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해 피곤했는지 씻고 바로 침실로 들어간 차정한을 보다가 나도 내가 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 자는 시간보다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냥 오늘은 조금 누워 떠오르는 것들을 피하지 않고 생각하고 싶었다.
조용하고 완벽한 어둠 안에서 차정한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누나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조금도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차정한을 떠올리니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나를 데리러 왔다는 그 말도, 쉬라면서 내 머리칼을 쓰다듬던 그 손길도 전부 다 꽉 조여든 마음 안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고인 숨을 뱉어냈다. 숨과 함께 눈동자가 축축해진 느낌이 들었다.
“…….”
늘 생각하는 거지만 나는 차정한의 다정함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또 너무 아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다가서지도 못하면서 그만두지도 못하는 나의 모순적 사랑이었다.
* * *
오전 스케줄을 마치고 들어온 차정한과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얼마 전 녹화한 연예프로그램 인터뷰를 기다렸다. 그냥 보는 건 심심할 것 같아 맥주와 멜론, 체리 같은 것들을 가져다 두었다. 우리는 맥주를 들고 가볍게 건배했다. 차정한은 소파 뒤로 기대어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얼굴로 무심히 화면을 봤지만, 나는 내가 보지 못한 인터뷰라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다.
“뻔한 질문만 하더라. 그래서 저런 인터뷰는 재미없어.”
“새로운 질문을 하기가 좀 그렇기는 하지. 작품 얘기면 몰라도.”
“그러니까 분량 채우고, 시청률 챙기려고 광고 현장에는 왜 오냐고. 광고 얘기할 것도 없고, 오랜만에 만난다고 전에 물은 거 묻고 또 묻고.”
“그래도 사람들이 너 인터뷰하는 거 좋아하잖아. 대답 시원시원하게 한다고. 어! 나온다.”
차정한이 말한 것처럼 질문들이 다 어디에선가 물었던 것 같은 진부한 것들이기는 했다. 광고 촬영은 즐거운지, 차기작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지, 영화와 드라마 중 어떤 게 더 매력이 있는지 차례대로 이어지는 질문에 차정한은 지금 옆에서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듯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면서도 전혀 논란이 되지 않는 현명한 답을 꺼냈다.
<자, 그럼 둘 중 하나 고르는 둘 중에 난 이거! 시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여름, 겨울! 하면 정한 씨가!>
<여름.>
<네! 그렇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최대한 깊게 생각 마시고 바로바로 본능적으로 우리 차정한 씨의 있는 그대로의 답을 골라 주시면 됩니다. 자, 갑니다! 맥주, 소주!>
<소주.>
<아메리카노! 라떼!>
<아메리카노.>
<상처가 되더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스타일! 상처가 되지 않게 돌려서 말하는 스타일!>
<상처가 되더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스타일.>
<산, 바다!>
<바다.>
<다정한, 무정한!>
<다정한.>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정, 사랑!>
<우정.>
차정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정이라 말하고 리포터를 바라보았다. 우정이라고 말한 게 고백도 아닌데, 어쩐지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괜히 쿠션을 꽉 끌어안았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머, 우정을 너무 단호하게! 정말 이것보다 단호할 수는 없다! 싶게 선택을 하셨는데요. 다시 한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우정! 사랑!>
<우정.>
<나중에 이 인터뷰를 미래의 차정한 씨 운명의 상대가 보신다고 해도 괜찮으신가요? 너무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요.>
너무 단호한 차정한의 대답에 오히려 리포터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상황을 재밌게 포장하기 위한 알록달록한 자막들이 화면 아래를 뒤덮었다.
<저한테는 저보다 중요한 친구가 있거든요. 저보다도 그 친구가 더 중요한데 우정을 고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한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전 왜 차정한 씨 친구가 아니죠? 너무 친구분이 부럽습니다.>
친구분과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알록달록한 자막과 함께 리포터가 인터뷰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맥주를 다 마신 차정한이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거 기록 이제 계속 남아서… 나중에 네 여자 친구가 서운해하면 어쩌려고. 그냥 사랑이라고 하지.”
“그런 거로 서운해하는 사람 나도 관심 없어. 뭐야, 지유현. 넌 사랑이야?”
“…응? 사, 사랑?”
“넌 사랑 택할 거냐고.”
“난…….”
우정을 택하든 사랑을 택하든 결국, 차정한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도 내게는 똑같았다. 하지만 차정한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기에 살짝 웃었다.
15
?
?
“당연히 우정이지.”
“그래, 그래야지. 너 나중에 누구 생겨서 나 뒷전이기만 해. 내가 진상처럼 따라다니면서 깰 거야.”
“무서워서 누구 만나지도 못하겠다.”
“누구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왜? 진상처럼 따라다니면서 깨려고?”
“지유현한테 잘하나 내가 봐야지. 넌 너한테 잘하고, 너만큼 착하고, 좋은 사람 만나야 돼. 무조건. 너한테 못되게 굴고 그러면 내가 진짜 그건 못 참아.”
한 번씩 이렇게 진심으로 날 걱정하고 위해 줄 때마다 너무 진지한 얼굴을 해서 귀여웠다. 이렇게 비장하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차정한은 이런 문제에 너무 진지하고 비장했다.
“뭐가 그렇게 비장해.”
“진심이라 그래.”
“알았어. 그럼 네가 골라 주는 사람이랑 만나야겠다. 그럼 되지?”
“그거 좋다.”
씩 웃은 차정한이 그대로 나를 잡아 소파 뒤로 기대게 했다. 나는 차정한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곧 예상대로 내 허벅지 위로 머리를 대고 누운 차정한이 눈을 감았다.
“아, 그 드라마.”
“응.”
“한다고 연락했더니 바로 연락 왔는데 작가랑 감독이 한번 보고 싶다고 했나 봐.”
“언제? 날도 정해졌어?”
“다음 주쯤. 그날 같이 가.”
“알았어. 벌써 기대된다. 재밌을 것 같아. 네가 작품 안 하니까 요즘 볼 드라마도 없고… 영화도 없고 심심했거든.”
내 말에 눈을 뜬 차정한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대로 차정한이 내 뒷머리를 잡아 눌렀다. 차정한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내려가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너 내 얼굴만 보잖아. 이렇게 봐.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이게 더 좋잖아.”
과한 장난이었다. 미치도록 가깝고 친하기에 차정한이 칠 수 있는 과한 우정의 영역 안에 있는 친근하고, 다소 과한 장난. 적당히 내려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마주한 그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에 조금 마음을 다쳤다. 차정한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미친 척 조금 더 내려가 닿고 싶은 불순한 마음을 숨기고 버티기 힘들어 차정한의 손을 잡아 내리고 몸도 일으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났어?”
차라리 화가 나면 좋을 텐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볼 자신이 없어 그대로 걸음을 옮겨 방으로 향했다. 차정한이 그런 내 뒤에서 나보다 먼저 걸어 내가 들어가려는 문 앞을 막아섰다. 미안함과 걱정, 그리고 조금 당황한 그 눈을 보니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졌다.
“놀랐구나. 미안해. 내가 장난이 심했어.”
놀랐기 때문도 차정한의 장난이 심했기 때문도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 외에 내가 소리 낼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놀랐잖아.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안 그럴게. 잘못했어.”
“…알았어. 가서 자.”
“진짜 풀린 거 맞지?”
“그래. 풀렸어.”
못 믿겠는지 여전히 문을 막은 채 선 차정한이 나를 내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꼭 그 눈과 표정이 잔뜩 잘못해 놓고 용서받기를 바라며 낑낑대는 큰 강아지 같아서 그만 웃어 버렸다. 차정한은 웃는 나를 보며 똑같이 따라 웃고는 그제야 문을 막고 있던 팔을 들어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그럼 쉬어. 잘 자고.”
“…응. 너도 잘 자.”
고등학생 때 자주 본 그 얼굴로 웃은 차정한이 가볍게 방문을 닫았다. 서른이 됐는데도 차정한의 얼굴에는 아직 그때 그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의 웃음에서 또 그가 무언가에 집중한 그 모습에서 십 대 차정한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으로 뽀얗고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다음 주 차정한의 스케줄 정리도 해야 하고, 그 외에도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아 잘 수는 없지만, 머릿속이 요동을 쳐 잠시 침대에 누웠다. 아무래도 차정한과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모든 게 뒤집혀 엉망이 된 모양이었다.
“…….”
키스하고 싶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얼굴을 더 내렸어도 닿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냥 저지르고 싶었다.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이렇게 침대에 고요히 누워 있을 수 있을까.
‘만약’이라는 것을 떠올리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한 번씩 어느 쪽으로든 마주한 충격에 머릿속이 뒤집힐 때면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했다. 차정한의 장난에 내가… 그에게 키스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런 최악의 상황을.
“…….”
밀려나는 건 당연하고 한 대 맞았을지도 몰랐다. 쫓겨나서 집에 가며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이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맨정신의 멀쩡한 차정한은 나와 키스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할 차정한에게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차정한처럼 웃고 넘기거나 장난치지 말라고 가볍게 밀어내고 좋게 마무리해도 될 일이었다.
“…….”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차정한은 기억하지 못하고, 나는 기억하는 몇 번의 순간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어지러워.’
‘나 잡아. 그러다 넘어져….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유현아.’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내 몸을 덮으며 기울어진 순간 밀리던 몸. 스무 살, 따뜻하던 5월의 어느 밤의 기억이.
* * *
차정한이 광고 촬영을 간 사이 동윤 형에게 전화가 왔다. 같은 소속사 선배인 서지운 배우의 주도로 오늘 갑자기 저녁에 소속사 배우들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하필 모이는 장소가 차정한 촬영장 근처라 꼼짝없이 잡혀가게 생겼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동윤 형의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걱정이 올라왔다.
서지운 배우는 주로 조연으로 유명한 배우였다. 씬스틸러로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보다 더 비중이 크고, 인상 깊은 조연으로 활약했다. 차정한보다는 열 살이 많은데, 차정한이 데뷔했을 때 많은 조언을 해 주고, 잘할 수 있다고 다독여 준 적이 있어 웬만하면 서지운 배우의 말은 들으려 애썼다.
딱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다면 이상한 술자리 매너였다. 본인보다 다른 사람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계속 술잔을 채우고 피할 수도 없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술이 꽤 센 차정한도 서지운 배우가 있는 술자리에만 가면 잔뜩 술에 취해 돌아왔다.
특히 차정한은 타인들과 있는 곳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고, 힘들어도 끝까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약점 잡히기 쉬운 단 한마디의 말실수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차정한을 데리고 동윤 형이 집에 와서 내게 차정한을 넘겨주면 그제야 몸에서 힘을 풀었다.
“최대한 조심하라고 전해 주세요. 네. 밤에 출발하실 때 연락 주세요. 맞춰 내려갈게요. 네.”
통화를 마치자 아까보다 조금 더 큰 걱정이 밀려들었다. 내일 일정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건강이나 혹시 모를 기자, 팬들의 눈에 뜨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는 먹이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디 서지운 배우가 지난봄과는 조금 달라졌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지금 집으로 출발한다는 동윤 형의 연락이 왔다. 차정한의 상태가 어떤지 묻자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괜찮아 보인다는 말에 혹시 오늘은 괜찮은 건가 하는 기대가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지금까지도 매번 차에서는 괜찮아 보이다가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긴장을 풀어 흐트러졌다는 것을 알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30분쯤 뒤에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정한의 밴이 들어와 내 앞으로 섰다. 나는 동윤 형이 내려 뒷문을 여는 것에 얼른 가까이 다가가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차정한을 보았다. 술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잠이 든 사람처럼 보였다.
“정한아. 다 왔어. 올라가자.”
차 안으로 상체를 기울여 넣고 눈을 감고 있는 차정한을 불렀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차정한이 어둠 속에서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지유현….”
“응, 나야. 다 왔어. 내리자. 올라가서 자자.”
어둠 속에서 잔뜩 취한 것 같은 차정한의 눈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몇 번의 기억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누르며 동윤 형과 차정한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잡았다.
“유현 씨 혼자는 안 되겠다. 이러다 같이 넘어지겠어.”
혼자 서기는 서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차정한을 혼자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190cm에 육박하는 차정한이 내게 확 기울어지거나 무게를 내가 견디지 못하면 넘어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배우 차정한의 매니저로 일어날 수 있는 ‘안 좋은 만약의 상황’을 먼저 떠올려야 했다.
“같이 올라가.”
“네, 오늘도 서지운 배우가 이렇게 술 먹인 거예요?”
“그 이름 진짜 말도 마. 저번에 그 언제야, 올 초에 봤을 때보다 진상, 진상 아주 더 진상이 돼서는 정한이 잘나간다고 잘나가는 만큼 받아야 자기 오늘 이 자리 끝낸다고 그랬나 봐. 정한이가 술이 세니까 이 정도지, 연락이 안 돼서 들어가 보니까 다 도망가고, 둘만 남아 있는 거야. 서지운 그 양반은 멀쩡해. 내가 진짜 눈이 뒤집혀서. 그러면서 나한테 애 안전하게 데려다주라고 하더라니까.”
“앞으로 되도록 서지운 배우 있는 자리에는 안 나가야겠어요.”
“맞아. 피해야 돼. 이러다 정한이만 큰일 나.”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바뀌었다니 할 말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형, 늦었는데 얼른 가세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혼자 할게요.”
“괜찮겠어?”
“네. 거의 두 시가 다 됐는데 얼른 가서 쉬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 바로 하고.”
“네, 가세요.”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가는 형에게 묵례한 뒤 내게 아예 기대어 선 차정한을 바로 세우려 애썼지만, 힘이 빠지기 시작한 차정한을 바로 세우는 건 무리였다.
“정한아, 내 말 들려?”
“…….”
“정한아. 차정한. 집에 다 왔어.”
두 손으로 잡다 보니 비밀번호를 누를 수가 없어 곤란했다. 나는 차정한을 벽에 기대고 설 수 있게 한 뒤에 얼른 한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들어가자. 다 왔어.”
문을 겨우 열고 발로 밀어 고정한 뒤에 두 손으로 차정한을 붙잡았다. 벽에 기대고 있던 차정한이 그대로 내게 쏟아진 것도 그때였다.
#16
?
?
“아…!”
차정한의 무게에 밀려 그대로 뒷걸음쳐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센서가 반짝이며 밝아진 순간 문이 닫히고, 나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내게 쏟아진 차정한을 겨우 끌어안다시피 붙들고 섰다.
“…….”
조금만 내가 잘못 움직여도 차정한이 넘어질 것 같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팔을 느슨하게 할 수도 없고, 떨어지려고 몸을 움직여도 큰일 날 것만 같았다. 나를 거의 덮다시피 흐트러진 차정한의 허리를 조금 더 꽉 끌어안아 붙잡자 차정한이 술 때문에 괴로운지 낮은 숨을 뱉어냈다.
“…정한아.”
“…응.”
작지만 분명 내 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아직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몸 바로… 세워 봐. 집이거든. 방에 들어가자.”
“간지러워…….”
몸이 완전히 서로 포개져 끌어안은 모양새라 차정한의 귓가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거기에 대고 말을 해서 그런지 차정한이 간지럽다며 작게 웃었다. 작게 부서져 나의 모든 곳으로 스며드는 그 웃음소리에 나는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다시 머릿속을 스치는 몇 가지의 기억들에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 차정한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제발 바로 좀 서 봐.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따뜻해….”
“정한아, 제발 몸 좀……!”
분명 밀어냈는데 몸이 더 깊게 맞물리듯 포개졌다. 등과 허리로 감기는 따뜻함과 몸을 웅크린 차정한의 습격 같은 온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나 혼자서는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차정한이 나를 안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
심장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빠르고 세차게 뛰는데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심장으로 확 모여들었다가 아래로 확 빠져 버리는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심한 감기를 앓는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시야가 흐릿했다. 머릿속은 멍해지고…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다.
정한아, 불러야 하는데 입술만 벌어질 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을 헤집어 완전히 점령한 어느 날들을 결국, 떨쳐내지 못하고 마주했다. 그날들에 하루를 더 추가하면 안 될 것 같아 겨우 정신을 모아 차정한에게서 팔을 풀고, 몸을 밀어냈다. 별 저항 없이 팔을 푼 차정한이 내 어깨 위로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들어가자.”
몸을 조금 더 떼어내자 차정한이 확 더 가깝게 몸을 붙였다. 힘이나 체격으로는 그를 혼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려 애썼지만, 한곳에서 생각이 빙빙 돌기만 할 뿐 유의미한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 나 누군지 알아?”
“…지유현.”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차정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움직임을 감지한 현관 센서에 빛이 옆으로 퍼졌다. 차정한이 나를 뒤덮고 있어 내 얼굴이나 몸 위로는 조금도 빛이 닿지 못했다.
“그래…. 나 유현이야. 그러니까 정한아. 들어가서… 우리 들어…….”
기울어진 얼굴이 그대로 내려왔다.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렸다. 따뜻한 입술이 겹쳐진 순간 너무 놀라 탄식처럼 숨이 터져 나왔다. 차정한은 그대로 내 벌어진 입술 안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어 혀끝을 머금었다.
혀끝이 닿아 문질린 순간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를 밀어내려고 어깨에 대었던 손이 흘러내려 차정한의 얇은 재킷 자락을 겨우 붙잡았다.
밀어내야 하는데 내일 차정한이 이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한편 밀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지금까지 몇 년을 함께하며 단 한 번도 차정한은 이런 순간들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 지난봄에도 그리고 작년 크리스마스와 어느 여름날에도…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맞은 그 봄에도 차정한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 무엇도.
“…으음, 응…….”
지난 생각을 한 번에 무너뜨린 감각들이 단숨에 몸 여기저기를 타고 올랐다. 내 혀를 휘감아 깊게 빨아들인 그가 살살 혀끝을 문질렀을 때는 차정한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내 혀끝을 문지르는 그의 혀를 살살 마주 문질렀다. 내가 움직이자 순식간에 거칠어진 숨이 느껴졌다. 차정한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나를 파고들었다. 혀가 빨리고, 문질릴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찌릿대는 쾌감들이 몸 여기저기를 찌르며 돌아다녔다.
“하아… 흐으. 하으…….”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어 틈이 생긴 입술 사이로 고여 있던 숨이 흘렀다. 숨을 내쉬는 순간에도 차정한의 시선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꾸만 소리를 짓눌렀다.
차정한과 이렇게라도 닿을 수 있어 좋으면서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에 편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반칙을 해서 닿는 것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더 그랬다. 13년 동안 이어져 온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나 혼자만의 감정이 퇴색된 것만 같아 눈동자가 축축해졌다. 차정한이 그런 내 턱을 잡아 부드럽게 올렸다. 그리고 다급한 사람처럼 다시 입술을 겹쳤다.
드디어 내가 정신이 들어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차정한은 내가 고개를 돌린 쪽으로 찾아와 다시 입술을 겹쳤다. 나는 차정한을 피해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차정한은 다시 내 턱을 잡아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상을 썼다. 내가 피해 화가 난 것이었다.
“…….”
“…….”
뺨이 뜨거웠다. 안 울려고 했는데, 절대 혼자서도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정한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조금 생각이 맺힐 수 없는 것처럼 멍해진 눈동자로 보다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눈물이 묻은 내 입술을 한참이나 머금었다. 혀를 대지 않고, 뽀뽀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빨아들였다가 놓을 때마다 손끝이 찌릿했다.
차정한은 눈물 맛을 보는 사람처럼 입술만 집요하게 머금다가 그대로 완전히 물며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나의 이중적인 작태를 경멸하면서도 차정한을 밀지 못하고, 그와 키스했다. 차정한의 혀를 문지르고, 똑같이 빨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이 떨어지면, 다시 겹치고, 또 떨어지면 다시 맞붙였다.
“하….”
“…하아…….”
마주 닿은 모든 곳이 다 뜨거웠다. 체온은 올랐고, 우리를 에워싼 공기까지도 따뜻함을 지닌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서로가 데운 숨이 너무 뜨거워 질식할 것만 같았다. 차정한은 가볍게 입술을 붙인 채 내 혀끝을 문지르다가 입술과 입가, 그리고 뺨 여기저기에 키스했다. 꼭… 차정한에게 사랑받는 것 같아 너무 설레고, 떨리고… 무서웠다.
“…이제 들어가자. 몸 세워 봐….”
겨우 숨을 고르고 여전히 몸을 혼자 잘 가누지 못하는 차정한을 부축하듯 잡았다. 차정한은 내 말을 따라 몸을 바로 세웠지만, 금세 흐트러지고 또 세웠다가 흐트러지고를 반복했다. 나는 그를 온몸으로 부축한 채 겨우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머리가 아프고, 술기운에 괴로운지 팔을 든 차정한이 눈 위를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옷을 갈아입히면 좋을 텐데 그럴 여력이 없었다. 바로 잠이 든 것 같은 차정한을 보다가 겨우 방을 나와 내가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문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
또, 또… 차정한과 닿아 버렸다. 스무 살 때부터 1년에 한두 번씩 있는 일이라 이제는 크게 놀라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멈춰 버릴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차정한과 닿을 때마다 나의 감정이 퇴색된 것 같아 몹시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과 온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다지만, 내게는 그런 생각이 전부 나의 불순한 마음인 것만 같아 괴로웠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었고, 그 우정은 나의 불순한 생각으로는 단단하게 이어질 수가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통제하고, 짓눌렀다. 친구를 사랑해서 찾아드는 죄책감도 떨치려 하지 않고 늘 곁에 두었다. 그래야만 하니까.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사랑보다 우정을 먼저 바라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