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이렇게 매몰차. 난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도 너랑 끝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 레스토랑에서 네 얘기 들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
“네가 지금 손 한 번 안 대고 그대로 둔 저 안에 있는 거 전부 내가 네 생각 하면서 산 거야. 네가 나 등쳐서 뜯어내기라도 했어? 내가 너한테 고맙고, 너한테 돈 쓰는 게 좋아서 샀던 거 다 잊었어?”
“…….”
“몰랐다고 해도 서운하겠지만, 아는데도 두고 가는 거면 나 진짜 이건 너무 서운해.”
차정한이 내게 어떤 마음으로 저 물건들을 사 줬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만큼은 늘 표현하려 애썼고,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그동안 나의 좋은 친구로서 차정한이 보인 마음은 내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물건들을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차정한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거짓말을 해댔으니까.
“…이거 가지고 가면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날 것 같아서 그래.”
“안 가지고 가면 내 생각 정말 안 하게?”
“노력할 거야.”
“유현아. 그러지 말고 우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좀 해 보자. 너한테 뭐 하라고 안 할게. 숨기라고도 안 하고, 참으라고도 안 할게.”
“…갈게.”
현관으로 바로 나가는 나를 따라 나온 차정한이 현관문을 완전히 막고 섰다. 차정한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그와 마주하는 나의 마음도 단단하지 않아 자꾸만 무너질 것 같았다. 이 순간 차정한과 마주하기 위해 무너져 내린 마음을 모으고 모아 몇 시간 정도 버틸 수 있도록 단단하게 만들어 둔 게 다였다. 자꾸 이렇게 차정한과 마주하고 흔들리다 보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왜 자꾸 간다고만 하고, 끝이라고만 하고…. 그래, 나는 내 얘기만 하고, 너는 네 얘기만 하는 거 나도 알아. 이래서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거 아는데… 그래도 난 너랑…….”
나를 보며 말하던 차정한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바라보는 눈이 커졌다. 왜 그러는 걸까 생각하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얼른 아무렇게나 손으로 눈가와 뺨을 문질렀다.
“왜, 왜 울어…. 나 화낸 거 아니야. 화낸 게 아니라 너 이렇게 오늘 가 버리면 다시 못 볼 것 같고 해서…. 내가 미안해. 진짜 화낸 거 아니야. 가, 가자. 데려다줄게. 그건 해도 되지?”
“…혼자 갈게.”
“가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할게. 그래도 안 돼?”
“…택시 타고 갈게. 부탁이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울지 마.”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간 차정한이 내가 나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내가 타고 1층을 누르는 것까지 본 차정한이 여전히 바깥에서 버튼을 누른 채 눈을 맞췄다.
“다시 처음부터 생각할게.”
“…….”
“이번에는 너를 위해서.”
“…….”
고개를 끄덕이자 차정한이 손을 놓았다. 문이 반쯤 닫히던 그때 서둘러 다시 버튼을 누르는 차정한이 보였다. 뭐 문제가 있나 싶어 보자 차정한이 나를 보며 급히 말했다.
“내려가지 말고 10초만 기다려.”
“왜 그러는데?”
“10초면 돼. 잠깐만 있어.”
얼결에 열림 버튼을 누르자 차정한이 집 쪽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엘리베이터 문을 연 채 그를 기다렸다.
10초가 조금 지난 것 같을 때, 차정한이 뭔가를 들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 위로 묵직한 것이 얹히고, 그가 뒤로 조금 물러나자 따뜻함이 온몸으로 확 타고 번졌다. 그제야 차정한이 긴 코트를 가지고 나와 내 어깨에 둘렀다는 것을 알았다.
“춥게 다니지 마. 날씨 생각도 너를 위해서 해.”
“…….”
“조심해서 가.”
“…….”
“연락할게.”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나간 차정한이 손을 한 번 흔들었다. 버튼을 누르고 있던 손끝에서 힘을 빼자 닫히는 문 안으로 그가 사라졌다.
어렵지 않게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춥고 새까만 창밖을 바라보는데 아까와는 달리 하나도 춥지 않았다.
“…….”
코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괜히 창밖으로 보이는 낯설 게 없는 건물들을 보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의미 없이 상호를 읽기도 하고, 뜻을 생각해 보려고도 하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울지 않으려고 참고, 정말 울지 않을 때는 잘만 참아지더니 한 번 펑펑 울어 버린 뒤로는 눈물 참는 게 쉽지 않았다.
어깨와 몸을 감싼 코트에 차정한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향수 냄새가 피하려고 해도 자꾸 닿아와 창밖에 그 무엇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다시 처음부터 생각할게.’
‘…….’
‘이번에는 너를 위해서.’
진지함이 묻어 있던 목소리도, 그중에도 얇게 입은 나를 보고 급히 가장 잘 입는 코트를 가져와 내게 둘러준 그 마음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차정한을 잊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사랑한 만큼 시간이 필요할까. 잊으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사랑이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평생 널 잊을 수 없는 거겠지.
평생이라는 말이 참 어렵고 무거우면서도 한편 안도가 됐다. 나의 모든 시간에 어쩌면 차정한이 여전히 머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차가운 택시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뜨거운 머릿속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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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차정한이 연기대상 시상식에 가는 날이라 전부터 적어 두었던 알람이 울렸다. 올해 초에 방영한 드라마 <가문의 이해>가 워낙 잘 되기도 했고,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아 최우수상 수상을 예상하고 있었다.
데뷔한 해에 신인상을 받고, 그 뒤로 드라마를 할 때 시상식이 열리지 않는 방송국에서 대부분 방영을 해 이런 드라마 시상식에 가는 건 꽤 오랜만일 것이었다. 영화로는 매해 많은 상을 받아 익숙하지만, 생방송으로 드라마 시상식에 나온다니 내가 다 떨렸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같이 시상식장에 가서 멋지게 차려입은 차정한을 내내 보고, 또 상을 받을 때마다 큰 박수를 보내며 행복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순간이 이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 있었다.
집에만 계속 있다가는 저녁에 시상식을 보고, 차정한이 나올 때마다 흔들릴 것만 같아 송년회를 하자고 연락하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낮에는 카페를 하루 쉬는 누나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요즘 내 상태로 봐서는 빡빡하고 무리일 수 있는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움직여야 종일 차정한의 생각만 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유현아!”
“누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직 시간 안 됐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일찍 도착했어. 그럼 너는 왜 20분이나 먼저 왔어?”
“막힐 줄 알았는데 안 막혀서. 빨리 나오기를 잘했네.”
“그러게. 들어가자. 여기 진짜 맛있어.”
누나는 점심을 먹는 내내 요즘 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며 걱정했다. 살이 빠진 것도 그렇고,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며 조심스럽게 차정한과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었다. 누나도 눈치가 있을 거고, 내가 늘 차정한과 붙어 다닌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모든 기분을 차정한과 엮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을 할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감기몸살이 좀 세게 왔어. 내가 잘 안 아픈데 한 번 아프면 좀 크게 아프잖아.”
“엄마, 아빠도 걱정하셔. 너 일 너무 힘든 거 아니냐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네 생일에 정한이랑 다 같이 매해 밥 먹었잖아. 그런데 올해는 정한이도 안 오고… 너도 얼굴 안 좋으니까 혹시 정한이랑 문제 생겼나 했지.”
“정한이랑 문제 생길 게 뭐가 있어. 정한이가 얼마나 잘하는데. 알잖아, 누나도.”
“알지…. 아니까 더 걱정된 거지. 아니라니까 다행이다. 그럼 네 걱정은 덜었고, 내 걱정만 덜면 되네.”
“누나 무슨 일 있어?”
“민성 씨가 다음 주에 유럽으로 일 때문에 한 달 살기로 출장을 가거든. 나랑 같이 가도 된다고 해서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카페를 알바한테만 맡기기도 그렇고, 닫고 가자니 한 달이나 닫으면 폐업한 줄 알 거 아니야. 미련이 좀 남아서 아직 고민 중이기는 한데 안 가는 쪽으로 마음 거의 정했어.”
한 달이나 떨어져 있으려면 힘들겠다는 생각과 함께 카페 안에 만들어 둔 방이 떠올랐다. 누나가 매형이랑 한 달 동안 가 있는 동안 내가 대신 카페를 보면서 그 방에서 지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이면 괜찮은 집도 구할 수 있을 거고, 또 내가 카페를 보면 누나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다 훨씬 편하게 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누나. 카페 내가 볼게. 누나 매형이랑 다녀와. 결혼하고 둘이 여행도 제대로 못 다녔는데 한 달 나가서 살다 오면 좋잖아.”
“네가 어떻게 카페를 봐. 정한이 스케줄도 바쁠 텐데.”
“괜찮아. 메인 스케줄 내가 다 보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정한이가 알아서 잘해서 나 대부분 집에 있어. 그냥 이러고 있느니 일이라도 하면 좋잖아.”
“정말 괜찮겠어? 나야 유현이 네가 봐 주면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서 너무 좋지만, 카페 일이라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너 안 그래도 힘들 텐데 너무 큰일 맡기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카페 일 누나랑 같이 많이 해 봤잖아. 더 알아야 할 거 있으면 가기 전에 알려 줘.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한 달인데 뭐.”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누나가 앞에 놓인 새우요리를 하나 들어 내 앞으로 놓아주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좋았다.
“그럼 우리 동생한테 부탁 좀 해야겠다. 고마워, 유현아. 민성 씨도 너무 같이 가고 싶어 해서 내가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거든. 진짜 고마워.”
“뭘….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은 그대로 다 나올 거 아니야.”
“응, 그럼. 오픈 전에 가서 준비하고, 저녁 전에 마감 알바 오니까 그 친구한테 맡기고 넌 가면 돼.”
“어려운 일도 아니네, 뭐. 주말에 카페 한 번 갈게. 그때 알아야 할 거나 그런 거 알려 줘. 아, 그 안에 방 만들어 뒀잖아. 거기 내가 써도 돼?”
“그럼. 써도 되지. 네가 마감해야 하거나 할 일 있으면 하고, 집에 가기 귀찮잖아, 밤에. 그럴 때 거기서 자면 좋아. 청소 싹 해 놔야겠다. 고마워, 내 동생.”
주말까지 짐을 다 챙기고, 누나가 가는 날 카페로 가지고 가면 될 것 같았다. 가구나 이런 것들 중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짐을 보관하는 곳에 맡겨 두었다가 집을 제대로 구하면 옮기는 되고, 일단은 생활에 필요한 짐들만 따로 챙기면 카페 안에 있는 방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나도 풀리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나라도 풀려 정말 다행이었다.
* * *
술잔이 이리저리 부딪쳤다. 잔을 계속 받기는 했지만,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냥 이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구경했다.
차정한과 같이 나와서 조금 안 좋게 끝났던 반 모임에 나왔던 녀석들 중에 그래도 괜찮은 애들만 나와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평소에 회사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한지 술병이 쉴 새 없이 기울고 회사 이야기, 상사 이야기가 이어졌다. 듣기만 하는데도 어떻게 매일 저걸 견디고 일하나 싶어 대단하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만난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나를 제외한 모든 애가 다 취해 목소리가 커지고 행동이 조금씩 과격해졌다. 그래도 뭐가 좋은지 다들 웃고만 있었다.
“어! 이모님! 거기, 거기 틀어 주세요. 이모님, 차정한 아시죠! 저기 나오네! 잘생긴 새끼…. 쟤가 우리 친구거든요. 동창이에요! 같은 반이었다니까요?”
“야! 차정한 우리랑 같은 반 아니었다는데? 지유현 따라 다니느라 온 거래! 너 알았냐?”
“무슨 차정한이 우리 반이 아니야! 내가 걔 우리 반에 매일 있는 거 다 봤는데.”
식당 티비에 나오는 차정한을 본 뒤에 이야기의 화제는 완전히 차정한으로 넘어갔다. 나는 보지 않기 위해 집을 나왔던 시상식을 이곳에서 마주했다. 사회자가 차정한에게 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예쁘게 잘 만지고, 누구보다 멋지게 차려입은 차정한이 웃으며, 열심히 했으니 상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게 사실이라며 솔직하게 말하자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 그러고 보니까 지유현! 너는 저기 안 가고 왜 여기 있냐? 시상식 같은 데는 같이 안 다녀?”
“저기는 다른 매니저 형이 가셨어.”
“그래? 다 다니는 게 아니구나. 근데 진짜 저거 얼굴 하나는 타고났다. 뭐 방송국 카메라에 찍히면 내 얼굴보다 더 이상하게 나온다던데 쟤는 뭐냐?”
“정한이가 카메라가 잘 받아. 그래서 광고 촬영하거나 드라마 촬영 가서 카메라 테스트받으면 다들 놀라. 실물이 그렇게 그대로 분위기 있게 담기는 사람 진짜 드물다는데… 정한이는 다들 좋아해. 너무 잘 나온다고.”
말을 다 마친 뒤에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친구를 바라보았다. 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내 어깨를 치며 술병을 내밀었다.
“야야, 누가 보면 차정한 팬클럽 회장인 줄 알겠다! 지겹지도 않냐. 그렇게 붙어 다니는데 차정한 얘기만 나오면 아주 팔불출이 따로 없네. 술이나 마셔!”
누군가가 차정한 이야기만 하면 자동으로 이렇게 됐다. 내가 그동안 봐온 너무 멋지고 좋은 모습들이 많기에 더 많이 자랑하고 싶고 알리고 싶었다. 우리 정한이가 이렇게 멋있고, 많은 스태프에게 칭찬받는 배우라는 것을.
한 번 화면에서 차정한을 본 뒤로 친구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는 멀어지고, 시상식 화면만 너무 또렷하게 다가왔다. 나는 물만 겨우 한 모금씩 마시며 높은 곳에 매달린 화면만 흘끔댔다.
자정이 넘어 장소를 옮겼다. 12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이제 내일이면 또 한 살을 먹는다며 우는 소리를 낸 친구들이 술이 모자랐는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주는 안 받을 것 같았지만, 맥주 몇 모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몇 모금을 마시며 호프집에 틀어진 시상식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번 차정한을 눈에 담은 뒤로 나의 관심은 온통 그쪽에 몰려 있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
최우수상 후보로 차정한의 얼굴이 나왔다. 술을 마시던 녀석들이 그걸 보며 완전히 티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곧 시상자가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입 모양만 보고도 차정한이라는 것을 알았다. 곧 화면에 차정한의 모습이 담기고, 다들 박수 치고 좋아하며 그를 축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야! 정한이 최우수상 받았다!”
취해서 그런 건지 다소 과격한 축하가 이어졌다. 큰 소리인데도 귓가에서 그 소리는 사라지고 무대에 올라 수상소감을 말하는 그의 얼굴만 보였다. 종일 저 얼굴만 떠올리다가 시상식까지 보면 달려가고 싶어질 것 같아 밖으로 나온 건데… 전부 허사가 되어 버렸다. 세상이 다시 온통 차정한이었다.
뭔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공손히 인사하고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시상식은 꽤 잘 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노장 배우에게 대상을 주며 끝이 났다.
“야, 차정한 상 받은 기념으로 죽어라 마시자!”
내가 맥주 한 잔을 겨우 비울 동안 친구들은 테이블이 술잔으로 가득 차서 몇 번이나 비워야 할 만큼 술을 마셔댔다. 하나둘 사람들이 나가는 걸 보면 꽤 늦은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시간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남아 똑같이 시끄럽던 테이블 중 그래도 가장 먼저 나와 헤어졌다. 3차도 가야 한다고, 더 마시자며 내 팔을 잡는 녀석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마지막에 나도 택시에 올랐다. 새벽 두 시 반이 넘은 걸 보니 조금 놀랍기는 했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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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라 전혀 막히지 않아 원래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를 30분 만에 도착했다. 새벽 세 시면 몹시 피곤해야 하는데 종일 밖에 있었는데도 하나 피곤하지가 않았다. 집에 가서 차정한의 수상소감을 제대로 듣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도는데 진동이 작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친구들을 만난 뒤부터는 한 번도 휴대폰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예 휴대폰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니 차정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새벽에 무슨 일인 걸까. 받지도 못하고 화면만 바라보았다.
“전화 왜 안 받아?”
분명 전화를 안 받았는데 갑자기 들리는 차정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집 앞에 서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라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그런 나를 향해 차정한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금 몇 시야.”
“…넌 왜 여기 있어?”
“지금이 몇 신데 이제 들어와. 세 시가 넘었어. 너 지금까지 어디서 뭐 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내가 아까부터 몇 번을 걸었는데 왜 안 받아. 지금처럼 다 보고 일부러 안 받은 거야?”
“아니… 아니야. 온 지 몰랐어.”
“어디 갔었어.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다가 왔냐고.”
“…친구들 만났어. 연말이잖아.”
이제야 조금 상황 파악이 되어 캐묻는 차정한의 옆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차정한은 그런 내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옷을 갈아입었을 뿐, 그는 아까 화면에서 본 것과 같은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 누구. 송년회 이런 거? 너 원래 안 다니잖아, 그런 거.”
“시간이 없었잖아. 지금까지는.”
“시간? 아, 나랑 있느라 그동안 못 갔는데 올해는 나랑 안 있어도 되니까 갔다는 거야?”
“…….”
문을 여는 동안에도 옆에 서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하던 차정한이 나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뭐 갈 수는 있지.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정한아.”
“시상식도 안 봤어?”
“…….”
“…응. 밖에 있느라.”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을 한 번 하더니 이제 별것 아니라는 듯 술술 해대는 내가 싫었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서운함을 나는 이해했다.
“…나 상 받았어. 최우수상.”
“…….”
“나 최우수상 받으면 좋겠다고 네가 그랬잖아. 시상식에 꼭 같이 가서 현장에서 보고 싶다고.”
“…….”
“당연히 내가 받을 거니까 받는 거 잘 보라고 내가 그랬었는데…. 오늘 같이 못 간 게 내내 걸려서 끝나자마자 왔어.”
시상식이 끝나고 내게 왔을 차정한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지나가듯 대화한 그 이야기를 전부 다 기억하고 있는 것도 너무 속상했다.
“그런데 네가 없잖아.”
“…….”
“아무 소리도 안 나고, 전화도 안 받고…. 너 나가 버린 줄 알았어. 진짜 여기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나간 줄 알았다고.”
“…문 열어 보지 그랬어. 그랬으면 아닌 거 알았을 거 아니야.”
“무서워서 못 열겠더라.”
무섭다는 그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겉옷을 벗어 내려놓다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차정한이 그런 내 앞으로 와 내 팔을 양손으로 쥐고 눈을 맞췄다.
“너 없을까 봐 진짜 사라진 걸까 봐 무서워서 열 수가 없었다고. 나 진짜 돌겠어, 유현아. 수상소감 말하는데도 너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말할 뻔했어.”
“…내가 왜 가지도 않던 송년회를 나가고, 친구들을 만났는지 알아?”
“…….”
“집에 있으면 네 생각만 나니까. 시상식 하는 거 나도 당연히 알았고, 보고 싶었어. 네가 상 받는 거 누구보다도 보고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종일 너만 생각하고 너만 보다 보면 또다시 제자리잖아. 원점으로 돌아가. 그래서 나갔어. 너 잊으려고. 네 생각 안 하려고. 걔들은 그렇게 해 줄 수 있으니까.”
마음을 단단히 뭉치려 애썼다. 나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놓고, 전에 내게 그가 걸쳐 주었던 코트를 꺼냈다.
“코트 가져가. 그날 고마웠어.”
차정한은 내가 주는 코트를 받아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방을 나가려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아 세웠다.
“나한테도 말해. 나도 다 해 줄 수 있으니까 나한테도 뭘 원하는지 말해. 다른 새끼들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데 나는 왜 너한테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는데, 왜? 말해. 뭐든 다 할 테니까 말하라고.”
“난 너한테…….”
“나한테 바라는 거 없다는 말 하지 마.”
“…….”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넌 내가 원하는 거 못 들어줘.”
내 말에 차정한은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내 어깨에서 손을 미끄러뜨려 내리며 내 팔을 꽉 힘주어 잡았다.
“나도 다 들어줄 수 있어. 말해.”
우리 둘 다 극으로 몰렸다. 차정한은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죽어도 나를 놓지 않을 것 같았다. 자존심 상하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이 자신 있는 쪽의 일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게 늘 차정한이 최우선으로 말하던 우정에 관한 일이라면 더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늘 질투했고, 서운해했던 차정한은 지금 꼭 친구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일 것이었다.
“말하라니까?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는데! 다 해 준다니까, 네가 원하는 거!”
“…너랑 자고 싶어.”
“…….”
“…정한아.”
“…….”
“나 너랑… 자고 싶어.”
자존심이 상해 화가 묻어 예민하던 얼굴이 느릿하게 풀어졌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는 것 같은 얼굴에 웃음이 났다. 웃겨서 웃은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상황을 조금 감당하기 힘들어 나오는 웃음인 것 같았다. 나는 조금 힘이 빠진 그의 손에서 어렵지 않게 빠져나왔다.
“조심해서 가. 집은 곧 비울 거야. 그땐 진짜 이렇게 기다려도 나 여기 안 와.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정한아.”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그에게서 먼저 시선을 떼고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웠다. 잘 가져갈 수 있도록 반을 접어 다시 건네는 나를 계속 가만히 바라만 보던 차정한이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 아직 대답 안 했어.”
“…….”
“인사를 하더라도 대답 듣고 나중에 해.”
“…….”
내가 들고 있는 코트를 가져가 다시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던지듯 놓은 차정한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옷장으로 닿는 등과 내 몸 앞으로 닿는 차정한의 몸에 순간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
“나랑 자자.”
“…뭐?”
되묻는 나를 바라보던 차정한이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내게 쏟아진다고 생각한 순간 입술이 맞물렸다. 입술이 벌어지고, 뜨거운 것이 파고들려는 순간 나는 그의 어깨를 확 밀어냈다. 차정한은 순순히 뒤로 밀려나 한 걸음 뒤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입술이 조금 전 내게 닿았다고 생각하니 귓가가 뜨거워졌다.
“…차정한.”
“네가 원하는 거 나도 다 할 수 있어.”
“…….”
“밀어내지 마. 다음에는 안 밀려.”
내 힘에 밀려난 게 아니라 스스로 밀려나 주었다는 걸 상기시킨 차정한이 다시 한 걸음 크게 다가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의 차정한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내게 몸을 붙이고 고개를 기울이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맞았다.
“…….”
“…….”
숨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술에 취한 차정한과 이랬던 적이 있기에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지만, 차정한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쉽지 않은 일을 오기로 하려고 하는 그가 걱정됐다.
“…지금이라도…….”
그만둬도 된다는 말은 그대로 차정한이 닿는 것과 동시에 흐트러졌다. 입술이 제대로 맞물렸다가 벌어진 순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차정한은 내 입술을 머금어 빨아들이듯 머금다가 벌어진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혀끝이 살짝 문질리는 순간 몸 여기저기가 찌릿찌릿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죽을 것만 같아 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차정한은 내게 미리 말한 것처럼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