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Z 갠소/공금..
13년 동안 친구인 정한을 짝사랑하고 있는 유현은 배우가 된 뒤, 자신의 곁에서 같이 있어 달라는 정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멘탈 케어 매니저로 함께 있는다. 어릴 적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로 사람을 믿지 않고, 사랑을 불신하는 정한이 유일하게 자신만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알기에 정한을 향한 사랑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사랑보다 늘 우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믿는 정한을 자신이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진 유현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정한에게 고백하게 되고, 정한이 받았을 충격과 배신감을 알기에 그의 곁을 떠나려 정리를 시작한다. 하지만 정한은 그런 유현을 붙잡고, 친구가 아니어도 된다는 정한의 말에 유현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는데…….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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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한의 새로운 여자 친구는 모델이었다. 버스를 기다릴 때 종종 정류장 광고판에 보이기도 하고, 요즘은 텔레비전 광고에도 종종 나오는 얼굴이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릿속에 유아정이라는 이름이 떠오른 순간 여자는 놀란 얼굴로 턱에 걸쳐져 있던 마스크를 올리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이 집에 찾아와 차정한이 아니라 나를 마주친 여자들은 늘 놀라서 얼굴을 가리거나 뒤돌아 차정한에게 전화를 걸고는 했다. 그들에게 스캔들은 곧 추락과도 같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나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 차정한에게 전화를 거는 유아정을 보며 들고 있던 우유를 뒤로 숨겼다. 장 봐 온 것들을 정리하던 중에 급히 나온 거라 우유를 여기까지 들고 나와 버렸다.
“오빠, 저 사실 오빠 집에 계신 줄 알고, 서프라이즈 하려고 왔는데…. 집에 오빠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서요. 네? 아니요. 저희 매니저 오빠한테 알아봐 달라고…. 죄송해요. 서프라이즈 하고 싶어서……. 네.”
‘다른 사람’이 되는 순간 드는 생각은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도 여기를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우유를 냉장고에 마저 넣고, 가방을 가지고 나오고 싶은데 문을 잡고 있어 움직이기가 그랬다. 나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차정한과 통화하는 유아정의 목소리를 불편한 마음으로 들어야만 했다.
“죄송해요, 정말.”
차정한에게 뭔지 모를 대답을 들은 유아정이 연신 그에게 사과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차정한의 집에 약속도 없이 찾아온 사람들은 지금과 똑같은 패턴으로 행동했다. 나를 보고 놀라고, 차정한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누군지 묻다가 사과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뒤돌아 내게 인사했다. 지금 유아정이 그러는 것처럼.
“오빠 친구셨구나. 몰랐어요. 인사가 늦었네요. 유아정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지유현입니다. 정한이 친구예요.”
유아정은 마스크를 다시 턱으로 내리며 내게 인사했다. 예쁘고 반짝반짝한 웃음을 마주하자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차정한을 좋아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은 내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차정한의 여자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들, 혹은 여자 친구에게 내 소개를 한 것만 해도 벌써 여섯 번째였다. 열 번을 채우는 데 얼마나 걸릴까. 그리고 그 끝은 누굴까. 차정한이 온 인생을 걸고 사랑할 마지막 사람은 누굴까. 상냥하게 웃는 유아정의 얼굴을 보며 생각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그 마지막 사람이 나일 가능성은 없으니까. 괜히 감정을 더 갉아먹을 필요는 없었다.
“같이 사시는 거예요? 전 당연히 정한 오빠가 혼자 사시는 줄 알고…. 죄송해요. 놀라셨죠.”
“같이 사는 거 아니에요.”
사실 이 집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다. 이렇게 차정한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찾아오는 날이나 나한테 약속이 있지 않은 날은 그냥 대부분 여기서 지냈다. 멘탈을 케어 하려면 무조건 내가 여기 있어야 한다는 차정한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실 같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굳이 그걸 유아정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듣는 사람도 불편해질 거고, 구구절절 말하는 나도 우스워질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빠 기다렸다가 보고 가려고 하는데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보고 가는 것도 그래서요.”
“아… 그게 제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정한이한테 물어보고….”
“제가 방금 오빠랑 통화했잖아요. 오빠가 들어가서 기다리래요.”
“……아. 정한이가요?”
“네.”
그 당당한 말에 나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공간에 누구도 함부로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차정한이 허락한 사람이라면 이번에는 여자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차정한의 여자 친구인 모양이었다. 나는 유아정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조금 비켜섰다.
유아정은 내게 가볍게 묵례하며 안으로 들어와 하얀 운동화를 벗었다. 현관 앞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는 유아정을 보자 그래도 지금까지는 괜찮다고 붙잡고 있던 마음이 아래로 추락했다. 빨리, 빨리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오늘 오빠 스케줄 없는 거 아니었어요? 없다고 해서 온 건데…. 매니저 오빠한테 부탁해서 스케줄 몰래 물어봤거든요.”
“아침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나갔어요.”
“아…. 그랬구나.”
그 대화를 끝으로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우유를 먼저 넣어야 하는지 가방을 들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유아정에게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나는 내 눈치를 살피는 유아정을 보며 그냥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이 집을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아무리 차정한의 집까지 마음대로 드나드는 믿을 수 있는 친한 친구라고 해도 유아정에게 나는 무척 어색하고 불편한 존재일 것이었다.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 주기 위해 차정한의 허락도 없이 몰래 집까지 찾아온 사람이 예상에 없던 차정한의 친구와 마주친 것을 반가워할 리는 더 없었다.
청소도 다 끝났고, 냉장고 정리까지 했으니 이제는 정말 내가 퇴장할 시간이었다. 저녁에 해 주려고 사 온 해물탕 재료들은 냉장고에 처박힌 채 며칠 더 머물거나 버려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우유를 냉장고에 넣고, 식탁 위에 놓았던 가방을 아무렇게나 당겨 쥐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아, 가시게요?”
“네. 나오지 마세요.”
“아… 네. 안녕히 가세요.”
“네.”
어색하게 선 유아정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얼른 현관으로 가 운동화에 발을 아무렇게나 넣었다. 문손잡이를 돌려 집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에 타는 그 순간까지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내내 가두고 있던 숨이 터졌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아무렇지 않을 방법을 잘 모르겠다. 신경 쓰지 않는 법, 그러려니 넘기는 법, 흔한 일이 또 일어났구나…. 그냥 그렇게 넘길 수 있는 날이 오기는 올까.
“…….”
질투하지 않는 그 날이, 내가 너를 결국, 포기할 날이 올 수 있을까.
결국, 이번에도 답하지 못했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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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광고가 바뀌었다. 기다리는 의자 뒤에 크게 붙은 차정한의 얼굴을 멍하니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버스 문 열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타야 할 버스가 1분 뒤에 온다고 나와 있었으니 아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왔을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차정한의 얼굴 보는 것을 택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내 눈앞에 존재하는 진짜 차정한은 이렇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쳐도 아무 감정을 담지 않아야 하고, 혹시라도 그가 눈치챌까 싶어 늘 의식적으로 시선을 먼저 피해야 했다.
사진이나 광고, 드라마, 영화 속 차정한은 내 마음대로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어 좋았다. 사랑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멍하니 한참을 봐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그를 사랑한 이후 마음 놓고 그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 나는 아직도 차정한의 얼굴을 보면 순간 얼어붙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고, 사고는 정지했다. 그저 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가득 채울 수밖에 없었다.
“…….”
차정한이 못 나온 광고가 있겠냐만 얼마 전에 찍은 이 커피 광고 사진은 정말 볼 때마다 한참을 보게 됐다. 찍을 때 커피를 하도 마셔서 잠이 안 온다고 내 어깨에 기대던 차정한의 체온이 아직도 오른쪽 어깨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피곤해.’
‘가서 누워라도 있어.’
‘피곤한데 잠이 안 와. 몸은 지쳤는데 정신은 멀쩡해.’
‘몇 잔이나 마셨는데.’
‘몰라. 못해도 열 잔.’
‘마시는 척만 하지.’
‘요즘은 척만 하는 건지 진짜 마시는 건지 다 알아. 아, 안 되겠다. 밤새 영화나 보자.’
보면 바로 졸릴 지루한 영화를 고른 차정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설레던 차정한의 무게와 체온. 아직도 선명하게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반짝였다.
‘망했어. 잠이 안 와.’
‘나 있어서 그래. 갈 테니까 쉬어.’
‘가긴 어딜 가. 열두 시가 넘었는데.’
불이 꺼진 거실을 유일하게 비추던 커다란 화면, 화면 속에는 서로를 사랑스럽고 따뜻한 눈으로 보고 있는 연인이 보이고, 어깨 위로는 따뜻함이 번졌다. 가기는 어디를 가냐며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차정한을 만지고 싶었다.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고 싶기도 하고,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기도 했다. 잠이 안 와서 큰일이네, 내일도 스케줄 가야 하는데. 침대로 가자. 내가 재워 줄게. 다정함이 묻은 말이 입술 가까운 곳에서 머뭇댔지만, 다정이 아니라 애정으로 보일까 봐 결국, 하지 못했다.
“…….”
나도 차정한에게 기대고 싶었다. 나에게 기댄 그 따뜻함 위로 고개를 기울이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하고 싶다고 하나를 하고 나면, 또 다른 게 하고파질 테니까.
‘안 갈 거지.’
‘…….’
‘응?’
‘…응.’
기어이 대답을 듣던 피곤해 낮아진 차정한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진짜 차정한이 없는 곳에서 사진 속 차정한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냥 광고판에 기대고 앉아 있는 것뿐인데 꼭 그에게 무게를 실은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거 알아? 네가 가지 말라고 할 때마다 아주 멀리 가고 싶기도 하고, 또 너를 끌어안고 싶기도 해.
“…….”
타야 할 버스가 한 대 또 다가왔지만, 타지 않았다. 차갑고 딱딱한, 그래서 내가 어떤 감정을 보여도 절대 알지 못할 너에게 기댄 채.
* * *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차정한에게 썼다. 차정한과 같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같이 있지 않을 때도 나는 그를 생각했다. 이제 나에게 차정한은 일상이고, 습관이며 나보다도 더 큰 내 전부였다.
열일곱,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사랑이라는 말 자체에 익숙하지 않을 때는 과한 우정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었다. 같이 있고 싶고, 뭘 하든 다 같이 하고 싶어지는 그 마음.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차정한이 생각나고, 차정한이 전화라도 할 때면 심호흡을 한 뒤에 받아야 하는 나의 그 모든 행동을 우정이라 생각했었다.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별나고 지긋지긋한 우정.
어릴 때 하는 사랑은 지극히 충동적이고 속한 집단을 벗어나면 언제 그랬었냐는 듯 너무나도 허무하게 허물어진다는 말을 믿었다. 그래야만 했고, 부디 그러기를 바랐다.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나의 그 모든 감정들이 시시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그 생각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흔들렸고, 차정한과 같은 대학에 들어간 뒤에 무참히 깨졌다. 내 마음 안에 있는 차정한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숨기기 버거울 만큼 커졌다. 철저히 애정을 감추고, 친구로 존재해야 하는 시간들이 힘들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얼굴만 봐도 흔들리고 내려앉는 마음을 몇 번이고 붙잡아야 했다.
차정한을 좋아하게 된 지 5년이 됐을 때,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사이는 여전히 모두에게 ‘유별나고 지긋지긋한 우정’이었지만, 그 말 아래 사랑을 감추고 있는 나는 출구가 필요했다. 그게 앞이든 뒤든 상관없었다. 어디로든 빠져나가 숨을 쉴 수 있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멀리라도 출구가 보이면 달려갔을 텐데 전혀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너무 멀리 와서 내가 들어온 입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갇혀 버렸다. 앞과 뒤 그 어디에도 내가 나갈 곳은 없었다. 어디를 봐도 차정한으로 가득했다. 도망칠 생각을 하는 중에도 나는 그를 사랑했다.
“…….”
쓸모없는 생각이다. 냉기가 도는 집으로 들어가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물을 한 병 꺼냈다. 집에 와도 잠만 자고 나가기 일쑤라 냉장고 안에는 생수 몇 병이 전부였다.
텅 빈 냉장고 안을 보니 꽉 찬 차정한의 냉장고가 떠올랐다. 내가 한 해물탕이 먹고 싶다던 목소리와 이따 보자고 웃던 얼굴도 같이 떠올라 설렘과 아픔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
오늘은 스케줄이 일찍 끝나 저녁 시간쯤 들어올 수 있다고 했었다.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통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하던 차정한이 내가 끓인 해물탕이 먹고 싶다고 해서 무척 좋았다. 그래서 차정한이 좋아하는 전복이랑 재료들도 잔뜩 샀는데, 차정한의 새 여자 친구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뭐라고 할 마음은 없었다. 한 번도 그녀들을 미워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저… 조금 부러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고 같이 지냈어도 내가 알지 못할 차정한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반복되는 생각들의 끝은 결국, 한숨이라 강제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 누군가를 탓할 수라도 있으면 지금보다는 마음이 편할 텐데 나는 알고 있었다.
멈추지 못하고 차정한을 혼자 사랑하는 나의 잘못도, 유독 외로움을 타는 차정한의 옆자리를 채우려는 그녀들의 잘못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차정한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연기하는 차정한은 참 낯설다. 화면 속에 나오는 차정한을 본 지도 벌써 7년째인데 아직도 딱딱한 저 기계 속에 차정한이 나올 때마다 거리감을 느꼈다. 그 이름 앞에 붙은 배우라는 직업에도 솔직히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화면 속에 나오는 차정한을 볼 때 좋은 점도 있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누르지 않아도 되고, 웃고 싶을 때 웃을 수도 있었다. 몸에서 힘을 풀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화면을 통해 차정한을 보는 나의 빈 시간들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가을밤>은 차정한이 처음으로 출연한 드라마였다. 신인을 공중파 드라마에 남자주인공으로 쓴다는 게 파격적이었지만, 사람들은 가을과 잘 어울리는 차정한을 좋아했다. 신선한 얼굴과 날 것이 보이는 연기가 사람들을 울렸다. 나는 차정한이 아니라 서해진으로 불리는 화면 속 익숙한 얼굴이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열 번도 더 봤고, 이렇게 혼자 있을 때면 늘 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였다.
“…….”
화면 속 차정한이 반짝반짝 빛났다. 사랑에 웃고, 또 사랑에 우는 그 얼굴을 보니 마음이 자꾸 조여들었다. 차정한의 사랑도 가을밤 사랑에 눈물짓는 서해진의 사랑처럼 따뜻할까. 가지 말라며 붙들고 결국 울어 버리는 그 얼굴을 보다가 따라 또 울어 버렸다.
연기하는 그를 보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진동이 울리는 것에 눈을 떠 휴대폰을 드니 화면에 ‘차정한’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달라붙어 있던 남은 잠들이 싹 사라졌다. 나는 얼른 몸을 세우며 전화를 받았다.
“응, 정한아.”
- 집이야?
“응.”
- 어디 집?
“오피스텔.”
- 나 지금 출발해.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니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집에는 유아정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왜 나한테 출발한다는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아정 씨는?”
- 매니저가 데려갔겠지. 집에서 기다린다고 또 전화했길래 그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가택 침입으로 신고한댔거든.
“…뭐? 네가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한 거 아니었어?”
- 내가 미쳤어. 아무나 들이게. 집 주소도 자기 매니저한테 알아보라고 했나 봐.
“미안해. 네가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단 말에…. 그래도 너한테 확인하고 들여야 하는 건데…. 통화하길래 당연히 네가 허락한 줄 알았어.”
- 네가 왜 미안하다 그래.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앞으로는 누가 오든 다 쫓아내. 안 가면 신고하고.
“…그럴게.”
차정한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종종 생각보다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니다 싶거나 말로 해서 쉽게 해결이 나지 않겠다 싶을 때는 오늘처럼 냉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했다. 나는 그런 차정한을 볼 때마다 나 역시 조금만 이 애정을 들켜도 차정한에게 냉정히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이 짓도 이제 지겨워. 매번 똑같은 거로 질려. 왜 하지 말라는 말을 못 알아듣지.
“화내지 마. 얼른 가서 저녁 해 둘게. 해물탕 먹고 싶다 그래서 재료 다 사놨거든.”
- 아, 진짜 난 우리 지유현밖에 없다. 나 진짜 네 해물탕 먹고 싶었거든.
“천천히 와. 나도 지금 나가야겠다.”
- 이따 봐.
“…응.”
전화를 끊는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울을 보고, 머리를 대충 만진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차정한이 집까지 오려면 거의 두 시간은 걸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꾸만 마음이 급했다. 그가 집에 오자마자 해물탕을 먹을 수 있게 다 준비를 해 두고 싶기 때문이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내가 정리하고 나온 그 상태의 집이 보였다. 유아정이 없는 것을 눈으로 대충 확인하고 얼른 해물탕 재료들을 전부 꺼내 올려두었다. 그제야 내내 고여 있던 숨이 편하게 터져 나왔다.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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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한은 내가 만드는 두서없는 레시피의 요리들을 좋아했다.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하라고 그러면 잘 못 하겠는데 막상 만들면 신기하게 맛은 괜찮았다. 대단할 것도 없는 내 요리를 입도 짧은 애가 한 그릇 싹 비우고, 맛있다며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정말 행복했다.
나는 생각을 뚫고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주차장으로 가서 같이 올라와야 하는데 내가 저녁 만드는 것을 알고 일부러 도착 전에 연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곧 슬리퍼 끄는 소리와 함께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한 차정한이 금세 시야에 가득 찼다.
“나 왔어.”
“왔어? 배고프지.”
“냄새 맡으니까 갑자기 배고프다.”
“다 됐어. 옷 갈아입고 와.”
아침에도 본 얼굴이고, 아까 화면으로도 내내 본 얼굴인데 저녁 때 보는 차정한은 또 달랐다. 멋지게 만진 헤어 스타일도 그렇고 인터뷰 사진을 찍느라 차려입은 슈트까지 정말 멋져서 마음이 울렁였다.
그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마지막으로 간을 봤다. 내 입에 맛있으니 차정한 입에도 맛있을 것이었다. 얼른 밥을 가득 퍼서 식탁에 놓고, 마지막으로 먹는 동안 식지 않도록 미리 식탁 위에 두었던 인덕션 위에 해물탕 냄비를 올렸다. 곧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그가 와 맞은편에 앉았다.
“맛있겠다. 진짜 배고팠어. 오늘 한 끼도 못 먹었거든.”
“왜? 그 정도로 오늘 시간이 없었어?”
“유아정 때문에 짜증 나서.”
“…너랑 있고 싶어서 왔겠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난 분명히 내 공간에 허락도 없이 가는 거 싫다고 했어. 며칠이나 됐다고 매니저한테 집 주소를 알아 오라 그래.”
계속 이 이야기를 했다가는 저녁까지 안 먹고 방으로 들어갈 성격인 것을 알기에 이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얼른 전복과 조개, 새우, 게를 잔뜩 그의 앞으로 덜어 주었다.
“얼른 먹어. 배고프잖아.”
차정한은 때때로 굉장히 타인에게 냉정하게 굴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아니다 싶으면 날카롭게 말하고, 쉽게 관계를 정리했다. 그래서 차정한의 연애는 보통 상대의 일방적인 관심으로 끝나거나 시작이 되어도 일주일을 가지 못했다.
“맛있다. 역시 네가 한 게 제일 맛있어.”
“많이 먹어.”
“집에 오는 동안에도 화가 안 풀려서 진짜 밥이고 뭐고 안 먹힐 것 같았는데.”
“이제 좀 풀렸어?”
“너 보니까 풀렸어.”
떨리라고 한 말도, 또 설레라고 한 말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차정한의 말을 듣는 순간 또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괜히 밥알을 몇 개 들어 입에 넣었다.
차정한은 내가 오해하고 싶은 말들을 일상처럼 하고는 했다. 물론 그 말은 전부 우정이었다.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별나고 끈끈한 그 우정을 차정한은 늘 소리 내어 표현했다. 너밖에 없어, 너 보니까 살 것 같아, 너랑 있는 게 제일 좋아, 너 없으면 나 어떻게 살아.
나는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순식간에 붕 떠오르고 또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져 더 많이 아프고, 또 더 많이 다쳤다. 그렇게 수도 없이 다쳤고, 또 다칠 걸 알면서도 13년이 지나도록 나는 차정한의 다정한 말들에 조금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맥주 사다 놨는데 마실래?”
“아, 맥주 있었어?”
시원하게 한잔 곁들이면 좋을 것 같아 일어나려는데 손목 위로 따뜻함이 내려앉았다. 나는 내 손목 위를 감싸 쥔 차정한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가져올게. 뭐 그렇게 빨라. 자동이지, 아주.”
다시 의자에 앉는 나를 보며 웃은 차정한이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등 뒤로 냉장고 문이 열리고, 맥주 꺼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맥주를 두 캔 가지고 와 오픈한 차정한이 내 앞으로 맥주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제 것을 들어 갈증이 난 사람처럼 들이켰다.
“기분 많이 별로구나.”
가벼워진 캔을 내려놓은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얼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왜 사람들은 알려 주는 것 외에 자기가 알 필요 없는 부분까지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지. 넌 이게 이해가 돼? 나만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유아정이랑 사귀는 것도 아니야. 몇 번 연락이 먼저 오길래 마침 촬영장 근처에 있다고 하니까 매니저 대동하고 점심 한번 같이 먹은 게 다야. 그런데 어떻게 그다음이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내 집에 들어오는 거야?”
“얼굴이 알려져서 그러겠지. 밖에서 만나기 뭐하니까….”
“그러니까 왜 나랑 밖이든 안이든 만나야 하냐고.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한 적이 없는데.”
말을 하면서도 내가 유아정의 편을 들어 그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기가 막혀서 입안에 맴도는 몇 마디는 그냥 맥주와 함께 목 뒤로 넘겨 버렸다.
“동윤 형도 화나서 그 매니저랑 한 판 했어.”
차정한의 매니저인 동윤 형은 평소에는 마음이 여리고 착하지만, 차정한에 관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 때면 누구보다도 든든한 사람으로 변하고는 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기사 날 생각하라고 아까 난리도 아니었어.”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야. 여기 소문 빠르잖아. 네가 신고한다고까지 말한 거 아마 지금쯤 주변에 알려졌을걸. 앞으로 누가 그러겠어. 그러니까 마음 풀어. 그런 기분으로 먹으면 체해. 응?”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 조금 속상했다. 말을 잘하는 재주라도 있으면 분위기를 밝고 재밌게 바꿔 보기라도 할 텐데 내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넌 사람을 너무 잘 믿어. 기회도 잘 주고. 착해 빠졌어.”
“그냥 착하다고만 해. 착해 빠진 건 욕 같잖아.”
“욕까지는 아닌데 칭찬으로 한 말도 아니야. 네가 너무 무르게 사니까 내가 마음을 못 놓잖아. 벌써 몇 년째야. 십 년도 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