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261화 (261/280)

러스트 [RUST]-261

덴 브라운 과장이 한마디 더 했다.

“우리 애들 그런 거 못 한다고 해.”

“과장님!”

“어쩌라고? 넋 빠진 새끼들이 하라는 대로 하다가 우리 애들 다 죽일래?”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아니긴. 아니지. 아니야. 다들 정신이 나갔어.

“다른 방법 있으면 말해 봐. 전략사령부에서 뭘 잘못 먹었는지 눈이 돌아가서 저러는데, 시간 벌 방법. 우리 애들 떼죽음 안 시킬 방법 있으면 말해 보라고.”

“······.”

기본 설계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나? 내부에 자동 포탑이 있는데 중앙통제실 점거하고 출입구를 열라고?

자동 포탑 관리를 슈퍼컴퓨터의 인공지능이 하고 있고, 출입문 개폐 결정권자는 야니아 킴인데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야니야 킴을 생포해서 고문이라도 하라고? 그 뒤엔? 블라디마루 돌아오면? 오순도순 두 손으로 머리 들고 눕자는 이야기?

해킹해서 열면 된다? 형이상학(Meta-physics) 실험실에서 돌리던 최신 슈퍼컴퓨터에 인공지능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붙어있는 있는 걸 해킹하자고?

뭐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중앙통제실까지 가는 것도 힘들지만, 복도에 진입했다고 치자. 복도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20mm~40mm 벌칸포가 달린 자동 포탑이었다.

일렬로 죽으라는 건가? 피할 곳도 없는 일직선 복도에서, 총알 떨어질 때까지 밀어 넣고, 포신 녹아내릴 때까지 달려들면 가능이야 하지.

진지하게 따진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1차대전 참호전도 가능하지 않았던가? 기관총 진지를 뚫을 때까지 병력을 밀어 넣으면 뚫렸으니까.

근데 그걸 국토안보국 우리 애들이 하라는 소린가?

인력이 부족해 블러디 아크 타워에 있던 요원들을 빼서 재배치한 지 오래인지라. 지금 있는 애들 전부 희생해도 중앙통제실 방어를 뚫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나 병가다.”

“네?”

그래 지금부터 바로. 덴 브라운 과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하게 쓰러졌다. 털썩!

“과장님?”

덴 브라운 과장.

위궤양과 협심증, 고혈압 증세로··· R···은 아니었지만, 극도로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로 위험한 상태인지라 요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그로 인해, 전략사령부의 블라디 아크 타워 장악 작전은 일단 중지됐다.

전략사령부 회의실

“아무래도 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미합중국 연방군.

명예를 먹고 사는 군대라는 말에 걸맞은 대접받는 거의 유일한 군대. 공항에서 귀향하는 군인을 만난다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전사자의 시신이 운구되는 동안 자발적으로 시민들이 예의를 지키는 군대.

경제적으로 따지고 보면 그렇게 높은 대접을 받는 건 아니었다. 훈련병은 한화로 200만 원 이하, 정식으로 이병 달면 20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

여기에 훈련수당을 비롯한 다양한 수당이 붙긴 하지만, 미합중국의 평균소득을 생각하면 크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다른 직업이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군을 선택하고 군에서 복무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부심이 있기 마련이었다.

“한국군 복무 경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긴.”

한국군의 복불복 복무환경과 경험은 아는 사람이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최근에는 모르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상당히 부조리한 경우가 많았다.

대민지원이라고 쓰고 나가서 공노비 짓을 하고도 조롱받기, 그래서요 깔깔깔. 집 지키는 개. 이런 걸 실시간으로 방송에서 내보낼 정도였으니까.

“일종의 PTSD 상태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PTSD요?”

“예비 살인자 취급을 받았다면요? 군캉스하면서 생색내는 새끼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국군은 대체 어떤 지옥에서 복무하고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징병제인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블라디마루 칼린을 비방하던 자들도 잠시 침묵했다.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고통 어린 과거를 묻을 정도로 미합중국에 충성하는가? 그래야만 신뢰할 수 있었다. 북한산 중국조립 한국활동 용병 킬러라는 희대의 빨간 얼룩이 묻은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핵 보안 코드 폐기 작전에 참여한 것을 보면, 이제 충성심은 증명됐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전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넘겨짚지 맙시다.”

“고작 한 번으로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명령을 따른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정으로 미합중국을 위해 헌신할 정신인지. 그럴 자세인지 중심을 봐야지요.”

“그걸 어떻게 보고 어떻게 증명하자는 겁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어떤 장군이 낮은 목소리로 성구를 읊었다.

“신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네 가장 소중한 것을 제물로 바치라 하시매.”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라고 하자는 말입니까?”

블라디마루 칼린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블라디 아크 타워 그리고 야니아 킴. 그 둘을 건드려 보면 본성이 어떤지 드러날 것이다.

“충성과 명예는 의심의 대상도 신앙의 대상도 아닙니다.”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같은 저울에 올라갈 자신이 있습니까? 지금 같은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통과할 자신이 있어서 이럽니까?”

“시험은 기준이 명확하고 정당해야지, 지금 블라디마루 칼린에게 행해지는 것은 시험이 아닙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가 치러야 할 건 시험이 아니라. 시련이지.”

영웅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탄생한다. 빌런이 시련에 뒤틀려 탄생하듯.

부조리함에 맞서 싸우고, 사회와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영웅. 부조리하다는 이유로, 사회와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빌런.

블라디마루 칼린의 교전 영상을 보면, 그는 이미 그 자체로 전술병기였다. 그렇다면 그를 병기로 취급해야 할까? 아니면 진정으로 명예로운 영웅으로 응대해야 할까?

“그렇기에 그는 시련을 치러야 하네.”

그 시련이 설령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고 할지언정. 시련을 견디지 못해 빌런이 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치우는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일 테니까.

‘시련? 하- 웃으며 죽어야 충성스럽고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배신당하고 뒤통수를 처맞아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시련을 통과한 영웅이고?’

중령에서 대령이 됐고, 금방 별을 달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 남자, 길버트 브라운 대령은 역겨웠다.

대령은 어깨에 달린 훈장에 손을 댔다. 명예로운 훈장에서는 녹슨 쇠 냄새가 풍겼다.

일본에서 겪었던 일들, 부하들을 변종 괴수에게 잃었던 사건, 중국 특수부대와의 교전, 내부에 있던 배신자들과 밀려드는 감염자들.

블라디마루 칼린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전멸했을 수도 있었다. 자기를 포함한 생존자 대부분 지옥 같은 일본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는 명예를 위해 싸웠는가? 길버트 브라운이 본 블라디마루 칼린은 전형적인 소시민이었다. 딱히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영웅 심리에 취한 자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회의실에서 나오는 말들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알 수 있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조건을 내세우는 자들.

‘두려운 건가?’

명예를 비난하는 자들이 명예를 동경하는 법이고,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명예로 목줄을 삼는 법이었으니까.

일본에서 겪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길버트 브라운 대령은 깨닫고 말았다. 세계는 변한다. 변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확정된 미래였다.

일본에 있던 변이 괴수들이 본국에도 퍼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막고 있지만,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변종 바퀴만 하더라도 그랬다. 바퀴를 잡겠다고 독한 살충제를 뿌린다면? 벌도 죽고 파리도 죽고 전부 죽여버리면 먹이 사슬은?

인류는 점차 쇠퇴하게 될 것이다. 인류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국가가 온전하기는 힘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블라디마루 칼린도 그걸 꿰뚫어 본 게 분명했다. 아크 타워를 만든 것이 그 증거였다.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이 자리에 앉은 자들이라고 모를까? 그래. 이들은 두려운 것이었다. 미래가. 블라디마루 칼린 같은 초인들이 등장할 세계가.

그래서 더욱 목줄을 달고 싶은 것이겠지.

길버트 브라운 대령은 성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시련을 언급한 사람을 바라봤다. 어깨에 빛나는 별의 숫자는 셋이었다.

성서를 인용했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신앙심이나 충성심 따위는 아닐 것이다.

영웅이 어쩌니 하는 낯뜨거운 것은 더욱 아닐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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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벽,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일렁이는 그림자.

“사람이 없네.”

[북부전구의 초인 부대가 베이징에 침입해 통행금지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4~5월이면 황사나 매연이 심각했었는데, 베이징의 하늘이 유독 맑고 깨끗했다.

“그래도 그렇지.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밤도 아니고 대낮에 인기척이 하나도 없다니, 사람들이 전부 증발해 버린 것 같은 텅 빈 거리는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베이징에 사람이 있기는 한 거냐?”

[전력과 가스 사용 기록으로 보면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까요?]

“아니. 그보다 놈들의 흔적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은데?”

[주간에는 이동하지 않고 몸을 숨기는 것 같습니다.]

야간에만 이동, 교전하고 주간에는 휴식한다?

마루는 문득 하늘을 쳐다봤다. 높은 하늘 저 멀리 빙빙 도는 것이 보였다.

지잉-

헬멧 카메라에 잡힌 영상이 HUD에 떠올랐다. 고고도 정찰 드론의 모습.

“적외선 감지기에 걸리지 않겠지?”

[네. 적외선 촬영 기능이 있는 CCTV나 열감지기에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은신 장비가 부족한가? 방어력이야 괴수 가죽을 가공한 방어구가 압도적으로 좋다지만, 은신 장비의 효율성을 무시하긴 힘들 텐데.

어쨌든, 놈들이 이동하지 않고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거리를 좁힐 수 있을 테고, 운이 좋다면 기습도 가능할 테니.

삑삑-

[4시 방향. 아군식별코드가 확인됐습니다. 위치 표시할까요?]

아군식별코드가 있는 곳에는 전부 끔찍한 시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본 시신만도 10구가 넘었다.

“표시해.”

HUD에 지도가 떠오르고 한쪽에 붉은색 점 4개가 뭉쳐있었다. 거리는 대략 2km가량 떨어진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공터였다.

“CCTV는?”

[인근 CCTV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디아나는 레벨 3인 융통성을 발휘했다. 자동차 가운데 인터넷과 연결된 블랙박스가 설치된 차량이 있다는 정보를 이용했다.

[아군식별코드 인근 지역 확인합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블랙박스 기록을 검색 결과. 적들이 인근 아파트에서 휴식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 잘했어.”

[주변 아파트 CCTV 기록 확인합니다.]

순식간에 CCTV 기록을 분석해 적들이 있는 예상 지역을 표시한 디아나였다.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삼삼오오 짝을 이뤄 흩어져 있었다. 이런 식이면 하나를 기습하는 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는 기습하지 못했다.

‘보자, 각개격파는 어려워 보이고.’

떨어져 있다기엔 너무 가까이 있었으니까. 이것들이 포위해서 덤벼들어도 피곤하고 사방으로 흩어져도 문제인 절묘한 간격. 인질이라도 잡고 동영상 찍으면서 인질극 들어가 버리면 짜증 나는 상황이 되겠지.

‘장소를 들켜도 섣불리 폭격이나 포격하지 못하게 안쪽에 자리를 잡았네.’

다른 생각하지 못하게 몰아치려면 우두머리를 잡는 게 중요했다. 시체를 쌓아 놓고 앉아있던 일본 전통 갑옷 입은 놈. 일단 그놈부터 잡고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마루였다.

“일본 갑옷 입은 놈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 가능해?”

[안내를 시작합니다.]

마루는 디아나의 안내에 따라 놈들이 있는 아파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예상했던 대로 옥상에는 은신한 상태로 경계를 서고 있는 것들이 느껴졌다.

‘1명? 아니, 2명인가?’

마루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다가섰다.

대충 느껴지는 곳을 향해 쭉 뻗은 칼날.

크르르릉-

이클립스 특유의 파공음이 일렁이는 공간을 물어뜯었다.

푸화아아악-

투명한 공간이 찢어지며 사방으로 튄 붉은 핏방울이 은신 장비를 붉게 물들였다. 썰린 조각들이 바닥에 닿기 전, 마루는 다음 타겟을 향해 발을 굴렀다.

탁-

일렁이는 공간.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놈이 뒤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을 향해 마루가 살기를 터트렸다. 짙은 살기가 파동처럼 퍼졌다.

윽! 크윽!

숨이 막혀 억눌려 버린 신음.

소리가 샌 방향을 향해 날아가는 칼날.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이클립스가 울었다.

끼이이이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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