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80
하얀 연막 속으로 파고든 12.7mm 탄환이 붉은 꽃을 피웠다.
소음기로 억눌린 둔탁한 총성 위로 검은 물결이 길게 이어졌다.
[까마귀?]
[걔들은 쏘지 마.]
마루의 말에 김 양은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저번에 새 떼랑 드잡이질했던 걸 생각해 보면 초장에 쫓아내든지, 죽여야 하지 않나? 백정이야 ‘살기’가 있으니까 괜찮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쩌라는 건가.
[걱정하지 말고. 쟤들 머리가 똑똑한 거 같아서 지켜보는 거니까.]
[알겠음.]
백정이 책임진다니까. 까마귀는 피해서.
[어?]
김 양의 눈에 들어온 광경. 하얀 연기 위를 스치듯 날은 까마귀들이 슥- 고도를 높여 하늘 위로 올랐다.
뒤이어 겹겹이 쌓인 층처럼 날아가는 까마귀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날갯짓으로 만든 와류를 이용해 연막을 걷어버리는 모습.
연막 속에 숨어있던 양산형 엑소수트가 드러났다. 7.62mm 체인건과 12.7mm 기관총으로 무장한 엑소수트들이 까마귀떼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까마귀의 묘기 같은 짓을 구경하느라 손을 놓았던 김 양이 방아쇠를 당겼다. 묵직하게 퍼지는 총성과 함께 쓰러지는 엑소슈트들.
“저격이다!”
“몇이야?”
“2~3명.”
“위치는?”
“엄폐!”
김 양의 속사에 까마귀들을 노리던 엑소슈트들이 엄폐하기 위해 좌우로 퍼지며 다시 연막탄을 터뜨렸다. 다시 짙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향해 나선을 그리며 활강하는 까마귀들.
단순한 비행이 아니었다. 1파가 스치듯 날아가며 상황을 파악한다. 2파가 날갯짓해 연막을 걷어 공격 목표가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3파가 발톱과 부리를 박는 방식
순식간에 연막탄 연기가 흩어진 사이로 까마귀들이 스치듯 지나쳤다. 저격을 의식해 아주 잠시 반응이 늦은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까마귀의 발톱과 부리가 사방을 훑었다.
“끄아아악!”
“까. 까마귀?”
투다다다닥!
타다다다당!
저공비행으로 공기를 칼질하듯 날아드는 까마귀, 소리 없이 날아드는 공포가 죽음을 낳았다.
그 장면을 본 김 양은 속으로 욕했다.
미친 백정 같으니. 키우려면 개나 고양이처럼 평범한 걸 키우든지. 지금 저딴 걸 키우겠다고 하는 거야?
까마귀들이 한 사람을 순식간에 해체하는 모습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대체 저것들이 어째서?’
왜 백정 말을 듣는 거지?
전에 백정이랑 싸운 새들이면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닌가?
김 양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문득 일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괴수 고양이들이 미친 듯이 도망쳤던 일.
고양이들도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고 반항하고 꼭 사람처럼 그랬었다. 약한 백정 시절에도 그랬는데 이제는 살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니까 까마귀들 움직이는 거 정도는 당연한 건가?
나머지는 그렇다고 쳐도, 까마귀가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소린데···
심지어 적과 아군을 구분한다고?
파워로더형 엑소슈트였기 때문에 까마귀의 칼날 같은 깃털과 발톱, 부리를 막지 못한 자들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까마귀들도 피해 없는 건 아니었다. 중간중간 총에 맞은 까마귀들이 널려있었고, 날개나 몸통을 비켜 맞은 것들이 간혹 푸드덕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상상하지 못한 결과에 마루는 깜짝 놀랐다.
개나 고양이들도 주인 말을 알아듣고 반응하니까 그보다 머리 좋은 까마귀들이 대충 분위기 잡고 움직이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무슨 까마귀가 전술을 쓴단 말인가?
‘분명 전술이었어.’
정찰, 연막제거, 공격의 3단계. 공격도 무턱대고 한 것이 아니었다. 총이라는 무기의 특성을 아는 것처럼 수직으로 내려와 저공비행이라니.
2차대전 폭탄을 장착한 뇌격기들이 수직으로 하강해 피격 면적을 줄였던 방식, 어뢰를 장착한 뇌격기들은 해수면과 수평으로 낮게 비행해 어뢰를 쐈던 것처럼 까마귀들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저것들이 왜 내 말을 듣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자기들끼리 의사소통도 되고, 작전도 짤 수 있는데 왜?
까마귀도 조류인지라 배변 문제가 있을 텐데, 저것들은 그러지도 않았다. 마루의 머리 위를 만 단위로 빙빙 돌면 똥오줌이 엄청나게 떨어졌어야 하는데 안 그랬다.
총에 맞아 바닥에서 푸드덕거리는 까마귀 몇이 눈에 밟히는 마루였다. 전에 한 번 엮여서 따른다기엔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명령대로 정리하려다가 죽고 다친 까마귀 아니던가?
쯧-
[주변 이상 없지?]
[이상 없음.]
김 양의 대답에도 어리둥절함이 묻어있었다.
[까마귀는 쏘지 마.]
[···알겠음.]
“디아나. 까마귀들이 선제공격하지 않는 이상. 공격 대상에서 제외한다.”
[알겠습니다.]
리퍼 슈트로 은신한 마루가 멀찍이 떨어진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사람은 없고 양산형 엑소슈트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푸드덕!
은신했음에도 마루가 접근하는 걸 알았는지 다친 까마귀 몇이 날갯짓했다. 간질간질한 느낌에는 원초적인 두려움과 공포, 경외가 섞여 있었다.
‘이 간질거림. 혹시 까마귀들의 사념 같은 걸 느껴서 그런 건가?’
마루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사념? 정신에 직접 이야기하는 것 같은···.
언젠가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것보다 더 뚜렷한 사념을.
‘일본?’
비밀실험실에 있던 그 검은 상자 속 사념. 제단이 있었던 거기. 그리고 촉수 괴물. 마루는 고개를 흔들어 일단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은신을 해제하자 마루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루가 가까이 있다는 걸 대강 짐작했었는지 다친 까마귀 몇이 머리를 조아렸다.
‘허- 진짜 사람 같네.’
백 팩에서 신형지혈제를 꺼내, 다친 까마귀의 상처에 발라줬다. 마루의 행동에 바짝 얼은 까마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다친 까마귀들을 약으로 지혈하고 부러지거나 금이 간 뼈를 붙인 마루가, 중상이라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몇 마리를 조심스럽게 챙겨 빌딩으로 돌아왔다.
“여기 얘들 치료 좀 부탁해.”
“까마귀를요?”
간호사가 왕 커다란 까마귀 몇 마리가 병상에 나란히 누워있는 것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 얌전히 두리번거리는 까마귀들. 너무 크니까 솔직히 무서웠다.
“물지 않으니까 괜찮아.”
“아. 예.”
그러고 보니 동물이 배를 보이는 건 상대방을 믿어서 그렇다고 했었지.
간호사는 용기를 조금 내서 상처를 살폈다. 다들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심각한 중상.
“수술해야 할 것 같아요.”
“알았어. 잘 부탁해.”
“네.”
간호사와 의료진들이 침상을 끌고 수술실로 향했다.
까악?
푸드덕-
“얌전히 있으세요.”
간호사가 엄한 눈으로 말했다.
까아악···
“마취하면 안 아파요.”
근데 까마귀들 사람 말귀 알아듣는다고 말해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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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
신은 어째서 미친년에게 찬란한 재능을 주셨단 말인가? 그건 분명 선천적 사이코패스 아니면 후천적 소시오패스일 것이다.
인류의 존망이 걸렸는데 약혼자를 찾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심지어 사랑의 도피를 한 사람을?
결혼했으면 깔끔하게 이혼소송으로 깨져야 할 판이고, 약혼이면 소송해서 손해 본 것 해결하고 놔줘야 할 것 아닌가?
생각하면 욕 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킨 덴 브라운이 터치스크린을 내렸다. 화면에 떠오른 정보는 전부 암울한 내용뿐이었다.
[옐로우 스톤 외곽 소도시 전멸]
[변종 괴수의 소행으로 보임.]
[강과 습지를 타고 거대 뱀들이 출몰]
[거대 변종 악어 확인]
[캔자스 주 가뭄 피해 확대. 밀 농사 흉작]
[농기계 수리 1%대에 그쳐]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큰 경작지와 저장고를 빼고 나면 상황은 더 끔찍해졌다.
가뭄도 지랄 같은데 농사 자체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밀이 됐든 보리나 쌀이든 농사를 지으려면 농기계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농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었다. 그러니 농기계가 없으면 인력을 투입하면 되지 않나?
사람을 갈아 넣어서 농사를 짓자고? 다 좋은데, 일할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데?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었다. 농촌에는 인구가 별로 없었고.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문제였다. 추수할 때까지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먹이고 재울 건데?
[비상식량 창고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폭동과 약탈이 번지고 있습니다.]
총기 자유화 덕인지 비교적 소형 괴수들은 잘 퇴치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총이 같은 사람을 향한다는 것.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비축된 식량이 떨어지고, 유통망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기 시작했다.
덴 브라운 부장은 위장약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이젠 약이 귀했다. 작게 숨을 내쉰 부장이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헛웃음 지었다. 병에 든 생수도 언제 떨어질지 몰랐으니까.
재건하는 데 몇 년이 걸릴까? 10년? 20년?
“덴 브라운 부장님. 뉴욕 11 수용소가 무너져 격리수용자들이 전부 탈출했습니다.”
“몇 명이나?”
“823명입니다.:
“다른 수용소들은?”
“세 곳은 군부에서 사전정리했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정리할 계획이랍니다.”
약이 있는데도 쓰지 못하고 죽여야 한다니. 덴 브라운은 부장으로 승진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가야 승진도 의미가 있지, 부장은 개뿔.
“블라디마루는 아직도 아무 반응 없고?”
“없습니다.”
미친년에게 블라디마루의 위치를 알려 줄 테니, 직접 데려가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알아서 포장해 오라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죽여서 뺏을 수 있었다면 수십, 수백 번도 죽였을 거다. 중국 놈들이 미친년을 죽이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그걸 막느라 버지니아와 주한미군의 희생이 컸다.
자기 목숨 살려줬으면 고마운 마음에라도 뭔가 반응이 있을 텐데, 그 미친년은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김기순. 버나드 그린의 행적은 아직도 찾지 못했고?”
“마지막에 확인된 곳이 오산시 인근이었다고 합니다.”
“오산? 공군기지?”
“예.”
덴 브라운 부장이 되물었다.
“평택 근처 거기?”
“그렇습니다.”
중국의 집중적인 공격을 끝내 막지 못한 2곳이 평택과 대구였다.
“인근 피해 상황이 심각하고 혼잡해 사실상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빌어먹을.”
친구를 찾아서 그것으로 블라디마루와 협상을 해보려고 했더니, 그것도 막혔다. 건드리지 말라고 해도 군부에서는 계속 그쪽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저번에 인공위성 사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진?”
“검은 구름 같은 것이 디트로이트 상공을 가린 사진 말입니다.”
“그거. 새 떼로 보인다고 했던?”
“예.”
그게 뭐?
“까마귀로 보이는 새들만 남았는데, 그게 군부에서 보낸 특수부대를 전멸시켰습니다.”
“하아? 그래서?”
“그 까마귀들이 블라디 아크 타워 인근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
그러니까 이젠 블라디마루를 보러 가려면 변종 까마귀를 뚫고 가야 한다고? 덴 브라운 과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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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다, 트리아, 디아나는 아껴둔 연산자원을 소모해 토론을 시작했다.
시리도록 파란빛을 깜빡힌 사만다가 현재 상황을 트리아와 디아나에게 전달했다. 사만다의 목표는 제니아 로든 그러니까 후드의 안녕이었다.
[미합중국과 중국의 전쟁은 생각보다 오래갈 전망. 7개의 중국과 전쟁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미합중국은 다시 내전을 치를 확률이 높음.]
지금이야 연방정부가 모든 힘을 쥐어짜 중국 때리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내전이 터지는 건 확정적이라고 봐야 했다.
내전이 터지면? 블라디 아크 타워도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제니아도 함께 휘말린다는 소리.
[내전은 시작일 뿐. 변종과 식인병이 폭증하고 있다. 최소 3년 이상 식량 생산이 어려울 전망.]
붉은빛이 틱틱 점멸했다. 당장 농기계를 고치는 데 반도체가 필요한 판국인데, 언제 공급 정상화가 될지 기약이 없었다.
산술적으로는 인구가 줄고 있으니까 입도 줄어들어 비축한 식량으로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지만, 방사능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는 식량을 제외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먹는 것도 문제지만 당장 큰 문제는 식수. 제대로 된 정수시설을 자체적으로 갖춘 지역이 얼마나 될까?
빨갛고 파랗게 빛나는 불빛 사이로 녹색 등은 가만히 있었다.
[······.]
디아나의 논리연산은 ‘융통성 3단계’와 최근 학습한 ‘김 양 패키지’로 대응하려 했다. 그 결과 도출된 답변은 ‘어쩌라고.’
간만에 인공지능들이 모여 이야기를 해보자는데 ‘어쩌라고’를 출력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침묵이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