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 힘들지 말라고 내가 매번 그랬었는데, 널 혼자 버티게 한 게 나였다니…. 나한테 너무 화가 나고, 너 혼자 힘들 텐데 나한테 내색도 못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날 대했을 거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해.”
“…….”
“그래서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어. 널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더라.”
“아니야…. 정한아, 그러지 마. 나는 정말 좋았어. 미안해하지 마. 제발…. 그러지 마. 네가 그러면 나, 나 널 볼 수가 없어. 내가 너한테 숨긴 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미안하지, 왜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
겨우 제대로 본 차정한의 얼굴 역시 까칠해져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너무나도 잘 보여 마음이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오늘 네 생일인데.”
“…….”
“아침에 눈을 떴는데 레스토랑 예약 안 한 게 생각이 났어. 부모님 모시고 늘 같이 저녁 먹었었잖아. 그래서 레스토랑에 전화해서 여섯 명 예약한다고 거기까지 말을 했는데… 그때서야 집에 네가 없다는 게 떠올랐어.”
“…….”
“스케줄도 없었어. 알잖아. 나 네 생일은 죽어도 비워 두는 거.”
“…….”
“너 볼 낯이 없는데 오늘은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왔어. 너 나가라고 온 거 아니야. 화나서 따지러 온 것도 아니고.”
차정한의 말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가 그동안 잘 지내지 못한 것처럼 차정한도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아파 눈가로 열이 올랐다.
“기다리면서 계속 생각했어. 무슨 말을 할까. 난 어떻게 하고 싶어서 여기 온 걸까. 난 네 마음을 들었고, 이제는 잘 알고 있고, 아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대로 시간 지나면서 자연히 어떤 쪽으로 정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싫고…. 알지, 나 성격 급한 거.”
“…….”
“계속 생각하다가 널 봤어.”
“…….”
“널 보는데 답이 나오더라. 그렇게 안 나오던 답이.”
“…….”
“널 잃고 싶지 않아.”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말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떨어져 지냈던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멀어지는 생각을 한 내가 상상하지 못한 말이라 놀랍기도 하고, 이런 순간에도 차정한이 좋아 나를 이룬 모든 것들이 그를 향해 집중했다.
“…내가 거짓말했는데도? 그렇게 오래 널 속이고… 네가 나한테 다 말할 동안 난 이렇게 다 숨기고 있었는데… 화 안 나? 속이는 거, 이렇게 혼자 다 생각하다가 터뜨리듯 말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래. 이런 거 싫어해. 난 이기적이고, 내 감정이 우선이라 나만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통보받고 나 혼자 정리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싫어. 알리지 않을 수는 없으니 알리기는 하는데 최대한 마찰은 피하고 싶어서 가장 최후의 순간에 알리고, 바로 사라져 버리는 거 정말 최악이야.”
“…그런데 왜…….”
“날 사랑한다며.”
“…….”
“나한테 감추던 게 사랑이라면서.”
“…….”
“나도 몰랐는데 사랑은 그런 식으로 들어도 화가 안 나는 건가 봐.”
“…….”
“유현아. 나도 우리 관계 깨고 싶지 않아. 네가 앞으로도 나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차정한의 말이 나를 사랑한다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우리의 관계를 이대로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도 너 좋아해. 전에는 네 마음을 몰랐고, 이제는 알게 된 거… 달라진 건 그거밖에 없어.”
“…맞아. 전에는 네가 몰랐고, 지금은 내 마음을 네가 알게 됐지. 그게 달라졌어. 그런데 정한아. 그게 달라져서… 전부가 달라진 거야.”
“…….”
“친구로 너를 좋아해…. 내 인생에 있어서 친구로만 생각해도 네가 가장 소중해. 나한테 차정한이라는 친구를 빼면 남는 게 거의 없어.”
“…….”
“그런데 나…. 널 친구가 아닌 감정으로도 많이 사랑해. 그래서 너와 닿을 때마다 좋았어. 무섭고, 들키면 끝날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는데… 그래도 꼭 그 순간에는 너도 날 사랑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
“…….”
“내가 널 사랑해도 우린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어. 네가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제 아니야…. 정한이 네가 다 알잖아.”
차정한이 알게 됐다는 것, 딱 하나 달라진 그것은 우리의 아주 많은 것들을 뒤흔들 것이었다.
“네가 전처럼 나를 대할 수 있을까?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고민할 거야. 너의 그 행동이 나를 상처 주지는 않을지 설레게 하지는 않을지 고민하게 될 거고, 나도 평소처럼 반응하려다가… 내가 널 사랑하는 게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조금 더 덤덤하게 말하고, 조금 더 감정을 숨기며 대하게 될 거야.”
“…….”
“…그러다가 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
“지금보다도 어색해질 거고, 되돌릴 수도 없을 거야. 나 너한테 불편한 존재 되고 싶지 않아.”
“유현아.”
“오피스텔은 집 구하는 대로 정리해서 나갈게. 매니저 일은 동윤 형, 회사랑 얘기해서 새로운 사람 오면 인수인계 다 하고 네 스케줄에 지장 없도록 할게. 네 집에 있는 짐은 아까도 말했지만, 거의 네가 다 준 거라서…. 어떻게 하는 게 너한테 더 편할지 말해 주면 그렇게 정리할게.”
내 말을 끝으로 차정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움직이지 않아 내가 먼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차정한과 함께여서 참을 수 있었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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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한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 사이로 나오는 목소리가 낮고 무거웠다.
“그래.”
“…….”
“오피스텔은 집 구해서 정리하면 되고, 매니저 일은 동윤 형이랑 회사에 말해서 해결하면 되고, 집에 있는 짐도 내가 말하는 쪽으로 네가 정리하면 되고…. 그래, 그건 다 그렇게 정리하면 되는데… 나는?”
“…….”
“나는 어떻게 정리할 건데.”
“…….”
“네가 다 정리하고 나면 앞으로 그냥 서로 연락 안 하면 되는 거야?”
“…….”
“새로 온 매니저랑 스케줄 지장 없이 계속하면 돼?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전에 지유현이랑 오래 일했었지. 뭐 그냥 이러면 되는 거야?”
정리. 차정한과 나의 사이는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집이나 짐보다도 사실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지금 우리의 관계였다. 정리라는 말이 너무 딱딱하고 매몰차 보이지만, 나는 차정한과의 이 관계를 정리해야 했다.
“그래. 네 말도 맞아.”
“…….”
“행동에 제약이 생기겠지. 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쳐도 나는 내가 너무 심했나 싶을 거고, 너는 내가 너무 장난에 반응했나 싶어 서로 눈치도 볼 거고, 불편해질 수도 있어. 알아.”
“…….”
“아는데, 다 아는데… 유현아. 난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한테 네가 지금까지 쭉 있었던 것처럼 나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이기적인 마음인 거 알아.”
“…….”
“아는데…. 나 너 없으면 안 돼.”
“…….”
“내가 너 없이 못 산다고 할 때마다 그냥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 줄 알았지. 진짜야. 나 너 때문에 살았고, 네가 있어서 내일이 기다려졌어. 지유현 너 없으면 안 돼.”
몹시 불안한 사람처럼 구는 차정한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불안정한 그의 시간을 전부 알고 있기에 더 그랬다. 흔들리는 차정한을 잡고, 그가 외롭고 아플 때마다 옆에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 주던 그 많은 시간을 기억하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계속 날 사랑하면 되잖아.”
“…….”
“같이 있자, 유현아. 우리가 어떻게 끝내.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락과 같이 있자는 말은 지금까지 내가 들은 그 어떤 말보다도 달콤했다. 내 사랑을 알게 된 뒤에도 나를 탓하지 않고, 같이 있자고 말하는 차정한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매달리고 싶기도 했다. 아직은 갈피가 잡히지 않지만, 노력하다 보면 또 새롭게 정립된 관계에 익숙해져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새롭게 만들어질 관계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널 사랑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같이 있어.”
“왜 못 있어. 이제 내가 아니까 너도 편하게 생각하면 되잖아. 네가 날 사랑한다는 말 듣고 불쾌했다면 이런 말 못 하겠지만, 안 그랬어. 불쾌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너랑 더 가까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
“나도 너 좋아해. 우리 둘 중 한 명만 살 수 있다고 하면 난 무조건 널 살릴 만큼 좋아해. 네가 말하는 사랑이랑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많이 달라? 위하는 마음이잖아. 너는 내가 중요한 거고, 나는 네가 중요한 거잖아.”
“…….”
“넌 나랑 같이 있기 싫어? 감정의 이름이 그렇게 중요해? 13년 동안 같이 지낸 시간을 끝내 버릴 만큼?”
같이 있고 싶었다. 차정한이 내게 쏟는 감정이 무엇이든 그에게 내 사랑을 있는 그대로 다 보이고 싶었다. 13년, 14년, 15년…. 우리 앞에 붙는 모든 시간을 차정한과 함께하고 싶었다.
“…난 감정의 이름도 중요해. 너한테 말하기 전까지는 안 중요했어. 어떤 이름으로든 너랑 같이 있을 수만 있으면 됐으니까. 그런데 이젠… 네가 알잖아. 네가 내 감정의 이름을 알잖아. 아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 나만 아는 게 아니라 이제 너도 아는데.”
“…….”
“너랑 같이 있으면 나 너한테 자꾸 바라게 될 거야. 몰랐을 때는 모르니까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알아 버린 이상 나도 너한테 자꾸 받고 싶어질 거야.”
“…….”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게 잘못도 아니고, 내가 서운해할 일도 아닌데…. 난 서운해할 거고, 넌 그런 나한테 아마… 미안해하겠지? 어색해질 거고, 피하게 될 거야. 난 그러기 싫어. 내 사랑은 내 거고, 너한테 말한 것도 이렇게 될 거 각오하고 말한 거고…. 책임도 내가 다 질 거야.”
“…….”
“좋은 친구로 오래 남고 싶었어. 그 마음은 진심이었어. 미안해, 정한아. 정말 미안해….”
내 말을 들은 차정한이 답답한 듯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을 연 그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기다란 그의 뒷모습을 내가 더 외롭게 만든 것 같아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지유현. 너는 왜 자꾸 끝내고, 정리하고, 안 보는 쪽으로만 생각해. 난 그렇게 하기 싫어. 너 잃기 싫다고.”
“…….”
“말 좀 해 봐. 그렇게 이미 다 마음 정한 사람처럼 불안하게 하지 말고.”
“…맞아. 나 마음 다 정했어. 아까 말한 것처럼 오피스텔부터 비울게. 회사에는 내일 가서 그만둔다고 말씀드릴 거야.”
“돌겠네, 진짜. 누구 마음대로 그만둬?”
“…미안해. 정한이 너한테는 내가 할 말이 없어. 친구 자리 못 지켜서 미안해.”
“미안하면 있어. 무슨 이름으로든 있으라고. 너만 있으면 되니까 제발 그 나간다는 소리랑 그만둔다는 말 좀 하지 마. 네가 그런 말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미치겠는지 너도 알잖아. 내가 그 말 제일 무서워한다는 거, 너 없는 거 못 견디는 거 누구보다 네가 다 알잖아.”
계속 말이 같은 자리를 돌았다. 이대로는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같은 이야기만 하게 될 것 같았다. 계속 이야기를 해도 앞으로 나아갈 것 같지 않아 지금은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일… 스케줄 어떻게 돼?”
“오전에 하나 있어. 저녁에 들어올 거야.”
“그럼 내일 저녁에 갈게.”
“…….”
“너 있을 때 짐 챙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너 없는 집에 들어가서 혼자 마음대로 가지고 나오기도 그렇고.”
“유현아. 너 진짜 왜 이래. 네가 이러니까 나 진짜 이제 무서워.”
“…조심해서 가. 내일 여덟 시쯤 갈게. 혹시 늦어지면 말해 줘.”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는 내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차정한이 나보다 성큼 더 앞으로 걸어 앞을 막아섰다. 다시 뒤돌아 방을 나가려고 하자 그대로 또 나를 앞질러 문을 막은 차정한이 무너지듯 숨을 내쉬며 내 팔을 가두듯 양손으로 힘주어 쥐었다.
“유현아,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다시 안 볼 것처럼 왜 그래.”
“오늘 밤에 각자 다시 생각해 보고, 내일 다시… 다시 이야기하자. 응?”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여기 있는 거 불편하다고 또 새벽에 어디 다른 데 나가고 그러지 마. 내가 갈 테니까 여기 있기만 해. 내가 산 집이라고 너 여기서도 바로 나가 버리면 나 진짜 미쳐.”
“안 그럴게. 여기 있을게.”
“그래. 네 말 믿어.”
팔을 한 번 더 힘주어 쥔 차정한이 놓으려다가 나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복잡한 시선과 마주했다. 차정한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내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진짜 죽을 것 같았는데….”
“…….”
“…그래도 너 보니까 살겠다.”
그의 목소리가 어깨 위에서 울렸다. 그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허물어져 죽을 만큼 울고 싶었다.
잠시 내 어깨 위에 얼굴을 묻고 있던 차정한이 몸을 바로 세우고, 쥐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운 것처럼 젖은 그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내내 참고 있던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갔다. 턱과 입술이 떨리며 순식간에 뺨이 뜨거워졌다. 차정한은 나보다 먼저 손을 들어 내 눈가와 뺨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울지 마. 생일에 왜 울어.”
“…….”
“이런 분위기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
“생일 축하해, 유현아.”
“…….”
“올해도 어제가 정말 길더라. 매년 길어져. 아주 매해 최악의 크리스마스야.”
“…….”
“같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보고, 말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듯 쥐고 눈물을 문질러 닦은 차정한이 머리를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차정한이 이렇게 다정하게 닿아올 때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갈게. 나오지 마.”
“…….”
“네 말대로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내일 얘기하자. 내일이 안 되면 또 그다음에 얘기하고, 될 때까지 내가 너를 이해하고, 너도 나를 이해해서 우리 둘 다 괜찮을 때까지 얘기하자.”
“…….”
“내일 보자.”
두 발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아플 만큼 꽉 물었다. 발소리마저 다정한 그가 멀어졌다. 현관으로 나가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난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차정한이 닿았다가 떨어진 팔과 어깨, 그리고 그를 담은 눈과 머리, 마음…. 그에게 반응한 나의 모든 것이 너무 따뜻하고 아파서 나는 한참이나 울었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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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아침에 일어난 뒤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이 시간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것 같기도 했고, 시간이 너무 잘 가서 곧 차정한을 만나야 한다는 게 떨리기도 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바라든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흘렀다. 결국, 와 버린 시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차정한의 집까지 걷기 시작했다.
요즘 내내 집에 있고, 밖을 나가도 이렇게 걸은 적이 없어 조금 걷고 싶었다. 그사이 더 차가워진 공기와 마주하자 그래도 정신이 깨는 것 같았다.
차로 꽉 찬 도로와 추워서 몸을 웅크리고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로 나만 너무 느리고 조용했다. 그래도 차정한에게 가까워지는 게 좋아서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파트에 도착해 아직 가지고 있는 카드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몇 년이나 탔으면서 고작 며칠 타지 않았다고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왜 변하지 않아도 되는 건 이렇게 쉽게 변하면서 조금 변했으면 좋겠는 감정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니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만 잔뜩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추었다. 차정한도 내내 나를 기다리며 있었는데 내가 이걸 누르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벨을 눌렀다. 차정한이 이 집으로 온 뒤에 처음으로 눌러 보는 것이었다.
“…….”
벨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 옆으로 조금 비켜섰다. 차정한이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왔어?”
“…응. 나 아니면 어쩌려고 묻지도 않고 문을 열어. 너 인터폰 화면도 확인 안 하잖아.”
“내가 넌지 아닌지 그것도 모를까 봐?”
차정한은 비켜서며 문을 활짝 열었다. 오피스텔보다 여기서 지낸 시간이 더 긴데 이상하게 조금 어색함이 느껴졌다. 차정한이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와 방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잡아 세웠다.
“뭐가 그렇게 급해. 오자마자 짐만 가지고 가려고?”
“…그래야지. 짐 가지러 온 거잖아.”
“네가 무슨 이삿짐센터야? 챙길 때 챙기더라도 그 전에 나부터 봐. 너 내 얼굴은 봤어?”
“…….”
“안 봤지. 어떻게 나 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그래. 네가 지금 여기 얼마 만에 온 건데. 나 보고, 내 얘기 좀 들어 주라. 네 말대로 어제 다시 생각 많이 했어. 그 얘기는 들어야지.”
내 어깨를 뒤에서 잡은 차정한이 나를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 따뜻한 차를 가져와 앞에 놓아주었다.
“오늘 춥던데 옷이 그게 뭐야. 왜 그렇게 얇게 입었어.”
“…몰랐어. 이렇게 추울지.”
“…….”
“집에만 있었거든. 어제 잠깐 부모님 댁 가긴 했지만, 어제 날씨가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추웠던 것 같기는 한데…. 기억도 잘 안 나고, 날씨 생각까지 하지도 못했어.”
“무슨 생각을 하느라 날씨 생각을 못 해. 내 생각 했어?”
“…….”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날씨 같은 생각이 조금도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내 머리와 마음을 가득 채운 생각이 전부 차정한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난 네 생각만 했어. 나 원래도 네 생각 많이 하는데 그날 이후로는 스케줄 할 때도 네 생각만 했어. 어제도 마찬가지고.”
“…….”
“너도 그랬어?”
“…그랬어.”
내가 대답하자 차정한은 몸을 조금 앞으로 빼며 가까이 앉았다. 차정한이 나를 설득하려고 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나도 너만 생각하고, 너도 나만 생각하는데 그걸 왜… 이름으로 구분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전처럼 왜 같이 못 지내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아, 진짜 모르겠어.”
“…….”
“네가 날 사랑하는 걸 내가 알아서 문제랬지. 유현아. 난 알아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들은 내가 괜찮다는데, 알면서도 너랑 같이 잘 지내고 싶다는데 뭐가 문제야. 문제 될 거 없는 거잖아. 넌 나 안 봐도 돼? 나 안 보고 살 수 있어?”
몹시 불안해 보이는 차정한의 얼굴을 보자 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고맙다가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하기도 했다. 차정한은 틈을 주면 내가 자신의 말을 뒤집을 이야기를 할 거라 생각했는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난 너 없이 못 살아. 네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닌데 내가 왜 널 못 봐야 하는데. 네가 한 말 밤새 생각했어. 같이 있어도 어색해질 거라고 했지. 행동도 달라질 거고, 전처럼 편하게 못 지낼 거라고.”
“…응. 그럴 수밖에 없잖아.”
“아니. 난 전처럼 지낼 거야. 어색하지 않게 할 수 있어.”
“그래. 넌 괜찮을 거야. 전처럼 나랑 똑같이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래, 나 할 수 있다니까.”
“어색하지 않게 나를 대할 수도 있을 거고, 전이랑 똑같이 대하기도 하겠지. 넌 할 수 있어. 날 친구로 좋아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차정한은 조금 충격받은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혼자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을 믿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차정한이 사랑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정한아. 난 그게 안 돼. 널 친구로도 좋아하지만, 그 이상으로도 생각하니까.”
“…….”
“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지고… 내 다리에 머리 대고 눕고 할 때 무슨 생각 해?”
“…생각?”
“안 하지. 생각할 게 없을 거야. 그냥 별 의미 없이 습관처럼 나한테 하는 거잖아. 맞지.”
차정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차정한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난…. 네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얼굴을 만지고… 내 다리에 누울 때마다 숨이 잘 안 쉬어져.”
“…….”
“…너무 떨리기도 하고, 긴장도 되고, 내가 그걸 티 내고 있지는 않나 걱정도 돼.”
“…….”
“그래서 그래. 네가 모를 때는 숨길 수 있었지만, 이제 네가 아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해? 전처럼 숨길까? 아니면 떨린다고 말할까?”
미안한 얼굴을 하는 차정한을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내게 미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미안해.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하지 마. 네가 미안할 일 아니야.”
“내가 밉지 않아?”
“나 너 안 미워. 내가 왜 널 미워해. 밉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원망도 안 해.”
“…어떻게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내 마음도 모르고, 안 다음에 이렇게 속도 모르고 이런 말이나 해대면 원망스러워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그러겠지?”
나는 차정한에게 바라는 게 없었다. 나는 늘 나 자신에게만 바라는 게 많았다. 잘 숨기기를 바랐고, 영원히 차정한과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게 늘 긴장하기를 바랐다. 무엇도 그에게 원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나한테 바라는 게… 없어?”
“…응. 없어.”
“어떻게 바라는 게 하나도 없어? 좋아하는데 어떻게 없어? 아무리 네가 숨겼어도 내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런 적 없어?”
“한 번도 없었다고는 말 못 해. 왜 없었겠어.”
“그게 뭔데. 나한테 바라는 거 다 말해. 왜 너 혼자 가지고 있어. 다 알게 된 거 숨기지 말고, 남겨 두지 말고 나한테 다 말해.”
“나 혼자 시작했고, 그러다가 나 혼자 죄책감에 너한테 말한 거야. 그러니까 나 혼자 책임지고 알아서 끝낼게.”
“끝내? 날 사랑하는걸?”
“…응.”
할 말을 잃은 것 같은 얼굴로 차정한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감정을 추스르는 것처럼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끝낸다는 말은……. 그러니까 앞으로 나 안 본다는 거야?”
“…….”
“다시는 이렇게 여기 오지 않을 거고, 내 전화도 안 받을 거고, 나랑 만나지도 않을 거라는 말이야?”
“…….”
“대답해 봐.”
“…어. 맞아.”
내 대답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차정한이 창가로 다가갔다. 어제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이야기를 계속해도 결국,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빙빙 돌 것이었다. 나는 창밖을 보는 그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 내 짐을 가지고 올 때 썼던 캐리어를 꺼내 침대 위에 펼쳤다. 텅 빈 안을 보니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차정한이 사 준 비싼 옷과 물건들을 제외하고 넣다 보니 캐리어가 겨우 반 정도 찼다. 칫솔이나 이런 건 버리는 쪽으로 정리하면 되니 여기 넣을 것은 이게 전부였다. 나는 옷이 엉망으로 뒤섞이지 않게 안에 지퍼를 잠가 고정하고, 캐리어를 닫았다. 한 손으로 너무 쉽게 들릴 만큼 가벼운 캐리어를 끌고 나가려는데 문을 비스듬히 막고 선 차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사 준 건 왜 다 두고 가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