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3)

13년이라는 그 시간을 차정한은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 차정한의 시간 안에 지유현이라는 사람은 어떤 기억일까.

“너 그때도 그랬어. 강석호였나. 그 새끼가 나한테 맞히려고 공 찼는데 네가 맞았을 때, 그때도 내가 가서 죽여 버린다니까 하지 말라 그러고.”

“문제 일으켜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런 거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

“뭐가 별로 안 아파. 너 어깨에 멍들었었잖아. 크게.”

“그냥 크기만 컸던 거야.”

“지금 생각해도 빡 치네. 그때 확 진짜 죽여 버렸어야 되는데.”

“그랬으면 지금 연기 못 하지.”

“연기가 문제야? 네가 다쳤는데.”

차정한은 늘 내가 최우선인 것처럼 말했다. 한 번씩 차정한의 말을 듣고 있으면 불쑥 숨기고 있던 애정을 드러내고 싶어졌다.

“옛날 생각나네. 그땐 진짜 너 있어서 졸업했어. 너 없었으면 진작 때려치웠을 거야.”

“내가 차정한 학교 다니게 하려고 고생 좀 했지.”

“인정. 그건 무조건 인정.”

기분이 풀린 건지 이제야 웃는 차정한의 얼굴을 보니 나도 따라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웃는 얼굴 위로 열일곱의 차정한이 겹쳐졌다.

* * *

중학교 때 본 아는 얼굴이 몇 있기는 했지만, 친했던 애들과는 다 다른 반이 되거나 다른 학교로 배정을 받아 내게도 고등학교는 낯선 공간이었다. 딱히 먼저 나서서 남들과 어울리려 애쓰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냥 조용히 할 일이나 하고 있던 것이 애들의 눈에 띄었는지 추천을 받아 반장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 놀랐지만, 그래도 뭔가 열심히 한 학기를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차정한은 같은 반이었지만, 새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몇몇 중 하나였다. 사실 차정한은 나 외에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늘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고, 대부분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냥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차정한이 보이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들이 매일같이 일어났다.

쉬는 시간이 되면 같은 학년은 물론이고 다른 학년의 여학생들이 와서 차정한을 들여다보았고, 어쩌다가 엎드리지 않은 차정한을 보면 수군대기도 했다. 차정한의 책상이나 사물함에는 늘 먹을 거나 선물이 가득했고, 선생님들조차 수업을 하러 들어와서 차정한이 누군지 물을 정도로 유명했다.

솔직히 태어나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을 뽑으라면 나 역시 차정한의 이름을 댈 만큼 대단한 얼굴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차정한이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이라는 말도 나오고, 또 연습생을 하다가 담배를 피워 퇴출당했다는 말도 나왔다. 차정한이 있는 자리에서도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가 한마디도 밝힌 적 없는 이야기를 해댔다. 차정한은 그걸 들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차정한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게 된 건 4월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였다. 다들 낸 수련회 참가서를 정리하다 보니 차정한 혼자 아예 내지 않은 걸 알고 쉬는 시간에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자리로 다가갔다. 차정한은 내가 옆으로 갔는데도 알지 못하는 건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한아.’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했지만,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곧 차정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이거 수련회 참가서 오늘까지 내야 해. 점심시간에 선생님 가져다드릴 건데 그전에 줄 수 있어? 안 가져왔으면 너는 내일까지 낸다고 내가 말씀드릴게.’

‘…….’

‘혹시 종이 없으면 다시 줄까? 아니면 일단 갈지 안 갈지만 먼저 말해 줘도 되는데….’

‘있어. 내일 낼게.’

‘아…. 그럼 내가 너는 내일까지 낸다고 말씀드릴게.’

대답을 아예 안 해 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대화 마무리는 됐지만, 계속 나를 보고 있는 시선에 등을 돌려 가기가 좀 그래서 서 있자, 차정한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너는 가?’

‘응?’

‘너는 수련회 가냐고.’

‘응. 나는 가는데….’

‘그럼 나도 갈게.’

‘…….’

‘간다고 선생한테 말해. 참가서는 내일 줄 테니까.’

‘응, 그럴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나를 보던 차정한이 시선을 거두며 몸을 앞으로 돌렸다. 꼭 내가 가니까 자기도 간다고 말한 것 같아 좀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차정한이 수련회에 간다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차정한은 다음 날 정말 수련회 참가에 체크가 된 참가서를 내게 주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같이 매점에 갈지 물었고, 매점에 가서는 내가 고른 것들을 전부 사 주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게로 다가왔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차정한의 모습이 어색하고 얼떨떨했지만, 다가오는 차정한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4월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 어느 날, 우리는 처음으로 같이 점심을 먹었고, 또 같이 학교를 나섰다.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은 며칠 더 이어졌지만, 그 뒤로도 매일같이 나를 찾는 차정한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정한은 내 일상이 되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고, 나는 모든 것을 전부 다 차정한과 함께했다.

차정한은 아침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와서 나를 기다렸다. 사는 곳에서 학교를 지나 우리 집에 와야 하는데도 굳이 와서 나와 같이 학교를 가고, 또 끝나면 내가 가는 쪽으로 왔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차정한은 어차피 집에 가 봤자 할 일도 없고,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차정한을 늘 우리 집으로 데려가 같이 시간을 보냈다.

‘넌 왜 나에 대해서 안 물어봐?’

‘너에 대한 뭐?’

‘왜 집에 가기 싫어하는지 그런 거. 다들 그런 것부터 궁금해하던데.’

‘중요한 게 아니니까. 몰라도 괜찮지만, 네가 나중에 말하고 싶어질 때가 오면 해 주겠지. 급한 것도 아니고, 내가 꼭 지금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뭔가 말을 할 때마다 차정한은 꼭 내 눈을 바라보았다. 가끔 한 번씩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도 있어 종종 나까지 말이 없어지고는 했다.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해.’

‘…….’

‘진짜 난 유현이 너밖에 없어.’

‘…그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진짜니까. 거짓말 아니고.’

차정한은 원래 친구 사이에 이런 말을 소리 내어 하나? 싶은 말들을 종종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했다. 너밖에 없어, 네가 있어서 좋아,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해. 처음에는 어색하고, 간지럽기만 하던 말들이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차정한의 좋은 친구가 된 것 같아 기뻤다.

그때는 분명 그랬다.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04

?

?

씻고 나온 차정한이 내가 있는 소파로 와 내 다리 위로 머리를 대고 누웠다. 익숙한 일이지만,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여전히 담대할 수 없고, 숨을 잘 쉴 수 없었다.

“내일은 오후에 촬영이지?”

“응. 늦잠 자야지.”

“들어가서 자. 여기서 자면 중간에 깨야 하잖아.”

“알았어. 오 분만 있을게. 난 이게 제일 편하더라.”

“…….”

불이 꺼진 거실로 내가 틀어 둔 영화 빛만 이리저리 번쩍였다. 나는 그 빛으로 밝아진 차정한의 머리칼을 살짝 넘기다가 얼른 손을 거두었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닿고 싶은 마음이 불쑥 넘칠 때가 있었다.

“얼마 전에 말한 드라마 있잖아.”

“응. 그 재벌로 나온다는 거?”

“응. 그거 할까 봐. 저번에도 재벌이어서 겹칠까 봐 안 하려고 했는데 대본 더 보낸 거 보니까 재밌어. 착한 놈도 아니고.”

“이번에는 악역이야?”

“악역까지는 아니고, 왜 그런 거 있잖아. 분명 나쁜 새낀데 끌리는 거. 딱 그런 거. 원톱이라 촬영할 때 죽어나긴 하겠지만. 내일 대본 좀 봐줘. 두고 갈게.”

“알았어. 솔직히 네 분량이 많아야 재밌더라, 난. 찍는 넌 힘들겠지만.”

내 허벅지에 모로 누워 머리를 대고 화면을 보던 차정한이 몸을 돌려 나를 올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손끝이 괜히 긴장에 뻣뻣해졌다.

“넌 나 보려고 내 드라마 보잖아.”

“…당연하지. 너 나오는 드라마를 너 보려고 보지.”

“팬들은 그래도 내용을 보긴 보던데. 너 가을밤 그렇게 봐도 내용 모르지.”

“나도 내용 알거든.”

“모르네, 몰라.”

“잘 들어. 나 1화부터 다 말할 거니까. 서해진이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잖아. 그 내려간 고향 기차역에서 일하는… 왜 웃어. 맞잖아, 내용.”

장난기 가득해진 눈으로 보던 차정한이 소리 내어 웃으며 손을 올렸다. 닿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정말 차정한의 손끝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무 떨려 차정한을 밀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게 당하고 또 당해.”

이제 아예 뺨을 조물거리는 손길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더는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허벅지 위에 누운 차정한을 일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정한이 내 손목을 잡았다.

“가게? 놀렸다고 가는 거야?”

“너 쉬어야지.”

“내가 언제 너 있다고 못 쉬었어?”

“나올 때 보니까 집 엉망이야. 청소도 해야 하고, 내일 원우랑 만나기로 해서 집에 가서 자려고.”

“김원우? 김원우는 갑자기 왜.”

“내일 월차 내고 쉬는 날이래.”

“월차 내고 쉬는 날에 왜 너를 만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나를 당겨 다시 소파에 앉힌 차정한이 취조하듯 묻기 시작했다.

“만난 지도 오래됐고….”

“저번 달에 만났잖아. 패션매거진 촬영하던 날.”

“그걸 기억해?”

“그래서 내가 전화했는데 김원우가 받았잖아. 스타님 전화를 받으니 떨리네 뭐네 하면서. 내가 그때 얼마나 짜증 났는데 그걸 잊을까.”

김원우는 고3 때 나와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차정한과는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고, 3학년 때 처음으로 다른 반이 되었다. 3학년에 올라가 처음으로 같이 학교 일을 하게 된 애가 김원우였다. 친해진 건 당연했다.

“가지 마, 나 내일 촬영도 있고, 김원우 재수 없어.”

“원우를 왜 그렇게 싫어해.”

“김원우는 나 좋다 그래?”

“…….”

“답 나왔네.”

차정한은 내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래되고 또 유일하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인 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든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몇 번이나 얘기한 적이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차정한이 나를 필요로 하는 건 기쁜 일이었다.

“갑자기 약속을 어떻게 깨. 점심만 먹고 올 거야.”

“나 촬영 가기 전에?”

“당연하지. 내가 언제 너 일 있는데 약속 잡은 적 있었어?”

내 말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소파에 아무렇게나 등을 기댄 차정한이 고집스레 텔레비전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알았으니까 자고 가. 여기도 네 옷 다 있잖아.”

“청소도….”

“청소는 사람 불러 줄게.”

“…부르지 마. 내가 내일 가서 할게. 뭐 얼마나 된다고 사람을 불러.”

“내가 너 청소하라고 집에 보내는 줄 알아? 거기는 그냥 네 짐 두는 데라고 말했잖아. 요즘 자꾸 집에 간다 그러고 여기서 안 자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

“…….”

“네가 그러면 나 서운해.”

차정한은 외로움을 잘 탔다. 아니, 잘 탄다는 말로 그의 외로움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누구도 겉으로 차정한을 보며 외로움에 파묻혀 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겠지만, 그를 13년 동안 곁에서 본 나는 차정한이 얼마나 연약한 감정들에 잘 휩쓸리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걸 안 순간부터 늘 차정한을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늘 그거였다. 차정한을 외롭게 하지 않는 것.

“알았어. 그게 서운했어?”

“그럼 안 서운해? 넌 항상 갈 준비나 하고 있는데.”

“너 기분 안 좋거나 한 날은 누구랑 같이 있는 거 안 좋아하잖아.”

“그 누구에서 넌 빼야지. 아직도 몰라?”

“…….”

“내가 왜 남들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하는데. 눈치도 없고, 귀찮게 굴고, 그러다가 내 눈치 보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랑 왜 널 같이 둬. 네가 남이야?”

그렇게 말하는 차정한이 고마우면서도 한편 마음이 조금 아팠다. 저렇게 나를 친구로 믿고 의지하는 차정한을 혼자 13년이나 좋아하고 있는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생각은 순식간에 바늘로 변해 심장을 마구 찔러댔다.

“유현아.”

“…….”

“난 너밖에 없어.”

나도 너밖에 없어.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맺히지 못하고 마음에 맴도는 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내려갈 수는 있어도 이 소리는 절대 마음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소리 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멀어진 것처럼 그러지 마. 응? 나 진짜 네가 그러면 철렁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알았어. 안 그래. 자고 갈게. 아니,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고, 오피스텔은 짐 보관소고 네 말이 다 맞아. 맞으니까 마음 풀어.”

“풀렸어.”

씩 웃은 차정한이 다시 내 허벅지 위로 머리를 대고 누웠다. 다시 화면을 향한 그의 시선과 그런 그에게 닿은 시선을 동시에 담은 빛이 반짝였다. 나는 애정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가볍게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

마음에 맴돌던 말이 천천히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라 이제는 슬프지 않았다.

* * *

김원우와 12시까지 만나기로 해 11시쯤 집을 나서는데 차정한이 물을 마시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굳이 현관까지 따라 나와서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차정한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 집을 나섰다. 솔직히 혼자 두고 김원우를 만나러 가는 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김원우는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고 웃은 김원우가 길이 안 막혀 빨리 왔다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내미는 어쩌고 왔어?”

“아들?”

“너 없으면 울어대는 아들내미 있잖아. 유명하신 아드님.”

“아…. 정한이. 정한이 오늘 오후 촬영이라 집에 있어.”

“지겹지도 않냐. 너희는. 몇 년을 붙어 다니는 거야. 싸우지도 않아?”

“싸울 일이 뭐가 있어.”

“걔 사회성 없잖아, 솔직히. 이기적이고.”

“아니야. 안 그래. 사회성 없는데 배우를 어떻게 해. 촬영장에서도 잘하고,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인기 좋은데.”

김원우가 말한 거에 비해 내가 너무 길고 자세하게 설명을 했는지 김원우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됐고, 다음 주에 우리 3학년 때 애들 만나기로 한 거 알지.”

“응. 연락받았어.”

“이번에는 와.”

“정한이 스케줄 없으면 시간 봐서.”

“스케줄 없으면 차정한도 오는 거 아냐?”

“같은 반도 아니었잖아.”

“야, 애들은 다 차정한이랑 같은 반이라고 기억하던데. 나도 그래. 걔 맨날 너 보러 우리 반에 와 있었잖아.”

2년 동안 같은 반을 하다가 처음으로 3학년 때 다른 반이 된 날, 차정한은 학교를 관두겠다고 말했다. 나와 같은 반이 아니면 굳이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차정한을 방학 내내 달래고 얼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바로 옆 반이라 쉬는 시간마다 보고, 점심도 같이 먹고, 등하교도 같이하고, 수업만 따로 듣는다고 생각하라는 내 말에 차정한은 알았다며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돌렸다.

그렇게 3학년이 된 첫날부터 차정한은 매 쉬는 시간 우리 반에 왔고,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자율학습을 하는 시간에도 늘 우리 반을 찾았다. 종례가 먼저 끝나면, 우리 반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렸고, 아침에도 조례가 시작하기 전까지 내 옆에 있다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같은 반 애들은 물론이고 담임 선생님조차 차정한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 반이라고 생각할 만큼 차정한은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내 옆에 있었다. 김원우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너한테는 잘하나 봐. 우리한테는 맨날 재수 없게 굴었는데.”

“좋은 애야. 사람 대하는 걸 그땐 잘 못 해서 그런 거지.”

“이거 봐. 진짜 아들도 이렇게는 쉴드 못 치지.”

솔직히 김원우가 내 친한 친구라고 해도 차정한을 나쁘게 말하는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나쁜 소리를 들을 만큼 나쁘지도 않고, 또 그냥 내가 그런 말을 듣는 게 싫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가 겪고, 내가 알고, 내가 보고 있는 차정한은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13년이나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내게 따뜻하고, 다정했다.

“네 일 얘기 해 봐. 저번에 시작한다던 건 어떻게 됐어?”

공통으로 아는 사람 중 차정한이 가장 유명한 사람이고, 또 딱히 사이가 좋지 않기에 김원우와 이야기할 때면 늘 차정한 이야기가 주가 되었다. 험담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하면 몰라도 자꾸 차정한이 별로라는 이야기를 하니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차정한이 없는 자리에서 이렇게 차정한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내가 아니어도 세상 많은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할 텐데 나까지 얹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김원우는 자신의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자 풀이 죽은 사람처럼 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더 이상 김원우가 차정한을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편했다.

#05

?

?

김원우와는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집에서 아무것도 안 먹고 내내 자고 있을 차정한이 떠올라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차정한이 좋아하는 브런치 가게에 들러 샐러드와 갓 짜낸 비타민 주스를 사 집으로 향했다.

집은 아직도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내가 나오고 다시 들어가 지금까지 자는 건지 몹시 조용해서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샐러드 봉투를 내려놓고 침실로 들어갔다.

거의 3시가 다 된 시간이라 이제 일어나야 했다. 때마침 울린 진동에 휴대폰을 보니 4시 반에 도착할 거라는 동윤 형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씻고, 샐러드라도 먹고 나가려면 지금은 일어나야 가능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옆으로 가 앉아 잠든 차정한의 어깨를 쥐었다.

“정한아.”

깊게 세상모르고 잠드는 편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몸이 반응했다.

“일어나서 저거 먹어. 내가 너 좋아하는 아보카도 샐러드랑 비타민 주스 사 왔어. 동윤이 형 네 시 반까지 오신다니까 지금 일어나야 먹고 준비할 수 있어.”

“그냥 오지, 뭘 또 사 왔어.”

“너 굶는 거 싫어.”

침대에서 뒤척인 차정한이 어둠 속에서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옅은 어둠에 익숙해져 눈이 마주치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너 없으면 나 굶어 죽었을 거야.”

“자랑이다. 알아서 챙겨 먹고 좀 그래.”

“싫어.”

“왜 싫어.”

“내가 다 하면 너 집에 가서 안 올 거잖아. 내가 안 해야 와서 밥이라도 먹이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차정한이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김원우가 나 씹었지.”

“아니.”

“씹었네. 그 새끼가 날 안 씹을 리가 없지.”

“안 그랬어. 그냥….”

“그냥?”

“우리가 오래 같이 붙어 지내니까 신기하다고.”

“신기할 것도 없다. 앞으로는 진짜 만나지 마. 한 달은 만날 일 없겠네.”

없다고 하려다가 문득 김원우가 말한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이 생각났다.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데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말하지 않기로 정하는 동안 눈치가 빠른 차정한이 스탠드 불을 켜고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날 일 있나 보네, 얼굴 보니까.”

“얼굴 보고 어떻게 알아.”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다 알아. 네 눈만 봐도 척이야. 솔직히 불어. 뭔데.”

“다음 주에 3학년 때 반 애들 모이기로 했다고… 되면 오라고 해서.”

“그래서.”

“될지 안 될지 아직 모르잖아.”

“안 될걸. 그날 중요한 스케줄 있을 거야.”

딱 잘라 말한 차정한이 이불을 조금 신경질적으로 걷어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오는 그를 따라 일어나 방을 나섰다. 창으로 간 차정한이 버튼을 누르자 블라인드가 걷히며 갑자기 집 안으로 빛이 확 쏟아졌다. 내내 어둠 속에 있어 그런지 갑자기 마주한 빛이 너무 밝아 눈을 감았다.

“언제인지 말 안 했는데….”

“언제든 그날은 너 바쁠 날이니까 그렇게 알아. 갈 거면 나도 같이 가고. 나 너희 반 애들 다 알아. 걔들도 나 다 알 거고, 뭐 몰랐던 애도 지금은 다 알 거 아냐. 꼭 가야 하면 같이 가.”

“별로 가고 싶은 건 아니야. 원우가 알려 줘서 생각난 거지.”

“그럼 다행이고.”

창밖을 보고 있다가 내 쪽으로 확 돌아선 차정한이 욕실로 가며 입고 있던 니트를 벗었다. 나는 갑자기 보이는 그의 등에 얼른 식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언젠가부터는 똑바로 내내 바라보기가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점점 많은 것들이 변해 가는 내 모습이 싫어 전에는 참 많이 울었었다.

“씻고 나서 먹을게.”

“응. 알았어.”

차정한이 나와 바로 잘 먹을 수 있게 샐러드를 꺼내 놓고, 주스는 시원하게 마실 수 있도록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이따 차정한이 스케줄에 가면 집 정리를 좀 하고, 오피스텔로 가서 청소를 할 생각이었다. 또 뭘 해야 하나 번호를 매겨 떠올리는데 딱히 내가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내 마음속 최우선은 차정한으로 변해 버렸다. 나와 차정한이 똑같은 크기로 있었는데, 차정한이 기울어지며 나를 전부 물들였고, 나조차 차정한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떠올릴 때 늘 차정한을 먼저 떠올렸다. 나보다도 늘 차정한이 먼저였다.

“유현아.”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가까이 온 차정한이 보였다. 놀란 나를 보며 수건으로 머리칼을 문지른 차정한이 웃으며 맞은편으로 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멍하니 있었어.”

얼른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흔들어 투명한 컵에 따랐다. 차정한은 그 주스를 몇 모금 넘기고,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원호진 감독님 영화 홍보 촬영 있는데 같이 가.”

“알았어.”

“서필준이랑 찍거든. 가을밤 배우들이 아직도 한자리에 모여 감독님을 응원하는 의리의 모습을 보여 주자나, 뭐라나.”

서필준은 차정한과 같이 드라마를 한 적 있는 배우였다. 신인인 차정한이 남자주인공으로 발탁이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현장에서 차정한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대했었다. 그때도 몇 번이나 울컥해서는 달려들려는 차정한을 달래고 또 막았던 기억이 났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괜찮아졌다고 하지 않았어?”

“전처럼 무시 못 하지. 뭐 달라졌다고 해도 신인이라고 무시하고, 배우들한테 내 얘기 한 게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최대한 부딪히지 말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차정한이 샐러드를 마저 먹었다. 촬영이 있는 날에는 헤비한 걸 먹고 싶지 않아 해서 이런 샐러드 같은 것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차가운 샐러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아보카도 쉬림프 샐러드는 드레싱이 맛있다며 한 통을 늘 다 비웠다.

“나 가면 오피스텔 갈 거야?”

“응. 가서 청소도 좀 하고, 쉬다가 올게.”

“알았어.”

샐러드랑 주스를 싹 다 비운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입이 짧아 잘 안 먹으려 하는 편이라 기특하기까지 했다. 김원우가 차정한을 내 아들이라고 표현했던 게 떠올라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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