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43)

“그게 벌써 몇 년이야. 난 좋았지만, 너한테는 너무 네 시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해. 그 생각이 어제야 들더라.”

“억지로 한 거 아니야. 싫었으면 안 했을 거야. 나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지도 않고, 싫은데 친구라고 참고 몇 년이나 같이 일할 만큼 바보도 아니야.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그냥… 중요한 일 많이 앞둔 너한테 옮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 싫었고, 잠도 못 자고 계속 들락날락할 널 아니까 그게 미안해서 그랬어.”

“앞으로는 말하고 가. 데려다만 주고 난 올 테니까.”

“…….”

“그렇게 도망가듯 가지 말고. 없어서 놀랐잖아. 전화 걸면서도 조마조마했어. 네가 다시는 안 받을까 봐.”

차정한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왜 여기까지 와서 다 아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지 못했는지 알았다. 이 안에 내가 있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를 두고 가 버렸다는 부모님처럼 나도 가 버렸을까 겁이 났을지도 몰랐다.

“…….”

안아 주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그를 안고 등을 쓸어 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그걸 참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럴게. 다… 다 말할게.”

“그래, 그거면 됐어.”

자리에서 씩 웃으며 일어난 차정한이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전기 포트에 생수를 열어 쏟아붓고 스위치를 누른 그가 몇 개 남아 있는 티백을 꺼내 들었다.

“따뜻한 거 같이 마시자. 아프니까 다 나을 때까지 내가 해 주는 거 다 받기만 해.”

“…응.”

“대답도 잘하고 예뻐라.”

애들한테 하는 것 같은 말을 소리 낸 차정한이 흘끗 나를 보며 웃었다. 컨디션도 분명 어제보다 괜찮아졌고, 머리 아픈 것도 나아졌는데 나는 그 웃음을 보고 따라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

내가 다시는 전화를 안 받을까 봐 조마조마했다는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아까는 정말 일어나 그에게 다가갈 뻔했다. 내가 보여도 되는 감정과 보이면 안 되는 감정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었다. 차정한과 함께 지켜야 할 우정의 선을 몇 번이나 넘다 못해 그보다도 더 심한 스킨십을 해 버린 후로 자꾸만 마음이 헛된 기대를 품었다.

“아…!”

다른 생각을 하다가 차정한이 놓아준 머그를 잘못 잡아 손끝으로 확 퍼지는 뜨거움에 손을 떼었다. 차정한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손을 뻗어 얼른 그런 내 손을 잡아 살폈다. 그의 손이 내 손끝을 쥐는 순간 온몸에 긴장과 함께 힘이 들어갔다. 그날 새벽 내 위로 쏟아지던 그의 숨과 무게, 그리고 온몸을 휘감던 쾌감과 열기가 그대로 살아나 생각과 마음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데인 거 아냐?”

“…아니야. 괜찮아.”

손을 빼는데 차정한이 다시 조금 고집스럽게 내 손을 잡아당겼다. 밀어도 다시 내게 확 다가오던 게 떠올라 다리가 오므라들고, 귓가가 홧홧했다. 차정한이 손끝을 잡고 문지르는 것뿐인데 꼭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내 몸을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심해.”

“…응. 잠깐 다른 생각을 했더니.”

차정한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아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제 정말 이렇게 버틸 수가 없다는 걸 그때 정확히 깨달았다.

선을 그어야 했다. 이제 정말 내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그 선을 따라 잘라내야 했다. 틈이 벌어지고, 균열이 생겨 감히 선을 넘을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우정만을 단단하게 지키거나 우정조차 지키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만 택할 수 있었다. 애초에 친구를 친구가 아닌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우정을 지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차정한에게 바라는 게 무엇도 없었던 내가 자꾸 그와의 무언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키스를 떠올렸고,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피부를 만지던 그의 손길을 떠올렸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고, 감각은 낙인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 지울 수도 없었다.

“…….”

너와 사랑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술에 취하지 않은 네가 나를 끌어안고, 다가와 입 맞출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유현아….’

나처럼 숨이 뜨거워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모습이 차정한의 얼굴 위로 겹쳐 흔들렸다. 내 위로 쏟아지던 뜨거운 숨, 벗어나야 하는데 벗어나고 싶지 않던 그의 무게와 입술, 손길, 그리고 열기. 차정한과… 닿고 싶었다. 다시 그가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 내게 키스한다면 이번에는 그를 밀어내지 않을 것 같았다.

“…….”

어쩌면 평범하고 일반적인 짝사랑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이 생각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참담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오랜 시간 동안 잘 숨겨 왔던 것들이 손에 하나도 잡히지 않고 마음대로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차정한과 눈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나의 사랑이 방향을 잃기 시작했다.

#31

?

?

내가 내내 사랑을 숨기던 루틴이 망가지자 나는 수없이 많은 위기와 맞닥뜨렸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에 긴장을 하게 됐고, 별것도 아닐 일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치기도 했다. 차정한이 평소 내게 하는 사소한 행동에도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설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차정한이 나를 만지고, 내 위로 올라타 내려 보던 게 잊히지를 않았다. 겨우 잠이 들어도 꿈에 그가 나와 나를 만졌고, 나는 그런 차정한을 꿈에서도 끌어안지 못했다.

이런 꿈 때문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게 자책감이었다. 자책으로 시작한 하루가 즐거울 리 없고, 가벼울 리도 없었다. 뭘 먹어도 맛있지 않고,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웃을 일이 있어 웃고 있어도 마음은 조금도 웃지 못했다.

차정한이 그런 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내가 아프고 난 뒤에 컨디션이 내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촬영 어땠어?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좋았어. 왜 그런 날 있지. 한 번에 생각대로 다 되는 날. 오늘이 그랬어. 손발이 잘 맞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날 진짜 기분 좋은데.”

“맞아. 그래서 간만에 기분 좋게 찍었어. 저녁은 먹었어?”

“그럼. 시간이 몇 신데. 넌?”

“팬들이 촬영장으로 보내 준 거 먹었어.”

“그럼 쉬어. 난 갈게.”

간다는 말에 차정한이 셔츠 단추를 풀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만,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로 보는 차정한을 보다가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오피스텔로 간다는 거야?”

“…응. 오늘부터는 가서 자고, 아침에 출근할게.”

마음을 정리하는 첫걸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차정한과 나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내내 같이 있으면 정리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차정한을 보면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너무나 잘 보였다. 정리보다 그에게 설레고, 긴장하며… 차정한과 닿았던 시간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됐다.

“출근?”

“아깝게 오피스텔 그렇게 비워만 두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너 케어는 문제없이 하던 대로 할 거야. 너 일 갈 때, 집에 올 때 내가 같이 다 할 거고, 촬영장 같이 가자고 하면 그것도 당연히 갈 거야. 달라지는 거 없어. 그냥… 동윤 형도 너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것처럼 나도 오피스텔로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요즘 진짜 왜 그래. 다른 사람처럼. 내가 너 매니저로 같이 지내는 거 아니잖아.”

“친구여도 집에 가야지.”

셔츠에서 손을 아예 뗀 차정한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이었다. 그가 가지 말라고 늘 하는 것처럼 매달리면 나는 또 주저앉을 게 분명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줘. 갈게. 내일 열 시까지 올게.”

차정한에게 인사하고 현관으로 나가는데 그대로 나를 앞질러 움직인 그가 그대로 현관을 막고 섰다. 내려 보고 또 올려 보며 중간에서 마주한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지 마.”

“…비켜 줘.”

“가지 말라니까. 너 여기서 하루 이틀 있었어? 오피스텔보다 여기에 네 짐이 더 많아. 같이 살자고 서로 말만 안 했다뿐이지 동윤 형, 회사 다 우리 같이 산다고 생각해.”

“…….”

“그런데 늘 너만, 너만 아니라고 해. 몇 년을 여기 있으면서도 늘 얹혀사는 것처럼 편해 보이지가 않아. 넌 늘 갈 생각만 하지. 한 번씩 이렇게 갑자기 공과 사 구분하면서 선 그을 때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너를 단순히 편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래. 이 한 문장이면 되는데 말을 고르고 또 골라야 했다. 잔뜩 뒤엉켜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 사랑과 우정을 분리해 우정만 남기는 과정은 내게도 너무나 어렵고 힘들었다. 이렇게 차정한에게 냉정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할 게 좀 있어.”

“무슨 생각.”

“혼자 일단 생각할 일이야. 혼자 있어야 생각할 수 있어서 그래. 너 케어 하는 일에 지장 없도록 할 테니까 좀 봐주라.”

“내가 지금 일에 지장 생길까 봐 너한테 이러는 거 아니잖아.”

“생각 다 끝나면 말할 테니까… 당분간은 좀 봐줘. 부탁할게.”

부탁이라는 내 말에 말문이 막힌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던 차정한이 조금 화가 난 것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 크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크게 숨을 내쉬어도 하나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버튼을 누르고 등을 기대는데 막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차정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내가 누른 1층을 취소하고, 주차장 버튼을 다시 눌렀다.

굳이 묻지 않아도 나를 데려다주러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차 키를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혼자 갈 수 있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왜 나왔냐는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다물고 있는 입술을 열기만 해도 울 것 같아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까지 고개만 푹 숙이고 울렁이는 마음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차정한은 뒤로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차에 안 타고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았는지 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 조수석에 태우고, 몸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앉은 앞으로 쑥 들어오는 그의 얼굴에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었다.

차정한은 안전벨트를 죽 당겨 내 몸을 꼭 결박하는 것처럼 가로질러 채웠다. 고요한 차 안으로 딸깍 안전벨트 버클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차정한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기와 닿을 것 같은 체온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대로 몸을 빼내고 문을 닫은 그가 운전석으로 움직였다. 내가 차에서 뛰쳐나가면 바로 잡아 다시 태우기라도 할 것처럼 조수석을 보며 가서 탄 차정한이 아무 말도 없이 시동을 걸었다.

차는 너무나 당연하게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라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말을 한마디도 나누지 않아 그런지 유난히 더 길게 느껴졌다. 나는 오피스텔 문 앞으로 차를 세운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내려.”

“…….”

“들어가.”

“…조심히 들어가.”

많은 말을 고르고 골랐는데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이었다. 차정한은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문을 닫자 차가 움직였다. 멀어지는 차정한의 차를 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가 없고, 서운할 텐데도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간 차정한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가서 그의 마음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 가면 감정들이 분리할 수 없도록 더 단단하게 굳어질 거고, 그때는 분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서운하고 어색해도 이렇게 지내다 보면 차정한도 나와 따로 지내는 게 더 편해질 것이었다. 우리도 일을 하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을 때는 같이 있고, 같이 있어야 하는 무언가가 끝나면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렵지만, 곧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차정한도 분명 곧 이런 생활에 익숙해질 것이었다.

씻고 나와 잠은 오지 않지만, 몸이 피곤해 침대에 누웠다. 요 며칠 내내 머리가 무겁고 몸이 너무 빨리 지쳤다. 내가 주로 하는 생각들, 그리고 요즘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들이 너무나도 무거워 그걸 버티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생활하기가 조금 힘이 들었다. 거기에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는 건지 평소보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몸은 벌써 힘이 다 빠져 축 늘어졌다.

‘몇 년을 여기 있으면서도 늘 얹혀사는 것처럼 편해 보이지가 않아.’

정적 속으로 어김없이 차정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불편해 보이는 나를 보며 너는 늘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언제고 너를 버리고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해하며 나를 바라본 걸까.

‘넌 늘 갈 생각만 하지.’

요즘은 너랑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해. 네 손이 조금만 닿아도 하고 있던 모든 생각이 새빨갛게 물들어. 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내가 마주할 때면 견딜 수가 없어. 네 옆에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너를 배신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네 옆에 편히 있기가 힘들어.

“…….”

숨이 턱 막혔다. 13년 동안 이어지던 사랑을 갑자기 마음먹었다고 해서 끝낼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을 줄은 몰랐기에 막막하고, 한숨만 흘렀다. 이게 정말 실현 가능한 일인지 미래의 나에게 묻고 싶었다.

차정한을 다 잊었는지, 잊었다면 얼마나 힘들었는지…. 만약 잊지 못했다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오늘 나의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지.

* * *

차정한에게 일이 끝나면 집에 가겠다고 말을 한 뒤로 그는 내게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같이 스케줄을 가기도 하고,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냥 일에 관련된 말을 하거나 중간에 동윤 형과 같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늘 다정하고 먼저 다가와 관심을 보이던 차정한은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최대한 말을 아끼고, 너무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다. 스케줄이 끝나고 갈 때도 동윤 형에게 말해 나를 먼저 오피스텔 앞에 내려 주라고 말했다. 그게 열흘 정도 반복되자 우리 사이가 전보다 조금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내 붙어서 그가 나에게 쏟는 특별한 우정을 전부 받으며 마음을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열흘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우리의 모습에 이러다가는 친구로도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스케줄이 조금 빨리 끝나 해가 질 무렵에 오피스텔로 들어와 멍하니 점점 벌어지는 우리를 떠올리는데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보이는 차정한이라는 이름에 입술이 다 떨렸다. 스케줄에 문제가 생겼거나 할 가능성이 있어 얼른 떨림을 감추고 받으니 곧장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야.

“…응. 무슨 일 있어?”

-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나올래? 같이 저녁 먹자.

“…….”

- 얘기도 좀 하고.

“…….”

- 스케줄 있을 때 아니면 이제 나 안 만날 거야? 생각할 거 있다고 했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나랑 관련된 생각일 거 아냐. 아무 상관도 없는데 네가 갑자기 이럴 리가 없잖아. 뭔지 말을 해야 나도 같이 생각을 하든 해결을 하든 할 거 아냐. 아무 말도 없이 얼마나 기다려라 이런 말 하나도 없이 갑자기 이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차정한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변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만 아주 작게 소리 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게는 그 최소한의 소리도 엄청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차정한에게는 아니었다.

- 너 지금 나 고문하는 거야.

“…….”

-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 줘. 왜 그러는 건지 알려 줘.

“…….”

- 나 좀 살려 줘, 유현아. 너 그렇게 가 버리고 아무것도 못 하겠어.

고문. 차정한이 말한 고문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차정한의 입장에서 고문이라는 말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었다. 나 혼자만의 감정을 나 혼자 책임지려고 정리하면서 차정한을 고문하고 있다니……. 이게 뭔가 싶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나갈게. 저녁 같이 먹자. 어디로 갈까?”

- 주차장으로 내려와.

“알았어.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길게 몇 번이나 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 버린 지금, 차정한을 만나러 간다는 자체가 어쩌면 미친 짓일지도 몰랐다. 그냥 적당히 달래고, 또 적당히 어르면서 전처럼 평온한 척,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의 모습으로 지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드러나 버렸다. 나는 이제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어떻게 이 마음을 그렇게 꼭꼭 숨기고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차정한이 차에서 내렸다.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 차정한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입술을 조금 끌어 올려 겨우 미소 지었다.

차에 타서도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이건 지난 열흘의 결과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안전벨트를 당기는 내게 차정한이 물었다.

“비싸고 맛있는 거 먹자. 오랜만에 같이 저녁 먹는 거잖아.”

“…그래. 그러자.”

그가 좋아하는 호텔 레스토랑까지 가는 동안에도 딱히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열흘 전이라면 서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고작 열흘 만에 침묵이 익숙해졌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 다들 적응할 수밖에 없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빨리 적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차정한이 미리 연락을 해 둔 건지 호텔 문 앞으로 몇 번 본 적 있는 VIP 손님 담당 직원이 나와 있었다. 직원은 차에서 내린 차정한과 나를 레스토랑으로 안내해 미리 식기와 여러 가지가 세팅된 방으로 안내했다.

메뉴를 봤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딱히 뭘 먹고 싶은 게 없기도 하고, 메뉴가 지금 내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정한은 메뉴를 내려 두는 나를 보며 내가 좋아할 것들로 대신 주문했다. 그가 주문하는 것들은 전부 전에 같이 왔을 때 내가 먹고 맛있다고 했던 것들이었다.

“안 나오면 어쩌나 진짜 고민했어. 쳐들어가서 왜 그러는 건지 물어야 하나, 아니면 알아서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하다가 전화한 거야.”

“나도 나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랑 통화하면서 계속 고민했어.”

“왜 나왔어? 내가 매달려서?”

“…고문.”

“고문?”

“내가 너 고문하고 있다는 말 들으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

물을 한 모금 마신 차정한이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마주 앉아 얼굴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코끝이 아릿해졌다.

“우리 처음 친해졌을 때, 네가 그랬지. 서로 숨기는 것만 없으면 된다고. 뭐든 서로에 대한 건 말해서 바로바로 풀면 좋겠다고.”

“그랬지. 난 혼자 생각 다 하고, 나한테 마지막에 통보하는 부모랑 살았잖아. 나도 그 일에 관련이 있는데 나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혼자 생각하고, 기다리게 하고, 다 결정한 뒤에 내가 상처를 받든 말든, 놀라서 머리가 돌든 무너지든 그런 건 신경도 안 썼으니까.”

“…….”

“그런데 유현이 넌 안 그랬어. 처음부터 다 나랑 같이 생각하고, 내 의견을 묻고, 내가 너랑 다른 대답을 해도 끝까지 들어 줬어.”

“…….”

“그게 그렇게 좋더라. 집에 가서 자려고 누웠는데 네가 내 말 듣는 얼굴이 계속 생각났어. 처음이었거든. 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

나는 차정한에게 상처를 준 그의 부모님과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나 혼자 책임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 사랑은 내가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워진 순간 차정한까지 뒤흔들어 버렸다. 급기야 차정한은 이유도 모른 채 내게 고문과도 같은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별일 아닌 것처럼 즐거운 식사를 하고, 전처럼 지내야 하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그 유혹이 가장 컸다.

“맛있겠다. 얼른 먹어. 너 점심도 거의 안 먹었잖아.”

음식이 여러 번 나눠 나와 이야기가 끊기는 게 싫다며 차정한은 애피타이저와 메인 음식을 한 번에 달라고 말했다. 식사가 끝나면 디저트 요청을 할 테니 그전까지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는 차정한의 요청대로 음식은 한 번에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나는 앞에 놓인 스테이크와 여러 음식을 보면서도 끝까지 고민했다.

“유현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안 해도 되는데 멀어진 것처럼 그러지 마. 너랑 멀어지는 기분 싫어.”

“…….”

“그거 알아? 나 열흘 동안 내내 네 눈치만 살핀 거. 얼마나 힘들었는데.”

열흘 동안 내 눈치를 살피느라 힘들었다는 차정한의 말을 듣는 순간 그에게 내 마음을 처음으로 전부 말하고 싶어졌다. 쏟아내고 싶었다. 열흘이라는 말이 너무 강하게 마음을 치고 지났다.

차정한에게 들키고 싶어 시작한 것도 아니고, 알아주기를 바라며 이어 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누가 시켜서 13년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이 사랑은 오롯이 나의 감정이고, 나의 선택이며… 나의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소리 내지 않는 게 더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나만 조용히 하면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으니까.

우리는 내일도 친구일 거고, 다시 좋은 사이로 돌아가 많은 날을 함께 전처럼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13년 만에 처음으로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충동적이지 않은 내가 마주한 최초의 충동이었다.

“…….”

너무나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차정한에게 사랑을 바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열흘 동안 힘들었다는 그의 말에 13년의 시간을 쏟아내고 싶은 것을 보면. 내가 너무 유치하고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얘기 하자. 우리 오랜만에 같이 저녁 먹는 건데 무거운 거 싫어. 아, 맞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뭔데?”

“김태웅이랑 백무영 만났던 날 말이야.”

차정한과 조금 더 깊게 닿았던 날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이 떨렸다. 차정한의 시선이 내 손에 닿는 게 느껴져서 얼른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편치 않은 마음에 마주 쥔 손이 조금 차갑고 불안했다.

“그날 너 왔을 때 나 누구랑 같이 있었어?”

“…아니. 혼자 있었어.”

“그래?”

내 대답을 들은 차정한은 뭔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술에 잔뜩 취한 날은 늘 지나고 나면 아무 기억도 하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날을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술을 많이 마셔 정신이 없던 날에 대해 시간이 지난 뒤 이렇게 묻는 게 처음이라 몹시 긴장되고 떨렸다.

“왜? 뭐 그날… 문제라도 있었어?”

어떻게 물어야 이상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정한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나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아니, 그날 내가 누구랑 같이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좀 있거든. 너도 알겠지만, 나 술자리에서 사고 안 치잖아. 네가 와야 너 믿고 뻗으니까. 그런데 그날은 사고 친 기억이 좀 나서 백무영한테 누가 있었는지 물어봤거든. 그 새끼들이 다른 새끼들보다 좀 낫다뿐이지 더럽게 노는 거야 나도 아니까.”

“…물었더니?”

“정색하고 아니래. 나 만날 때는 절대 그런 짓 안 한다는 거지. 그러다가 내가 기사라도 나면, 자기들도 까발려질 거고, 그럼 이제 회사에서 망신당하고, 심하면 자리까지 잃으니까.”

점점 이야기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정한과 눈을 맞추기가 힘들고, 눈을 맞추는 것도 힘들어 속이 울렁대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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