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79
마루는 억울한 눈으로 김 양을 바라봤다.
‘왜? 무엇 때문에 잊고 싶은 기억을 들쑤시는 거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
진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법. 김 양이 서늘한 눈빛으로 받아쳤다.
“진짜 약혼하지 않았다니까!”
“그럼?”
아무리 미친년이라고 계속 이렇다는 건 뭔가 있다는 소리 아니겠음?
“미쳐서 그러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약혼이라고 생각할 만한 행위를 했다거나?”
그러니까 팥떡-팥떡-팥떡 했다든지, 야식으로 라면을 길게 후루룩-했다든지.
“아니. 그런 팥-같은 눈빛 할 거 없었다고. 진짜.”
“근데 나주연이 왜 그럼?”
약혼자 타령을 일관적으로 하고 있다는 건 숨겨왔던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지 않겠음? 김 양의 눈빛에 마루는 갑갑했다.
이유야 어쨌든 피하고 싶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라디오로 호소하던 연방정부, 군부에서 안면 몰수하고 애들 밀어 넣은 이유가 신약의 레시피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라면?
북미 지역에서 독점적으로 약을 생산 유통할 수 있게 된다면, 분리독립주의자들도 무릎 꿇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판단했다면?
“미치겠으니까 그만해라. 오늘처럼 애들 계속 죽을지 모른단 말이잖아.”
그걸 왜 걱정? 김 양이 갸웃했다.
“좋게 생각하삼. 이제 미사일 걱정은 없겠네.”
버티고 배를 째라고 하다가 미사일 엔딩이 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 몸값 측정 불가능한 백정 옆에 있으면 안전하지 않으려나?
김 양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루의 위아래를 훑었다.
‘레이드하겠다고 몰려오겠지?’
이래저래 살펴보고 견적을 뽑아봤지만 아니었다. 아까 온 애들이 최정예라며? 그런 애들로는 불가능했다. 아무리 봐도 급이 달랐으니까.
‘생포? 어림도 없지.’
품평과 견적을 마친 김 양이 조그맣게 주억거리다 덜컥 멈췄다.
만에 하나 백정이 잡혀가면? 이 빌딩은? 백정이 없으면 내 건데, 바로 홀라당 뺏어갈 거 아닌가? 여기저기 세계가 개판이라 돈이 많아도 이런 빌딩 구하는 건 불가능. 어떡하든 사수해야 했다.
“솔직히 말해 보삼.”
“뭘?”
“진짜 팥···”
“팥이고 쑥이고 안 했다니까!”
“그럼 절대 안 감?”
“안 가!”
진짜로 안 간다고 했다? 버틴다고 했다? 무슨 일 있어도 안 간다고 한 거다.
“안 간다고!”
살짝 살기까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믿어주기로 한 김 양이었다.
======
======
마루 타워 외벽을 넘은 특수부대 가운데 생존자는 단 2명. 5명 1팀으로 3개 팀이 들어왔지만, 생존자는 고작 2명이었다. 곧 0명이 될 예정이고.
“다른 할 말 없음?”
철컥!
“MOTHER F···.”
퉁! 퉁! 퉁!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 머리, 가슴에 총알을 박아 넣은 김 양이 침대에 누워 색색 숨을 몰아쉬는 사람에게 총을 겨눴다.
“가. 가슴에 ㅍ···”
퉁! 퉁! 퉁!
3번 방아쇠를 당긴 김 양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연방정부고 전략사령부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전쟁한다고?’
‘적의 핵무장 해체와 모든 핵 관련 시설의 파괴. 그리고 복수가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 식인병자와 변이 바이러스 감염자들을 피난민에 섞여 밀어 넣은 뒤로, 문명 세계의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출입구를 봉쇄하고 하수시설을 박살 내서 내부에서 썩게 한 것도. 한미연합군이 진격하는 자리에 소형 전술 핵탄두를 지뢰로 개조해 터트리는 것도 흔한 일이 됐다.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측만으로도 한 지역을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어떤 전쟁도 깨끗할 수 없겠지만, 7개의 중국과 한미연합군은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7 중국에서는 강화인간, 개조인간 등 신비한 인체를 가진 부대가 등장해 한미연합군을 물리적으로 다지기 시작했고
미 연방군에서는 엑소슈트와 기갑병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쟁기계들이 7 중국군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진과 샬롯에서는 전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약물을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오진 제약 그룹이 만든 약. 엔젤 키스 또는 키스 엔젤이라 불리는 약을 기반으로 만든 전투자극제는 사용자의 집중력을 비롯한 반응성을 극도로 높임과 동시에, 신체적 능력을 안정적으로 강화하는 약물이었다.
샬롯 그룹에서 만든 약. 버서커 폴. 고통과 두려움을 잊게 할 뿐만 아니라, 신체의 잠재능력을 거의 모조리 쓸 수 있게 해주는 약물이었다. 단점으로는 뇌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는다는 것이었는데, 오진에서 만든 치료제와 병행하면 그런 단점을 상쇄할 수 있었다,
이 2가지 전투보조제가 보급되면서, 전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7 중국도 크리스털을 시작으로 다양한 약물을 병사들에게 투약하기 시작했다.
승리를 위한 전쟁에서 멸절을 위한 전쟁으로. 기술과 강철의 전쟁에서 약물과 피륙의 전쟁으로. 이성의 전쟁에서 본능의 전쟁으로.
25만 명의 1차 연합군이 15만 이하로 줄어드는 동안, 5천만 명이 넘었던 지역의 인구는 집계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마루의 질문에 김 양이 분해된 총을 재조립하며 말했다.
“2호기. 상황 설명.”
사만다가 이어받았다.
[바닷길이 막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따개비 때문인가?”
[따개비도 문제지만, 따개비 말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기관고장이 생겨 멈추는 배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향후, 안정적으로 수송선을 운용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 미국 본토에서 120만을 동원하는 작전은 어려울 전망입니다.]
그 외에도 문제는 많았다. 연방 탈퇴를 선언한 11개 주도 문제였지만, 제일 큰 문제는 식인병과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이었다.
120만을 소집하려고 했지만, 핵 맞은 여파로 소집이 늦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식인병과 감염자들 그리고 괴수들이 사방을 헤집기 시작하자, 그나마 소집한 병력은 지역 사회를 지키는 데 투입됐다.
연방정부와 전략사령부에서 중국부터 처리해야 한다고 핏대를 높이고 계획을 세워도 그럴 여건도 능력도 없는 상황.
미군이 동원하기로 한 120만이 기약 없이 날아갔으니, 중국과의 전쟁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빠져야 할 상황. 이대로 가면 ‘따서 갚지 못할 판.’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결론.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치는 것을 제의했습니다.]
김 양과 마루가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재난의 여파로 일본의 대략 2천만 명 최대 3천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최대치를 가정해도 일본의 남은 인구는 8천만 명이 넘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인구를 합하면 1억 3천만 이상이 되며, 일본에서 강제 징집할 경우 4백만까지 병력을 확충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 180만, 일본 400만을 합해서 580만으로 중국을 밀어라?
“일본이 그럴 상황은 되고?”
[현실적으로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일본은 생존이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되고, 되지 않고를 떠나서 미국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수송선 끊긴다며.”
[미국에서 원조를 받을 수 없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과 엮여서라도 생존을 도모해야 할 상황이 일본의 현실입니다.]
일본은 아직도 중앙 정부가 없는데, 어떻게 징집하고 누구랑 힘을 합치라는 소린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연방정부든 전략사령부든 이런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했군.’
전쟁을 지속할 힘을 잃은 미국이 중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려면? 조금 미안해도 한국이 독박을 써야 했다. 한 91.1% 정도?
[현재 미합중국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제일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은 신약의 레시피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위급상황이니까 일단 레시피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약혼자를 찾아주지 않으면 죽어도 레시피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버지니아에서 ‘감사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할 텐데. 버지니아가 아니더라도 좋다고 영구 안식 서비스를 보내는 애들이 넘칠 테고.
[그녀가 죽거나, 사고로 중상, 인사불성, 약물, 세뇌 같은 정황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모든 자료가 폐기되는 보안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레시피를 요구했지만, 당연히 거절했고. 모두 같이 엿 먹자며 중국 특수부대가 몇 차례나 암살을 시도했다, 그걸 막기 위해 버지니아를 비롯해 한국에서도 난리가 아니었다고.
[한국 정부가 수차례 대승적 결단을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도 인도적 차원에서 레시피 공유를 요청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망해도 다 필요 없고 마루를 데려오라는 소리. 그건 김 양도 조금 놀란 얼굴이 됐다. 진짜 미친년이었다. 엉클 샘이고 UN이고 뭐고 전부 다 무시?
[새로운 신약을 만들고 있는데, 변종 따개비만 제거할 수 있는 약이라고 합니다. 실험실에서는 이미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됐고, 현장 실험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레시피 공유의 조건은 같다고 합니다.]
인류를 위해서 네가 가라는 소리가 나올 판이었다.
“망할···.”
마루는 그저 허탈하게 일어섰다.
“어디?”
“치워야지. 다른 사람 시킬 건 아니잖냐.”
속도 답답하고 말이지. 그럴 때는 청소가 제일이었다.
시신을 핸드 카트에 싣고 빌딩 밖으로 나서자, 멀찍이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마루를 반기듯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이런저런 새들도 제법 많았었는데, 다른 새들은 다 쫓아냈는지, 순수하게 까마귀만 모여 있었다.
고요하게 마루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도는 까마귀들의 움직임.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 없는 비행은 보고 또 봐도 신기했다.
외벽에 오르자, 그대로 남아있는 흔적. 신기하게 외벽에 있는 시신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함부로 부리를 디밀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까마귀가 똑똑한 게 맞았다.
먹이다. 먹이다. 먹이를 줘.
젠장. 기가 허해서 그런가? 마루는 고개를 흔들고서 시체를 외벽 밖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시체들이 멀찍이 떨어졌음에도 먹이다. 먹이다. 빙글빙글 회전할 뿐 달려들지 않는 까마귀들.
이것들이 왜 이러지?
‘혹시?’
설마··· 그럴 리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마루가 멀리 던진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먹어.”
말하기 무섭게, 둥글게 회전하던 비행 궤적이 비틀어지며 일렬로 하강하기 시작하는 까마귀들. 날갯짓 소리 대신, 살과 뼈가 끊어지는 소리도 잠시. 15구의 시신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빙글빙글 언제 그랬냐는 듯, 마루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까마귀들이 작은 무리로 나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래도 제일 큰 무리는 여전히 마루의 머리 위 하늘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 머리 위에 꿀이라도 발라 놨나?’
고요하게 회전하던 까마귀들이 흔들리는 느낌.
먹이. 먹이. 살아있는 먹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방향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CS탄 아니면 백린탄. 마루가 바로 김 양을 호출하곤, 리퍼 슈트를 챙겼다.
“3시 방향에서 연막 흔적 발견. 옥상에서 확인 필요.”
[알겠음.]
[교전을 피해 이동하는 무리 발견.]
[연막 때문에 무장 상태 확인 불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으로 보임.]
누군지 모른다고?
문득 떠오른 생각. 까마귀들은 알지 않을까?
‘먹이? 살아있는 먹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정리함?]
식인병과 변이 바이러스가 넘치는 디트로이트에 밀고 들어오는 자들이 좋을 리 있을까? 게다가 지금 마루는 살아있는 보물 그 자체였다.
“정리해.”
투웅- 옥상에서 묵직한 총성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정리해.’ 라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까마귀들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