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43)

그 뒤로도 나는 한 달을 더 아팠다. 그중에 절반은 진짜 몸살이 나서 혼자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야 했고, 차정한은 전에 내가 팔이 다쳤을 때처럼 내내 내 곁에 있었다. 나는 매 순간 헤집어지고 또 헤집어졌다.

그 헤집어진 마음의 끝은 나의 인정이었다. 사랑을 그만둘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랑은 내가 끝내고 싶다고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대신 인정을 했다. 차정한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는 확실히 친구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종일 세뇌하듯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멋대로 혼자 시작한 사랑인데 차정한을 원망할 이유도 또 서운해할 이유도 없었다. 사랑이 내 마음대로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가끔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잘 정리하고 단단한 우정을 앞으로 내세웠다. 나는 점점 내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차정한이 배우 제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니까. 차정한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곁에서 항상 단단하게 존재할 그의 유일한 친구니까. 나는 한 번도 그 선택을, 차정한의 옆에 친구로 남기로 한 그 마음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차정한을 배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스물의 봄이 저물었다.

#19

?

?

충격적인 일을 몇 번 반복해서 겪었을 때의 좋은 점을 굳이 찾는다면, 회복하기까지의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것이었다. 스무 살, 처음 차정한과 키스했을 때는 거의 한 달을 헤매고, 날마다 마음이 헤집어져 괴로웠지만, 그다음부터는 조금씩 회복이 빨라졌다. 그리고 서른이 된 지금은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의미를 두고 기억해야 할 일과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하는 일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정한을 대했다. 그저 우리 사이에 비밀이 한 가지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비밀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차정한이 알게 된다면 몹시 서운할 일이었다.

“유현아.”

“…….”

“지유현.”

생각을 파고드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차정한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보니 동윤 형이 샵 정문 앞에 바로 차를 대고 있는 게 보였다.

“요즘 생각이 많네.”

“끝난 줄 몰랐어. 오래 걸릴 줄 알았거든.”

“풀 세팅하는 것도 아닌데 뭐. 가자.”

“…응.”

헤어샵 밖으로 나가자 한국 팬은 물론이고 해외 각국에서 온 팬들이 차정한의 이름을 부르며 셔터를 눌러댔다. 기껏 만진 머리와 메이크업이 망가지면 안 되기에 차정한은 얼굴을 가리지 않고 팬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해 주었다. 마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의 매너는 오히려 이미지에 좋은 일이라 굳이 말리지 않았다.

차에 올라 출발하자 뒤에 서 있던 택시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미러로 뒤에 오는 택시를 확인한 동윤 형이 짜증 섞인 소리를 내며 차선을 바꿨다. 이렇게 택시를 타거나 일반 차인 척 서 있다가 밴을 따라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동윤 형은 이제 차를 따돌리는 데에 베테랑이 되었다.

나는 뒤에서 사라진 택시를 확인하고 대본을 보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오늘 캐스팅을 확정하기 전에 작가와 감독이 차정한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방송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만난 뒤에 마음에 들지 않아 캐스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처럼 전달이 될까 봐 걱정이 됐는지 일정 확인차 전화한 조연출은 몇 번이나 내게 이미 내부에서 캐스팅은 차정한으로 정해진 게 확실하다고 전했다. 작가와 감독이 워낙 차정한을 좋게 보고 있고, 이 대본 자체가 차정한을 모델로 쓴 거라 그 결정에 후회가 없다는 확인을 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고 10분이 넘도록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송국에 도착해 드라마국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하나둘 차정한을 보고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차정한을 직접 마중 나온 드라마국 국장님이 그런 직원들을 보며 웃었다.

“사진 서비스 좀 해 줘. 다들 말도 못 하고 발만 구르고 있는데.”

“네. 얼마든지요.”

유쾌한 국장님의 말에 차정한은 휴대폰을 들고 선 직원들과 한 명씩 차례대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새 연락을 다 돌린 건지 복도가 꽉 찰 만큼 몰려든 방송국 직원들 때문에 사진 촬영을 하고 또 해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옆에 있다가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휴대폰을 주면 앞으로 가 차정한과 누군가를 찍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 긴 시간 동안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없었다. 나도 저 복도 줄 가장 뒤에 서서 차정한과 이렇게 사진 찍고 싶었다.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와 찍은 사진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오십 명도 넘게 사진을 찍었을 때, 이번 작품의 감독님과 작가님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왔다. 두 사람과 악수하며 반갑게 인사한 국장님이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확성기처럼 뒤에 선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 여기까지만 합시다. 미팅 시작해야 하니 양해 좀 부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직원과 웃으며 사진을 찍은 차정한이 다녀온다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네 사람을 보다가 복도로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그래도 자주 와 본 곳이라 낯설지 않아 다행이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을까 하다가 혹시 카페인 때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이온 음료를 뽑아 아무도 없는 휴게실 한쪽에 앉았다.

사실 이 시간이 가장 느리게 갔다. 촬영장을 따라가면 그래도 찍는 걸 보니까 힘도 덜 들고 연기하는 차정한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이렇게 혼자 남아 차정한이 끝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때면 시간도 느리게 가고, 더 길게 느껴졌다.

음료를 다 마시고, 할 게 없어 요즘 뉴스는 뭐가 있는지도 다 봤는데 아직도 차정한은 나오지 않았다. 정식 미팅도 아니고 캐스팅 전에 이렇게 만날 경우에는 그리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아마 곧 끝나고 나올 것이었다. 당연히 좋게 봐주겠지만, 그래도 정말 차정한이 감독님과 작가님에게 잔뜩 예쁨받기를 바랐다.

동윤 형은 어디서 뭘 하나 궁금해 휴대폰을 꺼내는데 휴게실 쪽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형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차정한이 두 번째 드라마를 할 때 같이 했던 배우 이현준이었다.

“어? 누구시더라. 얼굴 분명히 아는데.”

“아, 저…….”

“아, 차정한 매니저!”

“네. 안녕하세요.”

“와,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때 이펙트 끝나고 처음이죠?”

“…네. 진짜 몇 년 만에 뵙네요. 잘…….”

잘 지냈냐고 인사치레로 물으려다가 작년에 이현준에게 큰 스폰서 스캔들이 났던 게 떠올라 안부를 묻는 것을 관두었다. 그 스캔들 이후 어디에서도 쓰려고 하지 않아 직접 방송국을 다니며 아무 대본이나 좀 줘 보라고 구걸하고 다닌다는 말을 다른 배우 매니저들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뭐 잘 지내지는 못했어요. 지금도 못 지내고. 여전히 우리 차정한 매니저는 눈치가 있네. 그때 이펙트 찍을 때도 그랬는데. 아, 서서 이러지 말고 앉아요. 마실 건… 아, 있네요? 그럼 내 것만 뽑아 올게요.”

<이펙트>라는 작품을 촬영하던 약 5년 전에도 이현준은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데뷔하자마자 한 번에 확 떠 버린 차정한을 못마땅하게 보는 티가 나서 늘 불편했었다. 웃으면서 알게 모르게 실수인 척 텃세를 부리기도 하고, 대기하는 내게 와서 차정한을 은근 험담하기도 했었다. 내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내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자기를 따라오면 돌려주겠다고 강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5년이 지난 지금도 이현준과 이렇게 마주하는 게 썩 편하지는 않았다.

“우리 매니저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네. 어쩜 그렇게 피부가 좋아요? 아가네, 아가. 한번 만져 보고 싶네.”

칭찬인 것처럼 말하지만, 칭찬보다는 희롱이었다. 이현준이 남자 여자 안 가리고 달려든다는 말 역시 많이 들어 불쾌해졌다.

“나랑 작품 한 뒤로 차정한 엄청 잘나가던데. 비법이 뭐예요?”

“정한 씨가 열심히 하시는 거죠.”

“나도 열심히 하는데.”

“…….”

“로비도 하고, 몸도 열심히 움직이고, 응?”

앉은 채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는 시늉을 하며 웃은 이현준이 다시 의자 뒤로 푹 기대었다. 박차고 일어나 나가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괜히 차정한 이미지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 빈 캔만 만지작댔다.

“내 매니저로 올 생각 없어요?”

“네?”

“차정한이 돈 얼마 주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두 배 줄게요. 아니, 내 매니저가 한 달을 못 버티고 나가잖아. 내가 까탈스럽지도 않거든요? 내가 얼마나 잘하는데 버티지를 못해. 보니까 이제 막 시작하는 어린애들은 근성이 없어. 우리 때는 안 그랬잖아요. 무조건 버텼지.”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었다. 갑자기 자기 매니저로 올 생각이 없냐고 묻는 정신은 도대체 얼마나 망가져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현준의 매니저가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는 이야기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20대 초중반 처음 사회에 나와 취직한 매니저가 주로 붙는데, 폭언과 폭행을 일삼거나 자기 마음에 들면 자꾸 몸을 붙이거나 집으로 불러대서 견딜 수가 없어 뛰쳐나간다는 내용이었다.

“난 매니저님이 맘에 들거든요. 그때 내가 이펙트 찍을 때 매일 봤잖아. 매니저님이 정한이한테 지극정성으로 하는 거.”

그건 차정한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매니저 일을 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이현준은 듣기 싫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더우면 우산 펴서 위에 대줘, 도시락 매번 최고로 챙기지, 새벽까지 밀고 찍어도 차정한만 멀쩡했잖아. 매니저님이 하도 챙겨서 애가 지치지를 않았잖아요. 그래서 그때 우리 사이에 저런 매니저를 만나야 된다고 그랬거든. 차정한은 씨발, 얼굴에 키에 몸, 운까지 있는데 매니저 복도 있다고 우리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니까.”

“그냥 저도 열심히 한 게 다예요.”

“뭐 그렇게 겸손하고 그래요. 마음도 예쁘네.”

“말씀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정한 씨가 곧 끝날 시간이 돼서요. 오늘 반가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피하자 이현준이 그대로 내 손목을 낚아채 당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몸이 확 끌려가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몸이 확 움직였다. 이현준은 내가 아니라 내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씩 웃으며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얼른 뒤를 돌아보니 차정한이 잔뜩 불쾌한 얼굴로 이현준을 보고 있었다.

“끝났어요? 형한테 연락할게요.”

다른 사람도 있는 자리라 최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을 높여 말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차정한이 그제야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정한은 나를 보면서도 괜찮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현준에게 손목이 잡혀 끌려가던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차정한은 나를 자신의 뒤로 세웠다. 그리고 이현준에게 다가갔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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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 뵐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보네요, 형.”

목소리는 상냥하지만, 전혀 상냥한 인사가 아니었다. 이현준은 그런 차정한을 보며 전혀 흔들리지 않고, 똑같이 비아냥거렸다.

“연예인이 방송국에 있는 건 당연하지. 뭘 그렇게 놀라.”

“출연 정지당하셨잖아요. 작년에 시끄러웠던 그 일 때문에. 아, 여기가 아닌가.”

“넌 또 뭐 다 지난 일을 가지고 그래. 몇 군데 꽉 막힌 늙은이들이 있는 데가 있어. 정지는 무슨. 거기는 원래도 안 나갔던 데야.”

“아, 네. 뭐… 앞으로도 안 나가시면 될 문제고. 그런데 제 매니저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셨어요?”

“왜, 네 매니저랑은 얘기도 하면 안 돼?”

“네.”

“뭐?”

날카롭게 반응하는 이현준을 보고 눈은 그대로 둔 채 입술만 끌어 올려 웃은 차정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는 안 되는데 이미 하셨다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 뭐 얼마나 재밌는 얘기기에 분위기가 이래요?”

“재밌는지 야한 얘긴지 네가 어떻게 알아. 막 와 놓고 뭐 다 들은 척을 해. 그럼 좀 있어 보여?”

“아니, 얼마나 얘기가 재밌었으면 간다는 애를 그렇게 당기나 해서요. 뭐 사람 쉽게 변하는 거 아니라니까 손버릇 여전하신 것 같아서 걱정도 되고….”

차정한과 이현준의 대화가 아슬아슬 수위를 넘나들었다. 누구 하나 선을 확 넘으면 큰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조마조마했다. 나는 바로 올라온다는 동윤 형의 메시지를 보며 제발 이 상황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랐다.

“왜. 내가 네 매니저 뭐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그래?”

“설마요. 형이 제 매니저 건드리시겠어요? 건드리면 나한테 죽을 텐데.”

“나한테? 죽을 텐데?”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이현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정한에게 다가왔다. 차정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다가오는 이현준과 마주했다. 나는 얼른 차정한의 팔을 잡았다.

“제발, 정한아… 제발.”

그의 귓가에 싸우면 안 된다고 애원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좋은 결과가 나올 게 보이는 드라마 감독님과 작가님을 만나는 자리였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방송국이었다. 방송국에서 주먹질이라도 했다가는…. 아,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그러냐고? 너 같은 게 건드리게 내가 놔두기는 하고?”

“너 같은 게? 이 새끼가 위아래도 없이!”

“내 거에 손대지 마. 사람이든, 물건이든 함부로 건드리지 마. 전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그 더러운 버릇 못 고친 모양인데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그땐 출연 정지가 아니라 은퇴할 생각 해야 할 거야. 지금도 은퇴나 마찬가지지만.”

이현준이 차정한의 말에 그대로 어깨를 확 밀쳤다. 반사적으로 이현준에게 튀어 나가려는 차정한을 얼른 뒤에서 감싸 안아 뒤로 당겼다.

“정한아, 안 돼. 하지 마. 참아.”

자꾸 앞으로 가려는 차정한을 끌어안고 당기는데 누군가가 급히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정한의 앞을 막고 선 국장님의 뒷모습을 본 뒤에야 고인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국장님을 보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현준, 너 또 왜 와서 소란이야? 오지 말라고 했지. 와 봤자 너 지금 나올 데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왜 와서 매번 이 난리야, 어?”

“국장님, 그러는 거 아닙니다. 상황을 모르시면서 무조건 저한테만 그러지 마세요. 저 싸가지 없는 새끼가 위아래도 없이 지금 대들고, 내 일 들먹거리면서 씨발, 매니저를 첩으로 들였나. 전부터 지 매니저 건드리기만 하면 눈 뒤집혀 지랄하네.”

이현준의 말에 차정한이 그대로 달려들었다. 나는 물론이고 국장님과 마침 들어온 동윤 형까지 그 사이에서 차정한을 떼어냈다. 국장님은 차정한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참으라고,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잘 넘기자고 말했다. 나와 동윤 형은 그대로 씩씩대는 차정한을 데리고 휴게실을 나섰다. 몇 번이나 잡은 팔을 뿌리치고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달래고, 또 달래 겨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차에 타 출발을 한 뒤에야 나도 동윤 형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국장님이 나타나 이 정도로 끝났지 만약 계속 대치했더라면 아까 줄 서서 차정한과 사진을 찍던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그 현장을 전부 봤을 것이었다. 사진이 인터넷 여기저기로 올라갈 거고 막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 나가 아마 지금쯤 실시간 검색어에 차정한 폭행 같은 자극적인 말이 올라가 있을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 얼른 생각을 지우고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의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아?”

괜찮은지 물으려고 했는데 차정한이 먼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하기는 하지만, 괜찮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연예계 일을 하다 별일을 다 겪고, 별말을 다 들어서 그런지 이제 이 정도는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았다.

“원래 저런 사람이잖아. 신경 안 써.”

“…….”

“기분 풀어. 아까 감독님이랑 작가님 만난 건 어땠어?”

“날 상상하며 썼는데 상상보다 더 이미지가 잘 맞는 것 같다고. 하기로 했어. 다음 주쯤 기사 날 거야.”

“다행이다. 이제 화만 풀면 되겠다.”

“넌 어떻게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 너한테 뭔 소리를 했는데, 그 새끼가. 나 있는데도 씨발, 첩이니 뭐니 그따위로 굴었으면 나 없을 때 뭐라 그랬을지 안 봐도 진짜…. 아, 짜증 나. 다 말해 봐.”

“음…. 돈 두 배로 줄 테니까 자기 매니저로 오라고.”

“씨발, 그거 약했나. 완전히 맛이 갔네.”

차정한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이르고 싶었다. 그런데 반응을 보니 이현준이 했던 진짜 불쾌한 말들은 절대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거까지 다 들었다가는 당장 차를 돌리라고 하고, 이현준에게 가서 기어이 주먹을 날릴 것이었다.

“그래서 뭐라 그랬어?”

“대꾸도 안 했지, 뭐. 할 말이 없잖아.”

“절대 안 돼. 죽어도 안 돼. 네가 간다고 해도 내가 너 가둬서라도 안 보내.”

“네가 된다고 해도 안 가. 거긴.”

“거기 아니면 가고?”

“또 이상하게 해석하지. 그런 의미 아니잖아.”

“…너 앞으로 밖에서 나한테 잘하지 마. 막 대해. 반말하고, 욕도 하고, 안 오면 뺨도 때려. 뭐 저런 매니저를 데리고 다니나 싶게 굴어.”

제법 진지하게 말해서 지금 저 말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순간 헷갈렸다. 차정한은 이게 뭐라고 정말 진지한 얼굴로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네가 착해서 다 너 노리잖아.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씨발. 진짜 너 나한테 잘한다고 매니저 넘길 생각 없냐고 개소리하는 새끼들 꽤 있었어.”

이현준이 아니라 이제 다른 쪽으로 옮겨서 화가 난 얼굴을 보니 어쩐지 귀여워 웃음이 났다. 웃는 나를 본 차정한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숨을 내뱉었다.

“왜 웃어. 내 말 들으니까 좋아?”

“좋은 거 아니야? 내가 너한테 잘하는 거 다른 사람들도 알면 좋은 거잖아. 그만큼 내가 일 열심히 잘한다는 거… 인정받은 기분인데.”

“그러니까 그 인정을 왜 다른 새끼들한테 받고 좋아하는데. 나한테 받고 좋아해야지.”

“너는 매일 다 해 주잖아. 고맙다고도 하고, 고생했다고도 하고….”

나는 차정한의 그 사소한 감정 표현들을 참 좋아했다. 내게 닿는 말 그 하나도 입에 발린 말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밤새 촬영을 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와서 몹시 피곤할 텐데도 차정한은 내게 꼭 밤새 힘들었겠다며 먼저 들어가 자라고 말했다. 어깨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기도 하고,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또 오늘처럼 누군가 내게 무례하게 굴면 조금도 머뭇대지 않고 앞으로 나서서 나를 보호했다.

사람들은 차정한이 내게 보이는 그 보호를 때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고작 매니저를 저렇게 감싸고 보호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때때로 그의 보호가 과잉보호라 느꼈지만, 내가 차정한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그의 보호나 표현들을 말리지 않고 전부 끌어안았다. 차정한이 주는 건 그게 뭐든 마냥 좋았다.

“내가 너한테 받는 게 얼만데 고작 그 정도로 다 해 준다고 그래? 나중에 내가 너 지금 우리 사는 데보다 더 좋은 집도 사 줄 거고, 전 세계 퍼스트클래스 타고 가게도 할 건데.”

“나만 가?”

“같이 갈까? 그러고 보니까 우리 둘이 여행 간 적이 없네.”

“…너 갈 수 있으면 같이 가자.”

“나야 스케줄 싹 다 밀고 너랑 당장이라도 가지.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

말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차정한은 내가 정말 내일 떠나자고 하면 모든 걸 위약금 다 물고라도 취소하고 갈 사람이었다. 내 친구는 늘 그렇게 내가 최우선이었다. 내가 가진 감정과는 다르지만, 서로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결국, 똑같았다. 그저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나중에 같이 가자. 꼭.”

기분이 다 풀렸는지 아니면 잠시 잊은 건지 차정한이 씩 웃었다. 그게 뭐든 나는 그가 웃어 좋았다. 그저 그게 다였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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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는데 동윤 형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 도착할 시간이 아닌데 벌써 온 건가 싶어 전화를 받자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라는 말과 함께 바로 회사에 들어가야 하니 10분 후에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말이 이어졌다.

아직 사이트에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자잘한 스캔들이 났던 게 떠오르는 걸 보면 이번에도 그런 일일 것이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사이트에 들어갔다. 실시간 검색어에 차정한의 이름이 보이고, 그다음에 뜨는 유아정 이름에 머리가 아파 왔다. 단독이라는 말을 앞에 붙인 기사에는 유아정이 이 아파트에서 나가서 차에 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나는 차정한의 방으로 들어가 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차정한이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고개만 기울여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바라보았다.

“기어이 나왔네.”

“알고 있었어?”

“며칠 전에 실장님이 이거 터뜨린다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해서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랬거든.”

“…뭐 너랑 만난 것도 아니고 너 촬영장에 있었던 것도 맞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지.”

“내가 부른 것도 아니잖아. 집에 가 있으라고 내가 알려 준 것도 아니고. 그러게 왜 멋대로 굴어서 귀찮은 일만 생기게 하냐고. 짜증 나게.”

“동윤 형 지금 오는 중이래. 실장님 호출인가 봐.”

“저번에 다 말했고 따로 할 말도 없는데.”

“그래도 잘 말씀드려. 수습은 해야지.”

“알았어. 같이 갈 거지.”

“…그럼.”

지금 도착했다는 동윤 형의 메시지를 보고 차정한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 다행히 주차장까지 기자들이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잘 살피며 차정한이 완전히 차에 탈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주차장 바깥으로 나가자 길가에 서 있던 차들이 밴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따돌려 봤자 소속사 앞에 어차피 또 다른 팀의 기자들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쫓아오는 차들을 보다가 다시 포털에 접속해 새로 올라온 기사들을 살폈다.

“유아정 씨 소속사에서 반박 기사 냈어. 친구가 살아서 잠깐 들렀던 거고 너랑은 상관없다고.”

“잘 포장했네.”

“우리도 기사 올라온다. 그날 너 그 시간에 촬영하고 있었고, 촬영지에서 일로 만난 이후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다고 올라왔어.”

“뭘 그렇게 구구절절 올려. 변명하는 것같이. 사실무근이다, 허위사실 유포 시 법적 책임 묻겠다 하면 그만이지.”

“그 말도 아래 있어.”

“다 좋은데 저런 대응할 때 늘 너무 구구절절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부인을 해야 진짜 아니니까 알리바이 다 대면서 아니라고 하는구나… 생각들 하니까.”

턱 아래로 마스크를 내린 차정한이 내가 보고 있는 휴대폰을 가져다가 기사를 대충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다 정리된 것 같은데 실장님 만날 필요 있나.”

“한 말씀 하시겠지.”

잔소리 들을 걸 아는지 차정한이 시트 뒤로 몸을 푹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나는 새로 고침을 할 때마다 새로 올라오는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은 강경한 워딩의 열애 부인 기사들을 내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소속사 앞에는 예상대로 기자들이 잔뜩 와 있었다.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차를 대자마자 내가 먼저 내려 문을 열었다. 차정한은 기자들에게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이지 않고 문 안으로 바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등 뒤로 셔터 세례가 쏟아졌지만, 거기까지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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