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이 한 번씩 울릴 때면 깜짝 놀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차정한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를 떠올렸다. 나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나인 것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응, 누나.”
- 응, 누나야. 어디야? 정한이랑 놀아? 조용하네.
“…집이야. 혼자 있어.”
- 아, 정한이 오늘 스케줄 있어? 하긴 바쁜데 크리스마스라고 놀고 이런 거 없겠다.
“…크리스마스?”
누나가 하는 말에야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알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 버린 걸까. 밝은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니 자꾸만 마음이 따끔거렸다.
- 혼자 있지 말고 카페라도 놀러 와. 우리 크리스마스 음료랑 케이크 나왔단 말이야. 와서 누나랑 놀자. 저녁에 매형이랑 파티도 하고. 누나 집에서 자고 내일 같이 집에 가자.
“집?”
- 얘가 또 잊었네. 내일 네 생일이잖아.
생일이라는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부모님과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할 상태가 아니라 생일이라는 자체가 더 무겁게 다가왔다.
“…깜빡했어.”
- 그럴 줄 알았어. 전화하기를 잘했네. 나가서 먹자고 했는데 엄마가 해서 먹이고 싶으신가 봐. 정한이 내일도 바빠? 되면 같이 오라고 하시는데.
매년 생일을 같이 보냈던 차정한을 부모님이 챙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올해는 바쁘다고 말하면 되겠지만, 내년, 또 그다음 해에는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벌써 막막했다.
“정한이는… 내일도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원래 연말에 다들 바쁘기는 하지. 너는 그럼 어떻게 할래? 지금 카페 안 올래?
“나도 할 일이 좀 있어서…. 내일 집으로 일찍 갈게, 누나.”
- 그래, 그럼. 내일 일찍 와. 오랜만에 우리 가족 다 모이겠네.
“그러게…. 내일 점심때쯤 갈게.”
누나와 통화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했다. 12월 25일이라는 날짜와 오후 4시 40분이라는 시간이 그제야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선배의 결혼식에 다녀온 뒤로 딱 보름이 지나 있었다.
“…….”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간인데도 온통 블라인드를 쳐 놔서 밖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거실로 나가 창을 완전히 덮은 블라인드를 사이를 손가락으로 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언제 눈이 온 건지 아래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가족끼리 나와 차에 오르는 사람들도 보이고, 둘둘 짝을 지어 가는 사람들도 길에 많이 보였다. 낯설게 보이는 바깥을 보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올라 아무렇게나 누웠다. 이런 무기력함을 느껴보는 것도 정말 평생 처음이라 그냥 이렇게 몸에서 힘을 빼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 * *
꿈을 꿨다. 교복을 입은 차정한이 손에 케이크 박스를 들고 웃고 있는 꿈이었다. 나는 꿈속 차정한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열아홉 번째 생일이 시작된 12월 26일 자정에 우리 동네 놀이터로 나타난 차정한의 얼굴이었다.
차정한은 내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하고 싶었다며 놀이터에서 초에 불을 붙였다. 노래까지 부르기는 좀 그러니 틀어 주겠다고 생일 축하 동요 같은 것을 틀기도 했다. 나는 그 동요도 웃기고 검색해서 찾은 건데 안 들어 봤더니 이런 게 나왔다고 당황하는 차정한이 웃기기도 해서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웃느라 초가 반이나 녹아내린 뒤에야 불을 끌 수 있었다.
‘생일 축하해, 지유현. 올해는 내가 처음 맞지.’
‘응, 맞아. 고마워.’
‘내년에도 내가 첫 번째로 축하할 거야. 앞으로도 계속.’
웃는 그 얼굴이 내게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나를 축하하려고 이렇게 추운 밤에 케이크를 들고 여기까지 와서 첫 번째로 축하했다고 좋아하는 차정한이 너무 좋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같이 생일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아 너무너무 행복했다.
‘어제 가족이랑 잘 보냈어?’
‘그냥 오늘이 생일이니까 어제는 밖에 나가서 저녁 먹고 했어. 넌?’
‘난 오늘만 기다렸지.’
‘…….’
‘나한테 크리스마스는 네 생일 전날이니까.’
차정한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전부 마음에 닿아 녹아들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우리는 새벽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시간까지 같이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차정한은 우리 아파트 앞까지 와서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보고 돌아갔다. 나는 부모님과 누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집으로 들어가 방에 누워 아침이 될 때까지 너무 두근거려 조금도 잠들지 못했다.
스무 살 생일도, 또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스물세 살…. 작년 스물아홉의 생일까지 매해 차정한과 늘 함께였다. 차정한은 초 단위로 시간을 보며 자정이 되면 가장 먼저 내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 차정한과 함께하며 나는 점점 내 생일이 너무나도 특별해졌다. 그 모든 특별함 안에는 전부 차정한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서른 살 생일에도 당연히 차정한과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우리의 매일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대부분 다정하게 흘러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잘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
나는 경계가 모호한 꿈과 현실의 생각을 넘나들다가 침대를 벗어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나 대학 동기들에게 축하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커피나 케이크, 상품권 같은 선물들도 도착해 있는 것을 하나씩 확인하고 고맙다는 대답을 보냈다. 정말 고마웠지만, 너무 기뻐 넘치는 마음으로 그걸 받아들이고 답할 상황이 아니라 미안할 따름이었다.
누나에게 온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12시까지 집으로 오라는 말을 확인하고 답한 뒤 얼른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가족들과는 그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의 이런 일 때문에 부모님과 누나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를 본 엄마와 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기에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웃는다는 게 이렇게 어색하고 힘든 일인 줄도 처음 알았다.
“얼마나 바빴으면 이렇게 말랐어. 어디 아팠어? 조금 창백한 것 같은데.”
“요즘 좀 바빴어요. 감기 기운도 좀 있고 해서…. 지금은 괜찮아요. 엄마도 요즘 많이 바쁘셨을 텐데 건강은 괜찮으세요?”
“엄마야 늘 괜찮지. 아프면 엄마한테 말을 하지.”
“많이 아팠던 거 아니에요. 그냥 조금…. 정한이가 잘 챙겨 줘서 금방 괜찮아졌어요.”
“엄마가 정한이한테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그러네. 오늘 같이 오면 좋았을걸. 정한이 시간 될 때 한번 같이 와. 엄마가 맛있는 밥 해 줄게.”
“…네. 그럴게요.”
엄마는 점심부터 맛있는 파스타와 스테이크, 집에서 구우신 피자 같은 것들을 잔뜩 차려 주셨다. 아버지가 저녁에 오실 때 맛있는 케이크를 사 오신다고 하셨다며 웃는 엄마를 보니 그래도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누나는 그래도 자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하지만, 이렇게 셋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즐거운 이야기가 흐르고, 나는 웃음이 끊이질 않는 나의 엄마와 누나를 바라보았다. 내 이야기도 뭔가 하고 싶은데, 딱히 즐거운 이야기를 할 게 없어 그냥 듣기만 했다.
“정한이는 어디 아픈데 없이 건강해? 스케줄 많아서 힘들 텐데.”
“건강해요. 운동도 하고, 쉬는 날에는 또 푹 쉬려고 해서….”
“정한이도 엄마 아들이잖아. 아들들이 그렇게 바빠서 걱정이기도 한데, 그래도 둘이 같이 있어서 마음이 놓여. 우리 유현이 착한 거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정한이도 너한테 정말 잘하잖아. 엄마보다도 더 챙기고, 더 잘하고. 그래서 둘이 같이만 있으면 안심이 돼. 얼마나 다행이니. 인생에 그렇게 좋은 친구 만나기도 힘든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희 걱정은 마세요, 엄마.”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 먹을 때까지 조금 쉬라는 엄마의 말씀에 방으로 올라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이사 온 이 집에서 나는 얼마 살지 못했다. 정원도 있고, 2층으로 되어 있어 방이 위에 있는 것도 좋았지만, 학교 앞으로 나가 독립해서 이 집에 별로 추억이나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여기는 부모님이 사는 집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낯선 2층 내 방이 지금은 더 좋았다. 내가 이곳에 오래 있었다면 분명 이 방에 차정한과 관련된 추억들이 있었겠지만, 얼마 살지 않아 여기는 딱히 차정한과 함께했던 기억이 없었다.
내가 언제든 오면 지낼 수 있게 방 안에는 내가 고등학생 때 쓰던 책상과 의자, 그리고 새로 산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내가 없을 때도 매일 청소를 하시는지 올 때마다 방에 먼지 하나가 없었다. 답답한 속을 누른 채 침대에 앉은 순간 토기가 올라왔다. 얼른 방 밖에 있는 욕실로 가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다. 속이 텅 빈 느낌이 난 뒤에야 힘이 쭉 빠지며 울렁이던 속이 가라앉았다.
겨우 일어나 입을 몇 번이나 헹구고, 양치질도 몇 번이나 했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얼굴이 보기 싫어 거울 쪽은 절대 보지도 않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침대에 올라 눈을 감았다. 목이 아파 그런 건지, 아니면 속이 아파 그런 건지 잠들기 전까지 계속 눈물이 났다.
#35
?
?
다시 가족들을 마주하기 전까지 괜찮지 않은 기분을 괜찮은 척을 할 수 있는 정도로 바꾸려 애썼다. 울어서 눈이 부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울었다는 것을 알 만큼 심하지는 않아 잘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먹은 것을 전부 비워 낸 속은 아직도 조금 아팠다. 한동안 뭔가를 많이 먹지도 않았고, 한 곳에 신경을 과하게 쓰고 있어 그런지 뭘 해도 편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이 모습조차 내가 혼자 책임지고 가야 할 것을 알기에 계속 괜찮다고, 오늘은 괜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찮지 않아도 나는 괜찮아야만 했다. 주문처럼 세뇌하듯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저녁에는 아버지와 매형이 같이 들어오셨다. 온 가족이 다 모이자 점심때보다 더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근사한 요리들과 아버지가 사 오신 멋진 케이크, 그리고 매형이 준비한 비싼 와인과 샴페인까지 무엇 하나 즐겁지 않은 게 없었다.
이 즐거운 분위기 안에서 오늘 생일인 내가 즐겁지 않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열심히 먹고, 또 열심히 마셨다. 묻는 말에도 다 잘 대답하고,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도 노력했다. 원래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되던 일인데 오늘은 노력을 해야만 할 수 있다는 게 조금 속상하고 죄송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이렇게 나를 축하해 주는 가족들을 슬프게 만들 것 같아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처남 요즘도 친구 스케줄 거의 다 같이 다녀?”
“아니요. 요즘은 정한이가 필요할 때만 같이 다녀요. 작품 촬영 들어가면 그땐 바쁜데 그 외에는 다 같이 다니지는 않아요.”
“그렇구나. 아니, 다른 건 아니고 누나 카페 일 처남이랑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카페 일을요?”
“하라는 건 아니고, 우리 아이 계획도 있고, 그렇게 되면 누나 혼자 카페 일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서. 남한테 팔기도 아깝고, 괜찮으면 처남이 일도 잘하고 하니까 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매형의 말에 은근 내 대답을 기대하는 시선들이 닿아 왔다. 내게 굳이 계속 걱정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 일하는 것을 생각은 해 봤으면 좋겠는 가족들의 마음인 것을 알기에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카페 일 좋아요, 저도. 누나 카페 열고 몇 번 일 해 보면서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고…. 좋았어요. 일단은 기회가 되면 제가 누나 잘 도울게요.”
“우리 유현이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 그리고 나 저번에 독감 걸려서 쉴 때 유현이가 며칠 카페 봐 줬잖아. 그때 여자 손님들이 유현이 보러 왔었다니까. 나중에 내가 다시 나갔더니 동생은 이제 안 나오냐고 나한테 얼마나 많이 물었는데.”
“안 나와서 좋다는 거 아니야? 내가 어설프게 일해서.”
“절대 아니거든. 친동생이냐고, 여자 친구 있냐고 묻는 사람도 많았어.”
여자 친구라는 말에 엄마는 유독 관심을 보이며 내 연애사가 궁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한 적도 없고, 관심을 보인 적도 없기에 이런 화제가 나올 때마다 궁금해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어떤 말도 할 게 없고, 할 수도 없었다.
차정한의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또 나오지 않을 때도 전부 이 자리에 차정한이 있는 것 같은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13년 동안 우리 가족과 가깝게 지내며 차정한은 이미 우리 가족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함에도 완전히 의연할 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만, 얼른 이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식사 후, 케이크를 먹고, 치즈, 과일과 같이 술도 조금 마셨다. 집에 가기 전 2층에 두고 온 걸 가지고 내려온다는 핑계로 올라가 먹은 걸 다 또 토했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 지금 내 기분을 들키지 않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누나가 집으로 가는 길에 나를 내려 주었다.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린 매형이 필요한 것을 사라며 내게 상품권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괜찮다는데도 매형은 안 받으면 서운하다며 끝내 내게 주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다시 차에 타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누나와 매형에게 인사하고, 그 차가 완전히 눈에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종일 속에 고여 있던 것 같은 숨을 뱉어냈다. 숨을 뱉었을 뿐인데 바닥으로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입속에 맴도는 민트 향, 따끔대는 목…. 차정한이 없는 오늘.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아직은 너무나 낯설었다.
‘서른 살 생일 때는 우리 뭘 하고 있을까.’
내 스무 살 생일에 차정한은 아주 먼 미래를 그리는 것처럼 내게 물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어렸고, 또 감정을 숨기는 게 쉽지 않아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딱 하나를 떠올렸다.
서른 살에도 너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서른 살의 너는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말을 해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며 차정한은 씩 웃고 내 뺨을 문질렀다.
‘하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아? 대답이 바로 안 나오네. 이럴 땐 나 감동하라고 서른 살 생일에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이런 대답을 해야지.’
‘서른 살 생일에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말했지만, 차정한은 내가 자신의 말을 따라 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귀엽다는 말과 함께 얼굴을 양쪽에서 눌러 비비고 문지르는 차정한을 보며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게 농담으로 흘러갔든 진심으로 그에게 닿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에 차정한과 함께라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했다.
“…….”
멀게만 느껴졌던 바로 그 서른 살 생일이 오늘이었다. 그때로 돌아가 차정한이 내게 다시 묻는다면, 나는 그냥 지금처럼 우리 똑같이 지내고 있을 거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그냥 평범하게 좋은 친구로, 너랑 하루하루를 지금처럼 보내면 좋겠다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머무니 그래도 내내 집 안에 있던 때보다 조금 정신이 들었다. 오피스텔 아래에서 몇 번이나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추고 조금 더 찬 공기 속에 머물렀다. 부모님 댁에 있을 때만 해도 빨리 이곳으로 돌아와 혼자 있고 싶었는데 막상 오고 나니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기분은 뭘까.
“…….”
문득 이 오피스텔도 차정한이 마련해 준 것이라는 게 떠올랐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은 걸까. 여러 생각이 많아 미처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진작 이걸 알고 불편한 내색을 했던 모양이었다.
오피스텔에서도 빨리 나가야 했다. 내 짐들을 보관하고 가끔 와서 쉬라는 용도로 차정한이 마련해 준 곳이기는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내가 그를 상처 준 이상 빨리 여기를 비우고 나가는 게 맞았다. 차정한의 집에 있는 짐 정리도 해야 하고, 오피스텔 정리도 해야 하는데 도대체 나는 빨리 처리해야 할 것들을 잊은 채 보름 동안 갇혀 뭘 하고 있었나 싶었다.
내일부터 지낼 곳을 최대한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짐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집만 구하면 이사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차정한의 집에 있는 내 짐들 역시 대부분 차정한이 사 준 것들이라 챙길 게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을 구해 나가려면 일단 차정한의 집에 가서 거기부터 정리를 해야 하는데 그 집에 갈 자신이 사실 없었다. 매일 드나들었고, 거의 살다시피 한 곳인데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잊은 기분이었다. 내가 거기 발을 붙일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동윤 형에게 말을 해서 처리를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스케줄을 간 사이에 가서 정리를 알아서 하는 게 나을까. 어떤 쪽도 다 차정한을 불편하게 할 것만 같아 조심스러웠다.
집을 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오피스텔을 비운다고 차정한에게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알아서 눈치껏 깨끗하게 비우는 게 좋은 건지 그조차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보름 동안 생각하고 처리를 해도 모자랐을 텐데 그 시간 동안 넋을 놓고만 있었다는 걸 떠올리니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한숨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에 딱 하나 있는 집을 향해 코너를 돌았다. 차정한이 수시로 드나들어도 불편하지 않아야 해서 얻은 특별한 층이었다.
“…….”
얼마 전 내가 아팠을 때 아침부터 여기 와서 들어오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가 생각나 눈동자로 또 열이 몰렸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잠시 멈춰 눈을 깊게 감고 자꾸만 열이 오르는 감정을 짓눌렀다. 잘 눌려서 숨기는 대로 잘 숨던 감정들은 이제 더는 숨고 싶지 않은 듯 내가 누르는 사이로 빠져나와 내 위에서 쏟아졌다.
그래도 울 것 같은 마음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본 저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늦었네.”
짙은 색의 긴 코트를 입고, 문 옆으로 등을 기대고 선 남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눌렀던 감정이 그대로 온몸을 적시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
차정한이 나를 찾아왔다.
#36
?
?
세상이 멈추고, 나와 차정한 단둘이 남은 것 같았다. 나는 차정한을 눈으로 보면서도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나를 내내 바라보던 차정한이 기대고 있던 등을 느릿하게 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부모님 댁 다녀와?”
처음 닿아 온 말 역시 내가 생각한 것과 달라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조금 멍하니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응.”
“기다렸어.”
“…….”
“두 시간쯤.”
“…전화하지 그랬어. 그럼 빨리 왔을 텐데….”
“가끔 난 너 기다리는 게 좋더라.”
“…….”
“네가 기다리는 나 보면 놀라는 것도 좋고, 전화하지 그랬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좋아. 그냥 그런 너를 보고 싶을 때가 있어.”
차정한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선 내게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문 앞으로 데려갔다. 내 손에 닿은 그의 손이 차가워서 속상했다.
“오늘이 그랬어. 너 기다리고 싶더라.”
내 손을 놓으려던 차정한이 다시 잡아 살짝 위로 들어 올려 잡은 손을 내려보았다. 눈으로 보기에도 떨리는 손을 본 차정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놓았다.
“왜 이렇게 떨어.”
“…….”
“일단 들어가자.”
떨리는 손을 한 번 잡아 누른 뒤 얼른 문을 열었다. 차정한은 나를 먼저 들어가게 하고 뒤에서 따라 들어왔다. 아침에 그래도 어느 정도 집 정리를 해놓고 나가 다행이었다.
“…뭐 마실래? 추웠을 텐데 차 줄까?”
“마실 건 됐고 앉아.”
소파에 앉는 차정한을 따라가 맞은편으로 앉았다. 앞에 차정한이 있다는 것도 사실 믿을 수가 없고, 그날 이후 이렇게 마주하는 게 처음이라 너무 떨리기도 하고, 또 무섭기도 해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침묵이 불안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게 닿아 오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떨림이 느껴지는 입을 열었다.
“…오피스텔 곧 나갈게.”
“…….”
“진작 나갔어야 맞는 건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생각을 못 했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내 짐도 정리할게. 그런데 그중에 대부분이 다 네가 나한테 준 거라…. 그건 두고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내가 그냥 두고 가면 네가 번거로울 것 같고 해서……. 그것만 어떻게 할지 말해 주면 내가…….”
“두고 나가라 그러면 두고 나가고, 가져가라고 하면 가져가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야?”
“…응. 그래야지.”
“나가지 말라고 그러면 그 말도 들어?”
생각하지 못한 대답에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차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내내 생각하던 얼굴이라 그런지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얼굴이 그게 뭐야. 사람들이 너 보면 다 알겠다.”
“…….”
“갑자기 혼자 고백하고,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혼자 실연당하고, 혼자 집 나갈 생각, 짐 정리할 생각하는 거.”
“…미안해. 미안해, 정한아. 널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아서 말한 건데……. 너 화나게만 했어.”
“나 화 안 났어.”
차정한은 분명하게 소리 냈다. 화를 억누른 목소리도 아니고, 참고 일단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를 안심시키려는 얼굴도 아니었다.
“솔직히 화낼 일은 아니잖아. 뭐…. 네가 사실 날 싫어하는데 내가 매달려서 억지로 참고 친구 놀이 해 준 거라고 말했으면 화가 났겠지만, 사랑…한다는데 그게 내가 화낼 일은 아니지. 물론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
“너한테 사랑받는다는 거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화낼 일 아니야.”
“…….”
“몰랐던 일이니까 놀라기는 했고, 생각할 것도 많았어. 내가 술 마시고 너랑…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가장 충격이었어. 네가 그걸 나한테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
“우리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랬겠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한 목소리에 대답을 하려다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입만 괜히 열었다가 닫는 것을 반복했다.
“그날이 처음이었어?”
“…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이 처음 있었는데 네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을 리가 없을 것 같아서.”
“…….”
“솔직하게 말해 줘.”
“…그전에도 몇 번… 그런 적 있었어.”
“…….”
차정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괴로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
“정한아….”
“…….”
“…미안하다고 안 했으면 좋겠어.”
“…….”
“난… 난 좋았거든.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 빼면 정말 좋았어. 그리고 나중에는 네가 기억하지 못해서 더 다행이라고도 생각했어….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를 위로하기 위한 말도 아니었고, 이 상황을 면하기 위해 하는 말도 아니었다. 조금의 거짓도 없고, 조금의 더함도 없는 진심이었다. 나는 차정한과 닿았던 모든 순간이 좋았다. 따라붙는 죄책감이야 그의 탓이 아니기에 닿는 순간만 떠올려 보면 참 많이 설레었고, 좋았었다.
“너 혼자 힘들었을 거 아냐.”
“…….”
“나는 기억 못 하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했고, 넌 그런 나 보면서 혼자 많이 속상했을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