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정한의 얼굴은 다정하게 보면 다정하고, 냉정하게 보면 냉정해 보이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역할을 맡든 상대를 압도하고 완전히 사로잡았다. 전작에서는 다정하고 설레는 순정남을 연기하다가 며칠 뒤 개봉한 영화에서는 일 외에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야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냉혈한으로 변신해도 사람들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완전히 다른 캐릭터라고 생각하며 몰입했다. 차정한의 얼굴에는 여러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 좋다는 감독님들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내가 다 좋아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앞으로는 저 얼굴에 어떤 이야기가 더 담길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정한의 이야기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내가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사랑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대로 오래 머물고 싶었다.
“…….”
친구라는 아주 좋은 이름으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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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매니저한테 한 소리를 들은 건지 아니면 정신을 차린 건지 서필준은 마지막 남은 세 파트의 촬영을 엔지 한 번 내지 않고 마쳤다.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다는 걸 생각하니 화가 났지만, 괜히 건드려 좋을 게 없어 서둘러 정리하고 촬영장을 떠났다. 우리가 굳이 난리를 치지 않아도 오늘 서필준의 못난 행동을 본 많은 스태프 사이에서 말이 나올 것이었다.
샵에서 같이 촬영장으로 출장 나갔던 직원들을 내려주고, 한층 더 적막해진 분위기에 잠긴 채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면 아까 내가 한 말에 대한 이야기, 혹은 해명을 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자꾸 입술이 말랐다. 얼버무려 상황을 모면하고 피하는 재주가 없어 솔직하게 말을 하기는 하겠지만,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차정한이 나 때문에 상처 받을까 그게 가장 걱정이 되었다.
“정한아 오늘 고생 많았다. 그래도 오늘 보니 우리 차정한 이제 중학교 정도는 들어간 것 같아서 형이 마음이 놓이더라. 축하한다! 초딩 졸업!”
“자꾸 그러면 겨우 들어간 중학교 자퇴하는 수가 있어.”
“야, 무서운 소리 좀 진지하게 하지 마. 오늘 진짜 고생 많았고, 들어가서 쉬어. 내일은 너 쉬라고 스케줄 안 잡았고, 모레 올게. 유현 씨도 오늘 수고 많았어. 푹 쉬어.”
차정한과 나를 보고 인사한 동윤 형이 아까 먹지 않은 간식이 든 종이봉투를 내게 주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리는 차정한과 함께 얼른 주차장을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 그래도 여기 오르면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과 마주칠 걱정은 없기 때문이었다.
“배고프지. 가서 이거 먹고 쉬어. 아니면 뭐 다른 것도 더 해 줄까?”
“그거면 됐어.”
“…정한아, 아까는….”
“거의 다 왔으니까 기다려. 할 말 없어서 안 하는 거 아니야.”
“…….”
그의 말대로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차정한을 먼저 내리게 하고 뒤따라 내려 그의 앞으로 가서 문을 열자 차정한이 먼저 들어가라는 듯 내 허리를 부드럽게 밀었다. 허리에 손이 닿는 순간 놀라 온몸에 힘이 확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차정한은 마스크를 벗어 아무렇게나 식탁 위에 놓고,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마개를 여는 단순한 행동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다 보여서 걱정과 긴장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차가운 물을 단숨에 한 병 다 비운 그가 페트병을 버리고,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서 있어.”
“죄지은 거 맞지…. 내가 너 불편하게 했잖아.”
“진짜 멀게 느껴지는 말은 다 하네.”
“…….”
“이리 와. 좀 앉자.”
내 앞으로 지나며 손을 뻗은 차정한이 그대로 내 팔을 잡아서 거실로 이끌었다. 나는 하릴없이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 중에도 차정한이 잡은 팔이 화끈댔다.
“앉아. 서 있을 거야?”
소파에 먼저 앉은 차정한을 보다가 그의 말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떨어져 앉는 나를 보고 짧게 숨을 내뱉은 차정한이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숨기는 법도 모르고, 안에 담고 있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대로 조금도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게 물었다.
“너 요즘 무슨 생각 해?”
“응?”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까 그런 말이 혼잣말로 너도 모르게 나와. 나 버리고 어디 갈 생각 하는 거야?”
“나는… 정한아. 내 말 좀 들어 줘.”
“알았어. 해.”
버림이라고 말하는 건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요즘 종종 차정한과 나의 끝을 떠올렸다. 그리고 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기도 했다. 변덕이 죽을 끓고, 마음이 나도 어쩌지 못할 만큼 혼란스럽기도 했다. 처음 이러는 건 아니었다. 차정한과 그런 사이가 맞든 아니든 특별한 사이처럼 집에 찾아오는 여자와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매번 그랬다.
“네가 나 없어도 이제 다 잘하잖아. 전에는 촬영도 다 같이 다니고, 네가 어디를 가든 다 같이 다녔었는데… 지금은 내가 안 가도 너 충분히 다 잘하고 그러니까…. 내년쯤에는 나 없어도 너 다 잘할 것 같아서 나온 말이야.”
“유현이 네가 언제나 당연하게 있으니까 믿고 잘하는 거야. 너 힘드니까 힘든 스케줄에는 나오지 말라고 그러는 거고. 집에 오면 너 있고, 쉬는 날에도 전처럼 너랑 시간 보내고 그럴 거 아니까, 내가 유일하게 믿고, 기대고, 편하게 볼 수 있는 네가 거기 있으니까 내가 밖에서도 잘하는 거야. 너 그거 몰라?”
“…알아.”
“아는데 왜 그래. 너 그럴 때마다 솔직히 무서워. 갑자기 관둔다고 할까 봐.”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만큼 심각하게 말한 거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 봐. 그만두고 다른 일 하고 싶어? 나도 알아. 너도 네 인생 있다는 거. 나 만나서 10년 넘게 고생하는 것도 다 알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다 말했으면 좋겠어. 네가 진짜 네 인생 살고 싶다고 하면…. 나도 생각해 볼게.”
나쁜 말도 아니고 다 나를 위해서, 내 입장에서 생각해 하는 말인데 너무 뾰족하게 느껴졌다. 한 번도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차정한을 만나 10년이 넘게 고생했다는 생각 역시 한 적 없었다. 내 인생이 차정한이니까. 나는 13년 동안 차정한과 함께할 수 있어 무척 좋고, 행복했다. 불쑥 혼자 자라난 내 사랑은 내가 책임질 일이기에 그것 때문에 아파도 차정한과의 이런 일상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정한아.”
“…….”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그런 말 들으면 무서워.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내 인생이랑 너랑 일하는 지금을 분리해서 생각한 적도 없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네가 끝을 무서워하는 거 알아. 그래서 사람들이랑 정도 안 붙이고, 깊은 관계로 가는 거 싫어하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나도 그래. 나도 끝나는 거 무서워. 그게 너라면… 더 그래. 13년 동안 정말 거의 내내 같이 지냈는데 나라고 왜 안 그러겠어.”
“…….”
“나한테도 소중해. 나한테도 간절하고, 나도 너한테 의지해. 13년이나 지났잖아. 넌 내 일부야. 네가 다치면 나도 다치고,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전부라고 말할 수 없어 일부라고 거짓말을 했다. 차정한이 없으면 내 마음이 무너지고, 나 혼자 쌓아 올린 감정들이 전부 무너져 아주 많이 다칠 거라는 말도 할 수가 없어 속으로 삼키고 또 삼켰다.
“아까 그 말은 미안해. 너 불안하게 하려고 한 말 아니야….”
“…….”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누르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진심을 말했는데 이래도 서운한 마음이 안 풀리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차정한을 보니 나를 물끄러미 보던 차정한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왜 웃어.”
“몰라. 난 네가 속마음 말하면 괜히 좋더라. 뭐… 소중하고 간절하고 거기에 의지까지 한다는데 봐 줘야지.”
“그걸 말해야 알아? 너랑 나랑 13년이야. 내 눈만 봐도 다 안다며.”
“알긴 아는데 네가 솔직히 표현에 박하잖아. 난 너한테 다 말하는데.”
“그래서 내 입으로 들어서 좋아?”
“좋지. 그럼 말하는 김에 하나 더.”
“뭔데?”
무슨 말을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조금 긴장이 됐다. 내내 숨긴다고 철저하게 숨겼는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무언가를 차정한이 본 건 아닐까 싶어 초조한 마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랑 김원우랑 누가 더 좋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냥 빨리 말해.”
“동윤 형한테 전화해야겠다. 너 중학교 자퇴하고 다시 초등학교 들어갔다고.”
그런 쪽 질문이 아니라 다행이기는 한데 또 어이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정한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도대체 이 질문이 뭐라고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솔직히 조금 귀엽기도 했다.
“대답하고 가. 나는 네가 물으면 다 너라고 하잖아. 어려운 대답도 아닌데. 뭐야, 너한테는 지금 고민까지 해야 할 만큼 어려운…!”
“네가 더 좋아.”
대답을 들은 차정한이 그제야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웃음을 씩 보이며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를 따라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척 둘렀다.
“이제 저녁 먹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질문의 답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차정한을 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내가 차정한을 웃게 만든다는 게 좋았다. 별것도 아니고, 정말 너무나 당연한 확인을 받고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꼭 열일곱의 차정한을 보는 것 같았다.
아까 촬영장에서 먹지 않고 챙겨 온 것들을 꺼내 식탁 위로 올려 두었다. 나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아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았지만, 간식용으로 들어온 거라 아무래도 한 끼를 대신하기에는 양이 적어 보였다.
“정말 이것만 먹어도 되겠어?”
“일단 이거 먹고 부족하면 이따 다른 거 해 먹지 뭐.”
“알았어. 일단 이거… 아!”
“왜 그래, 다쳤어?”
샌드위치와 과일이 든 플라스틱 포장 용기를 열다가 날카롭게 찢어진 끝부분에 손끝을 찔렸다. 아픈 것보다는 순간 놀라 나온 소리에 차정한이 놀란 얼굴로 얼른 내 손을 잡아 확인했다. 손끝에 피가 살짝 나와 맺힌 것을 본 차정한이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마주한 그 걱정 가득한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그 날과 똑같은 그의 얼굴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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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이사 가서 보지 못했던 중학교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어디가 부러지고 피가 나는 아주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는 아니었다.
차 주인이 구급차를 부르고,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차정한과 만나기로 했는데 꼼짝없이 응급실로 실려 가서 치료를 받느라 연락하지 못했다. 인대가 늘어나기도 하고, 뼈에도 조금 금이 가서 깁스를 하고 절대 팔을 쓰면 안 된다는 말에 엄마와 같이 집에 오는데, 집 앞에 선 차정한과 마주했다. 차정한은 깁스를 한 내 팔을 보고 하얗게 질려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심하게 걱정할 정도도 아니고, 깁스만 잘하고 있으면 괜찮아진다고 말을 했는데도 차정한은 어쩔 줄을 모르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친구가 조금 다쳤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을 다해서 걱정하는 차정한에게 큰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
차정한은 그 뒤로 매일 우리 집에 찾아와 내가 잠들기 전까지 내 옆에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었다. 물도 가져다주고, 심심해 책을 보려고 하면 그 책도 대신 들어 주거나 읽어 주었다. 휴가를 내고 집에 있겠다는 부모님을 말린 것도 차정한이었다. 자신이 와서 하면 되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엄마와 아빠를 오히려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그렇게 모든 수발을 다 받을 만큼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차정한은 내가 무엇도 혼자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른손에 깁스를 해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밥은 왼손으로 먹어도 되는데 밥도 먹여 주고, 컵도 들어 내 입에 대주었다. 과일도 먹기 좋게 잘라 하나씩 다 먹여 주고, 과자도 입에 넣어주었다. 샤워하는 것까지 도와준다고 해서 기겁을 하고 밀어냈다. 차정한은 그렇게 2주 동안 매일 자신의 시간은 조금도 쓰지 않고 내 옆에만 있었다.
‘나 이제 진짜 괜찮아. 병원에서도 좋아졌다고 했고. 너 이렇게 우리 집에만 와도 돼? 나 때문에 너만 고생하고… 이제 이렇게 안 와도 돼. 늦잠도 좀 자고 그래.’
차정한이 와서 시간을 보내 주는 덕분에 나는 즐겁고 심심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내가 차정한의 모든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쉴 수 있는 방학에 꼼짝없이 내 옆에서 이런 수발이나 들고 있다니… 조금 억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차정한은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에 나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집에 있어도 너 걱정돼서 아무것도 못 해. 네 생각밖에 안 나.’
진지하게 걱정이 묻은 눈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뭐 그렇게 걱정할 일도 아니라고 웃으며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수도 없고 심장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쿵 떨어졌다.
‘손톱 잘라야겠다.’
내 손을 잡아 길어진 손톱을 본 차정한은 침대로 올라와 아무 말도 못 하는 내 앞에 앉은 채 손톱을 깎아 주었다. 조금 자르고 아픈지 묻고, 또 조금 자르고 혹시 아픈지 물으며 나를 보는 얼굴에… 나는 고개를 저을 뿐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정한이 움직일 때마다, 나를 볼 때마다 보이는 그 모든 장면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넌 손도 예쁘고, 손톱까지 예쁘네.’
손톱이 조금씩 잘려 나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내 손가락을 잡고 말하는 차정한에 꼭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바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정수리만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30분도 넘게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손톱을 잘랐다. 그리고 손을 잡아 환히 웃으며 내 앞에 들어 보여 주었다.
‘이것 봐. 완전 잘했지.’
그 웃는 얼굴에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심장이 다시 쿵 떨어졌다. 솔직히 이게 무슨 기분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동안 차정한을 보며 느낀 것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고, 차정한이 닿고, 담기는 모든 곳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부끄럽고, 손이 닿아 있는 것도… 어쩐지 떨려 자꾸만 손을 빼서 감추고 싶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부모님은 차정한에게 저녁을 먹고 자고 가라 말씀하셨다. 매일 집에 가기 싫다고 말하던 차정한은 바로 그러겠다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고 간 적도 있었고, 저녁을 먹고 간 적도 많았기에 나는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조금도 자지 못했다. 침대에서 자라니까 됐다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차정한의 숨소리가 너무나도 가깝게 들리는 것 같아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웃는 얼굴이 아른거리고, 내 걱정으로 아무것도 못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내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 주던 것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손끝에 차정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왜 이러지.’
생각과 실제로 들리는 차정한의 숨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내 심장 위로 손을 올린 채 그 이례적인 박동에 멍하니 캄캄한 천장만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사랑에 빠진 밤은 참 길고 두근댔다.
차정한은 그 뒤로도 매일 우리 집으로 와 나와 함께 있었다. 오늘은 맛있는 것을 해 주겠다며 재료를 준비해 온 차정한은 볶음밥을 만들기도 하고,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떡볶이를 만들기도 했다.
차정한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볶음밥은 너무 달아 한 입도 먹기 힘들었고, 떡볶이는 너무 매워서 눈물이 다 났다. 그래도 나는 그 떡볶이를 계속 먹으며 맵다는 이유로 줄줄 울었다. 맛없고 매운 거 먹지 말라고 가서 맛있는 걸 사 오겠다고 자기가 만든 떡볶이를 들고 방에서 나가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계속 울었다. 팔이 거의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팔이 나으면 더는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싫었다. 부러졌으면 더 오래 아팠을 텐데 하는 미친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나 싶어 곤란하고 혼란한 그 순간에도 차정한의 다정함은 나의 알 수 없는 마음과 계속 마찰했다.
그리고 그 사소한 마찰은 결국, 발화했다. 열일곱 여름의 어느 날. 그리고 13년이 지난 서른의 오늘. 나는 지금도 차정한의 다정함에 매일 흔들리고, 발화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세세하게 하나씩 따지자면 달라진 게 있기는 했다. 고등학생이던 차정한은 유명한 연예인이 됐고, 대학에 가서 그냥 무사히 졸업하고 취직해 평범하게 살 것 같던 나는 차정한의 곁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며, 친구에게 이럴 리가 없다고, 그냥 잠깐 이러다가 말 거라는 그 감정은 13년째 열을 더해 오늘 가장 높은 온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를 다 합쳐도 우리는 감정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나에게 차정한은 사랑이고, 차정한에게 나는 친구였다. 그리고 겁이 많은 나는 오늘도 차정한을 배신하지 않으려 마음 위로 떠오르는 사랑을 숨기고, 차정한은 숨긴 그 사랑이 떠오르는 것도 모른 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내게 다정함을 흘려 넣었다.
“괜찮아? 병원 가자.”
“…뭐 이 정도로 병원을 가. 약 바르면 돼. 내일이면 멀쩡해져.”
그리고 너는 나를 걱정하고, 나는 13년이 지난 오늘도 너의 그 나를 걱정하는 얼굴에 몇 번째인지 잊을 만큼 반복된 사랑에 또 빠졌다.
* * *
모처럼 푹 쉴 수 있는 날이라 차정한은 점심 때쯤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새벽까지 영화를 같이 보다 잠들어서 더 늦게 일어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나와 조금 놀랐다.
“더 자지.”
“깨서 그냥 나왔어. 지금 더 자면 저녁때나 일어날 것 같아서.”
몸을 쭉 펴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차정한이 소파에 앉아 흐트러지듯 기대었다.
“유현아.”
“응?”
“저번에 너 옷 사러 갔던 게 언제지?”
“여름이었어. 8월 초였던 것 같아.”
“벌써 석 달이나 지났네. 오늘 백화점 가자. 너 겨울옷 사야지.”
“나 겨울옷 많아. 작년에 사서 한 번도 못 입은 것도 있고.”
“작년은 작년이고 올해는 올해지. 폰이 어디 있지….”
소파에서 일어난 차정한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보며 다시 나왔다. 괜찮다고 말을 다시 했지만, 차정한은 내 말은 듣지 않고 어디인가로 전화를 걸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오후에 쇼핑 좀 했으면 해서요. 네. 저 말고… 네, 맞습니다. 그 친구요. 그때랑 사이즈는 비슷할 겁니다. 네. 네, 그럼 네 시까지 가겠습니다.”
악취미라고 하기에는 내게도 마이너스인 일은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차정한에게는 이상한 취미가 있었다. 백화점에 나를 데리고 계절별로 가서 옷을 잔뜩 입히고 본 다음 전부 사들이는 것이었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옷이 필요하면 직접 백화점에 가서 적당한 것으로 사면 되는데 차정한은 굳이 나를 자신을 담당하는 백화점 퍼스널 쇼퍼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가격의 옷들을 마구 사들였다.
“정한아, 나 진짜 옷 많은데….”
“더 많아지면 좋지.”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거기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오고 하는 거 어색해.”
“몇 년을 하는데도 아직 적응이 안 돼?”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연예인 친구면 그런 것도 누리고 사는 거야. 가서 거기 위에서 점심 먹고 가자. 너 거기 디저트 좋아하잖아.”
“…알았어.”
거절도 못 하게 씩 웃은 차정한이 씻고 온다며 욕실로 향했다. 차정한 말처럼 계절별로 백화점을 찾은 것도 벌써 3년째였다. 처음에는 정말 어색하고 낯설어 차정한이 있는 밖으로 걸음을 하는 것조차 민망했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쇼핑 방식 자체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퍼스널쇼퍼가 추천해 주는 스타일로 입고 나오면 뭐든 다 잘 어울린다고 좋아하는 차정한을 보는 게 좋기도 했다. 그래서 백화점에 가기 전에는 그냥 차정한의 웃는 얼굴을 마음껏 보러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색함보다 설렘이 더 크게 찾아왔다.
준비를 하고 한 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차정한은 직접 운전을 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VVIP구역으로 가 주차를 맡기고, VVIP 전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자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VVIP 담당자가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오랜만에 나오셨습니다.”
“네.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잘 나오셨습니다. 오늘 편안히 쇼핑 즐기실 수 있도록 모시겠습니다. 쇼핑 예약은 4시로 전달받았습니다.”
“네. 그전에 식사부터 하고 싶은데요.”
“늘 가시는 레스토랑으로 모실까요?”
“네.”
“네, 알겠습니다. 먼저 편안히 식사하실 수 있도록 모시겠습니다.”
차정한은 이 백화점의 오랜 VVIP였다. 백화점 모델과 면세점 모델까지 독식할 만큼 좋은 관계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쓰는 금액도 커서 한 번 백화점에 나올 때마다 차정한 전용 담당자가 나와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를 해 주었다.
처음에는 이런 대접을 나까지 받는다는 게 몹시 어색하고 자리를 피하고 싶을 만큼 낯설었지만, 이것도 몇 년을 보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져 지금은 안내를 받아 다닐 수 있을 만큼은 적응한 상태였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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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거의 건물 꼭대기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한 번에 올라가 안내를 받았다. 서빙하는 직원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프라이빗한 공간에 앉아 밖을 보니 전망대에 올라온 것처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네가 말해서 나도 11월인 거 알았어. 올해 진짜 바빴잖아.”
“여름에 드라마 끝나고 그런 촬영할 일이 없어 그런가 밴 타고 주차장에서 주차장만 다니다 보니까 계절 변하는 것도 솔직히 모르겠어. 몇 월인지 생각할 일도 없고. 요일은 뭐 잊은 지 오래됐고.”
물을 한 모금 마신 차정한이 창밖으로 두었던 시선을 내게로 움직였다.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은 늘 감정을 뭉쳐 크게 만들었다.
“내가 왜 너 데리고 여기 오는 게 좋은지 알아?”
“왜 좋은데?”
“너랑 같이 백화점 네 번 오면 한 해가 가거든. 너 보면서 시간 가는 걸 알아. 그냥 문득 깨닫고 아는 것보다는 이렇게 아는 게 더 좋더라고.”
“…….”
“물론 지유현 긴장해서 로봇처럼 나오는 거 보는 재미도 있고.”
“네가 내 상황이어도 그럴 수밖에 없을걸.”
“난 수십, 수백 명 앞에서 울고, 웃고 다 하거든.”
“…….”
“졌지.”
“졌어.”
장난기 묻은 표정으로 웃은 차정한이 턱을 괴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고정된 시선에 계속 바라보고 싶기도 하고, 시선을 피해 숨고 싶기도 했다. 나는 늘 차정한을 보면 가까워지고 싶고 또 멀어지고 싶은, 같이 존재할 수 없는 감정들을 동시에 느꼈다.
“유현이 너희 부모님은 얼마나 좋으실까. 네가 아들이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살면서 너 같은 애 진짜 처음 봤어. 착하고 순하고 사고 한번 안 치고, 공부도 잘해, 욕도 안 해, 예의도 바르고 거기에 얼굴까지 되잖아. 너 같은 아들 있으면 진짜 열 명도 키우겠다.”
“…네가 그냥 날 너무 좋게 보는 거야. 욕은 안 해도 속으로는 다 하고, 그냥 사고 치고 싶을 때도 있고, 착한 척할 때도 있어.”
“그래? 언제 그런데.”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듯 차정한은 궁금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기다렸다. 솔직히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라 차정한의 기대만큼 재밌는 이야기는 할 게 없었다.
“어제처럼 서필준이 일부러 그러면 너 힘드니까 내가 가서 그러지 말라고 확 사고 치고 엎어 버리고 싶기도 하고, 누가 말도 안 되는 걸로 너 욕하는 댓글 달면 나도 가서 그 사람 앞에서 욕하고 싶기도 해. 공항이나 행사장에서 사람들이 너 밀고, 잡고 막 그러면 나도 같이 확 밀고 싶고, 하지 말라고 뭐라고 하고 싶은데 나 때문에 괜히 기사 날까 봐 착한 척 그냥 표정 관리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