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현.’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자책으로 얼룩진 마음 위를 차정한의 목소리가 덮었다. 그는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할 상황에서도 늘 내 이름은 정확하게 소리 냈다. 나를 타인으로 생각했다면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상처 받아 끝낼 수 있었을까. 수많은 생각은 자책의 영역을 벗어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나는 무릎을 세워 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차정한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내일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래야 우리의 단단하게 구축된 이 친구라는 관계가 내일도 이어질 테니까. 나는 우리의 우정을 결코 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아직 빛이 바래지 않은 나의 진심이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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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가 된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늦게 잠들어 그런지 눈을 떴을 때는 열 시가 넘어 있었다. 늦잠을 잔 것 같아 심장이 철렁했지만, 곧 오늘 차정한의 스케줄이 없다는 걸 기억하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방 바깥이 조용한 것을 보니 차정한도 아직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옷도 갈아입히지 못해서 불편할 텐데 잘 자고 있나 싶어 일어나 차정한의 침실로 가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자다가 답답해서 벗은 건지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재킷을 집어 들었다. 몇 벌 모아둔 옷이랑 같이 클리닝을 맡길 생각이었다.
“…몇 시야.”
내 작은 움직임에 그가 깰까 싶어 일부러 최대한 조용히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려 애썼는데도 기척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기 전에 마음을 건드렸다. 저 비슷한 목소리로 지난 밤 내 이름을 부르던 게 떠올라 애써 잠재웠던 마음은 다시 너무나도 쉽게 헤집어졌다.
“열 시 좀 넘었어. 속은 어때?”
“괜찮아. 머리가 좀 아파서 그렇지.”
얼른 방을 나가 차가운 생수 한 병을 꺼내 차정한에게 가져다주었다.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한 병을 비운 그가 빈 병을 옆으로 놓고 미간을 구겼다. 나는 차정한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분위기로 봐서는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제….”
“…….”
“나 몇 시에 왔어?”
“…한 시 반인가. 그쯤.”
“내가 너 또 괴롭혔겠다. 미안해.”
“…….”
괴롭혔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바로 파악할 수 없었다. 차정한의 머릿속에는 단순한 말만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내 머릿속에는 차정한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차정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올려 보았다.
“네가 또 나 낑낑대고 옮겼을 거 아냐.”
“…아. 그러긴 했지.”
“나 또 말 안 들었어?”
거기까지 들었을 때 마음이 꽉 조여들며 놓였다.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을 애써 외면한 채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 취하면 말 진짜 안 들어. 원래도 안 듣는데 취하면 더 안 들어. 고집 세고… 힘은 더 세고.”
내 말을 듣던 차정한이 숨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걸 보니 확실히 어제 일은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감정이 흐트러졌다. 안도만 하기에는 아직 내게 달라붙은 차정한의 온기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우리 착한 지유현이 이렇게 숨도 안 쉬고 말하는 거 보면 나 어제 진짜 말 안 들었나 보다.”
“…다시는 술 그렇게 마시지 마.”
“다시는 그 선배가 불러도 안 나가. 어제부로 완전히 질렸어. 제정신 아니야. 자기는 한 모금도 안 마시면서 나한테 마시라고 계속 술잔 돌리는데…. 고마워서 말 들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차정한은 맺고 끊는 게 굉장히 확실한 타입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니다 싶으면 단칼에 관계를 끊어냈다. 나는 그렇게 잘려 나가고 싶지 않았다.
“바로 어젠데 기억이 안 나면… 이상하지 않아? 답답하거나.”
“답답하다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실수한 게 있진 않나 그걸 모르니까 좀 무섭더라고. 그래서 절대 밖에서는 아무리 취해도 정신 붙잡고 있잖아.”
“그건 어떻게 잡고 있는 거야. 그게 의지로 돼?”
“네 생각하면 돼.”
“…내 생각?”
생각지도 못한 답에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별것 아니라는 듯 씩 웃은 차정한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뻗어도 지유현 얼굴 보고 뻗자, 지유현 보일 때까지 참자. 참자.”
“…….”
“내가 믿는 사람 너밖에 없잖아.”
“그래, 그건 좋아. 기특해. 좋은데… 준다고 그렇게 다 마시지 마.”
“네. 우리 유현이 말 들어야지. 네 말 들어서 나한테 나쁠 게 없잖아.”
“알면… 말 좀 잘 들어. 대답만 잘하지 말고.”
“어제 내가 진짜 진상 짓 했나 보네. 엄청 혼내는 거 보니까. 나 뭐 너한테 실수했어?”
차정한이 안다면 어제의 키스는 최악의 실수로 변할 것이었다. 누가 봐도 실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그걸 실수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라고 욕해도 지금의 마음이 그랬다.
“실수 같은 거 안 했어. 그냥… 똑바로 좀 서라는데 안 서고, 제대로 몸도 못 가누고 하니까 걱정돼서 그래.”
“미안해. 진짜 조심할게.”
침대에서 일어난 차정한이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키스할 때가 떠올라 고개를 조금 돌리니 돌린 쪽으로도 다가와 눈을 맞췄다. 이러다가 턱을 잡아 입술을 맞물렸던 게 떠올라 등줄기를 타고 묘한 감각이 흘러내렸다. 나는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려 애써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그제야 차정한이 몸을 바로 세워 내게서 떨어졌다.
“씻어야겠다.”
“국이라도 끓일까?”
“아니, 괜찮아. 생각 없어. 나 저녁때까지 뭐 못 먹잖아. 씻고 커피나 한잔 마시면 돼.”
“내가 이따 내려 줄게. 씻고 나와.”
“응. 고마워.”
방 안 욕실로 들어가는 차정한을 보며 문을 닫았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서니 기억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조금은 긴장했던 마음이 숨에 섞여 흐트러졌다. 나는 깊게 눈을 감았다.
“…….”
스무 살, 그해의 5월처럼 우정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 * *
스물이라는 나이는 내게 그리 큰 변화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십 대에서 이십 대가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하거나 어른이 된 것 같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둘 중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차정한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도, 이십 대가 되었다는 것도 아니었다.
수능을 보고 대학 입학 확정이 날 때까지 나와 차정한은 제발 같은 대학에 붙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친하고 같은 대학에 다니고픈 마음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기에 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또 노력한 결과가 부디 잘 나와주기를 바랐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 같은 대학에 붙었다는 것을 안 뒤로 우리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차정한은 나랑 같은 대학이 아니면 붙어도 등록을 안 하려고 했는데 내 덕분에 최종 학력이 높아졌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솔직히 너무 극단적인 차정한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대학을 다닐 수 있다는 기쁨이 너무 커서 그 말에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스물은 어른이 됐다는 기쁨도, 십 대가 끝난 걸 믿을 수 없는 낯선 감정도 아니었다. 특히 나에게 스물은 사랑이라는 말을 해도 조금 더 존중받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십 대가 말하는 사랑을 전부 풋사랑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더는 풋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 누군가는 진지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스물이 돼도 차정한에게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담는 순간 우리의 관계가 요란히 깨져 버릴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단단해야 했다. 차정한이 언제 기대도 절대 무너지면 안 되는 존재였다. 나는 나약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나약하게 하는 게 사랑이라면… 더 깊은 곳에 묻고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우정을 택하고 싶었다.
생각처럼 모든 일이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생각은 생각이고 마음은 마음이었다. 나는 십 대의 끝자락에 시작된 나의 사랑을 스스로 풋사랑이라고 치부했다. 어려서 그런 거라고, 늘 붙어 다니니 착각한 것뿐이라고 그냥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내 생각에 상처 받은 나의 마음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나의 마음이 봄볕에도 나오지 못하고 내가 숨길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자리했다. 나는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내가 숨긴 사랑에 익숙해졌다. 점점 나의 사랑은 당연히 숨겨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차정한은 대학에 입학을 하기 전부터도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오리엔테이션 때 난리가 났고, 입학을 한 뒤에는 차정한의 관심을 끌고, 친해지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차정한의 곁을 맴돌았다.
나는 늘 차정한의 곁으로 다가가는 많은 사람에게 밀려 뒷걸음쳤다. 그럴 때마다 차정한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나를 잡고,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럴 때마다 사랑이 숨은 곳에서 녹아내려 온몸을 흠뻑 적셨다. 그걸 차정한에게 들킬까 봐 나는 늘 몸을 웅크렸다. 사랑으로 젖은 마음을, 눈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고등학생 때처럼 차정한은 내가 아닌 타인과 엮이는 것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싫어했지만, 대학 생활은 그렇게 둘만 고립되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수업을 들어야 하고, 타인과 조를 이뤄 과제를 해야 할 때마다 우리는 각각 다른 곳에 소속됐다. 몇 번을 해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로 다른 모임에 빠질 수가 없어 참석하는 일도 생겼지만, 그럴 때마다 서로를 챙겼다. 차정한은 내가 술을 마시면 찾아와 밖에서 기다리다가 나를 데리고 갔고, 차정한에게 술자리가 있으면 내가 그쪽으로 가 차정한을 챙겼다.
5월의 그 날도 그랬었다. 저녁 술자리가 있다는 차정한의 말에 나는 도서관에서 내내 과제를 하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그가 알려 준 술집으로 향했다.
타인 앞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하는 차정한은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나와 나를 보고 웃었다.
‘어지러워.’
‘나 잡아. 그러다 넘어져….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유현아.’
그날 처음으로 차정한이 흐트러졌다. 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내내 버티고 있었던 건지 나를 보자마자 몸이 살짝 기울었다. 나는 온몸으로 나보다 큰 차정한을 부축했다. 그리고 차정한의 집까지 가기 힘들어 술집에서 조금 더 가까운 내 집으로 데려갔다. 사실 우리는 네 집, 내 집의 의미가 없었다. 차정한이 대부분 내가 지내는 오피스텔에 와서 살다시피 하기 때문이었다.
‘정한아… 정신 좀, 차려 봐. 너 그러다 넘어지면 다쳐. 다리에 힘 좀….’
‘유현아…….’
‘그래, 나니까 이름 부르지 말고 일단 여기 서 봐. 설 수는 있어?’
오피스텔 앞에 도착해 밑에서 들어가는 카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차정한이 자꾸만 내게 쏟아졌다. 쏟아진다고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꼭 내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전부 적시며 흘러내리는 사랑 같았다. 하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차정한이니 그 사랑이나 차정한이나 다를 게 없기는 했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차정한을 잡아 세우면서도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했다.
‘문만 열게, 문만 열면…….’
그대로 차정한이 완전히 나를 덮으며 기울었다. 들고 있던 현관 들어가는 카드와 지갑, 가방을 전부 떨어뜨렸다. 나는 떨어진 것은 보지도 않고 빈 두 손으로 오롯이 차정한을 붙잡았다. 꼭 서로…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 입술이 마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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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자는 거 아니지. 다 왔어.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만 타면 돼. 갈 수 있지?’
나를 폭 끌어안은 것처럼 기댄 차정한의 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차정한은 이렇게 부드럽게 달래고, 쓸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누구도 이렇게 해 준 적이 없다며 내가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 등, 손을 쓸어 줄 때마다 나를 물끄러미 보며 웃었다.
‘기분 좋아….’
‘정신없을 만큼 마시고 또 기분은 좋아?’
‘손…. 네 손……. 더, 더 해 줘.’
‘…….’
술 때문이 아니라 등을 쓸어 주는 내 손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불분명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댔다. 이 봄밤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이 소리가 차정한에게 다 들릴 것만 같았다. 술에 취해 이렇게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열 번 더 할게. 그 다음에는 들어가는 거다?’
내 어깨에 고개를 숙여 얼굴을 파묻은 차정한이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차정한의 등을 쓸어내렸다. 대충 쓸어 주고 빨리 들어가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떤 상황에도 차정한에게 진심이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네 번. 내가 등을 쓸어 내릴 때마다 차정한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차정한에게 이렇게 몸이 꽉 조일 만큼 안겨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한 번 남았어. 진짜 들어가야 해.’
한 번 남았다는 말에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차정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오피스텔 현관 입구에 달린 하얀 불빛이 차정한의 얼굴을 비추었다.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조금 풀린 눈동자로 내가 보였다. 나는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맞췄다.
‘…정한아.’
그의 등을 타고 내 손이 미끄러져 내려온 순간 차정한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리고 입술로 태어나 처음 느끼는 뜨거움이 찾아들었다. 나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그리고 차정한과 입술이 닿아 있다는 것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 순간 부드럽게 파고들어 조금 서툴게 혀가 마주 문질리는 느낌에 너무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차정한이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으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몸이 울긋불긋해지는 것 같았다. 키스라니, 차정한이 내게 키스를 하다니. 이건 내가 생각했던 범위의 일이 아니었다.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바란 적이 없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는 일이 내게 벌어지고 있었다.
한 번도 키스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차정한의 혀가 닿을 때마다 온몸이 다 움찔거렸다. 혀끝을 문지르면 어깨가 움츠러들고, 사탕을 빠는 것처럼 혀를 빨면 다리가 오므라들기도 했다. 혀가 닿아 비벼지기만 해도 놀이공원에 가서 바이킹을 탄 것처럼 아랫배가 이상했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한데 혀와 혀가 닿아 문질린다는 게 어색해 조금은 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한 느낌은 차정한과 입술이 맞물리고 몇 번이나 혀가 뒤섞일수록 점점 흐릿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내게 다시 파고드는 그의 혀를 처음으로 같이 문질렀다. 아랫배가 간지럽고 온몸으로 혀끝의 감각이 옮겨간 것처럼 열이 올랐다.
차정한은 내가 혀를 문지르자 내 턱을 잡고 조금 거칠고 깊게 파고들었다. 이렇게 거칠게 구는 차정한은 처음이었다. 정신없이 혀가 문질리고, 빨렸다. 이게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처음이라 알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았다. 정신이 나가 버릴 것처럼 좋아 몸이 붕 뜨고… 몽롱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차정한과 첫 키스라니… 믿을 수 없지만, 꿈이 아니라 너무 좋았다. 이렇게 뜨겁고, 차정한과 닿은 모든 곳이 홧홧한데 꿈일 리가 없었다. 들뜬 기대감이 숨어 있던 내 사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하으… 하아…….’
‘하….’
한참이나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봄밤의 온도보다 훨씬 높은 뜨거운 숨이 공기를 가르며 서로를 덮었다. 나는 조금 더 풀린 눈으로 나를 보다가 축 늘어지듯 안기는 그를 가득 끌어안았다. 꼭 사랑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겨우 집까지 올라가 차정한을 침대에 눕혔다. 차정한은 눕자마자 조용히 잠들었다. 나는 그 옆에 걸터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얼굴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첫 키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차정한의 얼굴만 봐도… 온몸에서 부드럽게 힘이 빠졌다.
‘잘 자, 정한아.’
나는 잠든 차정한에게 인사했다. 빨리 우리의 아침이 오기를 바랐다. 차정한도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들뜬 마음이 부풀어 자꾸만 떠 올랐다.
그토록 바라던 아침이 왔을 때, 차정한은 머리가 아프다며 내게 첫마디를 건네었다. 그리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고 걸터앉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제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어쩌다가 키스한 건지 묻는 건가 싶어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떠올렸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데리러 온 거 같은데….’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에 차정한이 말한 어제의 일은 키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 안 나?’
‘너무 마셨나 봐. 너 보니까 안 취한 척하고 있던 게 풀린 건 생각 나는데.’
‘…….’
‘그 뒤는 생각이 안 나네.’
앞서간 기대감이 두드린 소리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던 사랑이 다시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실수할까 싶어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어제 고생했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평소처럼 웃는 차정한의 얼굴을 보며 나는 똑같이 따라 입술을 올렸다.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야, 고생 안 했어. 따위의 말뿐이었다.
그렇게 5월의 봄밤, 나는 잊을 수 없고, 차정한은 잊은 첫 키스였다.
차라리 십 대 때는 감정을 숨기기가 쉬웠다. 정말 풋사랑이었던 건지 차정한을 보면 떨리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정도의 반응만 있었을 뿐,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저 날마다 얼굴을 보고, 함께하는 이 일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 더 유연해질 줄 알았던 마음은 첫 키스 이후에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차라리 없었던 일이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나도 술에 취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나을 텐데 나는 차정한의 감촉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동안 차정한과 눈을 맞출 때마다, 그가 옆에 오기만 해도 그날의 키스가 떠올라 힘들었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하릴없이 떨려 버리는 마음과 순간순간 덮쳐 오는 또렷한 온기에 차정한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피하기도 했다. 혼자 있고 싶어 아프다고 집에 가 엉엉 울기도 했다.
불도 켜지 않고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청승맞게 한참을 울다가 겨우 그쳤을 때, 진동이 울렸다. 나는 그제야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놓인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이쪽으로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는데 메시지가 오십 개 넘게 와 있었다. 보낸 사람은 전부 차정한이었다.
[정한 : 많이 아파? 감기야?]
[정한 : 갑자기 그래? 약 사갈게]
[정한 : 유현아]
[정한 : 왜 답이 없어 보지도 않고]
[정한 : 많이 아픈 거야? 집에는 갔어?]
내가 보지도 않고 답도 없자 차정한은 계속 내게 어디인지 괜찮은지를 묻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걱정이 묻은 관심을 보내는 차정한의 메시지를 보다가 일 분 전에 온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한 : 지금 올라가]
어디를?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어디를 올라간다는 거지. 우리 집? 여기? 생각이 제대로 맺힌 순간 벨이 울렸다. 내가 기대고 있는 현관문 밖에 차정한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자느라 못 봤다고 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알면서도 그걸 빠르게 실행할 힘이 없었다.
한 번 더 벨이 울리고, 조금 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드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주저앉은 채 그를 마주할 수 없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아 여는 순간 바깥으로 확 열리는 문을 따라 끌려나갔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집에 있었어?’
‘응? 아…. 자, 잤어.’
‘그랬구나. 그럴 거 같기는 했는데 아까 집에 간다고 한 뒤부터 계속 안 봐서 무슨 일 난 줄 알았잖아.’
‘일 날 게 뭐가 있다고….’
‘쓰러진 줄 알았어. 약은 먹었어? 내가 일단 감기약 사 왔는데. 들어가자.’
양손으로 내 팔을 부드럽게 쥔 채 몇 번 쓰다듬은 차정한이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고 온 종이봉투를 식탁 위로 올려 두었다.
‘죽도 사 왔어. 빈속에 약 먹으면 안 되잖아. 따뜻한데 지금 좀 먹어.’
‘나중에 먹을게.’
‘속 안 좋아?’
‘…응. 조금.’
계속 울어 그런지 힘도 없고 입맛도 없었다. 나는 식탁을 짚은 채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그럼 이따 먹자.’
차정한이 조금 몸을 움직여 불을 켠 순간 갑자기 마주한 빛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이제 정말 그냥 눕고 싶었다. 오늘은 차정한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유현아.’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도.
‘너 울었어?’
나를 너무나도 잘 보고, 또 아는 그 눈과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병원 가자. 그렇게 아픈데 왜 여기 이러고 있어. 나와, 가자.’
‘아니야…. 좀 쉬면 괜찮을 것 같아. 어디가 막 아프고 그런 게 아니라 피곤하고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서 그래….’
‘힘든 일 있어? 아니지…. 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진짜 컨디션 안 좋아서 그래?’
차정한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힘든 일, 아픈 일, 기쁜 일… 모든 일을 공유했다. 그냥 말 안 하고 지나도 아무 문제가 없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전부 알 만큼 가까웠다.
‘…응. 그냥 좀 잘래.’
내가 차정한을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보게 된 건 우리 사이에 생긴 첫 번째 비밀이었다. 차정한은 모르지만, 나는 아는… 그리고 숨겨야 하는 비밀. 우리 사이에 비밀이 생겼다는 그 자체로도 나는 오랜 시간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도 내 사랑을 위로할 수가 없었다.
‘들어가자.’
혼자 걸을 수 있는데도 차정한은 나를 부축하고 침대로 데려갔다. 괜찮다고 할까 하다가 말을 하는 것도 힘들어 놔두었다. 이불을 걷은 차정한이 나를 눕히고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침대 옆으로 걸터앉아 가만히 나를 보던 그가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아프고 그래.’
‘…….’
‘속상하게.’
‘…….’
울면 안 되는데 다정한 그 목소리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차정한은 우는 나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침대에 걸터앉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 혼자 있어도 되니까… 가.’
‘너 우는데 내가 어떻게 가.’
‘…가. 혼자 있고 싶어.’
‘혼자 두기 싫어.’
‘…….’
‘거실에 있을게.’
멀어지는 발소리와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내내 울었던 것처럼 또 한참을 울었다. 나 때문에 속상하다는 차정한의 목소리가 자꾸 생각나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가 멍하고, 힘이 완전히 빠져 더는 울 수도 없을 때까지 울다가 조용한 문밖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우는 사이에 집에 갔나 싶어 가만히 방을 나가 보니 조용한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차정한이 보였다. 내가 방 밖으로 나가자 차정한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다 울었어?’
‘…응. 미안해,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자꾸 머리가 아파서 그래. 아프니까 짜증도 나고…. 못 볼 꼴이나 보이고 미안해.’
‘뭐가 못 볼 꼴이야.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가만히 선 내게 다가온 차정한이 몸을 숙여 나를 위로하듯 끌어안았다. 품으로 가득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그 온기는 절대 사랑일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자 오히려 눈물이 말랐다. 운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