 본 블라디마루 칼린과 야니아 킴의 관계는 사랑의 도피 이딴 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다만. 야니아 킴의 불확실한 과거는 문제의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인지라,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다른 기관에서 야니아 킴과 블라디마루 칼린을 검증하겠다는 방법이, 이제껏 덴 브라운 과장이 올린 사용설명서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가 보기엔 다이너마이트를 모닥불에 던져 놓고 안전성 검증이라고 하는 꼴.
‘이대로 가다간 사고가 나도 크게 나겠어.’
블라디마루가 돌아오면 현재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고, 진득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덴 브라운 과장이었다.
“과장님. 전략사령부에서 긴급전문입니다. 블라디 타워를 장악할 부대를 보낸다고 합니다.”
“작전이 시작되면 타워 보안을 담당하는 국토안보국 요원들로 중앙통제실을 장악하고 출입문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씨발-
덴 브라운 과장이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나 기절했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