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3)

“유현아, 가자. 내 팬미팅 끝났대.”

웃는 차정한을 보니 왜 차정한이 여기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자리에서 내가 자신에 관련된 물음에는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할 걸 알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해 주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나는 차정한을 따라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키를 받아 차에 오르는 차정한을 보며 조수석에 올랐다.

“내가 분위기 조진 것 같으면 사과할게.”

“너 없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걸 이제 알았어?”

“…….”

“너 나한테 피해 갈까 봐 저 새끼들이 저런 말 해도 참고 한마디도 못 하는 거 내가 모를까 봐?”

“내가 그 생각까지는 못했어. 괜히 너만 곤란하게 했다. 미안해.”

시동을 건 차정한이 나를 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과하지 말고, 박영진 같은 새끼한테 사과받고 살아. 솔직히 너 사과할 일 하고 살지도 않잖아.”

“…그래도.”

“어디 가서 맛있는 거나 먹고 가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옷에서 냄새만 나네.”

불만스럽게 팔을 들어 냄새를 맡은 차정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얼른 내비게이션에 차정한이 좋아하는 스테이크 레스토랑 이름을 적었다.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안 그래도 생각났는데.”

절대로 애정을 티 내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꽉 붙든 심장이 다 흔들릴 만큼 예쁜 웃음이었다. 나는 움직이는 차 안에서 내내 눈앞에 잔상처럼 흔들리는 차정한의 웃음에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08

?

?

다음 날, 김원우와 박영진에게 사과 메시지가 왔다. 김원우는 괜히 오라고 했다가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고, 박영진은 술이 과했던 것 같다며 술에 모든 잘못을 넘겼다. 썩 마음에 드는 사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마음이 무겁고, 또 자존심이 상했을 것을 알기에 넘기기로 했다. 솔직히 그 자리에서 차정한이 내가 하고픈 말들을 전부 다 해 줘서 내게는 아무것도 남은 감정이 없었다.

‘유별나고 지긋지긋한 우정이다.’

유별나고 지긋지긋한 우정. 세상에 죽어라 어울려 다니는 친구가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모두 유별나고 지긋지긋한 우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독 나와 차정한을 보고 저 말을 많이 했다.

하도 붙어 다니고 뭐든 같이하니 하는 말이겠지만, 솔직히 저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징그럽다는 말을 저렇게 돌려 말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게 시작된 걸까. 차정한이 수련회 참가서를 낸 뒤로 나와 친해졌고, 나와 모든 것을 함께하기를 바랐다. 그런 차정한이 부담스럽거나 이상하게 보였다면 멀리했겠지만, 나 역시 차정한과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차정한의 비어 있는 마음이 너무나도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차정한은 부족한 게 하나도 없었다. 얼굴이면 얼굴, 키면 키, 거기에 비율도 좋고, 몸도 좋아서 모두가 그런 차정한을 부러워하거나 좋아했다. 차정한을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그 밑바탕에는 관심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차정한은 늘 텅 빈 것처럼 굴었다. 마음이 하나도 차 있지 않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차정한은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남의 일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상대의 기분이나 마음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을 굉장히 귀찮아했다.

‘남한테 잘할 필요 없잖아. 잘해 봤자 어차피 끝은 배신일 텐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텅 빈 목소리에 놀라기도 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한 번도 차정한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궁금해졌다. 하지만 내가 묻는 것이 혹시라도 차정한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묻지는 않았다.

장마가 시작된 6월의 어느 날, 누가 우산을 훔쳐 가 차정한의 우산을 같이 쓰고 집까지 뛰어가다가 도저히 갈 수가 없어 근처 상가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요란한 빗소리에 사람들도 없고, 전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있어 상가 입구는 몹시 조용하고 습했다. 반 이상 젖은 교복 셔츠가 피부에 달라붙어 축축하고, 끈적했다. 운동화도 다 젖었고, 바지 끝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젖은 머리칼을 대충 만지고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나보다도 훨씬 더 흠뻑 젖어 있었다.

‘누가 보면 넌 우산 안 쓴 줄 알겠다.’

농담처럼 말하다가 정말 우산을 안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확실히 덜 젖은 걸 보면 차정한이 내 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차정한은 생색도 내지 않고, 또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비 오는 밖을 바라보았다.

‘나한테는 왜 잘해 줘? 어차피 끝은 배신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텅 빈 차정한의 마음에 비가 고일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이런 걸 묻는 것도 좀 그런가 싶었지만, 이미 소리 낸 말을 담을 수는 없어 그냥 젖은 운동화 끝으로 바닥만 괜히 문질렀다. 비가 요란해질수록 차갑고 습한 기운이 온몸으로 달라붙었다.

‘넌 안 그럴 것 같아.’

‘…….’

‘내가 엄마 아빠란 사람도 안 믿거든.’

‘…….’

‘그런데 너는 믿어. 왜 그런지는 몰라. 그런데 지유현 너는 나 배신 안 할 것 같아.’

‘그걸… 이제 알았어?’

알아줘서 고맙기도 하고 이제 그런 말을 해서 서운하기도 했다. 어깨를 슬쩍 밀자 차정한이 웃었다.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 뒤로 차정한과는 둘도 없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차정한은 나를 의지했고, 나 역시 내게 기대는 차정한에게 기댄 채 단단해지려 노력했다. 그때부터 언제든 같이 다녔다. 학교가 끝나면 우리 집으로 가서 같이 숙제를 하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했고, 가끔은 차정한의 집에 간 적도 있었다. 집이 엄청 크고 좋아서 어린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차정한의 방 역시 크고 좋았지만, 책상과 침대, 뭔가 채워지지 않은 책장이 전부였다. 방 크기에 비해 텅 빈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차정한이 이 방에서 외로움을 느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피자부터 먹자. 배고파.’

숙제하기 전에 먹고 하자고 올 때 사 온 피자를 책상 위에 놓자 차정한이 의자를 내 쪽으로 밀어 주고 책상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람 사는 방 안 같지.’

피자 박스를 열며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흐르는 차정한의 목소리가 무척 아프게 닿아 왔다. 나는 콜라 두 캔을 꺼내 책상 위로 놓으며 의자에 앉은 채 차정한 가까이 쭉 바퀴를 밀어 다가갔다.

‘사람 두 명이나 있잖아.’

‘…….’

‘피자 식어. 얼른 먹어.’

가장 큰 조각을 들어 차정한에게 주고 나는 그 옆에 있는 조각 하나를 들어 얼른 한입 물었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안 먹고 자꾸 보기만 해.’

‘내일도 와.’

‘…….’

‘모레도 오고.’

‘…….’

‘토요일에는 자고 가.’

‘…….’

‘내 방에 너 있으니까 좋다.’

차정한은 아주 많이 외로움을 타고, 또 아주 자존심이 셌으며, 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굳어질 만큼 솔직했다. 그리고 차정한이 가여웠다. 그때만 해도 분명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내 친구를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만 열면 다정하고 친구에게 표현도 잘하는 차정한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싶었다. 내가 있어 차정한이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알았어.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고, 토요일에는 옷 가지고 올게.’

‘정말이지.’

‘응. 그러니까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알았어.’

그제야 피자를 한입 먹는 차정한을 보며 꼭 웃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반드시 내가 차정한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분명 그때는 우정이었다. 열과 성이 넘치는 조금은 과한 우정.

* * *

샵에서 메이크업 받는 차정한을 보고 있는데 오랜만에 본 직원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알록달록 멋지게 머리 색을 바꾼 직원과 이야기를 하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차정한이 거울로 조금 불만스럽게 나를 보고 있는 게 보여 어색하게 직원을 보며 웃었다.

“커피 드릴까요?”

“아, 네.”

“아이스? 뜨겁게?”

“아이스로 주세요.”

“금방 가져올게요.”

“고맙습니다.”

직원이 웃으며 가는데 차정한이 그 직원을 불렀다. 나도 직원도 동시에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쟤 물 좀 많이 넣어 주세요. 카페인에 약해서요.”

“아, 그러시구나. 정한 씨 정말 다정하네요. 친구 커피 취향도 다 알고.”

“전 진하게 한 잔 더 주세요. 잠이 안 깨네.”

“우리 매장 잠 확 깨는 커피 있어요. 그거면 진짜 잠 확 깨지. 금방 가져올게요.”

컨디션에 따라 어떤 날은 진한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두근대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것처럼 느껴져 힘들 때가 있었다. 그건 정말 컨디션에 따라 다른 거라 언제 그럴지 몰라 커피는 되도록 굉장히 연하게 마셨다.

그런데 그것도 혼자 마실 때나 카페에 가서 부탁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지 이렇게 주는 것을 마실 때는 상대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마셨다. 그런데 차정한이 그걸 알고 직원에게 말한 것이었다. 차정한은 종종 넘치는 마음을 숨기기 힘들 만큼 세심하고 다정했다.

“헤어는 커피 드시고 할게요.”

“네.”

메이크업을 마친 직원이 차정한과 내게 웃으며 인사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차정한이 거울 안으로 나를 또 바라보았다.

“또 큰일 나려고 커피를 그냥 달래.”

“한두 모금은 괜찮아.”

“하여튼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없으면 안 돼.”

애한테 말하는 것처럼 소리 낸 차정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이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웃자 다시 거울을 통해 내게 시선을 올린 차정한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왜 웃어, 맞잖아.”

“그건 내가 너한테 해야 할 말이고.”

“내가 뭐. 나 요즘 나름 전보다 알아서 잘하는데.”

맞는 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같이하던 차정한은 점점 내가 없이도 알아서 해내는 것들이 생겨났다. 데뷔 초에는 매번 같이 촬영장을 다녔었는데 2년 전부터는 나까지 밤새고 고생하는 게 싫다며, 정말 같이 가야 할 스케줄만 같이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를 배려해서 내린 결정이지만, 처음에는 그게 조금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내년쯤에는 그럼 나 진짜 필요 없어지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응?”

혼자 중얼댄 말이라 내가 뭐라고 했는지 나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는 차정한의 얼굴을 보니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필요 없어진다니.”

“아… 내가 그랬어? 그냥 나도 모르게….”

“지유현. 너 그런 생각 하면서 나랑 있는 거야?”

“아니야. 정한아. 그런 게 아니라….”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에 차정한은 그쪽을 흘끗 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해.”

커피를 들고 올라온 직원을 본 차정한이 다시 내게 등을 돌리고 의자에 앉았다. 직원은 진한 색의 커피를 차정한에게 주고, 그것보다 훨씬 연해 보리차 같아 보이는 커피를 내게 주었다.

“…….”

“…….”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밝은 목소리로 말한 직원이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또다시 2층에는 나와 차정한만이 남았다. 나는 뭐라도 말하고 싶어 차정한을 바라보았지만, 차정한은 거울을 통해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내가 보는 것을 알면서도 봐주지 않았다.

“…….”

명백한 나의 잘못이었다. 나도 모르게 불안해하던 생각이 그렇게 정확히 튀어나왔을 줄은 정말 몰랐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정한아.”

“…….”

“…….”

“나중에.”

“…응.”

내내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차정한의 목소리를 들으니 놀라서 굳어 있던 심장이 조금 움직였다. 결국,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차정한뿐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나를 차정한은 너무나도 쉽게 움직였다.

“…….”

보리차 같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뭉쳐 있던 숨을 내쉬었다. 문득 혼잣말처럼 나온 말이 차정한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고 몸이 떨렸다. 소리 낸 게 사랑이 아니라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무너지는 시야를 가둔 채 겨우 안도했다.

#09

?

?

촬영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차정한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에 샵에서 현장으로 같이 가는 직원이 있어 사적인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 일 외에 공적인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다.

차정한은 어릴 때도 그랬었다. 내가 끝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을 할 때마다 감추지 않고 서운해했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며 내게 화를 내고, 애원했다.

‘졸업하면 지금처럼 집에 자주 다니고 그러지는 못하겠지? 같은 대학 가도 같은 과 들어가는 건 어려우니까….’

그때 차정한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은 졸업이었다. 그때 우리가 속한 고등학교 생활이 끝난다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아 했다. 나와 지금처럼 지낼 수 없는 것도, 어른이 되는 것도 전부 원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 끝을 소리 낸 것은 명백한 나의 잘못이었다. 요즘 나는 차정한에게 자주 잘못을 했다. 몇 번 더 이러면 차정한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눈치가 빠른 그는 나의 빈틈을 파고들어 깊게 숨겨둔 감정을 꺼내 이게 뭐냐고 물을 것이었다. 그렇게 들켜 강제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내가 생각해도 요즘 정신이 없고, 너무 쉽게 흔들리며… 차정한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너무 쉽게 휩쓸렸다. 이러다가 들키는 건 순식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동윤 형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밖을 보니 주차장이었다. 나는 얼른 내려 차정한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문을 열어 주려고 했는데 차정한은 알아서 문을 열고 혼자 내려 턱에 내려가 있던 마스크를 올려 썼다. 그리고 옆을 한 번 보더니 내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내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바로 차가 한 대 지나갔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차 오는지나 봐.”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

“정한아….”

“이름 부르지 마. 마음 약해지게.”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시선으로 나를 본 차정한이 차에서 내린 동윤 형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그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안 그래도 서필준과 촬영을 해서 기분이 별로일 텐데 내가 거기에 더 얹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세트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한 서필준이 웃으며 다가와 차정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타인이 마음대로 몸에 손을 대거나 치며 말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슬쩍 살펴보니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차정한! 오랜만이다! 요즘 너무 잘나가, 혼자 그렇게 잘나가면 어떡해. 좀 나눠서 하고 그러자. 다른 배우 다 굶어 죽으라고!”

대꾸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마스크를 벗은 차정한이 애써 감정을 누르며 서필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저도 좀 쉬고 싶은데 쉬면 도태된다는 얘기를 하도 옆에서 해 주셔서 할 수 있을 때 하고 있습니다.”

“또 좋은 말씀들 해 주시네. 그래, 물 들어올 때 열심히 해야지. 물 금방 빠져. 바닷물도 꼬박꼬박 빠지는데 그 자연에 비하면 사람은 또 미물이잖아?”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물 들어올 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저 의상 좀 입고 오겠습니다.”

차정한이 예의 바르게 묵례하고 옆을 지나자 서필준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아마도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에서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이러다가 싸움이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인 때 안 그래도 힘들었던 차정한을 대놓고 무시하고 어쩌다 들어온 물에 빠져 죽을 얼굴을 하고 있다며 웃던 게 떠올라 속이 다 시원했다.

“유현아.”

“응.”

“한 대만 패면 안 돼?”

“…안 돼.”

“너 없었으면 이미 실검 올랐다.”

“잘 참았어. 다 참은 건 아니지만.”

“인내심이 사람이 되면 내가 될걸.”

현장 스태프들과 인사를 하며 준비된 대기실로 들어간 차정한이 준비된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가을밤> 감독님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같이 출연했던 배우 둘이 모여 감독님의 신작 영화를 홍보하는 자리였다. 길게 이어질 촬영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한아. 일만 한다고 생각해. 그냥 말 걸면 모범답안으로만 말하고, 깊게 생각하지 마. 오늘 길게 할 촬영도 아니고, 금방 끝날 거니까.”

“알았어. 너 어디 가지 말고 눈앞에 있어. 나 너 봐야 참아지는 거 알지.”

“알지. 감독님 옆에 있을게. 걱정하지 마.”

“걱정은 네가 해야지.”

“응?”

“집에 가서 너 죽었어. 내가 지금 말 섞어 주니까 다 풀린 것 같지.”

“아…….”

“해명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오늘 진짜 그냥 안 넘어가.”

다 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 이야기하는 걸 보니 벌써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차정한 기분이 다 풀릴지 생각하느라 여러 말들이 마구 머릿속을 건드리며 돌아다녔다.

“유현 씨, 팬클럽에서 간식 보냈다는 게 와서 그것 좀 받아올게. 정한이 좀 봐주고,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내가 서필준 매니저한테도 서필준 잘 감시하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잘 넘어갈 거야. 정한이 그래도 좀 컸잖아.”

“그럼요. 제가 잘할게요. 다녀오세요.”

동윤 형을 따라 대기실에서 나가 저만큼 앞에 가고 있는 차정한을 향해 달렸다. 물리적 거리는 참 좁히기가 쉬웠다. 이렇게 내가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 다른 거리도 쉽게 좁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히 이제는 감정의 거리를 좁히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정한 씨, 필준 씨 앞에 의자에 앉아 주시면 됩니다. 아, 정한 씨가 오른쪽에 앉을게요. 저희가 그림을 다 짜 놔서요. 네, 좋습니다.”

나는 감독님 뒤에서 화면에 보이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불편한 얼굴을 감추고, 누구나 좋아하는 다정하고 설레는 웃음을 띤 얼굴을 보니 그게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좋았다. 아마 팬분들이 본다면 오늘은 다정한이 됐다고 좋아할 것이었다.

팬들은 차정한의 이름을 따서 부드럽고 다정한 날에는 ‘다정한’이라고 부르고, 차갑고 섹시한 컨셉일 때는 ‘무정한’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앞머리를 내리는 날에는 ‘순정한’, 공식 홈페이지에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않으면 ‘매정한’이라고도 불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밌었던 건 시상식 때 완벽한 슈트를 입은 차정한의 굴욕 하나 없는 기사 사진을 보고 팬들과 대중들을 죽이려고 작정했다고, 오늘은 ‘작정한’이라고 도배가 됐던 것이었다. 솔직히 팬들은 물론이고 대중들 모두 센스가 대단해서 회사에서 관리하는 차정한 오피셜 페이지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오늘은 다정한에 순정한이라 팬들이 엄청 좋아할 것 같았다. 오피셜 SNS에 올라갈 사진을 위해 소속사에서 나온 포토그래퍼가 차정한의 주변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차정한은 자신을 향한 카메라와 시선들을 익숙하게 견디며 전달받은 대본을 읽었다.

“프롬프터에 다 올라갈 거니까 자연스럽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잘만 해 주시면 한 번에도 끝날 수 있는 거니까요. 자, 준비되셨으면 시작하겠습니다. 레디, 액션!”

카메라에 불이 켜진 순간 서필준이 능청스럽게 화면을 보며 인사하고, 차정한을 향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조금 전까지 무표정하게 불편한 기색을 잔뜩 묻히고 있던 사람의 얼굴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건 차정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듣기 좋은 다정하고 적당히 낮은 목소리가 울리자 뒤에서 한 스태프가 목소리가 너무 좋다고 작게 말했다. 차정한의 칭찬이 듣기 좋아 내가 다 기분이 좋아졌다.

“자, 컷. 말이 지금 너무 빠른 것 같아요. 조금만 천천히 다시 가겠습니다.”

컷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차정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보다가 다시 시작된 촬영에 아까보다 조금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끝나면 당연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좋겠지만, 20분 정도 되는 분량을 촬영하려니 자꾸만 문제가 생겼다. 서필준이 자꾸만 말을 버벅이고 같은 부분만 다섯 번 이상 엔지를 내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알게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 온 건지 옆으로 온 동윤 형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촬영 길어지겠네. 별거 아닌 촬영에까지 왜 간식을 보내 주나 했더니 팬들이 역시 뭘 알아. 촬영 길어질 걸 딱 아는 거야.”

“그러게요.”

동윤 형의 말처럼 촬영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다. 짤막하게 부분부분 나누어 촬영을 하는데도 매번 서필준이 엔지를 냈다. 프롬프터에 있는 대사를 생동감 있게 읽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만 혀가 꼬여 이상한 발음을 해 재촬영에 재촬영을 거듭했다.

“자, 마지막 세 파트 남았는데요. 30분 정도 휴식하고 진행하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 쭉 이어진 촬영에 도저히 안 되겠는지 감독이 휴식을 선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정한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본을 구기듯 말아 든 채 대기실로 향했다. 동윤 형이 스태프들에게 차정한의 팬분들이 보내 준 간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얼른 차정한을 향해 달렸다.

“아, 저 미친 새끼가 진짜 일부러 저러지.”

대기실로 들어간 차정한이 대본을 테이블 위로 아무렇게나 던지듯 놓으며 말하는 것에 얼른 문을 닫고 차정한을 앉혔다.

“마지막 부분은 어려운 부분도 아니고 마무리라 금방 끝날 거야. 조금만 더 참자.”

“진짜 그냥 나 실검 오르면 안 돼? 못 참겠어. 저 새끼 일부러 실실 웃으면서 지금 나 엿 먹이려고 저러는 거 아냐. 혀 잘라 먹고 왔어? 발음이 새도 저따위로 새는 게 말이 되냐고, 지금.”

“아까 스태프들도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냐고 그랬어. 다 이상하게 생각해. 저쪽도 매니저가 다 들었고, 전달할 거야. 그러면 마지막에는 안 그럴 거야.”

“진짜 씨발….”

얼른 시원한 물을 주고, ‘차정한 배우님’이라고 적힌 간식 케이스를 열었다. 아까 보니 다른 샌드위치는 평범한 샌드위치였는데 차정한 것에는 특별히 랍스터 샌드위치와 여러 과일이 잔뜩 들어 있었다. 차정한에게 뭐든 가장 좋은 걸 해 주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나보다도 잘 챙겨 주는 팬분들이 고마웠다.

“이것 좀 먹어. 너 좋아하는 랍스터 샌드위치야. 여기 과일도 있고.”

“나중에. 지금은 생각 없어.”

“그러면 여기 과일주스도 왔는데, 이거라도 마셔. 조명도 세고, 힘들어서 안 돼. 점심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알았어. 너는? 넌 안 먹어? 샌드위치 어디 있어.”

“매니저 것도 여기 있어.”

“먹어. 계속 서 있고 힘들 거 아냐.”

“나도 이따 먹을게. 배 별로 안 고파.”

“그래, 그럼. 이따 가면서 차에서 먹어. 한 시간이면 이 짓도 끝나겠지.”

차정한은 의자 뒤로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내내 조명과 카메라 앞에서 허리를 세우고 앉아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무척 힘들었을 것이었다.

“…….”

피곤보다는 기분이 안 좋아 예민해진 얼굴을 보니 사고 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하면서도 날카로워진 분위기가 특별하게 느껴져 자꾸 시선이 갔다. 아무리 조금씩 깎아 공을 들여 조각해도 이런 얼굴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