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62
비릿한 녹 냄새가 옥상에 부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흩어졌다.
마루는 재빨리 놈들의 잘린 상체를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고 우두머리가 있는 층수를 눌렀다. 그새 썰린 쇼크에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는지 놈들이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누구냐!”
“적이다!”
[문이 닫힙니다.]
역시, 이놈들 정상이 아니었다. 일본의 능력자 놈들은 KTX에서도 겪었고, 미군들과 함께 관동지역에서 탈출할 때도 붙어 봤었는데,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KTX 때는 재생 능력자도 있었지만, 이렇게 토막 났는데도 혀를 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베이징에서 싸운 놈들은 전부 기괴할 정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재생 능력도 아닌, 말 그대로 생명력 자체가 다른 느낌.
무엇보다 이 피- 막 잘랐을 때는 밝은 선홍색으로 건강한 혈색이지만, 공기 중에 노출되면 순식간에 검붉고 끈적하게 변하는 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영 느낌이···.’
남은 부위를 조각 내 옥상 밖 사방으로 흩뿌렸다. 화염방사기나 네이팜이 있었으면 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찝찝한 느낌을 뒤로. 마루는 옥상에 있는 완강기 로프 끝을 잡고 아파트 외벽을 수직으로 내달렸다.
수직으로 뚝 떨어지던 마루가 로프를 확 잡아당기자, 일순 출렁이며 낙하던 몸이 아파트 베란다 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삐이이이이이잇-
가늘게 뽑힌 소리가 창틀과 두툼한 유리창을 부드럽게 잘라냈다. 깨끗하게 썰린 공간으로 마루의 몸이 살포시 내려섰다.
빈 거실.
예상대로 놈들은 엘리베이터로 몰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발걸음을 뗀 마루가 가볍게 안방 문을 열자, 침대에 걸쳐 앉아 갑옷을 챙겨입기 시작하는 우두머리가 보였다.
안면 가리개를 먼저 써서 면상을 볼 수 없었지만,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새치거나 나이가 많거나 둘 가운데 하나였다.
어쨌거나.
‘잘 가라.’
휘두른 칼날이 낮게 울었다.
크르르르르-
후딱 우두머리 보내고, 남은 놈들 조져야지.
‘너흰 누구냐?’, ‘뭘 원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이딴 뻔한 이야기는 필요 없잖아.
휙-
무심하게 휘둘러진 칼날을 풀썩 뒤로 누워 버리는 것으로 피해버리는 우두머리.
피해? 편하게 쉬게 해주려고 했더니···. 마루의 눈썹 끝이 슬쩍 치솟았다. 동시에 왼쪽 사각에서 채찍 같은 뭔가가 쏘아졌다. 휘둘러진 칼날을 그대로 끌어와 막는 마루.
!!!
둔탁한 충격이 이클립스에 흡수되면서 생긴 진동이 칼날을 흔들었다. 퉁- 칼날을 때린 것은 채찍.
‘아니. 이건···.’
채찍이 아니라 촉수였다. 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것이 마루가 들고 있던 칼인 것처럼 촉수가 이클립스를 휘감기 시작했다.
웅-웅-
그리고 그건 놈의 패착이었다. 충격을 흡수해 진동하는 칼날을 생으로 휘감으려고 했던 촉수가 낙지 탕탕이가 된 것처럼 숭덩숭덩 그대로 잘렸다.
크으으음!
안면 가리개로 감춰진 뒤에서 우두머리의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늙수그레한 목소리. 흰 머리카락이 새치가 아니라면 늙은이라는 소리.
촉수가 잘렸는데 신음?
마루는 잘려 꿈틀거리는 촉수를 칼을 흔들어 털어냈다.
촉수라. 촉수.
그래 기억났다. 검은색 촉수 괴물 새끼.
일본 다카이치 신약에서 봤던 괴물. 정신공격 한 놈.
나중에는 사람 잡아먹고 야마츠키 제약 입구에서 설쳤던 검은 괴물.
처음 만났을 때, 놈이 선빵을 쳤었다.
이렇게.
하얗게 빛나는 칼날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스리리리릭- 사선으로 흘려버린 적의 공격이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마루의 옆을 스쳐 벽에 박혔다.
쿠직-
하얀 칼이 철근 콘크리트에 박혀버리자, 칼을 회수하기 위해 상하 좌우로 흔드는 모습. 그래 이랬었다. 그땐 첫 공격에 칼이 깨졌었지.
크으으으흠!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서인지, 침대에 누운 놈이 불편한 소리를 냈다.
피하니까 짜증 나?
그런데 말이지, 촉수가 잘렸는데 넌 왜 고통스러울까? 응?
마루에게서 뭉클 살기가 뿜어졌다.
벽에 박힌 칼을 흔들어 뽑으려던 촉수가 살기에 쪼이자 마른오징어 다리가 가스 불에 올라간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크으읏! 네··· 네놈?!”
안면 가리게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
“오니···?”
오니? 아? 누군가 했더니, 그 치매 영감이었어?
뭉클뭉클 솟아나던 살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으으으읏! 비···비겁 죠세···.”
닥치라는 듯, 이클립스가 공기를 찢었다.
크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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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뻗은 실선이 부들부들 떨어대는 치매를 향해 그어졌다.
쩍 갈라진 노인의 가슴팍에서 붉은 피가 뿌려졌다. 침대 위를 적신 빨간 피가 마치 산패하는 것처럼 삽시간에 거무칙칙하게 변했다.
얕아?
휘둘러진 관성을 그대로 이용해, 다시 한 번 회전력을 준 마루가 대각선으로 다시 검격을 뿌렸다.
“크아아아악! 네놈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 마치 연체동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사지를 휘두르는 영감. 팔다리가 촉수처럼 움직여 날카로운 죽음을 막으려 했다.
크르르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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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클립스는 팔다리가 변해버린 촉수를 낙지 다리처럼 토막 내곤 노인의 상반신까지 썰어버렸다.
꿈틀! 파다다다닥!
침대와 바닥에 떨어진 잘린 팔다리 촉수가 싱싱하게 팔딱거렸다.
?!
한 방에 보내버리려고 했는데 몸통을 완전히 절단하지 못했다.
팔다리를 제물 삼아 몸통을 뒤로 뺀 것.
“크아아아악! 이 더러운 종자가!!!”
치매 영감의 고함에 안면 가리개가 터지면서 면상이 드러났다. 검붉은 뿌리가 얼굴 전체를 파고든 모습. 사방으로 흔들리는 가느다란 촉수가 아래턱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기괴한 면상에 깜짝 놀랄 법도 하건만, 마루는 담담하게 칼을 쭉 뻗어 노인의 아가리에 박아 넣었다.
쿠직!
웅- 충격을 흡수한 이클립스의 칼날이 진동파를 흘려 노인의 머리통을 세로로 쪼갰다. 좌우로 갈라진 머리통.
삽시간에 시꺼멓게 산패된 검은색 피에서 녹슨 냄새와 생선 상한 냄새가 뒤섞여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시궁창이 된 방안.
잘린 촉수와 침대 위에서 촉수처럼 펄떡이는 팔다리, 세로로 쪼개진 머리통 속에서 갈라진 혓바닥이 끄륵끄륵 소리를 내고, 사선으로 잘린 상반신이 각기 꿈틀거리는 난장판에 마루가 눈살을 찌푸렸다.
벌컥-
방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를 확인하러 나갔던 영감의 부하들이 들이닥쳤다.
“습격입니다!”
“피하십시오!”
“대표님!”
“누구냐?”
칙칙한 칼날이 그들의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따르르르르르르-
따르르르르르르-
화재경보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이 심각한 상황임을 알렸지만, 소방차는 오지 않았다.
윗집 아랫집 옆집 사람들이 불이 번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불난 집 불구경에 빠진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데 혈안이었다.
모인 사람들을 뒤로한 채, 마루는 짙은 그늘이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CCTV. 블랙박스 통제 끝났습니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마루가 중화제를 꽂아 넣었다. 쑤시고 달아오른 몸이 빠르게 진정됐다.
“질긴 놈들.”
이클립스가 아니었다면 훨씬 까다로웠을 놈들이었다. 특히 치매 영감의 촉수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이클립스 특유의 진동 칼날이 아니었다면, 시작하자마자 칼을 뺏기고 일격으로 꼬챙이가 됐을 지경.
그 빌어먹은 치매 촉수는 끝까지 지랄이었다. 슬금슬금 다가와 다리를 노린다든지, 벽을 타고 올라가 위에서 떨어져 내린다든지.
열 받은 마루가 촉수고 시체고 잘게 다진 것도 모자라, 기름에 가스에 불이 붙을 만한 건 죄 끌어다가 불 질러 버렸다.
“다른 곳에 있던 놈들은 어디로 가고 있어?”
[예상 진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치매 노인이 대가리니까, 대가리를 공격하면 주변에 있는 놈들이 전부 구하겠다고 올 줄 알았는데, 냉정했다.
“핵 보안 코드 있을지 모른다는 곳. 거기로 가는 거 맞지?”
[그렇습니다. 목표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뒤가 없는 행동 방식. 누가 죽든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남아있는 조직은 그대로 작전을 계속한다는 건데.
‘이거 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핵 보안 코드만 있다고 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동지들이 위험에 빠졌는데 버리고 간다?
우두머리가 공격받는데도 그냥 무시하고 간다?
그 말은 자신이 죽거나 공격받아도 버리고 가라는 소리였다.
일본인 입장에서 중국 핵 보안 코드를 이렇게 목숨 걸고 탈취해야 할 건가?
[광학 소자 손상률이 13%가 넘었습니다. 낮에는 발각될 확률이 높습니다.]
“아군식별코드 모여 있는 공터가 있다고 했지. 거기로 가자”
광학 소자를 교체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한 번 가보는 것이 좋았다.
디아나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는 지상에 있는 공터가 아니라 지하였다.
대규모 지하 쇼핑몰 공사장. 기본 골조 공사는 거의 다 끝났고, 상가 분할과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인 곳.
[···신규로 개통하는 지하철 노선과 연계되는 쇼핑몰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지하로 깊게 들어온 걸 보면 단순히 쇼핑몰 목적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깊이도 깊지만, 규모도 장난이 아니었다. 무슨 지하 도시라도 만들 기세.
[···자료를 분석한 결과, 핵전쟁에 대비한 쉘터 역할을 겸할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근처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신흥 부촌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
중국 놈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핵미사일 기지를 200개 넘게 동시에 공사하고 있다고 하더니, 도시에 대규모 핵전쟁 대비 시설까지 건설하고 있었어?
뉴스에서 중국이 대규모로 핵시설을 확충하고 있다는 보도를 봤었다. 다들 핵을 감축하고 폐기하는 분위기인데 중국은 오히려 늘리고 있는지라, 논란이 됐던 일이었다.
삑-삑-삑-
아군식별코드가 잡혔다는 표시가 HUD에 떠올랐다.
“영상 기록했으면 국토안보국 덴 브라운 과장 메일로 보내.”
[전송했습니다.]
시신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팔다리가 뽑힌 상태. 얼굴 가죽을 벗겨 해골로 만든 머리가 바닥에 굴러다녔다.
‘저번에는 코와 귀를 잘라 공처럼 만들어 놓더니, 이제는 해골바가지로 만들어?’
마루는 찢기고 뜯긴 리퍼 슈트 가운데 교체 가능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했다.
[···9% 가량 교체가 가능합니다.]
“시작하자.”
디아나의 설명대로 리퍼 슈트의 수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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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한 침대 위에서 덴 브라운 과장은 요양 1일 차를 즐겼다.
이 얼마만의 꿀잠이란 말이던가? 무려 6시간이나 연속으로 잘 수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휴양이었다.
그래. 이렇게 쉬면서 일해도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
자기가 아니더라도 미합중국의 안보를 지키는 사람들은 많고도 많았다. 컵라면을 생으로 먹어도, 똥을 싸고 밑을 닦지 않아도 죽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 계속 싸대면 기저귀를 채우면 되는 일이었다. 계속 삽질하면? 굴착기로 파라고 응원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모닥불에 던져 넣으면? 그러라고 하지 뭐.
6개월 만에 6시간 연속으로 차고 일어난 덴 브라운 과장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삑-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을 살포시 무시한 덴 브라운이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삑- 삑-
연속으로 들어온 메일. 직통 메일인지라 무시하려고 해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쯧- 이거 직업병인가?’
영상 메일이 3개나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블라디마루 칼린이 중국에서 보낸 영상.
끙-
내용을 열어보지도 않았는데도, 슬슬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요양 중이니까 무시해?’
그렇게 하기엔 덴 브라운 과장의 성실성과 애국심이 양심을 찔렀다.
한숨과 함께 영상을 보던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몇 차례 나왔다.
급기야 위장약을 씹어 먹으며 보던 과장이 전화기를 들고 외쳤다.
“긴급 비상회의 소집해. 1급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