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3)

“아시잖아요. 정한이 고집 센 거.”

“알고 있는데도 매번 놀라게 하니까 문제지.”

이제야 웃음이 나는지 동윤 형이 복도 끝 깊숙한 곳에 있는 방문을 웃으며 열었다. 그 문 안은 꼭 호텔 아주 좋은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침대나 욕실만 없을 뿐이지 누가 보면 바 안에 있는 장소인 줄 전혀 모를 것이었다. 차정한이 앉은 소파 뒤로는 서울의 야경이 통유리 밖으로 펼쳐져 있어 이런 상황에서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야, 정한아! 유현 씨 왔다! 난 물이라도 좀 마시고 있을 테니까 데리고 나와. 힘 더 필요하면 부르고.”

“네.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잘해 보라고 내 등을 두드리고 나가는 동윤 형을 보다가 소파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숙인 차정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옆으로 앉아 팔을 잡았다.

“정한아. 나 왔어. 이제 집에 가자.”

취했는데도 목소리는 또 잘 알아듣는 건지 고개를 든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본 눈과 비슷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유현아….”

“그래. 나 왔으니까 얼른 집에 가자. 가서 자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지유현 왔으니까… 이제….”

“응. 나 왔으니까 이제 가도 돼. 긴장 풀어도 돼. 나 왔잖아.”

고개를 끄덕인 차정한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파 뒤로 고개를 젖혀 기대었다. 테이블 위에 양주병이 몇 병이나 놓인 걸 보니 혼자 다 마신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꽤 독한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 나 잡고 일어나.”

나는 차정한의 팔을 잡고 등을 한쪽 팔로 감싼 채 일으켰다. 차정한은 내가 하라는 대로 일어나다가 다시 앉고, 또 일어나다가 앉는 것을 반복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전처럼 끌어안듯 몸을 단단히 양쪽 팔로 안고 일단 일으키려는데 중심을 제법 잘 잡고 일어나던 차정한이 그대로 기울어졌다.

“…아!”

차정한의 키와 취해서 더 세진 힘을 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소파로 넘어지듯 누웠다. 뒷머리가 소파에 닿는 순간 몸 위로 무게가 확 느껴졌다. 상황 파악을 하려고 눈을 뜨자 내 몸 위를 덮은 것처럼 같이 넘어진 차정한이 보였다. 목덜미로 숨이 닿아오는 것에 눈동자부터 발끝까지 힘과 열이 동시에 들어갔다. 나는 얼른 차정한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차정한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그대로 내 몸을 덮은 채 내 목덜미 쪽에서 고개를 들었다.

“…….”

“…….”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런 상황에서조차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먼저 돌리고 차정한의 어깨를 다시 양손으로 밀어냈다.

조금 내 힘에 밀리는 듯 뒤로 물러나던 차정한이 다시 확 내게 다가왔다. 놀라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보자 이번에는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숨이 뒤섞이고… 시선이 뒤엉켜 엉망으로 파고들 만큼 가까웠다. 다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입술이 맞물렸다. 이제 차정한은 완전히 내 온몸을 뒤덮은 채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정, 흐읍, 정한아….”

완전히 맞물린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가까스로 차정한의 어깨를 밀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차정한은 꼭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밀려나서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오기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가만히 있고 싶은 생각도 조금 있었지만, 나의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우리의 내일을 후회로 물들일 것을 알기에 차정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일어나. 집에 가자.”

말을 하고는 있는데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사실 잘 몰랐다. 귀까지 내 목소리가 닿지 않고 그냥 입술만 달싹대는 느낌이었다.

“내 말 들려? 너 진짜 취했어.”

“…….”

취해서 그런 건지 감정이나 생각이 맺히지 않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장난감을 뺏겨 화가 난 애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몸을 조금 더 밀고 소파에서 벗어나려 일어났다. 그 순간 차정한이 나를 그대로 당겨 다시 소파에 앉혔다. 아니, 처박았다는 말이 더 맞았다. 원래 손도 크고, 몸도 커서 힘이 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울 만큼 센 건 처음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처박힌 채 나를 끌어당긴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너 진짜 안 되겠다. 동윤 형 불러올게.”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내 몸 위로 차정한이 쏟아졌다. 아까처럼 몸 위를 완전히 덮으며 올라탄 차정한이 고개를 기울여 내려 입술을 집어삼켰다. 이건 집어삼켰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파고들어 멍청하게 멈춘 내 혀를 문지르며 빨아들였다.

어깨를 아무리 밀어내도 꼼짝도 하지 않아 맞물린 입술이 떨어지도록 고개를 돌렸다. 거칠어진 숨을 내쉰 차정한이 고개를 돌려 드러났을 내 목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뜨겁게 젖은 입술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입속에 고여 있던 숨이 탁 터져 나왔다. 너무나 낯선 감각이었다. 온몸이 간지럽기도 하고, 발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만큼 멋대로 움직였다.

“흐읏…!”

다물린 입술 사이로 숨과 뒤섞인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정한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닿아 있고, 혀가 피부에 닿았다가 빨릴 때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그래도 지금 나의 위치와 우리의 관계, 지켜야 하는 나의 우정을 위해 소파를 짚고 몸을 조금씩 뒤로 빼 상체를 세웠다. 그런 나를 따라 몸을 조금 세운 차정한이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눈을 맞추자마자 다시 달려들어 입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정한아… 흣, 너, 너 진짜…. 형, 형 들어오면……. 제발 좀….”

내가 고개를 돌리면 고개를 돌린 쪽으로 다가와 입을 맞추고, 반대로 돌리면 턱을 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내가 피할수록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굴었다. 피하다가 잡혀 입술이 맞물리면 키스가 더 거칠어졌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턱을 꽉 쥔 채 다시 입술을 겹친 차정한이 다물지 못하는 내 입속으로 다시 파고들어 혀를 문질렀다. 깊게 빨리다가 놓인 혀를 살살 달래듯 머금을 때마다 머릿속에 들어간 힘이 다 빠졌다. 무서워 죽겠는데 기분이 좋아 견딜 수가 없었다. 차정한은 내가 얌전해졌다고 생각했는지 꽉 쥐고 있던 턱을 놓고 고개를 더 기울여 조금 더 깊게 혀를 섞었다. 나는 그의 혀를 마주 머금으며 누구의 타액인지도 모르게 뒤섞여 넘어오는 것을 목 뒤로 넘겼다.

“하…. 유현아.”

이런 상황에서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나는 매번 차정한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늘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했다.

“차정한!”

갑자기 내 셔츠 아래로 무언가가 파고드는 느낌에 놀라 얼른 느낌이 나는 위를 손으로 잡았다. 이미 셔츠 안으로 들어간 그의 손이 잡혔다. 허리께 피부에 닿은 그의 손은 몹시 뜨거웠다. 한 번도 무섭고, 죄책감이 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어쩌다가 꿈에 나온 차정한이 나를 여기저기 만지기만 해도 며칠이나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하으…….”

셔츠 안에 들어간 그의 손을 셔츠 위에서 누른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런 손에 힘이 단단히 들어갈 리가 없었다. 차정한은 조금 멍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내 혀끝을 머금고 빨며 손을 깊이 넣었다.

차정한이 나를 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옷 아래로 들어가 아무것도 닿지 않은 내 피부 위를 부드럽게 만지며 움직였다. 겪으면서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손을 빼 버려야 하는데 부드럽게 몸을 쓸어내리는 손길과 내가 잘 아는 그의 손가락이 살짝 힘을 주어 누르는 느낌에 맺힌 말과 생각이 하나둘 사라졌다.

“흣!”

차정한의 손끝이 앞으로 움직여 유두를 스친 순간 허리가 확 들렸다. 내 귓불을 머금고 문지르던 차정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 보며 다시 손가락을 의도적으로 움직였다. 그가 손끝으로 유두를 스칠 때마다 허리가 비틀리고, 도망치고 싶어 몸이 마구 움직였다. 차정한은 조금도 머뭇대지 않고 계속 유두를 스치기만 하듯 문질렀다. 그것만으로도 울고 싶을 만큼 온몸으로 쾌감이 퍼져 나갔다.

“아…….”

손가락 하나가 더 닿아 유두를 쥐고 비트는 느낌이 나자 우는 소리가 뒤섞였다. 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몸이 벌벌 떨리고, 벌어져 자꾸 이상한 소리나 내는 입술은 자꾸만 말랐다. 차정한이 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끝만 살짝 넣어 내 혀끝을 핥았다. 나도 그의 혀끝을 마주 핥으며 그의 손끝에서 퍼지는 쾌감에 정신없이 무너졌다. 유두를 쥐고 살살 주변을 돌려 만지며 문지르는 손길에 머물러 있던 모든 생각이 깜빡였다.

상황은 뚜렷하지가 않은데 감각은 깜짝 놀랄 만큼 선명했다. 차정한의 뜨거운 손끝, 닿아오는 데워진 숨, 매끄럽지만 제대로 뭔가를 담지는 못하는 그 눈동자까지도 꿈이면 차라리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전혀 꿈 같지는 않았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뜨겁고… 또 너무 쾌감이 분명했다.

#27

?

?

“하아…….”

내 입술 사이로 흐르는 숨도 말도 안 될 만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알고, 무너진 것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그냥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게 더 쉽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정말 이대로 순서도 없고, 갑작스럽게 우리의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셔츠 단추를 풀려고 노력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제발, 제발 집에 가자.”

차정한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몇 번이나 실패하다가 결국, 단추를 풀어냈다. 손을 잡고, 벌어진 단추를 다시 잠그려는데 그 사이로 손가락을 건 차정한이 셔츠를 양쪽으로 확 당겼다. 열린 단추 위아래로 잠겨 있던 단추들이 그대로 여기저기 튀어 나가는 소리가 났다. 차정한은 셔츠 사이로 드러난 내 피부 위로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의 입술이 내 피부에 닿는 것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흣….”

피부 위로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스쳐 지났다. 입술이 움직이는 느낌과 그 사이에서 혀가 나와 피부를 건드리는 느낌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도저히 볼 자신은 없어 눈을 질끈 감다가 그의 입술이 유두 위를 덮는 순간 너무 놀라 눈을 떠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

차정한의 입술 사이로 혀가 나와 그가 건드려 잔뜩 흥분한 것을 핥기 시작했다. 말캉한 혀가 유두를 건드리고, 건드리는 순간 말도 안 되는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내 몸의 일부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몸이 뜨거워 전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차정한이 내 몸 여기저기를 머금고 빨아들일 때마다 믿기 힘들 만큼 야한 소리가 났다. 내가 이 소리를 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자체로도 온갖 자책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으…….”

무너지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 실수인 척 무너져 내리고 싶었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한 번은, 딱 한 번은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뜨겁고, 녹을 것 같은데… 끝까지 가면 더 좋지 않을까. 중심을 잃은 생각들이 멋대로 튀어나와 흐물흐물해진 머릿속을 덮었다. 나는 손을 내려 차정한의 얼굴을 손끝으로 가볍게 만졌다. 차정한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손끝에 입 맞췄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모든 감각과 상황 위로 확 쏟아지는 경고음 같은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있는 힘껏 차정한을 밀어내고 일어나 셔츠를 최대한 오므리고 겉옷 앞을 잠갔다. 밀어내려면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의 이중적인 모습과 마주해 괴로웠다.

“쟤 말 안 들어?”

문이 열리고 동윤 형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뒤돌아 차정한부터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아까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 본 것처럼 소파에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도 저러고 버티네. 안 되겠다. 유현 씨, 같이 데리고 나가자. 밤새우겠어.”

“…네. 제가 이쪽 잡을게요.”

그사이에 더 취해 잠이 든 건지 차정한은 고분고분 나와 동윤 형이 잡고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바를 나가 바로 차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그를 부축하며 닿은 몸 여기저기가 화끈댔다. 차정한의 입술과 손이 닿았던 모든 곳에 아직도 차정한의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숨고 싶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아니,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큰 놈이 술까지 마시고 늘어지니까 감당이 안 되네. 내일 깨면 좀 혼내. 내 말은 듣지도 않아. 그래도 유현 씨 말은 잘 듣잖아.”

“…네. 잘 말할게요. 이제 정말… 이렇게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고 치고 안 치고 문제가 아니라 이러다 어디 길에서 자겠어. 누가 주워 가도 모르겠네.”

차정한을 차에 태운 형이 내가 타는 것을 보고 문을 닫아 주었다. 나는 차정한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집스레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

온통 까맣고, 까맣고, 또 까맸다. 꼭 할 수 있으면서 완전히 밀어내지 못한 내 마음 같았다. 퇴색한 우정, 차라리 무너져서라도 순간 닿고 싶었던 욕심. 나는 정말 뭘 원하는 걸까. 또다시 같은 생각들이 줄을 지어 떠올랐다.

도망가고 싶고, 숨어 버리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리고…….

“…….”

차정한과 자고 싶었다.

집까지 올라와 차정한을 침대에 눕혀 준 뒤에야 동윤 형은 물 한 병을 가지고 돌아갔다. 기분이 엉망이라 나도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취한 애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어 집으로 들어왔다.

잘 자는지, 괜찮은지 그걸 살피러 다시 차정한의 방에 갈 용기는 없었다. 아직도 감각이 선명하게 남은 것 같은 상태로 차정한의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들어올 사람도 없는데 문을 잠그고, 잠갔던 겉옷을 풀었다. 겉옷이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단추가 중간에 여러 개 떨어진 셔츠가 같이 벌어졌다. 이 사이로 차정한이 얼굴을 파묻었던 게 떠올라 지끈대는 머리 위로 묘한 감각이 따라붙었다. 나는 얼른 겉옷과 셔츠를 벗고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찢어진 셔츠를 최대한 작게 접어 옷장 안으로 아무렇게나 처박았다.

지금까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술에 잔뜩 취한 차정한과 키스하는 일은 실수처럼 존재했지만, 그 이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옷 속으로 들어오던 손의 느낌과 피부에 닿던 뜨거움, 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던 그 손길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나와 눈을 맞추며 혀를 움직이던 차정한의 얼굴과… 혀끝이 내 몸에 닿던 게 자꾸 떠올라 열이 올랐다. 생각만 하는데도 다리 사이가 저릿하고 아랫배가 이상해졌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갈 것만 같아 일어나 벗었던 겉옷을 집어 들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여기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번에 아래까지 내려가 앞으로만 걸었다. 익숙한 버스정류장까지 도망치듯 가자 이상하게 숨이 찼다. 낮에도 버스를 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사람이 없는데 버스가 끊긴 이 시간에 정류장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텅 비고 차가운 의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뒤로 몸을 기댔다. 차정한과 키스하고 난 뒤처럼 숨이 차고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너무 좋아하는데, 그래서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그게 요즘은 유난히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나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의지해주는 차정한이 있어 행복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그에게 그저 좋은 친구가 되기만 하면 되는데,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 쉬워 보이는 일이 내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이대로는 머지않아 밑바닥이 드러날 것이었다. 차정한에게 내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날 게 분명했다. 그러기 전에 끝내야 했다. 내 사랑을 끝내든, 우정을 끝내든 뭔가 하나는 정리하는 게 맞았다.

말은 사랑이나 우정 둘 중 하나를 끝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랑을 끝내는 게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차정한에게 내 사랑을 앞세워 뭔가를 원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너도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13년이나 좋아했으니 너도 내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 어떤 보상을 바라고 차정한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의 우정이 흔들리지 않게 내가 잘 숨길 수 있었고, 타인들이 누리는 사랑의 모든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내 사랑은 내 책임의 영역이고, 거기에서 생긴 모든 감정은 내가 다 감당해야 했다. 바라는 게 생기면 지금까지 내가 고수해 온 마음이 틀어지게 될 거고, 방향을 잃은 감정은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나는 차정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입으로 말을 해서 알리는 방법 외 그 어떤 것도 싫었다.

“…….”

그러니 이제는 그만두는 게 맞았다. 내가 더는 감출 자신이 없고, 감당할 여력이 없다면 문제가 될 감정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어떻게 그만두지. 어떻게 해야 정리할 수 있지. 가장 원초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시작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처럼 끝도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이제 끝내자, 그 생각 하나로 감정이 정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하는 마음은 왜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을까. 좋아하는 감정 안에서는 내 의지로 아주 많은 것들을 숨길 수도 있고, 누를 수도 있는데 왜 가장 큰 사랑은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사이로도 한 번씩 집에 혼자 있을 차정한이 걱정됐다. 취했을 때 한 번 잠만 들면 얌전히 아침까지 잔다는 걸 알기에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혼자 두고 도망쳐 나온 이유를 차정한은 까맣게 모를 테니 그게 조금 미안했다.

“…하아.”

뒤로 등을 기댄 채 눈을 오랫동안 감고 있다가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피스텔이 아니라 차정한의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늘만 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13년을 사랑한 마음이 하룻밤 사이에 끝날 수는 없었다. 서두른다고 빨리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겨우 가라앉은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광고 속 차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

왜 순간 잊고 있었을까. 여기 그렇게 오래 앉아 너를 보고, 너를 담고, 너와 함께 있었는데. 겨우 가라앉았다고 생각한 마음이 차정한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엉망이 되어 버렸다. 광고 안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차정한은 그저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차정한. 술만 마시면 왜 그래. 내가 그렇게 편해? 술에 많이 취한 김에… 다 내려놓고 그렇게 했다가 다음 날 아무것도 기억 안 해도 될 만큼?”

비약일지도 몰랐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일도… 기억하지 마.”

다 잊어. 그래야 나도 하나둘 내가 꽁꽁 숨긴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내 주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13년이나 함께한 나의 감정들과 인사를 나누고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원래 나에게 가장 크게 존재하던, 차정한과 같은 우정,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만 남게 될 것이었다.

“…오늘은 네가 밉다.”

마주하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등을 깊게 기댔다. 그리고 또 차정한과 함께인 그곳을 한참이나 벗어날 수 없었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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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스텔에 가서 조금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 연 약국에서 술 마신 다음에 마시면 좋은 드링크를 사서 차정한의 집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도 차정한은 어제 눕힌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답답했는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옆에 아무렇게나 놓은 것 빼고는 그대로였다.

스케줄이 빈 날이니 그냥 오래 자게 놔두자 싶어 조용히 방을 나와 물 한 병을 꺼내 들고 소파에 앉아 어제 보다가 만 드라마를 틀었다. 차정한이 깨지 않을 만큼 적당히 소리를 틀고 7화를 보고, 8화까지 다 봤을 때 차정한이 방에서 나왔다.

“왜 벌써 일어났어. 더 자.”

“배 탄 것 같아서 깼어. 멀미나.”

“이거라도 좀 마셔. 이게 제일 효과가 좋다더라.”

드링크를 열어서 내미니 그걸 받아든 차정한이 목마른 사람처럼 단숨에 전부 비우고, 내가 가져다 둔 물도 한 병을 전부 비웠다. 그리고 괴로운 얼굴을 하고 소파 뒤로 몸을 흐트러지게 기대었다.

“어제….”

“…….”

“너 왔었지. 나 데리러.”

“…응. 기억나?”

“기억나.”

“…….”

“난 항상 너 본 것까지는 기억나. 널 봐야 버티고 있던 걸 다 놔 버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다음 일은 역시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상도 하고 있었고, 바라던 일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아주 조금은 상처였다.

역시 나는 이제 이 사랑을 끝내야만 했다. 바라는 게 생기고, 혼자만의 사랑으로 상대에게 서운함이 생기면 안 되는 거니까. 짝사랑은 어디까지나 상대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고, 원망해서도 안 되는 나만의 감정이어야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내가 말한 적도 없고, 감정을 보인 적도 없는데 차정한이 나의 감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적어도 알아주기를 바라며 조금 내비치기라도 해야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차정한을 눈치 없다고 말이라도 할 텐데 나는 감정을 그렇게 보인 적도 없고, 알아주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종종 그를 좋아하는 다른 여자 연예인들과 마주하며 상처 받기도 하고, 혼자 의연하게 굴지 못해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건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그의 앞에서 상처 받은 얼굴을 숨기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정말 술 그렇게 마시지 마. 어제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다음부터는 나 데리러 안 갈 거야.”

“화났어?”

“…그래. 어제는 좀 화났어.”

“나 뭐 실수했구나.”

“…집에 가자고 해도 말도 안 듣고, 형이랑 나랑 진짜 힘들었어. 나 가면 집에 간다고 했다면서 왜 내가 갔는데도 안 간다고 자꾸 그래.”

“미안해. 다음부터 진짜 그렇게 안 마실게. 원래 그렇게 마셔도 월초, 월말 이렇게 텀이 좀 긴데 그게 너무 가까이 이러니까 더 힘들었지. 진짜 미안해. 앞으로 진짜 그렇게 안 마셔.”

“…나 믿고 마시는 거 아는데, 그러지 마. 내 말 다 알아듣고 그럴 정도는 돼야 나도 널 데리고 오지. 내 말도 안 듣고, 못 알아들으면 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등을 기대고 있던 차정한이 몸을 조금 세워 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표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이라 밉던 마음이 또 나도 모르게 풀어졌다.

“약속할게. 이제 안 그래.”

“…….”

“안 그럴게. 유현아.”

“…알았어.”

“나 때문에 화나서 또 잠 제대로 못 잔 거야?”

“…걱정되잖아.”

더 미안해진 얼굴을 한 차정한이 손을 뻗어 습관처럼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런 손길을 처음 느끼는 것도 아닌데, 닿는 순간 온몸에 불이 켜지는 것처럼 감각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내가 말 안 들으면 그냥 두들겨 패서 데리고 가지. 착해 가지고….”

“넌 내가 취해서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서 데리고 갈 수 있어?”

“내가 널 어떻게 패.”

“나도 똑같아….”

“가서 좀 자. 나 조용히 있을게. 좀 쉬어. 너 힘들어 보여. 새벽에 와서 지금 나보다 먼저 깨서 드링크도 사 오고 한 거 아냐.”

나를 자리에서 일으킨 차정한이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앞으로 부드럽게 밀며 방으로 움직였다. 방문을 열고 나를 침대에 앉힌 차정한이 블라인드를 다 잘 쳐서 방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푹 자. 나 알아서 술 다 깨고 반성하고 있을게.”

“…알았어.”

“저녁에 밥 먹으러 가자. 우리 전에 간 한정식집 맛있었잖아. 거기 가서 밥 먹자. 밥 먹은 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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